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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사로 접근하는 TBC 성서연구 - 제 3 강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은총: 창세기Ⅱ
(5) 구원받은 인간의 복수심, 구원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눈을 흘기다. 창 11:1-9
사람의 범죄는 대를 거듭할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악해지고 대범해집니다. 열매를 하나 따먹고 하나님 앞에 숨어 몸을 가리던 인간이, 동생을 꾀어 죽이고 발뺌을 하더니, 이제는 자기들의 마음대로 선을 넘나들며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갑니다. 기준도 없고 질서도 없는 세상, 혼돈하고 공허한 세상, 흑암이 깊은 세상으로 돌아가버린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심판만 하지 않으셨지요? 아담과 하와에게는 가죽옷을 지어입히신 하나님, 가인에게는 남들이 해치지 못하도록 오트, 표를 주셨고, 오늘 이 인류가 사라져버릴 홍수에,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남겨두셨습니다. 미리 방주를 짓게 하시고, 모든 짐승의 암수를 남기시고 세상을 새롭게 시작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선택받은 노아의 특징을 살펴보았지요?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무슨 뜻이라고 말씀드렸지요?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삶, 온 세상이 기준이 없고 선을 지키지 않는 삶을 산다고 나도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대지 말라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범죄하지 않고, 가인처럼 시기하지 않고, 저 타락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 가능했다는 것을 노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문 앞에 웅크린 죄를 다스리며 살 수 있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노아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삶은, 철저한 순종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했기에, 그 분의 말씀이 가장 우선이었기에 그는 120년 동안 산에, 자기 스스로 문을 닫을 수도 없는 방주를 만들면서 살았던 것이지요? 그랬던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기식하는 모든 생물을 보존하셨고,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저 무서운 홍수가 끝나고, 모든 동식물들이 다시 땅을 밟으며 새로이 번성하고, 노아의 자녀들도 후손들을 낳아 이 땅에 다시금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기 시작하였을 때, 오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구원받은 인간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다시금 대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구원받은 인간들이 하나님께 눈을 흘기기 시작합니다. 그 본문, 이렇게 시작합니다. 11장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3-4)
오늘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도모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 앞에 왜 교만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일까요? 자기들이 가진 기술을 가지고 성읍을 건설하고 탑을 쌓는 일이 왜 문제가 될까요? 오늘 이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집을 짓고 망대를 세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 구름보다 높이 올라가보자! 선을 넘어보자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지면을 멸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악한 도모를 다시금 꿈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지요? 우리 이름을 내고, 하나님의 이름을 지우고 우리 이름을 높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여기 모여서 우리끼리 우리들의 방식대로 우리들의 꿈을 이루며 살자는 것이지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구요?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11:5)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두 가지로 소개가 됩니다. 하나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위로하시고 세우시기 위해, 또한 그러한 모든 일로 영광 받으시고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이스라엘은 복이 임하고, 고난이 끝나고 승리가 주어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께서 벌하시고 심판하시기 위해서 임재하시는 일도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그렇게 멸망당했던 것이고, 블레셋에는 다곤신이 넘어져 부서지고, 전염병이 돌았던 것이지요? 저 이방인에게만 그랬나요? 아뇨, 하나님의 불이 진영 끝에 내려 사람들이 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던 일도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진노와 징계가 내려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던 것은 후자입니다. 오늘 시날땅, 바벨성의 사람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오신 것은 오늘 이들의 도모를 폐하고, 이들을 흩으시기 위함이셨던 것이지요?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6-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창11:6-8)
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 왜 이들의 도모를 막으셨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일들을 도모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것을 생각해보면 금방 확인이 됩니다. 이를 위해 먼저 40일간 창일하던 홍수가 그치고, 노아 가족들이 배에서 내렸을 때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해서 배를 만들고, 마침내 새롭게 인류의 시작이 되게 된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1-3)
어떤 말씀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시나요? 저는 3절이었습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아멘! 노아의 홍수가 지나고 드디어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선언을 해주셨는지 모릅니다. 자, 그런데 고기를 먹게 해주신 것 말고, 가장 중요한 선언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들에게 해주셨던 말씀, 무엇입니까? 1절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 "Have many children, so that your descendants will live all over the earth.
