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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일 시 : 2009. 6. 11.(목) 14:00 o 장 소 : 의성청소년센터 대강당 o 발표자 : 목포시청 정성일(역사연구가) |
발표 순서
Ⅰ. 본인 소개 및 조문국의 역사를 알게 된 배경
Ⅱ. 삼국사기와 남당유고 기년(紀年) 비교
Ⅲ. 조문국 왕계보 및 기년
Ⅳ. 중국정사 조선전에 나타나는 조문국의 기록
참고) 경상북도 의성군에서는 소문(召文)을 조문으로 읽는다.
먼저 저를 초대하여 주신 김복규 의성군수님, 박정수 작가님, 김종우 문화원 경북도지회장님을 비롯한 의성군청 관계자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프로필에서 소개하였듯이 저는 현재 목포시청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지방직 공무원입니다. 대학 또한 史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양식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의성군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타지방 공무원이 경상북도 사학과 교수님, 의성군 향토사학자들도 모르는 조문국에 관하여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증을 먼저 풀어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의성군민님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저는 조문국을 알기 위해 역사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1993년 공무원임용시험을 준비하면서 역사공부를 좋아하여, 임병주님의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박영규님의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과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우리의 삼국 초기 기년은 엉망일까라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저의 의문은 남당 박창화 선생의 유고의 해석과정에서 풀렸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남당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유고를 국사편찬위원회에 제공하여 살펴보게 해 준 박인규(박창화 孫)선생님을 비롯한 유족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남당 유고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라디오(필명)님이 남당 유고중에 백제왕기라는 책을 처음 구리넷(coo2.net)에 소개하면서부터입니다.
아직도 제가 남당유고를 마무리 정리하고 있지 못한 시점에서, 이렇게 나와 강의를 하게 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한문도 잘못합니다만, 끈질김과 열정은 있었죠.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조문국의 역사에 대해 저보다 먼저 조문국의 기년을 풀어낸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필명은 세연이라는 분으로, 저보다 훨씬 뛰어난 분인데 돌연 중단하였습니다. 만약 세연님이 남당유고를 연구하였더라면 오늘날의 저는 없었겠지요.
조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 초기의 역사를 기본적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조문국의 역사는 기원전 124년에서 서기 245년까지의 이르는 21대 369년 동안 존속했던 나라로서 아쉽게도 의성군에서 발굴된 유물자료(5~6세기 추정)와는 불일치하는 점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의성에는 조문국과 관련된 설화와 지명이 존재하고 그 중 대부분은 남당 유고와 일치하였습니다.
먼저 삼국사기와 남당 유고 신라사초에 나타나는 신라왕의 재위기년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본기와 신라사초의 신라왕 재위기 비교】
묘호 |
신라본기 재위기 (先王과의 관계) |
신라사초 재위기 (先王과의 관계) |
생몰년 (신라사초) |
5. 파사이사금 |
A.D.80 ~ A.D.112 (유리의 아들) |
A.D.126 ~ A.D.158 (유리의 아들) |
? ~ A.D.158.10(壽 ?) |
6. 지마이사금 |
A.D.112 ~ A.D.134 (파사의 아들) |
A.D.159 ~ A.D.191 (파사의 아들) |
A.D.131.3 ~ A.D.191.8.(壽 61) |
7. 일성이사금 |
A.D.134 ~ A.D.154 (유리의 아들) |
A.D.192 ~ A.D.212 (남해의 손자) |
A.D.135.8.5 ~ A.D.212.2.(壽 78) |
8. 아달라이사금 |
A.D.154 ~ A.D.184 (일성의 아들) |
A.D.213 ~ A.D.243 (일성의 아들) |
A.D.180.9. ~ A.D.243.5.(壽 64) |
9. 벌휴이사금 |
A.D.184 ~ A.D.196 (탈해의 손자) |
A.D.244 ~ A.D.256 (석추의 아들) |
A.D.189.4. ~ A.D.256.4.(壽 68) |
설명해야 할 부분이 많으므로 핵심부분만 설명하겠습니다. 자료를 보시면 대략 60년의 기년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라왕들이 대체로 수긍할 수 있는 나이까지 사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조문국이 망한 시기는 벌휴왕 2년인데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185년2월이고, 제가 살펴본 남당유고 신라사초에는 245년2월입니다.
신라사초란 남당유고에 있는 파사이사금 ~ 법흥왕까지의 5권의 책들이 이름도 없어, 제가 임시적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이 책이 과연 신빙성이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4가지의 근거로 신라사초가 고기(古記)의 필사본이라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의 증거로 아달라이사금 20년 왜 여왕 비미호가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왜 여왕 비미호의 기록이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도 등장하므로 근거 자료로 제시합니다.
【신라사초 아달라이사금 20년 기사】
二十年 正月 五月 倭女王遣其弟狛比古等 獻其土物 請交易物貨 乃立倭典 與之通聘
20년(A.D.232) 5월 왜 여왕이 동생 박비고(狛比古) 등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물품과 재화를 교역(交易)하기를 청하여 이에 왜전(倭典)을 세우고, 왜와 더불어 교제(交際, 서로 사귐)하기로 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아달라이사금 20년 기사
20년(A.D.173) 5월 왜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다.
2. 삼국지 위서동이전 왜(倭)의 기사 발췌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 大夫難升米等 詣郡 求詣天子朝獻 (중략)
경초 2년(A.D.238) 6월 왜여왕(倭女王)이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등을 보내어 군(郡)에 이르러, 천자에게 조헌(朝獻)하기를 구(求)하자 (중략)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 여왕 비미호는 신라에 사신을 보낸 이후로 65년을 지나 중국의 대방군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남당유고는 6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삼국지(三國志)란 책은 진(晋)나라 진수(陳壽)가 편찬한 것으로, 중국정사의 기록 중에서 당대의 기록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습니다. 또한 왜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낸 것은 보고 들은 기록이 아닌, 당대의 공적인 기록이기에 오차가 적은 기록입니다. 이것이 남당유고 신라사초가 고기(古記)의 필사본이라는 첫 번째 증거입니다.
