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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남옹성의 속살을 보면서 (모임 스케치)
손 종 구
작은 가지 끝에 봉긋하게 솟아나던 새싹이 제법 연둣빛을 띄고 산자락을 물들이는 4월 마지막 일요일 여느 때와 같이 은행동 산성 유원지에서 박용규 사무차장을 만나 남문 쪽으로 오른다.
남문관 뜰엔 벌써 몇 분이 와 계셨다.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라 반갑게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열시가 넘어서니 오실 분들이 얼추 다 오신 듯하여 자기소개를 하는데 전보삼 회장님은 미국 출장 가셔서 못 오시고 또 많은 회원님들도 못 오셨다.
오늘 탐방 코스는 제1 남옹성이다. 2옹성, 3옹성은 발굴 복원이 되었고 이제 1옹성을 발굴 복원하려고 주변 나무를 다 베어냈다.
제1옹성 치에서 내려다보고 다시 6암문을 통해 내려갔다.
가파른 봉수대까지 올라 설명을 듣고 인증 샷까지 찍고 아랫길을 돌아 검복리 윗길로 해서 다시 제3 남옹성 옆 10암문 쪽으로 오르는 길은 성의 복쪽면 만큼 비탈길이라 힘이 든다.
오르는 길에 묘가 있어 잠시 쉬어 가는데 앉아있는 강형옥 회원 옆에 더덕 순이 올라와있다.
더덕뿐만 아니다. 양지꽃. 조개나물. 제비꽃. 애기똥풀꽃, 아기붓꽃도 양지쪽 묘 옆에 피어있고 먼 산은 연초록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연초록빛 산자락 군데군데 햐얗게 핀 산벗나무 꽃이 운치를 더해 산 전체를 뒤 덮은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4월이다, 참 아름다운 4월이다.
11암문은 시구문이다.
그 문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시신이 11암문을 통해 내다 버렸다고 한다. 다시 남문관으로 돌아오는 길옆 언덕에 늦은 진달래가 힘없이 피어있다. 굵은 가지가 잘라지고 옆으로 새 가지가 나와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그걸 카메라에 담느라 좀 늦게 남문관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는데 이번 점심 메뉴가 색다르다.
묵은지에 닭을 넣어 찜을 한 묵은지 닭찜? 새로운 메뉴라 그런지 맛이 좋다.
점심을 다 먹고 다음 달 남.사.모 16주년 행사를 논의하게 될 임원들은 기다리란다. 세세한 행사 내용을 토의하고 결의하고 공식 4월 모임은 끝을 맺었다.
회의를 마치고 남[남은]사[사람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장소는 검단산 자락 얼레지 군락지이다. 작은 승용차에 일곱 명이 타고 갔다. 초록빛 융단위에 보랏빛 꽃들이 피어있다. 그러나 시기가 늦어 많이 졌다. 늦었지만 일 년에 한 번 피는 귀한 꽃 얼레지를 볼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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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산성 인물
오달제(吳達濟) (1609년 광해군 1년-1637년 인조15년 졸)
자는 계휘. 호는 추담. 시호는 충렬. 본관은 해주. 오윤해의 자.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병조좌랑‧ 시강원사서‧ 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가 되었다.
이때 후금의 세력이 날로 커져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무섭게 위협하여왔다.이에 화친을 위하여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三司)의 공의(公議)를 위협, 제지하여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게 되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이에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그는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그는 묵매화(墨梅畵)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 조속(趙涑)‧ 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화풍 영향을 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그의 그림은 《묵매도(墨梅圖)》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趙之耘)‧홍수주(洪受疇)‧박동진(朴東晉)‧조희룡(趙熙龍)‧이공우(李公愚)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저서로는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오달제 친필)
회보 연재 ~ 제 5호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3. 능행 중의 조치
1) 老論 山林의 초빙-첫 째~
정조는 노론 山林 두 사람을 초빙하기 위해 노력했다. 宋德相(1710~1783)과 金亮行(1715∼1779)이 그 주인공인데, 송덕상은 회덕 출신으로 宋時烈의 玄孫이었고, 김양행은 여주 출신으로 金壽恒의 曾孫이었다. 그런데 송덕상은 정조 초년에 홍국영의 지원을 받아 조정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초빙 대상은 김양행이었다.
정조는 능행 준비가 진행되던 중에 송덕상을 불러 이번에 김양행을 만나기를 희망했다.
두 儒賢이 함께 陵所에 간다면 또한 훌륭한 일이다. 先正(송시열)의 시 중에 ‘어느 곳에서 무릎을 꿇고 진달할지 모르겠네(不知何處跪陳辭)’라는 구절이 있는데, 올해 경(송덕상)이 능소에 참배하게 되었으니, 이 일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송덕상은 이 자리에서 寧陵 제향에서 사용할 祝文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말 것을 건의했고, 정조는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효종의 對明義理를 고려해서였다.