어디서 많이 보신 말씀이지요? 맞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제일 먼저 해주셨던 말씀과 같습니다. 찾아볼께요. 창 1:27-28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28)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는데, 오늘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해주십니다.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이유,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은 노아에게 한 번 더 말씀하십니다. 9장 7절입니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You must have many children, so that your descendants will live all over the earth.
그런데 어떻게 했다구요? 번성하며 온 땅에 가득해야할 사람들이!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4) “not to be scattered all over the earth."
하나님은 흩어져(live all over the earth) 온 땅에 가득하고 번성할 것을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한다구요? 지면에 흩어지지 않게(not to be scattered all over the earth)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뿐인가요? 하나님은 식물과 동물을 먹을 것으로 주시지요? 무슨 뜻입니까? 그것을 다스리라는 뜻입니다. 그것에 대한 경영권과 소유권을 주시고, 그것을 통치하라(bring it under their control. I am putting you in charge of the fish, the birds, and all the wild animals)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다구요? 다스리고 돌보고 통치할 영역을 식물과 짐승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을 정복하고 하늘을 다스리고 싶어한 것이지요? 그 모습이 바로 성읍을 쌓고 탑을 건설하여 하늘에 닿게 하자고 했던 저들의 욕망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허락하신 사명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을 끌어내려 내 이름을 높여내려고 했던 이들, 그들의 가진 기술과 문명으로 하나님 앞에 한껏 교만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벨탑의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엊그제 3월 31일 뉴스에 나왔습니다. 인류가 가진 최고의 가위 어떤 가위일까요? 우리시저스의 김봉기 장인이 만드는 수제가위가 아닙니다. 바로 “유전자 가위”라는 것이지요? 지금은 3세대 유전자가위가 나왔다고 합니다. 유전자 가위는 특정 유전자 염기서열을 인지해서 원하는 유전자 DNA 정보를 자르고 붙이는 기술입니다. 무슨 이야기이지요? 하나님께서 고유하게 부여하시는 그런 특징들을 인간들이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골라서 내 자식을, 혹은 더 나아가서 제2의 나를 보다 나은 모습으로 복제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형외과에서 의느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뼈를 깎는 고통과 생사를 넘나들며 숨어지낼 필요없이 애시당초 수정란 때, 어미의 모태에서 사람의 형질을 조성하는 고유한 하나님의 영역을 이제 사람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키가 작으면 키가 크게, 눈이 작으면 눈이 크게, 다리가 짧으면 다리가 길게,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이야기인 것이지요.
이미 작년 11월, 중국에서는 유전자가 편집된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었구요. 이번 3월에는 제일 힘들다고 하는 파충류의 유전자 편집을 성공해냈다는 것이지요? 왜 어렵냐면, 파충류는 수컷의 정자를 뱃속에 한참 보관을 하고 있다가, 자기들이 자기들 건강이나, 주변의 환경조건이 맞아 떨어질 때 난자와 수정을 시키기 때문에, 정확하게 유전자 가위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기를 잡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또한 파충류는 아시다시피 수정됨과 동시에 알껍질이 생기기 때문에 알껍질을 손상시키면서 작업을 해야 해서 성공률이 매우 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시도하여 성공한 방식은 수정되기 이전, 암컷의 난모세포를 조작을 해서, 그것이 난자가 되고 수정이 되고 그렇게 해서 태어나도록 했는데 146개의 수정란 중에 4개가 성공을 해서 보시는 바와 같은 색깔이 없는 저 알비노 도마뱀을 태어나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랬더니 댓글에 뭐라고 나온 지 아십니까? “누구든지 빨리 저 기술을 익혀서 뱀을 백사로 만들어 소주에 담그면 금방 갑부가 된다!” 훌륭하고 좋은 기술이고, 더욱 발전시켜야할 기술인가요?