【신라본기와 신라사초의 신라왕 재위기 비교】
묘호 |
신라본기 재위기 (先王과의 관계) |
신라사초 재위기 (先王과의 관계) |
생몰년 (신라사초) |
10. 내해이사금 |
A.D.196 ~ A.D.230 (벌휴의 손자) |
A.D.257 ~ A.D.291 (벌휴의 손자) |
A.D.230.4. ~ A.D.291.3.(壽 62) |
11. 조분이사금 |
A.D.230 ~ A.D.247 (벌휴의 손자) |
A.D.292 ~ A.D.309 (벌휴의 손자) |
A.D.254.8. ~ A.D.329.2.(壽 76) |
12. 첨해이사금 |
A.D.247 ~ A.D.261 (조분의 동복아우) |
A.D.310 ~ A.D.324 (조분의 동복아우) |
A.D.274.1. ~ A.D.324.12.28.(壽 51) |
13. 미추이사금 |
A.D.262 ~ A.D.284 (구도의 아들) |
A.D.325 ~ A.D.349 (구도의 아들) |
A.D.292. ~ A.D.362.10.(壽 71) |
14. 유례이사금 |
A.D.284 ~ A.D.298 (조분의 아들) |
A.D.350 ~ A.D.364 (조분의 아들) |
A.D.306.1. ~ A.D.367.2.(壽 62) |
15. 기림이사금 |
A.D.298 ~ A.D.310 (조분의 손자) |
A.D.364 ~ A.D.370 (조분의 손자) |
A.D.330.4. ~ A.D.372.6.(壽 43) |
16. 흘해이사금 |
A.D.310 ~ A.D.356 (내해의 손자) |
A.D.370 ~ A.D.377 (내해의 손자) |
A.D.329.8. ~ A.D.392.5.(壽 64) |
17. 내물이사금 |
A.D.356 ~ A.D.402 (말구의 아들) |
A.D.377 ~ A.D.402 (말구의 아들) |
A.D.350.3. ~ A.D.402.2.7.(壽 53) |
15대 기림이사금 ~ 17대 내물이사금까지가 삼국사기와 신라사초와 기년차이가 많은 부분입니다. 신라사를 연구자들은 누구나 내물이사금과 실성이사금의 妻가 모두 13대 미추이사금의 딸이라고 기재한 부분이 잘못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삼국사기에 미추이사금의 몰년이 284년입니다. 내물이사금과 실성이사금의 왕비가 되는 여인들이 284년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내물이사금 원년은 356년이니 내물이사금의 妃이자 눌지마립간의 어머니 되시는 분의 나이가 내물이사금 원년 기준으로 73세입니다. 실성이사금의 妃의 나이도 살펴보면 실성의 원년이 402년이므로 무려 119세입니다.
그렇다면 남당 유고로 계산해 볼까요? 미추이사금의 몰년(沒年)이 362년이니 역시 삼국사기와 같은 기준으로 몰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가정하여 내물의 원년 377년에는 16세가 되고, 실성이사금의 원년인 402년에는 41세가 됩니다.
역시 남당유고 신라사초가 삼국사기 보다 정황상 맞다고 인정되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남당유고 신라사초가 고기(古記)의 필사본이라는 두 번째 증거입니다.
이 밖에도 신라왕의 계보상에 나타나는 정황증거는 많으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이 되므로 이것으로 줄입니다.
세 번째 증거는 미추왕릉의 발굴결과 현재 삼국사기 미추이사금의 몰년인 284년보다 60년 정도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신라사초에 의하면 선왕(先王)이 선위(禪位)한 시기에 죽지도 않은 왕의 사당(廟)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선위시기인 349년과는 65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하여는 제가 미처 검토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신라본기와 신라사초의 신라왕 재위기 비교】
묘호 |
신라본기 재위기 (先王과의 관계) |
신라사초 재위기 (先王과의 관계) |
생몰년 (신라사초) |
18. 실성이사금 |
A.D.402 ~ A.D.417 (대서지의 아들) |
A.D.402 ~ A.D.417 (대서지의 아들) |
A.D.359.6. ~ A.D.417.5.(壽 59) |
19. 눌지마립간 |
A.D.417 ~ A.D.458 (내물의 아들) |
A.D.417 ~ A.D.458 (내물의 아들) |
A.D.387.1. ~ A.D.458.8.20.(壽 72) |
20. 자비마립간 |
A.D.458 ~ A.D.479 (눌지의 아들) |
A.D.458 ~ A.D.479 (눌지의 아들) |
A.D.414.3. ~ A.D.479.2.3.(壽 66) |
21. 소지마립간 |
A.D.479 ~ A.D.500 (자비의 아들) |
A.D.479 ~ A.D.500 (자비의 아들) |
A.D.436.5. ~ A.D.500.11.5.(壽 65) |
22. 지증왕 |
A.D.500 ~ A.D.514 (습보의 아들) |
A.D.500 ~ A.D.514 (습보의 아들) |
A.D.437.10. ~ A.D.514.7.(壽 78) |
23. 법흥왕 |
A.D.514 ~ A.D.540 (지증의 아들) |
A.D.514 ~ A.D.540 (지증의 아들) |
A.D.480.2.10. ~ A.D.540.7.(壽 61) |
실성이사금부터는 신라사초와 삼국사기의 기년이 일치합니다. 남당유고 신라사초를 해석하면서 우리나라 국사학의 태두라고 불리어지는 이병도 선생의 말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고구려는 태조왕 이전을, 백제는 고이왕 이전을, 신라는 내물왕 이전을 믿을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정말로 맞았습니다.
남당유고 신라사초가 고기(古記)의 필사본이라는 마지막 증거는 조문(召文)국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조문국왕 계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사초 아달라이사금 16년 기사】
十六年 正月 召文妙德王殂 紅鳳碧海黃雲暖玉宝雲牧丹妙雲好蛙 八世主爭立 國中大亂 女主楚雲請救 乃命山乙率仙徒二千人 與盤述入召文 靖其亂立楚雲子妙楚爲王 以山乙爲召文監國 山乙善占風雲 知人邪正 皓鬚過膝 召文人奉之爲廟王 世稱乙公者是也
16년(A.D.228) 정월 소문(召文) 묘덕(妙德)왕이 죽었다. 홍봉(紅鳳), 벽해(碧海), 황운(黃雲), 난옥(暖玉), 보운(宝雲), 목단(牧丹), 초운(妙雲), 호와(好蛙) 8세주(世主)가 왕위를 다투었다. 나라 안에 대란이 있어났다. 여주(女主) 초운(楚雲)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산을(山乙)에게 명하여 선도(仙徒) 2000명을 이끌도록 하여 반술(盤述)과 함께 소문으로 들어갔다. 그 난리를 평정하고, 초운의 아들 묘초(妙楚)를 왕으로 삼았다. 산을을 소문감국(監國, 왕의 직위를 대신하는 사람)으로 삼았다. 산을은 바람과 구름의 점을 잘 쳤고, 사람들의 그릇됨과 바름을 알았으며, 흰 수염이 무릎을 넘었다. 소문 사람들이 봉(奉)하여 묘왕(廟王)으로 삼았다. 세칭(世稱) 을공(乙公)이라는 자가 이 사람이다.
