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南山 494m)
♣ 소개 / 특징 / 볼거리
높 이 : 494m
위 치 : 경북 경주시 인왕동, 탑동, 내남면
신라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경주는 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이다. 그 중 신라인들이 천년을 두고 다듬었던 남산은 그 자체가 신라인들에게 절이요, 신앙으로 자리한다. 한 구비를 돌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마애불이 맞이하고 골골이 남아 있는 수많은 절터와 유적은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기에 남산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산 자체가 문화재인 것이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뻗어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곳곳에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만날 수 있다. 이와 함께 남산의 지정문화재로는 보물 13개, 사적 12곳, 지방유형문화재 9개와 중요 민속자료 1개로 곳곳에 유적이 산재해 있다.
경주 신라문화원이 제작한 경주 남산지도에는 순례길만 70여개를 잡아놓았을 정도니 비록 산은 낮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등산로다.
경주시내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산이 금오산(471m)이고 그 남쪽에 솟은 산이 고위산(495m)인데, 남산이란 이 두개의 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와 40여 개의 계곡을 통틀어서 말한다. 남북 8km 동서 4km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 모습을 취하고 있다.
불상 80여 체, 탑 60여 기, 절터 110여 개소가 있어 남산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유물유적의 산이라고 할 수 있다.남산은 노천박물관이다. 남산에는 40여개의 골짜기가 있으며, 신라 태동의 성지 서남산, 미륵골·탑골·부처골 등의 수많은 돌속에 묻힌 부처가 있는 동남산으로 구분된다.
남산 서쪽 기슭에 있는 나정은 신라의 첫임금인 박혁거세의 탄생신화가 깃든 곳이며, 양산재는 신라 건국 이전 서라벌에 있었던 6촌의 시조를 모신 사당이다.포석정은 신라 천년의 막을 내린 비극이 서린 곳이다.
동남산에는 한국적 아름다움과 자비가 가득한 보리사 석불좌상, 9m 높이의 사면 바위에 탑과 불상 등을 새긴 불무사 부처바위, 바위에 아치형 감실을 파고 앉은 부처골 감실석불좌상이 있다.
남산에는 미륵골(보리사) 석불좌상, 용장사터 삼층석탑, 칠불암 마애석불을 비롯한 12개의 보물, 포석정터, 나정과 삼릉을 비롯한 12개의 사적,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입골석불, 약수골 마애입상을 비롯한 9개의 지방 유형문화재, 1개의 중요 민속자료가 있다.
유적뿐만 아니라 남산은 자연경관도 뛰어나다. 변화무쌍한 많은 계곡이 있고 기암괴석들이 만물상을 이루며, 등산객의 발길만큼이나 수많은 등산로가 있다. 남산을 일등으로 꼽는 사람들은 "남산에 오르지 않고서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곧, 자연의 아름다움에다 신라의 오랜 역사, 신라인의 미의식과 종교의식이 예술로서 승화된 곳이 바로 남산인 것이다.남산을 비롯한 경주는 유적의 밀집도, 다양성이 뛰어나 '경주역사유적지구(Kyongju Historic Areas)'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진다.
-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 산행코스
코스 : 용장1리 ~ 설잠교 ~ 용장사지 ~ 금오봉 ~ 상사바위 ~ 상선암 ~
선각여래좌상 ~ 삼릉 ~ 서남산주차장 ( 약 4시간 )
▶ 산행지도
◈◈◈ 풍물, 전설 한 마당 ◈◈◈
● 상사바위
상사(想思)바위 이야기
옛날 국사곡 어귀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외롭게 사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을 보면 손자를 보는 듯 귀여워 하였다. 동네 아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따랐다.
그 중에서도 이웃집에 사는 피리라는 소녀를 퍽 귀여워 하였고 피리도 할아버지를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하였다.할아버지가 80세를 넘었을 때에는 피리도 자라서 어느덧 꽃다운 처녀가 되었다. 피리는 철이 들면서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히 생각하여 맛난 음식이 생겼을 때나 햇과일이 날 때면 언제나 몰래 할아버지께 갖다 드려 기쁘게 해드렸다.
그러던 어느 해 봄에 피리네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돌봐주던 피리가 없으니 견딜 수 없을 만큼 쓸쓸하였다.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할아버지는 피리를 기다렸다.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안에 앉아 피리를 줄곧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반가운 피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피리의 환상이었다. 그 후부터 할아버지 눈에서는 피리의 환상이 사라지지 아니했다. 그저 자식처럼 귀여워서가 아니고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처녀 피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자신을 발견하였다.이제 며칠 안 가서 낙엽처럼 질 몸이 꽃 봉우리 같이 피어나는 피리를 사랑하다니 안될 일이지 하고 중얼거리면서 다짐해 봐도 헛일이었다.
피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뱀처럼 기어 나와서 혀를 날름거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피리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양심과 피리를 아내로 삼겠다는 욕심이 서로 머리 속에서 쉴새 없이 싸웠지만 끝내 양심을 져버리고 무서운 욕심이 할아버지 마음을 다 차지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국사곡 산정에 올라가서 피리가 이사간 마을을 멀리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나무에 목을 매어 죽어버렸다. 할아버지의 혼은 그 곳에 큰 바위가 되어 피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그 후부터 피리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큰 뱀이 몸을 칭칭 감고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덤벼드는 것이었다.
그 무서운 꿈은 한번만 꾸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눈을 감으면 또 다시 되풀이되고 하니 피리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볼품없이 되어 가는데 동네 사람들 사이에는 수군수군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피리를 생각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그리워하던 생각이 상사 뱀이 되어서 피리를 찾아 오는 거라는 이야기였다.
