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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예수, 부처를 만나다 : 십우도의 선 사상과 기독교 신앙
『예수, 부처를 만나다』는 크리스천의 신앙을 중심 주제로 삼으면서도 선(禪)을 가르치는 비유로 잘 알려진 십우도(十牛圖)로 시작하고 있다.
선의 지혜를 크리스천, 특히 신비주의 기독교의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각기 길이 다른 선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대화하고 교감하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가를 찾는 순례의 여정에서 풍부한 영적인 통찰력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선(마하야나)불교의 전통을 고찰함으로서 21세기의 다종교 시대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모색하고, 황소를 찾아가는 열 개의 그림 즉 십우도를 토대로 하여 열 개의 설교를 담아서 구성하였다. 이 책은 서방 기독교와 동방 불교 등 종교들 간의 만남과 문화적 역동성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지침이 될 것이다.
저자 : 그래엄 웹
그래엄 웹은 뉴질랜드 성공회 신부로, 한국과 태국에서 8년여 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종교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는 성공회 대교구의 신부로서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영어미사를 담당하였고, 한국외국어 대학교에 출강하였다.
또한 신학재단대학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태국 치앙마이에서는 극동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그 후 한남대학교 린튼 글로벌 칼리지의 학장직을 수행하였고, 현재 뉴질랜드와 태국을 왕래하며 기독교와 불교의 상호이해에 관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역자 : 박영기
한남대학교 행정학 교수, 연세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 영국, 필리핀, 몽골 등에서 수학하고 연구와 강의를 하였다.
현재는 대전 용전장로교회의 장로이며 기독교 신앙인으로 행정학 연구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현대행정이념』, 『조직관리론 길라잡이』, 『크리스천 리더십 강의』, 『주일성경연구』 등과 『21세기한국행정론』, 『정부조직진단』, 『참여행정론』, 『날아가는 세상 기어가는 지혜』 등의 공저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관료제와 조직 및 행정』, 『행정이념: 미국과 소련의 비교』, 『예수님의 리더십』 등이 있다.
서문 | 감사의 글 | 차례 | 십우도
Part ONE
01. 시작
02. 소와 목동
03. 원형
04. 선(禪)
05 살아있는 선(禪)과 사랑하는 하나님
06. 에크하르트와 친구들
07. 참된 자기 마음
08. 비움Emptiness, 없음No-Thing
Part TWO 십우도 설교
1단계 황소를 찾아 나서다
2단계 황소의 발자취를 찾다
3단계 황소를 찾다
4단계 황소를 잡다
5단계 황소를 길들이다
6단계 황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7단계 황소를 잊다
8단계 황소를 초월하다
9단계 근본으로 돌아오다
10단계 시장으로 들어가다
부록(經典) | 참고문헌
제 2부의 설교에서 저자는 선불교의 십우도를 '빌려서'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려고 한다.
양자간에는 상호대조적인 것도 있고 상호보완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융합적인 것도 있다.
종교간의 대면이 유익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은 종교적 통찰력을 상당히 심화시켰는데, 이제 그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불교는 기독교보다도 500년 이상이나 앞선 종교이다.
역사적 예수의 활동시기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 것처럼 역사적 부처의 활동시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미 불교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확실하다.
19세기 초엽 이래로 인도에서 온 불교의 전도자들이 이집트, 팔레스타인 및 시리아 지방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러한 영향이 예수의 이야기에도 어떤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학문적인 논의가 제기되었다.
특히 일부 독일의 학자들은 불교의 사상 및 경전과 예수의 말씀 및 비유 사이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 p.47
기원후 150년 이전까지만 해도, 기독교가 종교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기 전으로 기독교적 관점과 실천의 다양성이 풍부하였다.
일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성모독'이라고 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와 동일시하도록 한 영지주의 사상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기를 본보기로 삼으며 가르쳐서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친다.
그리고 예수를 봄으로써 거룩한 그 분을 보도록 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접근은 사제나 주교의 중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실제로 영지주의 크리스천들은 사제나 주교의 계층제적 관리에 의해서 구원(救援)받는 것을 거부한 예수의 제자들이다.