여러분, 무슨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것이지요? 지금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행했던, 기술과 문명으로 하나님 앞에 도전하는 모습들이 극에 달해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창조주에 대한 원망과 불평, 내 자신에 대한 불만족을 동력삼아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자. 우리의 이름을 내자. 이 기술을 가지고 흩어짐을 면하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이렇게 모여서, 성읍을 건설하고 탑을 쌓는 사람들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라는데, 왜 이들은 이러한 일을 도모하게 되었느냐는 것이지요? 그 시작이 된 사건이 창세기 9장에 소개 됩니다. 20-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창9:20-21)
노아가 농사를 짓고 어느 날 실수를 했던 것이지요? 그 모습을 공교롭게도 둘째아들이었던 함이 보고 형, 동생에게 다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얼레리 꼴레리~” 하면서 이야기하진 않았을 것 같구요. 아마 형동생에게 아버지 빨개벗고 주무신다고 이야기정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형과 동생은 이내 겉옷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뒷걸음질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지 않고 그것을 덮어드리고 나왔던 것이지요. 그 일을 나중에 알게 된 노아는 오늘 그 아들들을 축복하고 저주하게 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9:25)
여러분, 이것이 의인 노아가 술을 마시고 했던 최악의 실수입니다. 술을 마시고 벌거벗은 것보다 더 크게 실수한 것이 바로 이것이지요. 용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습니다. 곧바로 심판이었습니다. 이때 부모와 자녀가 처음으로 깨어집니다.
보십시오. 처음에 부부관계가 깨어졌습니다. 형제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모 자녀관계는 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관계를 오늘, 저 노아가,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던 노아가, 무슨 일인지, 저 포도주를 그렇게 마시고, 오늘 그 아들을 저주한 것이지요? 종이 되어 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야할 존재를 사람의 종이 되라고 덜컥 취소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부모님들, 우리들의 실수나 허물을 지적하는 자녀들에게, 오늘 노아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행여라도 우리의 입술로 저주와도 같은 말을 하지 않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어먹을 놈, 썩을 놈, 염병할 놈, 절대 아닙니다. 내가 낳은 자식일지라도 늘 저들의 존재 가치를, 하나님의 자녀로 늘 인정하시고, 오히려 그 앞에서 못난 우리의 모습을 인정하고 고쳐갈 수 있는 그런 성숙한 부모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함도, 형 동생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얼른 가서 옷을 덮어드렸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합니까? 상대방의 허물을 혼자 알고 있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존재, 그래서 “와 이건 정말 대박! 너만 알고 있어~” 하면서 여기저기 옮기는 존재, 상대방의 못난 모습을, 내가 돕는 배필이 되어 덮어주고 감싸주고 그 수치를 가려주려하기보다, 오히려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이들에게 복음도 아닌 것을 막 퍼뜨리는 모습, 바로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흉보고 욕하면서, 오늘 우리의 죄인됨과 수치됨을 덮어버리고 망각하는 존재 말입니다. 그래도 쟤보단 내가 낫지 하는!
아닙니다. 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면서 이내 내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저보다 얼마나 더 추하고 못난 존재인가를 늘 확인하는 것입니다. 소문내라고 망신주라고 상대방의 수치스러운 그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가 그러하다’고 또한 ‘너가 그것을 덮어주고 가려주라, 고쳐주라’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이 했던 실수를 반복함으로, 사람의 종이 되어 살게 되는 어리석은 길을 걷지 않게 되시길 예수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 해야겠으면, 하나님께만 하세요. “하나님 대~박!” 우리의 모든 수치를 이미 다 아시는 분께 말씀드리시길 축복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사람에게 안하고 대나무 숲에 가서 했는데도, 대나무 숲은 온 동네에 또 소문을 내버렸던 것이지요. 하나님이라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상대방의 수치가 보이는 순간, 그것을 얼른 널리 알려서 저를 망신주고 싶은 순간, 더욱 하나님께 물으시고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시작이 된 것이지요? 오늘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은 함은, 가나안의 아비가 됩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들이 이 함의 후손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창10:6)
자, 구스의 아들은 조금 이따 자세히 보시구요. 자, 미스라임의 자녀들, 14절을 보니까 그들에게서 블레셋이 나옵니다. 또 이어지는 가나안의 자녀들, 출애굽기, 여호수아, 그리고 요즘 보시는 사사시대까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대적으로 등장하는 이들이 다 이 가나안의 후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향한 한 마디의 위력이 이러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더욱 축복의 말,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과 꿈이 담긴 말들로 우리 자녀들의 귀에 부지런히 들려주시고 심어주시고 가르쳐주시는 복된 부모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자, 그럼 보시자구요. 오늘 저희들이 주목해야할 사람이 바로 이 함의 아들 중에, 구스의 아들입니다. 그 가운데, 이 바벨탑과 가장 관련이 있는 인물이 하나가 등장합니다. 우리 일단 8-9절 읽어봅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창10:8-9)
여러분, 기가막힌 속담이 나오지요? 세상에 용사라고 불리웠던 사람이 있는데, 뭐라고 했다고 해요? 여호와 앞에 니므롯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서설원은 여호와 앞에 니므롯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라고 하면, 이것은 좋은 말일까요? 나쁜 말일까요? 여러분은 결코 이러한 말을 듣지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이 말은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서는 안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의 저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면 칭찬으로 알았고, 우쭐댈 수 있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왜요?