효종대왕께서는 일찍이 ‘忍痛含寃’ 네 글자를 잊은 적이 없어, 저 나라를 항상 ‘오랑캐 나라[虜國]’라 칭하셨습니다. 그런데 本陵에 祭享할 때의 축문에 저 나라의 연호를 사용했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年月과 干支만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정조가 김양행을 처음 본 것은 8월 4일이었다. 행렬이 여주에 들어섰을 때 김양행이 동구 밖에 나와 국왕을 맞이했는데, 정조가 지나가면서 얼핏 그를 보았던 것이다. 이튿날, 정조는 김양행을 이조참의에 임명하고 불렀지만, 김양행은 해직된 다음에 나오겠다고 답했다. 정조는 김양행을 이조참의에서 해임한 다음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8월 6일, 정조는 여주 행궁에서 김양행을 만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김양행을 만난 정조는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卿(김양행)을 한번 보려고 하는 나의 마음은 목마를 때 물마시기를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서, 이전에도 정성을 들여 부른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나의 성의가 부족하여 경이 나를 멀리하는 마음을 돌리지 못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서로 만나게 되니 나의 기쁜 마음을 어찌 말로 형용하겠는가? 당초 이조참의에 제수한 것은 나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경이 간절히 사양했기 때문에, 해임을 허락하여 경의 마음을 편히 하고 나오는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경(김양행)은 山林의 宿德이 있는 현자로 泰山北斗와 같은 명망이 있다. 내가 왕위를 계승한 뒤 맨 먼저 불러 隱士에 대한 聘禮를 부지런히 했지만 賢士의 수레를 돌리지 못했는데, 이는 나의 정성과 예우가 부족하여 감동시키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마음에 부끄러움만 절실했는데, 이제 능에 展謁하는 행차가 현자가 사는 마을을 지나게 되었으므로, 이로 인해 서로 만나기를 바랐다. 다행히 나를 멀리하지 않고 생각을 바꾸어 登對했으니, 바라고 기다리던 끝에 위로가 된다. 이제 서로 만났으므로 계속 자주 만날 수 있겠지만, 車駕가 돌아갈 때 함께 가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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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을 오르며
조 한 숙
남한산성에 드나든 지 25년이 되었다.
이른 봄 산성에 처음 들어서던 날, 그 경이로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아직도 이런 마을이 있었는가. 남문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성리 마을의 조용한 아침 정경, 아침을 짓느라 어느 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는 낯선 풍경이었다.
그런 감동이 있은 후 몇 년 동안 우리 부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요일 아침이면 차를 몰고 산성으로 올라갔다. 어떤 때에는 주중에도 올라갔다. 이른 아침 산성에 올라가서 아침공기를 한껏 마시고 남편은 거기서 바로 출근을 하기도 했다. 소나무들이 내뿜는 아침공기는 밥 한 공기보다 배가 불렀다. 산성에서 밤새워 촬영하다가 미처 철수 못한 방송국 촬영 팀과 버스를 만난 적도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우리 부부를 산성으로 이끌었을까.
그것은 매번 신선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변화무쌍한 남한산성의 얼굴일 것이다. 그것은 한없이 깊고, 넓고, 슬픈 산성의 진솔한 모습일 것이다. 사계절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는 그 얼굴과 모습이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침괘정 옆에 있는 몇백 년 된 느티나무의 과묵함이 좋아서 달려간 적도 있었다. 장수처럼 위엄을 갖춘 수어장대의 늠름한 모습에 반해서 달려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수어장대 아래 소나무 밭의 청정한 솔바람 소리가 좋아서 여름 겨울 가리지 않고 달려가기도 했었다. 이렇듯 산성의 넓은 품에 안겨 25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그때 따라다니던 초등학교 3학년 아들이 이제 결혼하여 애아빠가 되었으니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
산성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깊은 속사정도 알게 되었다. 산성이 겪은 병자호란의 슬픔도 가까이 다가왔다. 치욕을 당한 인조의 아픈 가슴도 어루만지게 되었다. 조선을 멍들게 한 청나라를 향해 울분을 터트리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저런 모든 상처를 침묵으로 덮은 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밝은 얼굴로 내방객을 맞이하는 남한산성의 의연함이 참 좋다. 이제 남한산성은 기쁜 얼굴로 찾아오는 시민들의 휴식처요 면모를 제대로 갖춘 도립공원이 아닌가.
우리 내외가 ‘남사모(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에 입회하기 전에는 ‘산성회’라는 등산 팀 회원이었다. 산성회에서는 남한산성의 동서남북 골짜기마다 안 간 곳이 없었다.
남문[至和門]에서 서문[右翼門]으로 북문[全勝門]에서 동문[左翼門]으로, 남한산과 청량산에 걸쳐 있는 가파른 성곽을 오르내렸다. 조선시대 숨결이 그대로 남아 있는 암문(暗門)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일만이천 미터가 넘는 긴 산성을 나는 듯이 돌아다녔다.
봄이 되면 진달래 꽃길을 따라, 가을이면 낙엽을 밟으며 망월사, 장경사, 개원사, 국청사 등 유적을 찾아 수도 없이 다녔다. 한겨울의 폭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렇게 다녔더니 산성의 구석구석이 훤해졌고 우리 집 앞마당처럼 편안하고 친근해졌다.
그 시절 남문 근처 로터리 부근에 산성호텔이 있었다. 가을이면 호텔 정원에 빨갛게 익은 감을 바라보며 수어장대 쪽으로 오르곤 했었다. 그 언덕에는 나이를 먹어서 힘들어하는 수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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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된 느티나무 서너 그루가 있었다. 침괘정 근처 느티나무는 나이가 들었어도 건장한데 언덕배기 나무들은 좀 병치레를 한 것 같았다. 그 중 한 그루는 반쪽 남은 몸으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질곡의 세월을 버텨 온 산성의 역사를 보는 듯 가슴이 저려 오기도 했다.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 중턱에는 주춧돌로 보이는 큼직한 돌들이 여러 개 있었다. 어느 돌은 고개만 내밀고 숨어 있기도 했다. 그 돌들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등산 팀들은 그 돌 위에 제물을 차려 놓고 시산제를 지내기도 했고, 돌 위에 걸터앉기도 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흐른 후 1990년대 후반 그곳에 행궁 터라는 표지판이 나붙었다. 줄을 치고 등산객들의 발길을 금지시켰다. 주변에 있던 산성호텔과 단골식당 박달재도 헐려 나갔고, 그동안 정들었던 옛 등산길도 막혀 버렸다.