대신 그들은 인도의 불교와 같이 신비스러운 명상을 통해서 구속(救贖)을 얻으려고 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빛을 향하여 나감으로써 참된 영혼의 고향을 찾으려고 하였다.
‘자기 안에’라고 말할 때, 우리는 십우도에서 묘사되고 있는 자아를 향한 여정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는 그 세 번째 그림에서 목동이 드디어 황소를 발견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참된 자아를 찾고 참 나의 진면목(眞面目)을 인식하는 단계이다. --- p.60
선(禪) 수행(修行) 방식을 기독교의 가르침과 예배(禮拜) 방식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말, 말, 또 말에 진력이 났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신학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길에서 헤매고 있는가?
더 이상 말 할 것이 없는 지독히 메마른 밑바닥의 한계에 다다른 위대한 설교자가 절망 끝에 지혜로운 사제를 찾아갔다.
사제가 그에게 충고하였다.
“당신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만 설교하십시오.”
그 다음 주일날 회중 앞에서 그는, 설교단에 서서 많은 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그의 최고의 설교였다.
다음과 같은 선(禪) 시가 있다.
어디를 가든지 나는 말Words을 만난다.
그러나 그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내 마음속에서 의심의 덩어리가
버드나무 광주리만큼이나 크게 일어났다. --- pp.85-86
선과 기독교가 만난다.
두 개의 프리즘이 각기 다른 빛을 굴절시켜서 하나로 모으는 것처럼. 그것은 양자를 혼합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더 분명하고 뚜렷해진다. (교향악과 테니스처럼.)
어느 하나도 씻겨 버리거나 모습이 비뚤어지지 않는다.
둘 안에서 생명과 사랑이 교합된다.
선이 기독교의 영성이 가지고 있는 주제들을 노래한다.
신(神)을 부정하는 선(禪)이 인간의 조건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God-talk안에서 그러한 이해의 지평을 반영한다. (신학적으로 다룬다.)
선은 우리로 하여금 풍부한 유럽의 신비주의적 전통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한다.
선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가 진리를 독점하고 닫아버린 채, 경직되고 배타적이고 교조적이며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스즈키와 머튼과 같은 사람들은 확실히 창의적이며 정신적인 모든 경험에는 선이 내재한다고 믿었다. 우리가 종교의 근거가 되는 순수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선이다.
베리건Daniel Berrigan은 선의 계율과 기독교의 신앙이 적합하다고 보았다.
케네디Robert Kennedy는 예수회Jesuit의 사제로서 선불교의 선사(禪師, master)가 되었다.
케네디는 선이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영적인 목표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수행자가 선(禪)을 행하는 것처럼 침묵하며 묵상하고, 삶을 응시하고, 참된 자아를 자각하도록 한다. --- pp.90-91
우리가 정신적 여행을 시작하면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려는 의지와 힘이 부족하여서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행에는 끝이 없습니다.
숲 속의 가시가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이 장애물은 우리들에게 정신적 여행을 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이 다른 것들이나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거나, 그 동안에 축적되어 온 기독교인이나 교회의 조건에 막혀있거나, 또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데 방해가 되는 분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의 중심을 찾는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길은 여러 갈래로 나 있습니다.
선생님을 찾아야 합니까?
각각 다른 정신수행의 방법을 취합해야 합니까?
나의 참된 영성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나 자신의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이 교회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까?
시(詩)는 노래합니다.
다만 '매미 노랫소리와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만 들린다'고.
우리가 찾아다니기를 멈출 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가 바로 우리 코밑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매미의 노래 소리를. 우리는 기존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비우고 더 많이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 pp.163-164
우리의 소년 목동은 참 자아를 찾기 위한 오랜 자기 안으로의 여행 끝에 이제는 나이 든 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기를 잊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적(靈的) 여행의 초기에 이미 그는 자비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그 안에 완전한 예수의 성품이 자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우리에게는 동정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예수의 가르침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돌아보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우리가 특별히 온전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궁핍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 세상에 비추는 우리의 빛은 기쁨과 이해와 자비와 사랑과 친절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아무런 대가(代價)를 바라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주는 것이, 우리가 남들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곤궁한 사람이나 적대적인 사람이나 원수까지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개구리같이 하찮은 미물도 사랑의 키스가 필요합니다.