여호와 ‘앞에’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알(על)’이라는 단언데, 이 전치사는 ‘~위에, ~대항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넣어서 번역하면,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하나님 위에 서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대항하여 서 있는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가 됩니다. 니므롯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대적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랬던 그는 어떻게 했을까요? 10절입니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뛰어난 사냥꾼으로 완력과 기량은 갖추었으되 경건한 마음과 신앙은 갖추지 못했던 니므롯은 자신의 권력과 신망이 커져감에 따라 하나님마저 업신여기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마침내 자신이 하나님 대신 인간들을 지배하고자 정부 체계를 출범시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의 나라"라고 했으니 벌써 그는 나라를 조직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므롯은 자기와 자신의 아들들을 신의 화신이라고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숭배케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지배하는 첫 제국을 탄생시킨 그는 자신의 영토 내에 남아 있던 하나님을 숭배하던 신앙을 말살시키고 거짓 신화와 전설들을 꾸며내었습니다. 수메르 문명, 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만들어진 모든 거짓된 신화들이 다 이 니므롯과 그 후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드디어 오늘 본문 4절, 이렇게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4)
니므롯은 나라를 세운 왕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냥꾼 정도로 만족치 않았고 모든 사람들로 자기를 섬기게 했습니다. 그래서 세운 것이 바벨탑입니다.
바벨론의 신화와 또는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바벨탑의 맨 꼭대기 정상에는 월신(月神), 소위 NANA신을 섬기는 제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대 앗수르의 많은 탑들은 (소위 ‘지구라트’라고 하는 것으로 그 뜻은 '거룩한 성') 맨 위에 4각형의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지구라트’라는 탑들의 원형이 곧 ‘바벨탑’일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로 생각할 때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은 큰 목적 중의 하나는 '월신의 화신'이라고 지칭하는 자기와 자기 아들들을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지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또다시 심판하시더라도, 오늘 물에 잠기지 않는 탑을 쌓고 그 위에서 살겠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지구라트요, 바벨탑인 것입니다. 방주를 만들어야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이 탑을 건설해서 메소포타미아지역, 오늘도 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홍수로부터 안전하게 살게 할 수 있는 나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탑을 쌓아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이 말을 하고 있는 니므롯의 교만한 얼굴을 넉넉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흔히 어떤 업적을 통하여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 했고, 사람들로 자기를 찬양케 했고 우상으로 숭배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들이 만든 공든탑을 무너뜨림으로써 그의 교만을 심판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 여기에는 보는 대로 니므롯과 그 일당은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얻으려고 했던 목적이 소개됩니다. 사람들을 흩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일종의 경계표입니다. 멀리 탑이 바라보일 수 있는 한계에서만 사람들이 살도록 제한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로 흩어지지 못하게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처럼 그들의 발을 묶어 놓음으로써 백성들의 분산을 막으려 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을 영원히 자기들의 통치 밑에 두려는 정책을 썼습니다.