이 기사가 중요한 것은 삼국지 위서동이전 마한(馬韓)기사에 진한8국(辰韓八國)이라는 기사가 등장하는데 우연히도 소문국의 멸망기사와 진한 8국의 멸망 기사와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왕의 성(姓)씨가 박(朴)씨에서 석(昔)씨로 바뀌었다는 점은 중국인의 관념으로는 역성(易姓)혁명으로 왕조(王朝)가 바뀌었다는 오해를 일으킨 것입니다.
관구검의 고구려 동천왕을 공격하였을 때 멸망한 나라는 중국인들이 진한8국(辰韓八國)으로 알고 있었던 조문국이지 신라는 멸망한 것이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문국의 멸망기사가 신라의 멸망기사로 둔갑한 것은 당시 신라가 아달라이사금의 박(朴)씨 왕조가 벌휴이사금의 석(昔)씨 왕조로 변화했음으로 기인한 것입니다.
二月 捧骨女八人 妻召文世主公子 以八世妻 妻骨門仙子
2월 골녀(骨女) 8인을 봉(捧)하여 소문(召文) 세주(世主)와 공자(公子)에게 시집보냈다. 이 때문에 8세(八世)의 아내들을 골문선자(骨門仙子)들에게 시집보냈다.
四月 郁甫伊伐飡 好禮稟主
4월 욱보(郁甫)를 이벌찬, 호례(好禮)를 품주로 삼았다.
이 분들은 조문국을 정벌한 구도갈문왕의 부모님입니다.
【신라사초 아달라이사금 16년 기사】
十六年 七月 召文王妙楚入朝 請以國獻 以帝女多禮妻之 按召文 以穢王之後 初有龍王六年 虎王二年 紫聖女主二十年 紫聖之臣鳳王七年 子月王十一年 子碧王十九年 子紫帝五十二年 征伐四方 威振東西 子翠帝十七年 子召文在位八年而廢 紫帝庶子山雲枕婢脫脫生山雲子景德 山雲獻脫脫于翠帝 翠帝寵愛之 立爲后 翠帝殂 脫脫自稱神后 迎召文爲繼夫 召文懦弱 脫脫不悅 召文與其母召氏 欲出脫脫 事覺廢之 脫脫乃立其子景德 在位六十五年 文物大興 子文武王或稱暖帝二十年 子文丹立二月而廢 文丹弟牧丹立十五年 子宝文立二十五年 子景文立三十年 子翡貝立 委政於叔父崇德 三年而廢 崇德自立七年 傳位于子允明 行仙政十二年而殂 合十八年 允明三年而廢 其妻好妙自稱帝十三年 而立其子妙德 好妙通允明之庶弟雙德而生也 妙德仁而無威 八世主分據其地 不聽朝令 在位三十三年 國力大衰 妙德知國將亡 數遣使入貢稱臣 朝廷以其爲舊國 優待之 至是遂爲我藩甥 賜宅于京 山乙以功進爵角干 好妙素仰山乙 乞爲其妻 而帝爲妙德不許 至是亦許之
16년(A.D.228) 7월 소문왕(召文王) 묘초(妙楚)가 입조하여 나라를 바치기를 청하였다. 왕(帝)의 딸 다례(多禮)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소문(국)을 살펴보면 예왕(穢王)의 뒤로 처음에 용왕(龍王)이 6년, 호왕(虎王)이 2년, 자성여주(紫聖女主)가 20년, 자성의 신하 봉왕(鳳王)이 7년, 아들 월왕(月王)이 11년, 아들 벽왕(碧王)이 19년, 아들 자제(紫帝)가 52년이며, 사방을 정벌하여 위엄은 동서(東西)를 떨쳤다. 아들 취제(翠帝)가 17년, 아들 소문(召文)이 8년을 재위하였다가 폐위되었다. 자제(紫帝)의 서자(庶子) 산운(山雲)의 침비(枕婢) 탈탈(脫脫)이 산운의 아들 경덕(景德)을 낳았다. 산운이 탈탈을 취제에게 바쳤는데, 취제가 (탈탈을) 총애하여 후(后)로 세웠다. 취제가 죽자 탈탈은 스스로 신후(神后)라고 칭하였다. 소문을 맞이하여 새남편(繼夫)으로 삼았는데, 소문이 나약(懦弱, 의지가 굳세지 못함)하여 탈탈이 기뻐하지 않았다. 소문과 그 어머니 소씨(召氏)가 탈탈을 쫓아내고자 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탈탈이 이에 그녀의 아들 경덕을 세워 65년을 재위하였다. 문물(文物)이 크게 흥하였다. 아들 문무왕(文武王) 혹은 난제(暖帝)라고 칭하였는데 재위 20년, 아들 문단(文丹)이 서서 2달 만에 폐위되고, 문단의 동생 목단(牧丹)이 서서 15년, 아들 보문(宝文)이 서서 25년, 아들 경문(景文)이 서서 30년, 아들 비패(翡貝)가 즉위하였다. 숙부 숭덕(崇德)에게 국정을 위임하였는데 3년 만에 폐위되었고, 숭덕이 스스로 서서 7년, 아들 윤명(允明)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선정(仙政)을 행한지 12년 만에 죽었는데 합이 18년이다. 윤명이 3년 만에 폐위되고, 윤명의 처 호묘(好妙)가 스스로 왕(帝)이라 칭한 것이 13년, 그녀의 아들 묘덕(妙德)을 세웠다. 호묘가 윤명의 서제(庶弟) 쌍덕(雙德)과 상통하여 낳은 자식이었다. 묘덕인 인자하였으나 위엄이 없었다. 8세주(八世主)가 그 땅을 나누어 점거하고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재위가 33년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묘덕은 나라가 장차 망할 줄 알고, 수차례 사신을 보내 입공을 하면서 신하라고 칭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소문국을 구국(舊國, 역사가 오래된 나라, 사방으로부터 적의 침공을 받는 지세에 있는 나라)이라고 하여 우대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드디어 우리의 번국과 사위의 나라가 되었으므로, 경(京, 서울)에 집을 하사하였다. 산을(山乙)은 이 공으로 작위가 각간(角干)에 나아갔다. 호묘(묘초의 할머니)는 평소 산을을 흠모하여 그의 처가 되기를 구걸하였으나, 왕(帝)은 묘덕을 위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역시 허락하였다.