발굴 팀들의 오랜 작업이 끝난 후 그 자리에 행궁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소나무 목재들이 들어오고 목수들의 망치 소리가 산성리 마을에 울려 펴졌다. 쩌렁쩌렁 그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새로운 나라가 건국이라도 되는 듯 기뻐했다. 조선시대 백성이 된 듯한 착각과 임금을 모시는 행궁을 짓는다는 기쁨에 가슴이 뛰었다.
임금도 신하도 백성들도 모두 세월을 따라 흘러갔지만 후손들은 옛 모습대로 행궁을 재현했다.
작년 10월, 하궐 준공식 날, 축하객들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산성리 마을 주민들과 행궁 복원을 위해 애쓴 사람들, 지나가던 등산객들도 모두 모였다.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 행궁 가득 국악 소리가 흘렀고 남한산성의 모든 역사가 구름 따라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지금도 우리 내외는 ‘남사모’ 회원으로 산성에 자주 오른다. 올라갈 때마다 번듯하게 복원된 행궁을 한참씩 바라본다. 상궐, 하궐을 바라볼 때면 25년 전 옛길도 그 사이로 보이는 것 같다.
그때는 우리 내외도 25년이나 젊었었다.
수필가 조 한 숙
* 충북 중원 출생
* 이화여대 국문과 ․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국민교육신문 기자 ․ 기획위원
* 고등학교 국어 교사,
*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강사 역임
* 1990년《수필공원(현《에세이문학》)으로 등단
* 2004년 수필집《초록빛 은유》로 제 23회 한국수필 문학상 수상
* 現 :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에세이문학》발행인
국립 한경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국제펜클럽 ․ 한국문인협회 ․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수필문우회 ․ 에세이문학작가회 ․ 이대문인회 ․ 송현수필문학회 회원
* 저서: 수필집《초록빛 은유》《네프로네피스가 있는 풍경》
논문《우암(尤庵)선생 계녀서(戒女書)의 수필성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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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6주년 특강~
임진왜란과 남한산성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3. 전란의 영향
4. 임진왜란과 남한산성의 역할
5. 맺음말
1. 머리말
금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7주갑(420년)이 되는 해이다. 임진왜란은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중요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일본의 침략은 서양식 총포를 수용하여 분열된 일본 국내를 통일하여 그 넘치는 힘을 풍신수길이 명나라를 점령하기 위한 야욕을 부렸기 때문에 동서양의 문명이 접합된 결과라는 점이다. 둘째는 전쟁의 명분은 명나라를 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나라를 침입하였고, 전쟁이 무대는 우리나라였으며, 그 결과 전쟁의 피해는 우리나라가 인적 물적 피해를 가장 많이 받았다. 셋째는 명나라 원군이 두 차례 파병되어 지원한 국제적인 전쟁이었으며, 일본과 명나라는 이 전쟁으로 정권이 교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조선왕조는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 영향은 무엇이며, 어떻게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현재 임진왜란의 연구는 의병장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는 바 승리를 한 의병장을 돋보이게 하려는 문중사학의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지역사 중심의 임진왜란연구가 활발하다. 전국적인 파악은 오히려 소홀한 감이 있다. 이는 문헌중심사학의 결과인 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전쟁의 상황을 알려줌에 아주 부실한 자료이다.
본고에서는 임진왜란을 전반적 상황을 설명하고 그 영향을 살펴보고, 경기도 지역 중 광주 지역이 임진왜란 시기에 어떤 상황이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명나라 측과 일본 측의 자료도 현대인이 알고 싶어 하는 문제에 충분히 답을 해줄 수 있도록 자세하지 않다. 따라서 역사학은 문헌사학을 뛰어 넘는 이해를 해야 할 것이다.
실제 광주이역의 임진왜란기의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새로이 자료를 찾아야했다. 부족한 점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광주지역은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 임진왜란 전체를 조감하면서 이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임진왜란의 경과와 경기도 지역의 피해
2.1 전쟁의 경과
임진왜란은 1592년 음력 4월 14일 일본군 15만 5천명이 부산진에 침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총(총포라고 칭하기도 함)이라고 하는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의 대군이 부산진에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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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수천 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던 부산진은 몇 시간 만에 함락되고, 다음 날 동래진도 함락되었다. 조선의 방어체제는 중앙에는 5위제도가 있었으나 번상병으로 채워지도록 편제되었으나 이 무렵 유명무실했다. 또한 지방의 군사제도는 지방에서 방어를 담당하는 진관체제(鎭管體制)로 편성되었다. 이는 지역의 중심지를 중심으로 이웃 군현이 그 통제를 받도록 짜여 져 있었다. 이는 경국대전의 병전 조에 기술되어 있다. 지방의 군사적 책임은 지방관이 군사적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만 유사시에는 중앙에서 지휘관을 보내 지방군을 지휘하도록 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가 16세기 이후 적용되기도 하였다. 제승방략 체제는 북방의 여진족을 침입을 막아내는 데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작동하였고, 후기까지 도원수, 도체찰사라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진관체제를 경기도로 예를 들어 설명하면 경기도에는 육군을 담당하는 병마절도사(약칭 병사라 칭함) 한 사람이 배치되고 수군을 담당하는 수군절도사(수사라 칭함) 1명이 배치되었는데 이를 관찰사(감사, 또는 라고 칭하기도 함)가 겸하여 도내의 군사적 책임을 지며, 경기도에는 병사의 아래에 병마첨절제사(첨사라 약칭함) 4명이 두어졌는데 이는 경기도내의 광주진, 수원진, 양주진, 장단진에 두어지고, 이들 진을 주진(主鎭)이라 칭했다. 그리고 광주진에는 여주, 이천, 양근에 병마동첨절제사가 두어져 그 통솔을 받았는데 이들 진을 거진(巨鎭)이라고 칭하고 이하 예속 군현에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6명이 여주, 지평, 음죽, 양지, 죽산, 과천에 두어졌다. 이 직은 수령이 겸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도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병사(병마절도사). 수사(수군절도사)= 관찰사가 겸함
병마(수군)절제사- 광주, 양주, 수원, 장단 -주진이라고 칭함
병마동첨절제사-광주진관에 여주, 이천, 양근
병마절제도위 광주-여주, 지평, 음죽, 양지, 죽산, 과천- 속진이라 칭했다.