이러한 니므롯과 그 일당의 야심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며,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니므롯과 그 일당은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을 어겨 사람들로 온 지면에 흩어져 충만하며 번성하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을 한곳에 묶어두고 그들을 통치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이 탑을 헐고 사람을 흩으셨던 것이지요? 니므롯이 다스리는 성읍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으로 사람들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내셨지요?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11:7-9)
니므롯이 자기와 자기의 아들들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을 영원히 다스리는 통치자로 군림하려 했던 것은 참으로 악한 계획이요, 저들을 묶어두고 자기만을 섬기게 했던 것은 참으로 악한 정책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교만과 악함을 내버려두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직접 찾아오셨고, 오늘 그 탑을 허무시고, 사람들을 흩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하는 일이 악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성읍을 우리의 탑을 허물어 버리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늘 기억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집을 세우는 수고가, 성을 지키는 수고가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세워주시는 그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재는 아마 여러분들 5번이나 3강을 준비하면서 달달 외우실 지경이시기 때문에 마지막 단락만 읽어보겠습니다. 36쪽 제일 아랫단락부터 37쪽 끝까지입니다. “창세기 3장부터” 시작!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는 타락과 저주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계속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교만함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어버이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나중에는 자기 스스로 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와 용서로 삶과 역사를 영위해 나감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교만은 계속됩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등장하는 처음 족장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신 대로, 이 창세기가 기록하는 원역사, 인간은 계속해서 범죄하고 타락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네 사람을 용서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책임전가, 살인과 위증, 선을 지키지 않는 광범위한 타락, 하나님과 지혜와 파워를 겨뤄보자는 교만으로 이어지는 인간들의 모습 앞에 하나님은 ‘가죽옷’, ‘보호의 표’, ‘노아’를 남기시고 이들을 세워오셨습니다. 물론 이 은혜에 역행하여 이 이야기는 언어의 혼잡과 인류의 흩어짐으로 끝납니다.
이와같이 연결되는 족보의 이야기, 셋을 남기시고, 노아를 남기시고, 셈을 남기셔서 주욱 역사를 이어가시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창세기 11장 28절과 30절, 인간에게 드리운 절망이 짙게 보도가 됩니다. 뭐라고 이야기가 되지요? 하나님께서 그토록 이어가신 아브라함의 집, ‘여기까지였나보다, 이제 더는 안되나보다,’ 싶은 그런 안타까운 이야기가 기록이 되는 것입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창11:28)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창11:30)
데라의 집안 아들 하나는 자식만 하나 남기고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또 남은 하나의 아들은 아내를 얻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이런 인간의 한계, 절망 한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저들의 집안을 그냥 내버려 두실까요? 저들의 아픔을 외면하실까요?
이 절망적인 자리에 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부르십니다. 그리곤 구원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는 것이지요. 지금까지의 역사가 저주와 추방, 그리고 땅을 잃어버린 채 유리하는 비극의 역사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역사는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며 이끌어가시는 새로운 구원의 역사이지요.
계속되는 인간의 타락과 반복되는 심판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보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구원의 모델을 제시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큰 민족을 이루고, 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준비하시듯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하신, 저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하나님의 훈련받은 택한 백성들을 인도하심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새로운 구원사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이제 4강에서 시작되겠습니다. 특별히 여기까지인가 싶으신 분들, 한계와 절망이 더욱 드리워져 있다고 느껴지시는 분들, 이제는 두근거릴 일이 없다고 생각되시는 분들, 더욱 기대하는 마음으로 다음 수요일에 오시길 축복합니다.
아, 오시기 전에 교회 까페에 방문하셔서 아브라함의 이야기, 제가 하일교회에 와서 제일 먼저 했던 수요예배 시리즈 설교인데요, 지금 읽어보니 참 철없고 풋풋함이 느껴지는 설교이긴 하더라구요;; 그래도 꼭 한번 읽어보고 오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34편밖에 안됩니다^^
준비하고 오시어 더 큰 은혜를 누리시는 TBC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음 시간 예습
성경 창세기 12장 1절~25장 18절
교재 39-44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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