본래 남당 유고에는 이런 기사밖에 없습니다. 조문국의 역사가 21대 369년이라는 해석과 분석을 통해 얻은 결론입니다. 의성군에서는 召文國을 조문국이라 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보통은 소문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가지로 발음되는 경우에 어떤 식으로 표기해야 되는지 번역․해석자는 무척 애로가 있습니다.
신라사초에 있는 것은 그것을 따르고, 없는 것은 선왕의 몰년을 후왕의 원년으로 삼아 기년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조문국이 나라를 세운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오히려 빠릅니다. 기년을 정리하다 보니 조문국이라는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하더군요.
예왕(穢王)이라는 왕호(王號), 용왕(龍王)의 원년(元年), 조문국이 멸망한 245년이 단서가 되어 추적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문국의 멸망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신라사초 벌휴이사금 2년 기사】
二年 二月 召文八世主奉景德祠主龍雲 達文而反曰 “伐休非品竊位 非祖宗之法也 天下可共討之” 甘文阿瑟羅沙伐等 將應之 上憂之 右頭上興宣曰 “小寇可遣小兒擒之 不足憂也” 上曰 “朕所以憂者 非擒之也” 興宣曰 “何也” 上曰 “達文兄今之子也 子雖弄兵 父何可傷之乎 召文世主皆姻戚也 雖有迷途 可以導之 不可雪之 兩軍相對 無咎之民受禍 安得不憂乎” 興宣曰 “臣有二兵官 可當此任” 上曰 “誰也” 曰 “郁甫之子仇道 熟知召文得其人心 雖少寬仁 可任大事 彭仇之子仇須兮 善攻城 二人相得 一攻而一襲 則可保 無虞” 上大喜 乃以仇道仇須(兮)爲左右軍主 而伐之 仇道自龜山東北 仇首兮直指阿火屋大路 兩軍互相 緩急行計 仇道作女巫隊 襲其關守 直至其都 牛乙內應之亂 遂平 命其七世主 皆如牛乙 擇骨門丈夫爲夫 達文妻子 命宅京都
2년(A.D.245) 2월 소문(召文) 8세주가 경덕사주(景德祀主) 용운(龍雲, 소문국 묘초의 여동생)을 받들었다. 달문(達文, 아달라와 文窘의 아들)이 반정을 일으키며 말하기를 “벌휴(伐休)는 비품(非品, 왕의 될 골품이 아님)으로 왕위를 훔쳤다. 조종(祖宗)의 법(法)이 아니다. 천하가 함께 토벌하여야 옳다.”고 하였다. 감문(甘文), 아슬라(阿瑟羅), 사벌(沙伐) 등이 장차 응하려 하였다. 왕이 걱정하였다. 우두상(右頭上, 西路와 北路를 담당) 흥선(興宣)이 말하기를 “작은 도적은 어린아이를 보내어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걱정하기엔 부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은 걱정하는 바는 사로잡을 수 없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달문은 형금(兄今, 아달라)의 아들이다. 아들이 비록 병사를 제 마음대로 할지라도, 아버지가 어찌 상처를 입힐 수 있겠느냐. 소문의 세주(世主)는 모두 인척(姻戚)이다. 비록 미도(迷途, 미로)에 있더라도 가히 지도하여야 한다. 누명을 씌우는 것을 옳지 않다. 양군(兩軍)이 상대하면 잘못이 없는 백성들은 화를 입는다. 어찌하여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흥선이 말하기를 “신에게는 두 명의 병관이 있으니, 가히 이 임무를 맡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누구냐.”라고 물었다. (흥선이) 말하기를 “욱보(郁甫)의 아들 구도(仇道)는 소문국을 익숙하게 잘 알고 (구도는 소문국 묘덕왕의 딸 운모와 사이에 옥모를 낳았다) 그 인심을 얻었으며, 비록 젊더라도 너그럽고 어질어서 가히 큰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팽구(彭仇)의 아들 구수혜(仇須兮)는 공성(攻城)전에 뛰어나므로 두 사람이 서로 한번 공격하고 한번 습격하면 곧 가히 지켜낼 수 있으니, 그르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구도와 구수혜를 좌우군주(左右軍主)로 삼아 소문국을 치도록 하였다. 구도는 구산(龜山)에서 동북으로, 구수혜는 아화옥(阿火屋)대로로 곧 바로 향하였다. 양군은 상호 완급(緩急)의 계책을 행하였다. 구도가 여무대(女巫隊) 일으켜 관문을 지키는 자를 습격하고 그 도읍으로 직행하였다. 우을(牛乙, 산을의 아들)이 내응(內應)하여 란을 일으켜서 드디어 평정하였다. 7세주에게 모두 우을을 따르도록 명하고, 골문장부(骨門丈夫)를 택하여 남편으로 삼도록 하였다. 달문의 처자는 경도(京都)에서 벼슬살이를 하도록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2년 기사
2년 2월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가 좌우 군주가 되어 소문국을 정벌하였다. 군주라는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위의 기사에 의성군에 남아 있는 향토사료 혹은 지명과 일치하는 자료가 등장하는 것이 보입니다. 구산(龜山), 경덕왕(景德王), 빙산(氷山), 화전(花田), 조문금(召文琴)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겠지요.
【조문국 왕력】
예왕(穢王) (? - ?) 예군(濊君) 남려(南閭)로 추정
용왕(龍王) (B.C.124 - B.C.119) 재위6년
호왕(虎王) (B.C.119 - B.C.118) 재위2년
자성여주(紫聖女主) (B.C.118 - B.C.99) 재위20년
봉왕(鳳王) (B.C.99 - B.C.93) 재위7년, 자성여주의 신하
월왕(月王) (B.C.93 - B.C.83) 재위11년, 봉왕의 아들
벽왕(碧王) (B.C.83 - B.C.65) 재위19년, 월왕의 아들
자제(紫帝) (B.C.65 - B.C.14) 재위52년, 벽왕의 아들
취제(翠帝) (B.C.14 - A.D.3) 재위17년, 자제의 아들
소문(召文) (A.D.3 - A.D.10) 재위8년, 취제의 아들
경덕(景德) (A.D.10 - A.D.74) 재위65년, 산운(山雲, 자제의 서자)과 탈탈(脫脫, 취제의 비)의 아들, 신라가 사당을 짓고 모셨다. 신라의 건국에 도움을 준 듯 합니다.
