경기도 광명에서 안산 가는 길쪽엔 제법 큰 저수지가 있다. 낚시 좋아하는 이들은 웬만큼 아는 애기능 저수지다. 저수지를 오른편에 두고 1킬로미터쯤 걸어 산을 오르면 아담한 무덤이 외로이 솟아 있다. 애기능이다. 정확한 이름은 영회원(永懷園).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의 맏며느리 소현(昭顯)세자빈 강씨의 묘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맏아들이요, 효종 임금의 형 아닌가. 그이의 아내 강씨가 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묻혀 있을까? 무슨 사연이 있지 싶다.
우리 역사의 비극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8년 만에 돌아왔다. 세자빈 강씨도 함께였다. 귀국한 지 석 달 만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사망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록은 인조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둘러 장례를 치루며 사건을 봉합하려 한 데서, 인조가 죽음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얼마 후 인조는 수라상에 오른 생선회를 먹고 탈이 났는데, 생선회에 독이 있었다고 했다. 인조는 남편의 죽음에 앙심을 품은 며느리 세자빈 강씨를 범인으로 몰아 별당에 가뒀다. 인조는 강씨를 역모죄로 처형할 셈이었다. 인조는 어린 세손을 보아 처형만은 면해 주자는 신하들의 상소를 차갑게 물리치고, 강씨를 사가로 내쫓아 사약을 내렸다. 남편 소현세자가 죽은 지 일 년이 채 못 돼서였다. 검은 가마에 실려 나가는 강씨의 최후를 사람들은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인조의 칼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강씨의 세 형제와 칠순 노모를 처형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강씨의 아버지를 삭탈관직했다. 강씨 일문을 풍비박산 낸 것이다. 그뿐 아니라 강씨가 낳은 세 아들, 12살, 8살, 4살 난 친손자들마저 제주도로 귀양보내 버렸다. 그 중 둘은 병들어 죽고 막내만 살아 강화도에서 목숨을 이어갔다. 세자빈 강씨의 시신은 왕가의 땅이 아닌 사가의 땅, 서울 남서쪽에 있는 강씨 집안의 사유지에 묻혔다. 지금 누워 있는 바로 그곳에.
세자빈의 죽음은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시작된 비극의 제2막이다. 물론 소현세자의 죽음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소현세자는 당시 조선 지배층 가운데 보기 드물게 열린 눈과 앞선 생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이는 급변하는 극동 아시아 정세에 눈뜨고 지구 반대편의 서양 문물까지 받아들였다. 당시 지배층이 신봉하는 성리학 말고도 다른 가치와 이념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이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은 일찌감치 자주적 근대화를 준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총명하고 민첩하고 적극적인 세자빈
세자빈 강씨는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의 딸로, 정묘호란이 일어난 해에 소현세자와 결혼하여,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을 지냈다. 소현세자 부부는 만주 심양, 지금의 봉천에 거처를 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심관이라 했다. 당시 소현세자 부부는 명이 망하고 청이 서는 격변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청군이 명나라 수도 북경에 입성할 때, 부부는 청군과 함께 했다. 부부는 조선이 그토록 믿어 온 명이 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조선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친명배청(親明背淸)’의 깃발이 허깨비일 뿐이라는 현실을 확인한 것이다.
소현세자는 조선이 ‘오랑캐’라 하며 멸시하던 청나라가 실은 수준 높은 문화와 포용력을 갖춘 명실상부한 강대국임을 발견했다. 청은 소현세자를 후하게 대접했다. 나라의 중요한 제사나 황제와 중신들이 모이는 조회에 세자를 참석시키고 요직의 인물들과 사귀게 했다. 소현세자는 비록 인질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고 바깥출입을 할 수 있었다. 청은 명과 최후 결전을 앞두고 조선과 관계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어 다리 구실을 할 세자를 정중히 대접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청은 심관을 조선 정부를 대리하는 현지 기관으로 여겼다. 조선에 해야 할 연락 사항, 통보 사항은 으레 심관을 상대로 했다. 그러니 세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청 조선 대사요, 심관은 대사관인 셈이었다.
청군을 따라 북경에 입성했을 때, 소현세자는 70일 남짓 북경에 머물면서 독일인 가톨릭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며 서양 문물을 알게 되었다. 서양의 과학기술, 종교, 사고방식을 처음 만나며 소현세자는 어땠을까? 성리학이 가르치는 가치와 세계가 전부라고 믿어 온 세자가 느꼈을 충격을 짐작할 만하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 조선에 가 왕이 되면 새로 알게 된 학문과 사상을 널리 펼치겠다는 편지를 했다. 그리고 귀국하면서 중국인 가톨릭 신자 몇을 동반한다. 그때 조선에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종교, 문화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호란을 겪은 뒤라,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 아주 안 좋아 청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이 환영받을 리 없었다. 그러나 멸망하는 명과 떠오르는 청을 보고 서양의 과학기술과 종교에 눈뜬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은 분명 전과는 아주 다른 변화를 맞이했을 것이다.
한편, 국제정세에 어두운 조선 지배층은 심관의 세자가 친명배청의 절의를 지켜 조선의 기개를 만천하에 떨칠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세자는 친명배청의 기개는커녕 청나라 주요 인사들과 가깝게 지낼 뿐 아니라, 청에서 세자를 ‘조선 왕의 대리인’처럼 여긴다는 얘기가 인조의 귀에 들어갔다. 인조는 날이 갈수록 세자에게 실망을 느꼈다.