오랫 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여 괴로움에 지쳐 있는 피리가 어느 날 몽롱하게 잠이 들었는데 몸을 감고 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하면서「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아 죽어 버렸는데 죽어서도 또 잊혀지지 않아 피리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으니 용서해 주시오. 살았을 땐 죽을 길이라도 있더니 이제 죽었으니 죽을 길도 없구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힘없이 국사곡으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꿈을 꾸었다.
피리는 자기를 생각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피리는 조용히 일어나서 할아버지가 힘없이 가던 길을 따라 국사곡으로 들어가서 정상에 서 있는 그 바위에 올라서서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피리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옆에 나란히 섰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리켜 상사바위라 한다.
지금 큰 바위 부분에 붉게 보이는 반점이 있으니 그것을 피리의 피 자국이라 한다. 이상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상사바위에 기도를 드리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사랑은 참 아름다운 꿈, 나이, 국경을 초월하니...
● 배리 삼릉[拜里三陵]
사적 제219호. 신라의 박씨 왕인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삼릉이다. 능(陵)의 형식은 규모가 큰 원형 토분(土墳)이며, 표식(表飾)은 하나도 없고, 상석(床石)이 하나 있으나 이것은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중앙에 위치한 신덕왕릉은 1953년과 1963년 2차례에 걸쳐 조사되어 내부 구조가 밝혀졌는데, 널길을 갖춘 석실(石室)이 있고, 석실 내부는 회(灰)를 칠하였다.
아달라왕(재위 154∼184)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 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7, 박승영)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耶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 용장사 삼층석탑
이 塔(탑)은 下層基壇(하층기단)을 생략하고 岩石(암석)에 높이 6m의 괴임 1段(단)을 직접 마련하여 三層基壇(삼층기단) 中石(중석)을 받게 하였다. 中石(중석)의 一面(일면)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고, 다른 三面(삼면)은 두개의 돌로 되어있으며, 각면에서는 모서리기둥과 撑柱(당주) 한 개씩을 模刻(모각)하였다.
甲石(갑석)은 二段(이단) 板石(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밑에는 副緣(부록)이 있다. 甲石(갑석)의 上面(상면)은 약간 頃斜(경사)져 있고, 그 上面(상면) 중앙에는 모가 난 2단의 塔身(탑신)받침이 마련되었다. 塔身部(탑신부)의 각층 塔身(탑신)과 屋蓋石(옥개석)은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初層塔身(초층탑신)은 상당히 높은 편으로 네 귀에 모서리기둥이 있을 뿐이고, 2층 탑신은 급격히 줄어 들었다. 屋蓋石(옥개석)은 받침이 각층 4단이고 추녀는 直線(직선)이나 轉角(전각) 上面(상면)에는 경쾌한 反轉(반전)을 보인다. 옥개석은 상면에는 1단의 괴임이 있어 각각 塔身石(탑신석)을 받게 된 점은 일반 석탑에서와 다름없다.
上輪部(상륜부)는 전부 없어져 그 원래의 상태를 알수 없고 다만 3층 屋蓋石(옥개석) 頂部(정부)에 撑柱孔(당주공)만이 남아 있다.각 부의 調和(조화)가 아름답고 경쾌하며 주위의 자연과 잘 어울리어 壯觀(장관)을 이루는 手法(수법) 樣式(양식)에서 新羅下代(신라하대)에 속하는 代表的(대표적)인 石塔(석탑)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 용장사(茸長寺)
용장사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금오신화, 金鰲新話』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몇 군데의 석축(石築)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 용장사 마애여래좌상
이 磨崖如來坐像(마애여래좌상)은 8세기 후반에 製作(제작)된 우수한 작품으로 石佛坐像(석불좌상)의 뒤편 岩壁(암벽)에 造成(조성)하였으며 蓮華臺(연화대)위에 결가부좌한 자세에 二重(이중)으로 刻出(각출)한 頭·身光을 갖추고 있다.
머리는 螺髮(나발)에 육계가 뚜렷하고 얼굴은 원만, 온화하다. 양쪽의 귀는 길게 늘어졌으며 목에는 三道(삼도)가 뚜렷하다. 法衣(법의)는 通肩(통견)이면서 平行線(평행선)이 세밀한 옷무늬로 처리한 것은 印度佛像(인도불상)을 연상케한다.
양손은 降魔觸地印(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특히 여래좌상의 신광 왼쪽에는 造像銘(조상명)으로 보이는 銘文(명문)이 세줄로 10여자 새겨 있으나 現在(현재) 判讀(판독)은 어렵다.
●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1964년 8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약 30m 남쪽 땅 속에서 머리(佛頭)가 없는 상태로 발견 되었다.특히 이 부처님은 왼쪽 어깨에서 흘 러내려 매듭진 가사끈과 아래 옷 을 동여맨 끈, 그리고 무릎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매듭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용장사 삼륜대좌불과 함께 服飾史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손과 머리가 파손되었으나 몸체가 풍만하고 옷주름이 유려하여 통일 신라 시대의 우수한 조각품이다.
●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바위의 표면을 정으로 쪼아 새긴 것이 아니라, 붓으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각각의 암벽에 삼존불을 그려 놓았다. 만들어진 시대는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국내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힌다. 앞쪽 바위에 그려진 삼존불의 본존(本尊)은 입상,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은 좌상(坐像)이다. 음각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냈으며, 아래쪽에 연화대좌를 조각하였다.
● 금오산 [金鰲山]
높이는 468m로 고위산(494m)과 함께 남산을 이룬다. 타원형으로 이루어졌으며, 금거북이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가요 "신라의 달밤" 가사중에 나오는 금오산이기도 하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어린 금오산 기슭위에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
남산 부부바위...
◑ 차량 경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