문무왕(文武王, 혹은 暖帝) (A.D.74 - A.D.93) 재위20년, 경덕의 아들
문단(文丹) (A.D.93) 재위2월, 문무왕의 아들
목단(牧丹) (A.D.93 - A.D.107) 재위15년, 문단의 동생
보문(宝文) (A.D.107 - A.D.131) 재위25년, 목단의 아들
경문(景文) (A.D.131 - A.D.160.9) 재위 30년, 보문의 아들
비패(翡貝) (A.D.160.9 - A.D.163.3) 재위 3년, 재위기간이 1년 차이가 있다.
숭덕(崇德) (A.D.163.3 - A.D.170.겨울) 自立 7년, 180년 12월 사망(合이 18년), 비패의 숙부
숭덕(崇德) (A.D.170.겨울 - A.D.180.12) 仙政 12년, 아들 윤명이 정치를 대신함 (合이 18년), 신라사초의 기록에 착오가 있지만 더하기 하면 또 맞다. 아마도 숭덕이 선정을 한 시기는 169년인 듯. 7+12=19인데 덧셈도 못하느냐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先王의 몰년이 新王의 원년이 되기 때문에 1년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윤명(允明) (A.D.180.12 - A.D.184.10) : 재위 3년, 숭덕의 아들, 재위기간이 2년 차이가 있다.
호묘(好妙) (A.D.184.10 - A.D.196.8) : 윤명의 처, 재위 13년
묘덕(妙德) (A.D.196.8 - A.D.228.1) : 윤명의 서제(庶弟) 쌍덕(雙德)과 호묘의 아들, 재위 33년, 운모(雲帽)의 부친, 소문이 8국으로 나뉨(진한 8국으로 추정)
묘초(妙楚) (A.D.228.1 - ? ) : 초운의 아들, 나라를 신라에 바치기를 청함.
A.D.245.2 : 신라에게 정벌 당함.
용왕(龍王)이 조문국을 세우고 묘초(妙楚)의 대(代)에 멸망하는 시기에 중국정사조선전에 어떤 기사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후한서 예(濊)의 기사 발췌】
其後四十餘世 至朝鮮侯準 自稱王 漢初大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而燕人衛滿擊破準 而自王朝鮮 傳國至孫右渠 元朔元年 武帝年也 濊君南閭等 畔右渠 率二十八萬口 詣遼東 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그 후 40여세(世)가 흘러, 조선후(朝鮮侯) 준(準)에 이르자 왕이라 자칭(自稱)하였다. 한초(漢初, 秦나라의 말년으로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秦韓과 같은 시기)에 큰 난이 있어 연(燕)․제(齊)․조(趙)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그 땅으로 간 자가 수만 명이었다.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준(準)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朝鮮)왕이 되었다. 나라를 전하여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렀다. 원삭(元朔) 원년(B.C.128), 漢 武帝때 예군(濊君) 남려(南閭)등이 우거를 배반하여,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러 내속(內屬, 한나라가 다른 나라의 속국으로 복종함)하였다. 漢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이라 하였다. 수년 후 그만 두었다.
후한서의 예(濊)의 기사를 소문국 예왕(穢王)과 비교해보면, 예왕(穢王)이 예군 남려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한무제가 원삭(元朔) 원년인 B.C.128년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려다 수년 후 포기하였는데 용왕이 나라를 재건하는 시기가 B.C.124년으로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B.C.128년 예군(濊君) 남려(南閭)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러 내속(內屬)하고자 하였을 때는 마땅히 안전과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漢 무제가 요동땅을 나누어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남려가 있었던 지역을 창해군으로 삼아 자신의 영토로 하고자 하여, 창해군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위만조선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창해군을 폐하게 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기사는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의 기사와 연결된다.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발췌】
傳子至孫右渠 〈師古曰 滿死傳子 子死傳孫 右渠者 其孫名也〉 所誘漢亡人滋〈師古曰 滋 益也〉多 又未嘗入見〈師古曰 不朝見天子也〉 眞番辰國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師古曰 辰謂辰韓之國也 雍讀曰壅〉
아들에게 전하여 다시 손자 우거(右渠)〈사고(師古)는 ‘위만이 죽어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아들이 죽어 손자에 전하였다. 우거는 위만의 손자 이름이다.’라고 하였다〉에게 이르렀다. 한나라에서 도망 온 자를 꾀여냄이 점점 더하여 많아졌다. 〈사고는 ‘滋(더하다, 보태다)는 益(더하다)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입견(入見, 입조하여 찾아뵙다)하지 않았다.〈사고는 ‘천자의 조회에 찾아와 뵙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하였으나, 또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였다.〈사고는 ‘辰은 辰韓의 나라이다. 옹(雍)은 옹(壅)으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한나라 조정(朝廷) 입장에서는 예군 남려 등은 자신들을 배반하고 도망간 백성들의 신분이므로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며, 논공행상과 처리대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망명인들은 한(漢)나라를 의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반면 위만 조선의 설득이 이어지자 결국 남려의 잔존 세력은 한(漢)나라에 내속되기를 포기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진한(辰韓) 기사 발췌】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范書作 自言秦之亡人避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錢大昭曰 後人名我爲俺 俺卽阿也 聲之轉耳〉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 秦韓者 〈局本 無爲字 誤〉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范書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狛接〉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곳의 늙은 노인들이 세세도록 전하는 말로 스스로 말하기를 옛날 망한 나라의 사람이 진(秦)의 싸움을 피하여 〈범서(范書, 후한서)는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의 망명인들이 고역(苦役)을 피하여 왔다고 한다.〉 한국(韓國)으로 즐겁게 왔는데,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누어 함께 살게 해 주었다고 하였다. 성책이 있고,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았다. 국(國, 나라)을 방(邦, 나라)이라 하고 궁(弓, 활)을 호(弧, 활)라 하고, 적(賊, 도둑)을 구(寇, 도둑)라 하고, 행주(行酒, 술을 마시다)를 행상(行觴, 술을 마시다)이라 부른다. 서로 함께 부르기를(相呼皆) 무리(徒)라 한다. 진(秦)나라 사람의 말과 같음이 있으니, 단지 연(燕)과 제(齊)의 사물의 명칭뿐이 아니다. 낙랑(樂浪)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고, 동쪽 사람은 아(我)를 아(阿, 또는 옥)라 부른다. 〈전대소(錢大昭)는 훗날 사람들이 아(我, 우리)는 엄(俺, 우리)이라 하였다. 엄(俺)이 곧 아(阿)다. 소리가 바뀌었을 뿐이다.〉 낙랑(樂浪)사람을 설명하기를 본래의 땅에 남겨진 사람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낙랑(樂浪)이라고 부른다. 〈국(局) 본(本, 판본)에는 위(爲) 자(字)가 없으나 잘못이다〉 진한(秦韓)은 처음에 6나라가 있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12나라가 되었다. 〈범서(范書, 후한서)에는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는데, 그 북쪽은 예맥(濊狛)과 접(接)하여 있다고 한다.〉
진한의 말이 마한과 다르다고 하였으나, 살펴보면 한자의 뜻이 현재는 우리의 쓰는 말과 같은 뜻으로 나타난다.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에 나타나는 조선(朝鮮, 위만조선)이 마한(馬韓)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백제시조 온조왕이 마한(馬韓)을 멸망시키고 건국의 기초를 세웠다.