심관이 쓰는 경비도 심각한 문제였다. 심관에 머무는 인원은 약 300명. 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물품이며, 청나라 관리들에게 주는 뇌물과 관리들을 위해 베풀어야 하는 연회비용들로 심관이 지출하는 경비는 상당했다. 호란을 치른 뒤 피폐해진 나라와 궁중 살림에 비할 때 심관의 생활은 인조의 눈에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여겨졌다. 인조는 갈수록 심관의 세자가 미덥지 않았다. 인조의 머리 속에는 원의 부마국이었던 고려의 전례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원은 고려 왕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언제든 갈아치우곤 하지 않았던가.
인조의 불만은 의심으로 바뀌어, 청이 세자 대신 자기를 인질로 부르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라 하지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 소용 조씨가 그 의심을 부채질했다. 후궁 조씨는 세자빈과 사이가 나빠 틈만 나면 세자빈과 세자를 헐뜯었다. 세자빈이 재물 모으기에 열심이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우며, 청나라를 등에 업고 인조를 내몬 뒤 소현세자를 왕위에 세우려 한다고 모함했다.
세자빈 강씨는 총명하고 민첩하며 수완 있는 여성이었다. ‘세자의 실책은 모두 강씨가 저지른 일’이라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그이는 심관이 하는 일에 적극참여했다. 청나라 관리들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경비 마련을 위해 심관이 벌인 여러 영리 활동에서 세자빈 강씨가 한 일이 컸던 것 같다. 세자와 금슬도 좋았다. 세자가 넓은 세계를 바라보며 성리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열린 생각을 갖게 되었을 때, 강씨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이역 만리에서 인질로 살며 나누는 희로애락이리만큼 부부간의 애정도 왕실의 여느 부부보다 훨씬 깊고 애틋했을 게다.
소현세자와 세자빈이 즉위했다면
하지만 조선의 정치 현실은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조를 중심으로 하는 집권 세력에겐 ‘친명배청’이야말로 그 정통성을 받쳐 줄 유일한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인조 정권은 명과 청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펴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집권하지 않았던가.
8년 만에 인질에서 풀려난 소현세자 부부의 귀국 직후 동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야사에 따르면, 세자가 인조에게 청나라 사정을 알리고 서양의 책과 과학 기구들을 보이자 인조가 몹시 화를 내며 벼루로 세자의 얼굴을 내리쳤다 한다. 그 탓이었는지는 모르나 세자는 병이 들었고, 인조의 신임을 담뿍 받고 있던 의관 이형익에게 침을 맞다 사흘 만에 세상을 떴다. 그이의 나이 34세. 그로부터 일년 후 세자빈 강씨는 사약을 받는다. 강씨의 죄목은 이러했다. 심관에 있을 때 왕을 갈아치울 흉계를 꾸미고, 왕비만 입을 수 있는 홍금적의를 만들었으며, 수라상에 독을 넣은 범인으로 지목되어 별당에 갇혔을 때 왕의 처소 가까이 가 큰 소리로 발악하고 문안의 예를 그만두었다는 등등.
동서고금의 역사를 들추어 보면 왕가에는 비운의 죽음이 많다. 태조 이성계와 그 아들들을 예로 들지 않아도, 왕위를 둘러싼 피붙이간의 냉혹한 대립은 셀 수 없을 정도다. 당나라 측천무후는 아들을 죽이고 황제 자리에 올랐단다. 큰일을 하려면 혈연도 냉정히 끊을 줄 알아야 제왕답다고 생각한 모양인가. 혈연에게 그럴진대 왕비나 세자빈을 어떻게 대했을지는 알 만하다.
왕가의 냉혹한 권력 싸움에서 가장 잦은 희생양은 여인네들이었다. 흔히 여자의 치맛바람이나 질투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과 숙청 바람이 일었던 것처럼 드라마나 소설은 말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냉혹한 권력의 논리 앞에서 사랑의 순수함이나 결혼의 신의가 무참히 깨져 나가고, 여성이 그 피해자가 되는 일이 흔했던 것이다.
인조가 후궁 조씨를 총애하여 조씨의 말만 믿고 며느리 강씨를 죽였을 거라는 추리가 가능하지만, 인조의 행동은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반청(反淸)을 앞세운 인조 정권이 청과 가까운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를 용납하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조소용이 아니었어도 인조는 세자빈 강씨를 처형했을 것이다. 강씨가 살아 있는 한 소현세자의 망령이 언제든 살아날 수 있으니 말이다. 강씨가 총명하고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기에 더더욱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인조의 뜻은, 강씨는 물론 강씨 일가와 그이의 아들들, 심지어 강씨를 모시던 궁녀들까지 관련 있는 자는 모두 제거하여 둘째 왕자 봉림대군이 뒤탈 없이 나라를 다스릴 터를 닦는 데 있었다. 마침내 1649년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효종이다. 효종은 인조의 뜻을 이어 ‘반청’과 ‘북벌’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즉위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그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약 70년 뒤, 강씨는 역적 누명을 벗었다. 1718년 숙종은 강씨 일가를 모두 복관, 복직시키고 손수 제문을 지어 강씨를 위로하면서 민회(愍懷)란 시호를 내렸다. 강씨의 묘를 영회원이라 이름 지은 건 1903년 고종 때다. 영회원은 돌보는 이가 없는지 잡초가 무성하다. 무덤 아래쪽에 있었을 정자각(丁字閣)은 간 데 없고 깨진 기와 조각, 엎드러진 비석만 남아 터를 지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