조선왕조가 수립되고 경국대전 체제가 정비된 후 150여 년간 이 제도가 운영될 필요가 없이 평화기간을 가져와 조선시대의 군 체제는 갑작스런 전쟁에 작동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군사훈련이 전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대의 정원도 채우지 않은 상태였다. 대군의 합동으로 공격해옴에 이를 지방 단위에서 방어할 수 없었다.
왜란의 공격이 있자 경상좌수사와 좌병사는 도망을 쳤고, 이에 지방수령이 담당하는 방어체제는 힘없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도망을 치기에 급급했다. 일본군은 승승장구하여 보름 만에 한성을 장악하게 된다. 중앙에서 신립장군을 내려 보냈으나 당시 군대가 300명을 채우지 못했고, 그 나마 두루마기를 입고 몽둥이를 든 유생이었으니 이를 가지고 싸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수령들은 창고의 곡식이 적에게 이용당한 것을 막기 위해 불 질러 태웠다. 서울은 한강이란 천혜의 지형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킬만한 군대가 없어 천혜의 지형지물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5월 2일 서울을 장악한 일본군은 5월 18일에는 임진강 방어망을 격파하고 개성을 점령하였다. 小西行長은 6월 8일 대동강 어귀에까지 진격하여 18일 평양성을 점령하자 선조는 의주로 도망을 쳤다.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이덕형과 대동강에서 강화회담이 진행되었으나 일본군은 길을 빌려 달라는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했고, 조선 측은 무조건의 철병을 주장하여 회담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전쟁 중 회담은 무혈점령이란 전략의 일부였다. 6월 14일 일본군은 평양을 점령하자 조선 측은 물론 명나라 측에서도 심각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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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길주 이남이 가등청정 군에게 점령당하여 왕조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격이었다. 왕은 의주로 가서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따르던 승지 겸 사관 4명이 짊어지고 다니던 사초를 불태우고 선조를 버리고 도망을 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조선에서는 명군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요동지방을 지키고 있던 조승훈이 3,000명을 인솔하고 와서 7월 17일 평양성 탈환을 시도했으나 대패하고 겨우 자신의 목숨만을 구했을 뿐이었다.
일본군은 전 군량을 조선에서 거둬들이라고 풍신수길은 1592년 5월 16일자로 부친 지시문서에 8도에서 각 장수에게 할당하였다. 총계가 엉터리로 합계되었다. 서해안으로 군량을 조달하려는 당초의 계획이 이순신의 해전에서 5월 9일 최초로 패배하여 전라도 지역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우도 즉 낙동강 이서 지역이 의병들의 방어로 일본군의 침략을 저지했고, 일본군이 지나친 후방에서 일본 측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병들이 일어나 싸움으로써 북진한 군대에게 군량 수송을 불가능하게 하여 작전에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조선에 풍신수길이 직접 건너와 작전을 지시하겠다고 천명한 일이 여러 차례 연기되어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했다. 또한 일본군이 북상할수록 일본정부와의 통신도 어려워졌고 여름에 출병한 일본군은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아 혹심한 추위에 견디기 어려웠다. 그들은 점령지역에서 식량을 약탈하여 연명했으나 이는 많은 군대의 군량을 조달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명나라 측에서는 요동, 산동지방과 북경의 침략을 막기 위한 조처로 군무와 재정 등을 총괄하는 ‘경략(經略)’ 직에 송응창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남북 군을 모군하여 이여송을 대장으로 45,000명을 이끌고 12월 19일 압록강을 건너와 1593년 1월 5일부터 9일까지 평양성을 탈환하는 전투를 벌였다. 소서행장군은 개성으로 물러났고, 1월 18일 개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1월 29일 이여송은 자기의 기병 1000명을 이끌고 벽제관에 왔다가 매복한 군사에 포위되어 간신히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평양으로 귀환하여 이후 좀처럼 진군하지 않는 전쟁공포증을 가졌다. 함경도 지역에 있던 가등청정군은 두 왕자를 포로로 잡고 혹심한 추위와 정문부의 의병이 일어나 반격을 하자 서울로 후퇴하였다. 그 무렵 2월 초에는 경에 일본군 3만여 군대가 6.000명이 방어하는 행주성을 공격했으나 이를 점령하지 못하고 서울로 후퇴하였다.
4월 말경 일본군은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여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경상도 지역으로 모인 일본군은 지난해 10월에 진주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6만 군대를 동원하여 2차진주성전투가 벌어졌다. (6월 20일-29일) 그해 연말에는 일본군은 경상도 부산, 울산 거제 일대에 성을 쌓고 이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추격한 명군이 울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1차 島山城전투).