진한(秦韓)은 처음에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열두 나라가 되었다는 기사는 혁거세왕의 박씨 신라를 말하는 것으로, 여섯 나라(六國)란 신라의 6부(六部)를 말하는 것이고, 열두 나라는 혁거세왕 당시에 변한이 항복하여 왔는데 변한의 땅에 다시 여섯 나라(六國)가 섰으나 곧 혁거세의 신라에게 예속되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을 말한다.
신라가 진말한초(秦末漢初)에 연(燕)․제(齊)․조(趙)나라 사람들에게 부여된 역(役, 군역)을 피하여 달아난 사람들이 드디어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조문(召文)국이 멸망한 이후에 후손 중에 옥모(玉帽)와 그녀의 부친 구도(仇道)의 계통으로 진골정통이 계승됨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다.
처음에 옥모(玉帽)는 벌휴의 아들 골정과 사이에 조분을 낳고, 내해이사금과 사이에 첨해를 낳았다. 조분이사금과 첨해이사금이 동모형제라는 것은 첨해이사금의 골정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추이사금은 구도갈문왕의 아들이고, 유례이사금은 조분이사금의 아들, 기림이사금은 조분이사금의 손자, 흘해이사금은 내해이사금의 손자이면서 조분이사금의 외손자이기도 하였다.
옥모(玉帽)와 그녀의 부친 구도(仇道)의 계통으로 진골정통이 계승됨은 석(昔)씨가 신라왕이 되었을 때만으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내물이사금은 미추이사금의 외손자이면서 아버지 말구는 미추이사금의 동모제(同母弟)다. 비(妃)는 미추이사금의 딸이다.
즉, 옥모(玉帽)와 그녀의 부친 구도(仇道)의 계통으로 진골정통의 계통으로 형성된 것은 내해이사금의 시기이며, 조분이사금은 옥모(玉帽)의 계열로 최초로 왕이 되었다. 옥모(玉帽)는 조문(召文)국의 유신(遺臣)들을 힘써 도왔다. 조문(召文)국의 후손들이 신라에서 번성하게 된 것은 이 때부터다.
소문국의 건국시기와 관련된 기사를 살폈으니 멸망당시에는 중국정사조선전에 어떤 기사가 있는지 알아보자.
【삼국지 위서동이전 예(濊) 기사 발췌】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 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 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詣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供給役使 遇之如民
정시 6년(A.D.245) 낙랑(樂浪)태수 유무(劉茂), 대방(帶方)태수 궁준(弓遵)이 동예(東濊)가 구려(句麗)에 속하여 다스려지자, 병사(師, 군대)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領東濊를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여기의 東濊는 낙랑군 동부도위를 말하는 것이고, 고구려의 현토군을 말한다.) 불내후(不耐侯)등이 읍(邑)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정시 8년(A.D.247)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니, 조서를 내려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 벼슬을 내렸다. (예왕은) 민간인들과 섞여 살면서 사시(四時, 계절마다)로 군(郡)에 이르러 조알(朝謁, 임금을 찾아 뵘)했다. 두 군은 군사의 일(征, 온갖 세금)이나, 세금을 거두는 일, 사역(使役, 남을 부려 일을 시킴)을 공급(供給)함에 일반 백성과 똑같이 대우(예우)했다.
조문국의 멸망시점인 245년 2월을 기준으로, 신라와 신라의 주변국가에서 매우 중요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은 바로 243년 5월 아달라이사금이 죽어 석씨인 벌휴이사금이 왕으로 섭니다. 사실 아달라이사금과 벌휴이사금은 同母형제로써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이것을 바라보는 중국인의 생각은 역성(易姓)혁명에 의한 왕조(王朝)의 교체로 보았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245년 2월 조문국의 멸망입니다. 같은 해에 낙랑(樂浪)태수 유무(劉茂), 대방(帶方)태수 궁준(弓遵)이 한(韓)을 멸망시켰다고 하는데, 이 때에 멸망한 한(韓)은 진한8국(辰韓八國)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사실로 북사열전에 와전된 기사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건은 246년 8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의 동천왕을 공격합니다. 동천왕은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우회한 관구검의 적을 맞이하게 됩니다. 관구검의 병사가 1만이고 동천왕의 병사가 2만으로 나오나, 1만이라는 군사는 별동대이고 뒤에 본대(本隊)가 도착하게 됩니다.
관구검은 본대를 이끌고 환도성을 점령하고 부장(副將)인 왕기에게 군대를 나누어 동천왕을 쫓게 합니다. 동천왕은 겨우 1천의 기병을 이끌고 죽령을 지나 남옥저로 향하게 됩니다.
동천왕은 유유의 희생으로 왕기와 그들의 부장들을 죽이고 목숨을 구합니다. 당시 동천왕은 전세를 역전한 것이 아님에도, 관구검이 환도성이 환도성에서 저절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당시 낙랑(樂浪)태수 유무(劉茂), 대방(帶方)태수 궁준(弓遵)은 관구검의 후방을 지키고 있어야 했는데, 수비병들을 데리고 관구검을 지원하기 위해 나갑니다. 이것을 기회로 하여 백제왕이 이 지역을 공략합니다.
이 기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246년에 있는 기사이고, 245년이라는 삼국지 위서동이전 예(濊)의 기사는 잘못이죠.
