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2015. 9. 28.




남한산성 여장(女墻)
사적 제 57호
소재지: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번지 일원
여장(女墻)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 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 여장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전돌(塼乭)로 축조한 평여장(平女墻)이다 그러나 여장은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 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전돌(塼乭)을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형식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딘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 총안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 등 3개의 총안과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위한 타구(垜口)가 마련되어 있고, 남한산성 여장규모는 길이 4.2m, 높이 1.3m, 폭 0.8m내외가 일반적이다.



북문


북장대터(北將臺址)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 곳은 북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장대라 불린다. 북장대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에 단층누극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는 수어청에 소속된 5영중 중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남한산성의 장대는 18세기초에 붕괴되었고, 18섹 중현베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수축하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송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연주봉 옹성(連珠峰 甕城)
옹상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산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암문(暗門)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서쪽에는 성벽에서 2m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 길이 150㎝ 정도의 연주옹성이 연결된다. 개구부 외부는 홍예식이고 내부는 평거식이다. 통로의 길이는 5m 정도로 천장은 장대석 5매로 덮여 있다.



서문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와 완만하여 넓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락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려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1625)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