2.2. 강화회담의 진행
일본군은 진격하면서 여러 차례 강화회담을 제의했다. 첫 번째 일본 측 제의는 서울을 싸우지 않고 점령하려는 목적으로 침공 초부터 조선 측에 제안했다. 조선 측에서는 이들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이덕형을 보냈으나 이미 충주성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았고, 서울을 점령한 후에는 또 김명원에게 제안하였으나 조선 측에서 거부하였다. 이는 강화회담의 일본측 요구는 조선과 싸우지 말고 함께 명나라를 치자는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강화회담은 명 측에 제안을 했다. 강화회담은 선봉장인 소서행장이 주도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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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진행하였다. 평양을 점령한 후 명나라는 지연작전을 펴기 위해 병부상서 석성이 추천한 상인출신 沈惟敬을 시켜 강화회담이 진행시켜 북진을 지연시키면서 군대를 모집하여 이여송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때 강화회담은 상대방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서울로 철수한 일본군의 소서행장과 심유경 사이에 두 차례의 강화회담이 이루어졌다. 1593년 3월 15일과 4월 초순에 이루어졌다. 명 측의 제안은 일본군의 점령지 반환과 군대 철수, 포로로 잡힌 왕자의 송환, 풍신수길의 사죄를 요청했고, 이를 수락하면 풍신수길을 봉왕하겠다는 뜻을 주장하였고, 일본 측은 강화사신을 일본에 보내고, 명군을 요동으로 철수시키면 두 왕자를 송환하고 일본군을 서울에서 철수하겠다고 제안하여 서로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합의를 보아 형식 상 전투가 휴전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를 이용해 남쪽으로 철수한 일본군은 6만 대군을 동원하여 작년 10월에 공격을 했다가 실패한 진주성을 보복하는 2차진주성 공격을 감행하였다.(1593, 6월 20일-29일) 주위에 있는 명나라 군대가 있었지만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을 방어함에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 이에 진주성에는 남하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의병장들과 진주성 관군이 이를 지키려는 필사의 전쟁을 하여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수만 명의 시민이 도륙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조는 1593년 10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경복궁은 백성들에 의해 불에 탔음으로 왕은 별궁인 창경궁에 머물렀다.
명과 일본과의 강화회담은 두 사기꾼에 의한 것으로 양국에 제대로 보고되지도 않고 승인도 받지 않은 희대의 사기극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야할 문제이다. 또한 양국의 강화회담 내용이 조선 측에도 알리지 않은 것이어서 조선 정부에서는 끝까지 강화회담을 반대하게 되었다. 심유경은 자신의 책사인 서용재와 서일관을 강화사로 위장하여 소서행장을 따라 1593년 5월 23일 나고야에 가서 풍신수길을 만나게 되었다. 이에 풍신수길은 명나라의 황녀를 바칠 것, 감합무역의 재개, 명과 일본의 군사에 대한 서약, 한강 이남의 4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이북은 명나라가 점령한다는 등 9개항을 제시했다.
이에 명나라도 완강히 반대를 했다. 그후 심유경과 小西行長 사이에 항복문서를 허위로 작성해 小西飛를 북경에 1593년 12월에 파견하였으니 아마도 이를 빌미로 지리와 명나라 정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때 일본측 문서가 송응창의 {경략복국기략}이라는 책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에서는 이를 허위인줄 모르고 강화사신을 일본에 파견했다. 1594년 연말에는 일본군의 일부가 잔류하고 본부대는 철병하고 명나라 군대도 모두 철병했다.
가등청정이 포로로 잡은 두 왕자를 송환하였고, 조선 측에서 지금까지 강화를 반대해오다가 성종의 능인 선릉,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 등 두 왕릉을 도굴한 자를 잡아 보내라고 요구했고, 형식 상 이를 일본 측에서 보내자 조선 측은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어져 명나라 사신 편에 통신사 황진을 따라 보냈다. 1596년 4월 경 명나라 정사 이종성은 부산진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진영을 방문했는데 그는 지금까지의 강화회담이 거짓임을 알고 그 곳에서 도망을 쳤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부사로 일본에 이미 들어간 楊方亨을 정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대치하여 풍신수길을 일본왕에 책봉한다는 칙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이를 ‘봉공책봉’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를 책봉하고 공납을 허용한다는 것이니 일본 측에서 주장한 감합무역을 재개하도록 허용한다는 뜻이었다.
사신이 1596년 8월에 오사카에서 풍신수길을 만나보았다. 풍신수길은 그동안 강화회담이 거짓으로 자행되었음을 확인하고 소서행장을 죽이려다가 그 속인 죄를 앞으로 싸움으로 갚으라고 용서를 했다. 중국과 조선에 전하는 문서에는 풍신수길이 봉왕은 안중에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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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왜 명나라 황녀를 바치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고, 조선 측 사신에게는 사신의 지위가 낮다고 하면서 두 왕자를 송환하였는데 왕자들이 왜 와서 감사를 표하지 않느냐고 트집을 부렸다. 그러나 심유경은 사비로 선물을 사서 일본이 바친 것으로 거짓 보고하였다. 이로 인해 그 후 명나라에서는 심유경과 이종성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강화회담은 결렬되고 풍신수길은 재침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1597년 초부터 준비하여 3월에 14만 1500명의 군대가 재침하였고 명나라는 재빨리 군대를 파견하여 6만 여명이 파견되었다. 정유재란은 작전 계획을 바꾸어 무조건 북상하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지역을 완전 점령하고 전에는 분산하여 장수 개별적으로 진공하는 정책에서 합동으로 북진하는 전략으로 바뀌었다. 차근차근 북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조선의 명장인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교체함에 성공했다. 