【삼국지 위서동이전 마한(馬韓)기사 발췌】
景初中 明帝密遣 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 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 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宋本에는 臣幘沾韓으로, 三國志 韓傳에는 臣濆沽國으로 되어 있다〉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경초(景初) 중(A.D.237~239)에 위 명제(明帝, 조예)가 몰래 대방(帶方)태수 유흔(劉昕)과 낙랑(樂浪)태수 선우사(鮮于嗣)를 은밀히 보내어, 바다를 건너 (대방과 낙랑의) 두 군(郡)의 경계를 정(定)하도록 하여,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의책(衣幘, 옷과 머리싸개)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들도 (樂浪이나 帶方)郡에 가서 조알(朝謁)하며 모두 거짓으로 의책(衣幘)을 입었다. 스스로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은 본래 한국(韓國)을 거느렸으므로, 진한8국(辰韓八國)을 분할하여 낙랑에게 주었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같거나 틀림이 있어, 신지(臣智)가 한인(韓人)들을 격분시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宋本에는 신책첨한(臣幘沾韓)으로, 三國志 韓傳에는 신분고국(臣濆沽國)으로 되어 있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하였으나 2군(二郡)은 마침내 한(韓)을 멸(滅)하였다.
경초(景初) 중(A.D.237~239)에 위 명제(明帝, 조예)가 몰래 대방(帶方)태수 유흔(劉昕)과 낙랑(樂浪)태수 선우사(鮮于嗣)를 은밀히 보냈다는 것은 공손씨의 연(燕)나라가 멸망한 238년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위(魏)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고구려 이외의 연(燕)에 내속되어 있던 어떤 세력과 통(通)하여 연나라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서 해석해야 할 곳이 있다. 대방태수 궁준이 죽은 해를 경초(237~239)년으로 착각하기 좋게 되어 있는데, 삼국지 위서동이전 예(濊)의 기사에 분명히 245년에도 전쟁 참여기사가 있으므로 궁준은 245년에 죽은 것이 맞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이고 246년이 맞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 기사】
十三年 秋 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 與樂浪太守劉茂 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13년(A.D.246)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幽州)자사 관구검(毌丘儉)이 낙랑(樂浪)태수 유무(劉茂), 삭방(朔方)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을 습격하여 변두리 주민들을 잡아왔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대방태수 궁준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삭방(朔方)태수 왕준(王遵)으로 되어 있으니, 서로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닌 것이냐? 이 때 대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백제이고, 위나라가 대방태수를 자칭(自稱)하였으니 백제의 사서는 구별하여 위나라를 삭방(朔方)이라 하는 것입니다.
당시 위(魏)나라에게는 대방의 지역이 없으므로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서는 대방군 기리영이라 하였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낙랑의 변두리를 습격했다 하는 것입니다.
북사열전에는 관구검과 신라와의 관계가 나타나 있습니다. 비록 그릇된 기사라 할지라도 조문국의 이해에 꼭 필요한 기사입니다.
【북사열전 신라기사】
或稱 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諸本 雜訛作辯 據隋書卷八一新羅傳改〉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일설에 의하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중국·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불내(不耐)·한(韓)·예(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왕(王)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당초에는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자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았다
【양서 동이열전 신라기사】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 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 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 世相係 辰韓不得自立爲王 明其流移之人故也 恒爲馬韓所制
신라(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었다.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서로 만 리(萬里)를 간다. 전(傳)하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망한 나라사람들이 역(役)을 피하여 마한(馬韓)으로 가니, 마한에서는 동쪽 땅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진(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國)를 나라(邦)라 하고, 활(弓)을 활(孤), 도둑(賊)을 도둑(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술잔을 돌리는 것(行觴)이라 한다. 서로 함께 부르기를 무리(徒)라고 하니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또 진한(辰韓)의 왕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 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 맺음말 】
제가 조문국의 역사를 강의한다면서, 엉뚱하게 新羅의 역사를 설명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정사조선전에 나와 있는 역사가 대부분은 조문국의 역사이기 때문에 제가 다소 엉뚱하게도 신라의 역사를 부득이하게 설명 드렸음을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의성군에서 출토된 유물의 지표조사 결과는 5~6세기의 것이고, 조문국의 역사는 기원전 124년에서 서기 245년까지의 이르는 21대 369년 동안 존속했던 나라이므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현재까지의 발굴결과는 경주의 유물과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앞으로 3세기 이전의 유물이 발굴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의성군이 조문국 경덕왕의 제사를 지내고, 조문국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의 의성군은 조문국의 후손들이 봉지(封地)로써 물려받은 땅이고, 대(代)를 이어 제사지내오던 땅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조문국과 관련하여 의성군에 남아있는 향토사료 혹은 지명과 일치하는 자료가 많기 때문입니다. 구산(龜山), 경덕왕(景德王), 빙산(氷山), 화전(花田), 조문금(召文琴)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경청하여 주시어 감사합니다.
첫댓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제일 먼저 한 짓이 자신의 조상찾기라고 합니다. 주제발표자였던 박창님은 원고에서 소시무리를 우두산으로 비정하고 춘천의 우두산과 조문국의 유적지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우두산은 백제본기 온조왕기에 등장하고 낙랑의 땅으로 나오는 곳이죠. 일본의 고대도읍인 나라시는 낙랑의 이름에서 왔다는 것을 추정하면 일본 역사학계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한단고기에 고구려 건국공신 협부가 다파라를 세웠고, 탈해는 다파라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낙랑과 조문국은 어떤 관계일까? 의문이 풀리지 않는군요.
잘 봤습니다. 정리를 간략하면서도 알기 쉽게 잘 하셨군요. 복잡한거보다 저렇게 간단간단하게 소개하는게 아주 좋은 글입니다. 그리고, 사서 해석을 제가 제시한 해석을 참조로 해서 님의 해석을 개선해야 옳습니다. 고집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일단 님의 해석으로 책이 출간되면, 고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책이 출판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요..
국편의 박남수 편수관의 발언이 궁금하군요. 어떤 얘기가 오고 갔는지 궁금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박남수 편수관은 남당유고의 위작설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바람에 강연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포럼은 조문국박물관 건립 추진을 위하여 조문국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는 취지인데 박남수 선생은 취지에 반하였습니다. 자신의 견해도 밝히면서 두리뭉실하게 넘어갈 수 도 있었는데 확고한 부분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군요. 그럼 박찬 변호사랑, 소설가, 그리고 님, 세 분이 참석했군요.
그가 쓴 pdf파일을 대충 봤지만..그가 밣혀 낸 것은 거의 없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의 차이점에 대해서만 글에서 잔뜩 언급해 놓았죠.
'화랑후기' 가지고는 박창화 소설 운운하는 것은 성립이 못 됩니다. 새로운 사실만 더 첨가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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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발표할때 사람들에게 나눠줄 유인물이고, 발표자료는 powerpoint를 이용하여 다시 만드셔야 할 듯....
처음에 파워포인트로 작성용으로 만들었다가 유인물로 다시 바꾸어 만들었습니다. 학회발표때에는 다시 파워포인트로 만들어야 겠지요. 40분을 강연하였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2시간 정도는 소요될 듯 합니다.
