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은 국경을 넘어 팍 보 진지로 가기 전에 장 파쿠이 장군이 조직하였던 ‘베트남 혁명 동맹회’를 찾아갑니다. 보름 동안 비속의 야간 행군을 하여 찾아갑니다. 당시 그 동맹회는 지리멸렬하고 있었습니다. 호치민은 각 계파의 수뇌부를 소집하여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회의는 중구난방이었습니다. 이 때 호치민은 셔놀트 장군의 서명이 있는 사진을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최신 권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국민당 계열의 그 동맹회 사람들은 그만 압도되고 말았습니다(찰스 펜, 호치민 평전, 183쪽). 호치민은 이들을 공산당의 통일전선 조직, 즉 베트민의 계열로 재건한 것입니다. 베트남 통일전선에 대한 호치민의 헌신과 기지가 경이롭습니다. 물론 호치민이 떠난 후 중국 국민당은 그 편제를 다시 조정하여 베트민 색채를 완화시킵니다...
호치민이 국경 근처에 아직 머물고 있을 때, 마침 미군 OSS 인도차이나 담당관으로 새로 임명된 패티(Archimedes Patti)가 찾아옵니다. 패티는 사명감이 투철한 요원이었습니다. 호치민의 공산주의적 경향에 대한 미군의 의심 그리고 프랑스와의 관계에서의 민감성에도 불구하고, 항일전선에서의 정보 임무를 위해 호치민을 찾아 온 것입니다. 호치민과 패티는 서로를 탐색하고 향후 협조의 가능성 확인하였습니다.
그렇게 호치민은 팍 보로 돌아 왔습니다. 무전 장비와 다른 요원들과 함께 이동하는 데에 위험 부담이 있어 호치민이 먼저 혼자 국경을 넘고, 이후 보안 요원들 수십명을 보내 일행을 안전하게 후송할 수 있었습니다.(찰스 펜, 앞의 책, 180쪽) 그러나 팍 보로 돌아온 호치민은 얼마 안 있어 병이 납니다. 무리한 강행군이기도 하였지만,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결과에 실망이 크지 않았나 생각도 됩니다. 혼수상태에 빠지는 날도 많았습니다. 보 응우옌 지압의 회고에 따르면 호치민이 죽음을 예감하고 최후의 당부를 하는 듯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민간 약초가 효험이 있어 극적으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군들은 호치민이 당시 말라리아와 이질에 걸렸고, 미군의 의약품으로 치료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윌리엄 듀이커, 호치민 평전, 451-453쪽)
호치민은 미국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베트남 공산당은 레닌주의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만, 모스크바 코민테른은 식민지 현실을 반영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마저도 1943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호치민은 공식적으로 소련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당시 베트남은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식민 모국 프랑스의 세력이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프랑스는 연합국의 일원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태평양 전쟁으로 중국, 영국, 미국과 싸우고 있습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베트남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나라입니다. 더욱이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같이 또 따로 노력하고 있는 여러 민족주의 세력은 중국 국민당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영국은 프랑스와 같이 식민지 제국입니다. 반면에 미국은 유럽의 제국주의와 거리를 두고자 하는 새로운 제국입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에서는 핵심 주역입니다. 베트남의 미래에 연합국들의 관계에서 미국은 관건적 지위에 있는 것입니다.
호치민은 찰스 펜에게 여러 보급품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팍 보의 기지로 직접 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공군 당국은 찰스 펜을 파견하지 않습니다. 대신 젊은 장교 펠런을 보냅니다. 펠런은 공산 진영에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도 안 돼, 펠런은 호치민의 팬이 됩니다.
“사람들은 베트민의 태도를 오해하고 있음. 그들은 반프랑스적이 아니라 단지 애국자일뿐임.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원할 가치가 있음.”(찰스 펜, 앞의 책, 184쪽)
1945년 7월 전쟁은 마지막 고비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OSS의 패티는 중국 남부의 프랑스 군대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고는 항일전쟁의 파트너로 호치민의 베트민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토머스 중령과 부대 요원들을 파견합니다. 호치민은 이들을 극진히 예우하였습니다. 호치민의 절실한 노력에 드디어 보상이 오는 것일까요? 특별히 소도 잡았습니다. 닭고기를 할 때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요리법을 지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샴페인과 와인도 준비하였습니다....
호치민은 패티에게 전후 재건을 위해 온 프랑스의 생트니 단장과의 회담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후 베트남 질서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였습니다. 보통선거로 의회를 구성하고, 자연 자원을 베트남 민족에게로 환원하고, 아편 판매를 금지하고, 유엔 헌장의 모든 자유를 베트남 인민에게 보장하고, 5년에서 10년 사이에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토머스 중령은 팍 보의 호치민 동지들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쿤밍에 보내는 보고서에 “공산주의 도깨비는 없다. 베트민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프랑스의 가혹한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개혁을 하고자 할 뿐이다”라고 썼습니다.
한편 호치민은 펠런에게 미국 독립선언서를 물어보았습니다. 펠런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사실 호치민이 자기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호치민은 미국 독립선언서 서두를 베트남 독립선언서 서두에 넣을 생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해 9월 호치민은 하노이 광장 수십만의 군중들 앞에서 그러한 독립선언을 낭독합니다.
며칠 후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됩니다. 호치민은 때가 왔다고 판단했습니다. 당 중앙위원회를 소집합니다. 총 서기 추옹 친을 포함하여 전국의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호치민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는 즉시 총봉기 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반대 의견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호치민은 연합국들과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하기 위해서는 사태를 장악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8월 16일 일본 항복 소식 직후 베트민도 전국회의를 열었습니다. 국내외 60여명의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호치민의 연설이 끝난 후, 임시정부 역할을 할 5인의 ‘민족해방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호치민은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호치민은 “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우리 온 힘을 모아 일어서자. 전 세계 수많은 피압박민족들이 독립을 얻기 위해 다투어 나서고 있다. 우리만 뒤쳐질 수 없다. 전진! 전진! 베트민 전선의 깃발 아래 용감하게 전진하자!”
호치민은 이 호소문에서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이름을 다시 씁니다. 즉 프랑스, 홍콩 등지에서부터 베트남 사람들에게 각인된 '세계적인 애국자'의 이름을 다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다른 한편 소련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상기시키기도 합니다. 호치민은 이후 더 이상 그 이름은 쓰지 않습니다.
* 이상 다른 표시가 없는 한 윌리엄 듀이커, 호치민 평전, 푸른 숲에 의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