이는 소서행장이 간첩 要時羅를 통해 가등청정이 언제 부산항에 당도할 것이니 이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정보를 일러주었고, 전쟁을 모르는 선조는 부산 앞바다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이순신에게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정보를 믿을 수 없고 또한 小西行長 군이 침입을 했는데 加藤淸正을 잡기 위해 부산항으로 출격하는 것은 적의 술수에 빠질 것으로 판단하여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불충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직위해제하여 백의종군하게 하였고, 그와 견원지간이었던 원균으로 교체하였다. 원균은 1597년 6월 19일 칠천량 전투에서 완전 패하여 수군의 전함 500여척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이어서 왜군은 추풍령과 조령을 넘어 북상하는 침략을 취하지 않고 전라도 진격하여 8월 16일 남원성을 함락하였다. 남원성에는 이미 선발대로 파견된 명나라 부총병 楊元이 이끈 3,000명의 군사와 조선군이 지키다가 1만여명이 희생되었고, 일본군은 전주 공주를 무혈 점령하고 북상하다가 직산에서 海生이 이끄는 명군에 대패하여 전세가 역전되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명군은 모병한 군대로서 마병과 보병, 수병이었다. 조선은 산이 많아 서로 연락이 어려웠고, 지휘관의 현지 사정에 따라 대응하도록 하는 작전을 펴고 전군을 4로(路)로 나누어 울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加藤淸正 軍(2차도산성전투), 사천에 주둔하고 있는 島津義弘 군 그리고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小西行長 군을 9월 20일 아침 7시에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다. 東路軍의 지휘관은 馬貴, 中路軍은 董一元, 순천을 공략하는 것은 西路軍 劉綎과 진린이 이끄는 水路군이 담당했다. 견고한 왜성을 공격하였으나 세 군데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사천성의 島津義弘이 수군을 동원하여 갇힌 소서행장을 구하려는 하자 이순신은 노량에서 싸우다가 11월 19일 전사하고 11월 20일 소서행장은 퇴각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순천 왜교성 전투에는 유정의 군대 15,000명, 진린의 군대 9.000명 권율이 도원수로 1만여 군사를 가지고 참여하였고, 이순신이 참여하였다. 즉 3국의 명장들이 모두 참가한 최후의 연합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전략은 완전 복수를 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명군의 전략은 전쟁을 종결지으려는 것이었다. 정유재란 때에 일본군이 승리한 증표로 처음에는 군인 및 민간인의 귀를 베다가 코를 베어 이를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내면 전공으로 인정해주었으며 임진년의 전쟁과는 달리 지역을 지배하는 통치정책을 썼으나 의병과 관군의 공격으로 제대로 점령지역을 통치하지 못하였다.
2.2 경기도 지역의 전쟁의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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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지역은 전란 중 왜군이 태풍처럼 지나쳤기 때문에 일본군에 의한 직접적인 인적 물적 손실은 다른 도에 비하여 더 심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1592년 5월부터 이듬해 3월말까지 10개월간 서울을 점령하고 있었음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피난을 온 곳은 주로 경기도 지역이었다. 그리고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다가 전쟁이라는 미증유의 사건을 당하여 피난을 하였기 때문에 경상도 지역에서는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했고, 다음해 계사년(1593년)에는 흉년이 들어 전국적으로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특히 강화도에는 창의사 김천일이 주둔하여 장악하여 지방과 행재소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수원의 독산성 전투 행주성 전투가 강화도 군과 수원의 군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명나라 원군이 서울을 탈환한 후에는 그들의 식량과 말의 먹이를 대야함으로 큰 부담에 시달렸다. 특히 정유재란 때에는 5만여 명의 명나라 군대가 서울에 4개월 동안 주둔하고 있었음으로 이의 군량과 말먹이 감을 경기도 주민이 담당해야 했다. 실제로 이 기간 동안 얼마만큼의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하여는 기록이 부실하여 정확히 알 수 없다. 대략적으로 계산하면 우리나라의 식량사정은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자급자족을 했다. 풍년이 들면 곡식을 군자곡과 세곡을 거두어 비치하였다가 흉년을 대비했다. 그런데 일본군이 15만 여명, 명나라 군대가 5-6만 명이 전후 두 차례 들어와 그들의 식량이 조선의 곡식이었을 것임으로 국내의 식량 사정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명나라 군대는 초기 2개월의 식량을 가지고 왔으나 그 이후의 식량은 우리나라에서 대야했다. 더구나 일본군이 지나간 군현의 곡식 중 불에 태워져 없앤 곡식을 감안하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임진왜란 시에는 남한산성은 물론 이를 포함하는 광주부 일대에서는 전쟁이 없었다. 그러나 광주부에서 당한 전쟁의 피해로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일으킨 선릉과 정릉(靖陵)이 일본군에게 도굴되는 사건이 1592년 9월에 일어났고, 이는 보물을 캐기 위한 목적으로 능을 무참히 헤쳐졌다. 이 소식을 접한 정부에서는 1593년 4월에 유성룡을 야간에 보내 그 현장을 조사한 기록이 선조실록과 증정남한지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 사건은 조선정부로 하여금 씻을 수 없는 왜적에 대한 큰 분노를 가지게 하였고, 강화회담을 철저하게 반대한 한 이유가 되었음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3. 전란의 영향
임진왜란은 우리나라에 엄청난 피해와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을 대체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평화 속에 살아온 전 국민이 전쟁의 공포에 떨었고, 많은 사람이 일본에 포로 잡혀가거나 죽었다. 일본에 생포되어간 포로는 약 7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 1만 2천명 정도는 전쟁이 끝난 후 13차에 걸쳐 송환되었지만 나머지 포로는 일본 땅에서 또는 외국에 노비로서 살아가면서 어려운 고초를 겪었다.