원래 아침 10시에 개최되어야 옳아요. 오후 2시~6시까지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사실 초빙되어 온 청중들이 대부분은 동원되어 온 군민들이었다는 점 때문에 40분도 매우 긴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자치단체 공무원이기 때문에 뻔히 아는 내용인데, 주최측에서 말해 주지 않아 몰랐다가 청중들이 입장하는 것을 보면서 많이 당황했습니다. 물론 일부 대학교수님, 고등학교 국사선생님, 문화원 관계자, 의성신문사 등이 있었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이탈해서 빠져나간 사람들이 다시 착석하여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관심은 많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정수(작가)님과 박남수 편수관이 같이 내려 오기로 예정되었다는데, 그럼 박정수 작가는 혼자 내려 온건가요?
다음의 일을 예측하기란 어렵지만 박남수 박사를 초빙하고, 이종욱 교수님도 초빙하자고 건의했는데 어떻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남당유고를 알리는 자리였으므로 불필요한 다툼을 예방하자는 주최측의 생각이 있었던 듯 합니다. 다음 포럼의 주제도 어떻게 할 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포럼 당일이 되어서야 상대방의 원고를 보았다는 점, 어떤 문제를 질의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포럼이 진행되었다는 점, 자료를 검색해 볼 수 없는 여건이었다는 점 때문에 머리속이 든 것만으로 답변하기 매우 곤란했다는 점은 다음 포럼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인 것 같습니다.
분위기를 요약하면 '역사란 어린소녀와 같다는 중국의 소설가의 말처럼 분장하기에 따라 변함이 있어 실체를 알기 어렵고', 삼국사기에 한 줄 밖에 없는 조문국의 기록이 21대 369년의 역사로 나타나므로 조문국 역사연구소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생계에 수단이 되는 직장을 그만 두고 가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김갑주(전 동국대 총장, 박남수 편수관의 스승)교수님께서는 저에게 날카로운 논리가 있다는 말씀외에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하셨습니다. 역사책은 판매부수 500권을 넘기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김갑주 교수는 박남수 편수관의 스승이란 말이군요. 근데 그 스승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제자는 반대되는 입장은 가진 건 뭔지?
직장 그만두면서..대학원 나와서 뭐 하게요? 누가 밥 먹여 줍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그래요. 이 경제불황에..에휴..
서강대학교 총장이 되신 이종욱교수님은 이기백교수님의 제자라고 하더군요. 제자와 스승의 생각이 서로 같을 것이라는 잘못인 듯 합니다. 김갑주 교수님은 신라사학계의 원로인데 자신의 전공이 근대사학이라 말씀하셔서 또 한번 놀랐습니다. 그만큼 고대사학계를 이끌어 줄 인물의 부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님도 근대사학이 전공이고, 아마도 우리 사학계의 대부분은 근대사학계가 장악하고 있다해도 무방한 듯 합니다. 고구려사학과 신라사학으로 나누고 다투는 것 자체가 우스은 일 인듯 합니다.
간단하게 누구 누구랑 만나셨는지, 어떤 얘기가 오고 갔는지.. 따로 글을 올려 주셨으면 좋겟군요..
본래가 안면이 있던 분들이 아니고 포럼 시작 2시간전에 만나 식사를 하고, 포럼후에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지긴 하였지만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였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토론자 이외에도 여러분이 질문을 하였는데 2-3가지의 질문이 중복되어 전부는 대답하지 못한 듯 합니다. 이번 포럼은 제대로 준비되지 못해 어려웠다는 점은 주최측에 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된 각본이 아닌 즉석에서 이루어진 질문이 많았고, 자료를 볼 수 있는 노트북이 없었습니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우리 선조가 아니라 신라가 선조라고 이종욱 교수가 주장했습니다. 단군은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죠. 이기백은 식민사학의 대부이고 그 제자가 이종욱이니... 그 스승에 그 제자 맞습니다.
이종욱 교수님의 태생이 강단이니 강단의 틀을 깨기는 어려운 일이죠. 아마 다음 포럼에 참석하게 되신다면 쇠망치로 맞는 충격을 받게 되시겠죠. 제가 알기로는 이종욱 교수님도 화랑세기 이외의 남당 유고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변화가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의성신문사에 계시는 분의 말처럼 자꾸 떠들어대야 합니다. 이종욱 교수님도 예외는 아니죠.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920428091&cp=nv
여길 가보시면 이종욱이가 얼마나 황당한지 알 수 있죠.
아참, 박정수 작가님이 오늘 저의 강의내용을 한 마디의 말로 간단하게 정의하더군요. '조문국은 신라의 뿌리다'라고 하였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중국정사조선전이 말하는 신라의 출자가 바로 조문국입니다. 저는 이와같은 결론을 설명하기에 40분을 소비하고도 시간이 부족하였습니다.
정성일님의 조문국 포럼 발표 원고 잘 봤습니다. 알기 쉽고, 간략하게 잘 정리하신 것 같네요. 보는 사람의 입장으로선 매우 좋은 해설인 것 같습니다. 중대한 학계사안을 1시간 이상도 아니고 4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말씀하시려니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내물/실성이사금 왕비의 나이를 고증한 기년이 눈에 띄고 합리적인 해석같아서 마음에 듭니다. 예전 화랑세기에서 눈여겨 보았던 옥모를 기점으로 하는 진골계통의 성립에 관해서도 알기쉽게 정리되었고요.
조문국 왕력의 복원은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니, 그 스타트를 정성일님과 라디오님께서 풀어주신 셈이네요. 축하드립니다. 포럼에 참석하신 분들끼리 포럼 시작 전에 충분히 친분도 나누시고, 서로의 의견도 교환하면서 마찰을 줄이는 기회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박남수 편수관께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역사를 바라보려는 자세를 가지셨으면 좋으실텐데요. 이번 포럼에서도 여전하셨다니 안타깝습니다. 다음 포럼이 열리게 되면 꼭 참석해서 정성일님의 강연을 듣고싶습니다. 요즈음 남당유고 덕분에 아주 좋은 공부를 하고 있거든요.
일단 이런 역사들이 알려지기 위해선 대중화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수 작가님의 소설이 더욱 기다려집니다. 이번 정성일님의 신라사초 발간을 기대하고 있는 독자로서, 다른 분의 해석과 기존사서와의 비교작업을 통해 건실하고 좋은 책이 만들어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남당유고가 이제서야 빛을 발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네요. 화랑세기 이슈화때 진작에 연구되었어야 마땅한 사서였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