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한글이 살아야 우리말이 살고 겨레가 산다 |
이대로 논설위원, 558돌 한글날을 맞아... 기사입력: 2004/10/09 리대로 논설위원 |
우리 글자, 한글이 태어난 지 올해로 558돌이 된다. 한글은 우리 겨레의 자랑스런 보물이고 자존심이며 상징이다. 한글은 세계 언어학자가 극찬하는 글자다. 한글이 있기에 오늘날 온 국민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고 나라임자로서 떳떳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한글이 우리말을 힘나게 하고 우리 겨레와 나라를 일어나게 해준다. 한글이 고맙고 한글이 태어난 날을 즐겁게 보내고 돌잔치를 크게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한글을 남달리 사랑하고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지만 한글날이 즐겁지 않고 오히려 우울하다. 왜일까? 한글이 외국말에 밀려 몸살을 앓고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사람도 아닌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한글과 한글날을 우습게 여기고 미국말을 더 섬기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올 한글날은 국경일로 정하고 큰 돌잔치를 하고 싶어 여름휴가도 없이 국회를 드나들었는데 헛 땀만 흘리고 또 초라한 한글날을 맞이했다. 대통령과 정치인과 학자들은 나와 다른 사람인가 보다. 한글날 기념식도 초라하고 마지못해 치르고 있다. 제나라 말은 헌신짝 보듯 하고 모두 영어만 섬기기 바쁘다. 조기 유학과 영어 연수비용 때문에 유학 적자가 수 조원에 이른다는 데 대통령도 장관도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부와 정치인들은 정치싸움만 열심이다.
몇 해 전 독일유학을 다녀온 분이 나와 함께 우리말 살리기 운동을 하겠다고 찾아왔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 함께 방을 쓰던 중국 유학생이 한국은 중국보다 못한 나라라고 자랑하고 다른 외국인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한글을 내세우니 그 중국인도 꼼짝 못하고 다른 외국인들도 고개를 숙이더라고 했다. 한글은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자신감과 힘을 주었다고 했다. 세계 강대국도 부럽지 않게 어깨를 펴고 박사도 되고 그곳 대학에서 강의도 했다고 했다.
그런데 15여 년 만에 고국에 와보니 자신이 고국을 떠날 때보다 한글이 영어에 치어 죽어가고 정부도 언론도 영어 열병에 걸린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며 나를 찾아온 것이다. 한글이 어렵게 중국 한자로부터 눌려 살던 설움을 씻어내고 나라 글자로 자리잡으려는 판에 미국말, 영어 숭배가 지나친 것을 보고 조국의 모습이 한심스러웠다고 했다.
영어 열병이 크게 번진 건 15년 전 노태우 정권이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고 10여 년 전 김영삼 정권이 세계화 구호를 내세우며 영어조기교육을 하겠다고 하면서부터다. 럭키금성이 LG, 선경이 SK라고 회사 이름을 바꾸면서 영문 창씨개명 바람이 일어 지금은 구멍가게도 영문으로 이름을 짓고 있다. 회사이름과 간판만 그런 게 아니다. 상품이름, 잡지와 신문이름, 가수와 방송 이름은 말할 거 없고 일상 생활언어에까지 외국말과 외국말투가 유행이다.
“휴먼디스커버리, 더뮤지션, 다브러리, 시사투나잇, 리얼섹스라이브러리, 나이트라인”는 방송프로 이름이다. “오! 필승? 코리아, 안녕하세요”는 방송 자막 글이다. TVguide, entertain, sports, baseball, soccer는 스프츠신문 지면 이름이다. 그밖에도 어린이 잡지와 과자 이름부터 시작해 화장품, 자동차 이름 등 온통 상표와 회사이름이 영문이다.
이름만 그런 게 아니라 날마다 방송과 신문과 거리에서 한국인들에게 광고하는 광고문도 let's KT, Have a Good Time, think star 같은 영문이 판친다. 개인기업만 그런 게 아니다. 'Hi Seoul 시민 good! 아이디어 공모, Hi 서울 Green 청계천“은 미디어팀, 마케팅팀이란 영문 직제 이름까지 가진 서울시가 낸 영문혼용광고문이다.
도대체 영어가 무슨 요술방망이라도 된단 말인가. 교육기관도 아닌, 빚이 산더미인 서울시와 경기도청까지 수십, 수백 억 원을 들여 영어마을을 만들고 영어 열병을 부채질하고 있다. 얼마전 경기도지사가 영어마을을 여는 자리에서 “해피 버스데이 어쩌고...” 영어로 생일 축하노래를 하는 방송을 보고 처음엔 웃다가 가슴을 친일이 있다. 돌잔치도 아니고 태어난 자리에서 한국 정치지도자가 영어 생일 노래를 부르게 까지 된 현실이 너무 슬프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오늘날 서울 거리에 영문간판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 영문 간판은 법령을 위반한 것이고 지방자치단체가 지도 감독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서울시는 그 책무는 충실히 수행하지 않고 영어를 상용화하겠다고 하고 쓸데없이 버스에 영문자를 대문짝만하게 써 붙이게 하고 영어 혼용광고나 하고 있다. 그래서 한글단체가 그 시정을 건의했으나 영어에 눈이 멀어선 지 무시했다. 할 수 없이 감사원에 감사청구도 하고 헌법소송까지 하니 버스 로마자는 이제 지운다고 한다. 영어 공부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너무 지나치다.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 빛내는 일은 우리말 독립운동이다. 한글을 지키고 즐겨 쓰고 남의 나라 말 침투를 막는 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시대 사명이고 조상과 후손과 남의 나라 사람에게 떳떳한 일이다. 세계 으뜸가는 글자를 가지고도 558년이 지나도록 나라 글자로 자리잡지 못하고 자주 문화를 꽃피지 못한 건 못난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고 빛내는 일은 온 겨레가 잘 살고 힘센 나라가 되는 길이다. 이 일은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할 일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남의 나라 말글만 배우고 섬기기에 돈과 시간을 다 바쳐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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