둘째 국가적 행정체제가 마비되어 이를 작동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구체적인 예는 전국토의 양안이 불에 타고 전국적인 양안을 실시해야 했으며 대동법이란 공물제도를 실현함에 100년이 걸렸다. 중장의 군제가 5군영체제로 개편되었다. 이런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이 실학사상을 낳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磻溪隧錄이란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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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안을 30여 년간 유형원이 연구한 대표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전 국민이 역사상 최대의 주거지 이동을 하였다. 전쟁과 피난으로 자기가 태어난 곳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던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주거지 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수십만 군대가 넓은 지역을 이동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학자들이 자기 강산과 지리에 대한 소중한 인식을 하게 되었으니 산을 그 자체만으로 파악되던 데에서 산맥으로 파악하게 되었고, 강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이는 조선 후기에 역사를 지리 위에서 파악하는 새로운 경향인 역사지리학을 낳게 하였다. 상세한 지방읍지가 작성되고 전국의 정확한 지도의 작성 등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많은 사람의 주거지 이동은 지금까지 노비세습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도망노비가 나타났다. 평시에는 노비가 어느 이웃 지방으로 옮겨도 주인에 의해 추쇄가 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도망노비를 추쇄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이는 하층민의 신분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에는 전 국민의 반 정도가 노비로 전락하던 증가 추세에서 노비가 급감하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으니 공노비 사노비 모두 급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넷째 임진왜란은 지배층인 사족양반의 지배권을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의병활동을 통하여 국가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향촌사회를 방어 복구함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법제적, 정치적, 행정적 모순은 심각한 정도였고, 그 모순이 폭발하기 전에 외침에 의해 국난을 당하자 모순에 대한 백성의 반감은 외적의 침입에 우선 돌려지고 전란의 수습은 왕조의 모순을 봉합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덕천막부로 정권이 교체되고 명나라는 이 전쟁으로 국가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전쟁의 피해가 막심했던 조선왕조는 명맥을 유지했다. 임진왜란 중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은 왜란 중 잦은 반란사건으로 나타났고, 경복궁이 시민들의 분노로 불태워진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다섯째 왕조를 유지한 조선왕조에서는 수도의 방어를 위해 직업군인 중심의 5군영제와 수도 주변의 4유수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는 강화유수, 개성유수, 수원유수, 광주유수를 두게 되었다.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의 지형이 주목되어 축성하게 되고 광주유수는 남한산성의 수어청 수어사를 겸직하게 되었다. 유수들은 비변사 당상관으로 국가 기무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여섯째 언어 즉 국어에서는 중세국어에서 근세국어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순경음의 소멸, ‘ㄲ’에서 ‘ㅋ’으로 격음화 현상, 그리고 첫 소리 ‘ㄷ'이 'ㅈ’으로 변한 구개음화현상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예술에서는 우리나라 산을 그릴 때에 추상적인 산을 그리던 데에서 사실적인 산으로 그리는 ‘진경산수화’의 출현, 음악에서 한국적인 가곡의 출현 등을 들 수 있다.
일곱째 학문은 정통 성리학이 발전하여 철학에서 주작학적 철학이론이 발달하여 양명학 등 다른 학문 경향을 배격하였으며, 역사에서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본 뜬 명분과 정통을 강조하는 ‘강목형’의 역사학이 발전하여 종통, 장자세습제, 종법제도의 실현 등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학문이 지배층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런 경향이 비록 지배적이었다고 해도 다른 현상과 길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존명사대사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성리학과 존명사상은 비록 사회의 전반적 현상과는 길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일으킨 문헌기록은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후일 한국사회의 발전 동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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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작동하지 못하고 ‘위정척사’라는 다른 견해 다른 문명의 수용을 반대하는 길을 걸어 근대화에 뒤지는 결과까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4. 임진왜란과 남한산성의 역할
선조실록의 기록이 극히 부실하기 때문에 경기도 지역의 임진왜란 당시의 현상을 설명하는 자료를 거의 찾을 수 없어 대단히 고민스러웠다. 나는 실학자 홍양호의 손자 홍경모가 쓴 500쪽의 증정남한지를 샅샅이 뒤졌다. 이 읍지는 우리나라에서 상세하기로 대표적인 자료집이라고 생각한다. 이에서 한 가지 예를 찾았다. 즉 경기도의 광주는 서울과 인접한 지방 도시로서 조선왕조의 인재를 배출하는 연못이었다. 임진왜란의 외교적 임무를 수행한 이덕형의 출신지였다.
또한 임진왜란 시기 7년간 지방 노비신공을 받으러 갔다가 겪은 피난일기를 쓴 오희문의 쇄미록이 있다. 그러나 쇄미록은 저자는 광주사람이었지만 담긴 내용은 다른 도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증정남한지에는 조선왕조의 200년간 국가적 숙제였던 ‘종계변무’운동을 종결짓게 되고 명나라 원군을 파견해준 사연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인즉 다음과 같다.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갈 때 아마도 물건을 살려고 은 천량을 빌려가지고 갔다. 북경에 가장 아릿따운 여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술집을 찾아 갔다(‘一夜千金酒店’). 술집 주인이 한 여자를 데리고 나오는데 과연 천하일색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머리 단을 묶은 곳에 눈물자국이 있어 홍씨가 그 연유를 물었더니 “자기는 강남 사람인데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왔다가 아버지가 갑자기 죽었는데 시신을 고향으로 옮긴 돈이 없어 자신의 몸을 팔아 돌아갈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홍씨는 그 측은한 사연을 듣고 천량의 은덩어리를 모두 주어버렸다.