이솝(Aesop) 우화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친절한 행동은,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결코 헛되지 않는다.' --- pp.249-250
선(禪)과 기독교 신앙
- 황소 길들여 타고 집에 돌아오다 -
불교적 전통에서 십우도(열 개의 황소 그림)는 소를 찾아서 고삐를 매고 길들이는 것을 비유로 사용해서 마음의 수련하는 단계로 나타낸다.
목동은 본래의 자아를 찾아나서는 당신이며, 소는 당신의 본성이다.
아브라함의 종교에서 양치기의 이미지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는 소 목동의 비유가 중요하다.
소는 자아 속에 있는 인간의 본성이자 부처님 성품의 마음이다.
열개의 그림들은 목동이 잃어버린 황소를 찾은 다음에 일어나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이 열 개의 그림들과 각각의 그림에 수반되는 열 개의 노래(또는 시)들은 선불교가 수세기에 걸쳐서 신앙인들이 신앙을 찾아나가는 깊은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어왔다.
십우도는 일거에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암시한다.
저자는 이 그림을 사용해서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드러내보고자 한다.
저자는 부처와 예수의 본질적인 메시지에는 원형(原形)의 양식(良識)에서 우러나오는 유사성이 많다고 강조한다.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배격하고, 물질적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단순한 삶과 타인에게 연민의 마음을 주며 사는 삶 등 중용의 길을 강조하는 점이 그렇다.
선(禪)에서는 마음이 결국 아무 마음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인간은 그때야 비로소 마음과 그 마음의 일을 알게 된다.
이러한 통찰력을 기독교로 가져오면 기독교의 신비한 신앙체험에 가까운 통찰력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인간들이 지식의 굴레에 얽매여 있는 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그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없다.
인간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결코 인간으로부터 떠나버리시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지식은 하나님을 한정시키려고 하지만 본질상 하나님은 결코 한정 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은 그 동안 어느 정도 묻혀있던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거룩한 불교인들을 만났을 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부정하는 불교인들이 거룩해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성숙하고 변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선불교와 기독교의 가운데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바로 토머스 머튼이다.
머튼은 양자 간의 대화가 얼마나 유익한가 하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는 선불교와 기독교의 상호 이해를 가로막는 것 중에 하나는. 선을 잘못 인식하도록 하는 명제와 설명에 치중하는 서구의 경향이라고 지적한다.
선은 통찰력을 얻을 때 까지 의식을 일깨우고. 집중하고, 다듬는다.
기독교는, 성경 말씀의 종교로서, 교인들 간에 어떤 말씀을 수용하고 또는 수정 할 것인가 하는데 에는 이견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한다.
기독교는 은혜와 은총의 종교이다. 신자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역할을 갖는다.
그러나 선의 핵심은 사람을 자유하고 자립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순과 격렬함으로 선의 가르침은 준비된 설명과 편리한 상징의 근거를 여지없이 파괴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종교 간의 대화가 기독교 신앙을 더 성숙 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2부의 십우도 설교 10단계에서 저자는 선불교의 십우도를 ‘빌려서’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도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은 종교적 통찰력을 상당히 심화 시켜왔다.
따라서 저자는 십우도를 통해 기독교의 영적인 진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며, 전통적으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데 익숙해져서 놓쳐버린 예수의 또 다른 면을 이해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진수를 다른 종교의 관점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저자는 뉴질랜드 성공회 신부이시군요. 대한성공회에서도 활동하셨다니 친근감부터 듭니다. 그곳은 성공회가 당연히 강세임에도 이웃 종교에 진지하게 열린 자세를 지닌, 이런 성직자들이 계시네요. 도올이 언젠가 이런 말을: 불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오래 전에 지구에 출현했음에도 불교는 이제 겨우 새벽을 맞이하고 있다. 얼마든지 '도약'할 수 있다는 뜻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