그리고 홍씨는 귀국하니 돈을 빌려준 사람이 관에 소송을 제기하여 영남지방으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 그 후 강남으로 돌아간 그 여자는 석성(石星)에게 시집을 갔는데 석성은 승진하여 예부상서가 되었다(1586-7). 매양 조선 사신이 오면 홍씨의 소재를 물었다. 그리고 홍씨는 사면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 통역관 우두머리로 명나라에 종계변무사 홍성민을 따라 가게 되었다. 석성과 그 부인이 홍순언을 초대해 옛 은혜를 감사하고 종계변무사를 따라가 융숭한 대접을 받고 문제를 해결지어 주었고(실은 대명회전 한 질을 받아 왔다). 홍씨는 돌아와 선조로부터 1590년 光國의 공신호를 받았고, 그 부인에게는 ‘唐陵君夫人’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그의 부인은 스스로 비단 여러 필(두 필)을 손수 짜서 긑에 ‘報恩緞’이라는 세 글자를 수놓아 홍순언이 북경에 갈 때 보냈다. 후일 석성은 병부상서가 되었는데 이 때 1차 원군을 보내줌에 기여했다. 이는 인맥을 통한 외교였다. 석성은 심유경을 잘못 등용했다고 하여 후에 처벌을 받아 옥사했으나 조선 측에는 특별한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홍순언이 살았던 동네를 ‘보은단동’으로 칭하게 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광주 언주면 청담이니 바로 강남구 청담동이 그 곳이다.
5. 맺음말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고, 지방의 군권을 장악하던 수령들은 대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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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한 때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되었다. 일본군은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지만 이는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행위였다. 거의 거침없이 북상하던 일본군은 뜻밖의 장애물에 부닫혀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후방 점령지역에서 예상치 못한 의병이 일어나 전방에 나간 군대에 군수물자의 수송이 어렵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신등 연락에도 장애가 있었다. 또한 수군의 강한 저항을 받아 일본 수군은 완전 패배를 당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목줄을 죄이고 있었으나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 측에서는 식량의 지원이 계속되었고 얕잡아 보았던 조선의 문화능력은 명나라 군대를 동원함으로써 위기를 구했다.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점령지역에서도 받기가 어려웠다.
이런 결과는 일본군이 철수하여 전쟁은 1년여 만에 소강상태를 유지하여 일본군과 명군은 1594년 연말 경에는 모두 철수했다. 그러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전략을 바꾸어 재침을 1597년 1월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곧바로 지원온 명군에 의하여 직산에서 패퇴하여 후퇴하여 1597년 9월경에는 일본군을 완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리고 1598년 8월 중순에 전쟁의 장본인인 豊臣秀吉이 죽음으로써 전쟁은 어느 쪽의 승리도 없이 종결되었다.
전후 7년간 지속된 전쟁은 전창터였던 우리나라에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주었고, 우리나라는 명나라에 대하여 ‘再造之恩’을 입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곧이어 일어나 북방의 여진족(후금)의 침입은 일본에 대한 복수를 하지 못하고 말았다.
전쟁의 위기를 극복한 것은 전 국민의 힘으로 이를 막아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홍순언의 이야기를 바로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광주지역의 임진왜란시기의 역사는 앞으로 지방의 자료를 더욱 발굴하여 연구되어야할 것이다. (2012년 5월 20일)
정 구 복 (鄭 求 福 )
* 충남 청양 생*
* 서울대학교 학사 / 석사 * 경희대학교 문학박사* 계성여고 교사*
* 전북대 문리대 교수 * *충남대 문과대 교수* UCLA 교환 교수*
*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장*
* 한국고문서학회 회장*
* 국학연구지원심사위원회 위원*
* 서울시 문화재위원* 문화재 감정위원(전적 .고문서)*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원장*
* 한국문화사 편찬위원 국사 편찬위원장 *
* 서울시 문화재 위원 *
* 임진왜란 연구회 회장*
* 뉴질랜드 오클랜드 파견 교수*
* 한국사학사학회 회장 *
* 현재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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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4월 모임 결산(2012. 04. 29)~
수입 / *활동비 18명×20,000원=360,000원. *연회비 3명×30,000원=90,000원.
지출 / *식대-286,000원
합= 286,000원
결산잔액=16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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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 명단~
무순/ 정흥숙 최종섭 정완길 김내동 손종구 박용규 김진원 최종대 신창규 정재열 죄신영 이 능재 나종화 외 1명 주미숙 강현옥 조영희 이종화 -18명
연회비 납입/ 최종대. 신영수. 김남일. 이영남. 최종섭. 정완길. 정재열. 김진원. 전보삼. 손종 구. 이종화. 문제길. 공석봉. 고태우. 박용규. 신창규. 조한숙. 이승수. 김내동. 신동수. 주미숙. 박명숙 박연주 최병옥 강현옥 정흥숙 최신영 이능재-28명
~남.사.모 동정~
* 전보삼 회장님 박물관협회 회장으로 미국 방문. 수고하셨습니다.
* 만해 기념관에서 {설중매 만해 한용운} 특별전시가 5월 1일 ~30일 까지 있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 남한 행궁 낙성연이 5월 24일 오후 2시 전통공원에서 있었습니다. 관계자 여러분 수고 하셨습니다. 축하 ~축하
* 2012년 6월 남사모 모임은 역사문화 야외탐방입니다. 경상북도 문경 고모산성 / 문경새 재의 진면목을 보고 배우고 올 예정입니다. 외원님들 많은 관심 참여 바랍니다.
* 다음카페 (남사모 청년포럼)에 회보 열람방이 개설되었습니다. 남사모 회보는 이곳에서 영구 보존되니 24시간 열람 가능합니다. 많은 방문, 흔적 바랍니다.
* 사무국장 김진원 이-멜 : kimjw59@naver.com 전화번호: 010-7502-4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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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사모소식지가 날로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사무국에서 참 수고가 많네요.
한줄의 댓글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무국에 큰 격려와 힘이 될것 같습니다.
손종구시인님의 4월 스케치와 조한숙수필가님의 "남한산성을 오르며"를 찬찬히 읽어 보았습니다.
역시 문인들이 쓴 글이라 또 다른 느낌이 드는군요.
정구복교수님의 16주년 기념특강 내용도 인상적이네요.
김진원 사무국장님 사업하시면서 너무 수고가 많습니다.
알찬 내용의 남사모 회보 잘 보있읍니다.
만드시느라 너무너무 수고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