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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交通路 發達
- 전익요 -
Ⅰ. 서론
우리의 도시정책은 경제성장과 기능을 위주로 추진되어 왔으며, 문화정책과는 거의 연계되지 못하여 도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과 문화는 소멸되고 있다. 수익성 위주의 과도한 도시개발은 지역성 해체와 생활환경의 악화 등 여러 가지 도시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기술 산업으로는 더 이상 세계적인 수준의 도시를 만들 수 없음을 인식하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도시의 개성을 살리고 문화적인 삶의 환경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문화도시의 조성과 도시의 경관재생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1)
서울은 한국의 수도인 동시에 동북아 비즈니스의 중심지이며 한국 산업의 집적지로 아시아 최대 시장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해 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을 기점으로 서울은 대한민국의 경제 중심으로서 우리 경제를 눈부시게 발전시키며 여러 분야에서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였다. 오늘날 서울은 금융과 물류의 높은 효율성과 첨단 디지털 산업 및 지식 산업의 강한 경쟁력을 갖고 동북아 비즈니스의 허브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서울의 면적은 전 국토의 0.6%에 불과하지만 한국 GDP의 21%가 서울에서 창출되며, 금융의 50%이상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첨단 기술을 보유한 벤처 기업들의 43%이상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서울은 많은 경제적인 성과 속에서 세계의 도시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경제발전이라는 개발전략 속에서 도시의 개발과 집중, 과밀화 등 많은 도시의 양적 성장에 따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과 도시의 성장은 더 이상 기술, 경제의 성장과 기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서울의 경우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수도로서 60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많은 역사, 문화적 전통과 각종 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역사 문화적 잠재성이 큰 도시이다. 앞으로의 도시의 발전에 있어서는 그 도시의 역사, 문화적인 관점에서의 도시 조성이 필요하다.
Ⅱ. 조선시대 도로망 발달의 배경
1. 우리나라 도로의 발달
우리나라의 도로발달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시대 이전은 도로의 형상과 현황에 대한 문헌 기록상 확인이 곤란하여 파악하기 어렵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정치, 군사, 경제 등의 정책 수행에 있어서 중요 지점을 연결하는 역로가 형성되었고, 조선시대는 집권체제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도로계획 수립되어 역참(역마를 갈아타는 곳)을 주축으로 집약되는 도로망이 구축되었으며, 조선 초기는 상업의 기능보다는 군사, 행정상의 통신 기능에 주목적이 있었고,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 상업과 유통의 발달에 따라 군사, 행정의 목적보다는 상업, 유통의 목적으로 변화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식민지 통치와 경제적 수탈에 편리하도록 도로를 개설하였으며, 대륙 진출을 목적으로 도로사업 추진하여 약 2,700km(개수 및 신설)의 도로망을 구축하였다.
현대에 들어서 정부의 국토개발계획에 의거 1960년대 고속도로 신설과 기존도로(국도, 지방도, 시도, 군도)의 신설 및 개수하였다. 1960년대 고도경제 성장의 기반으로 도로망 구축사업을 목표로 주요 간선 국도의 포장을 시작하였다. 1970년대는 지역균형 발전을 위하여 국도 포장을 본격화 하였으며, 고속도로 건설을 본격화 하였다. 1980년대는 국민 생활환경 개선을 위하여 국도 및 주요 지방도로 포장 완료하였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는 국가 간선도로망의 확충과 교통 지정체 애로 등의 해소를 위하여 고속도로 연장 2배 확충과 국도 확장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표 1> 우리나라 연도별 도로현황
2. 조선시대 읍성의 입지와 도로
조선시대에 있어 읍이란 행정상의 위계와 상관없는 행정단위의 명칭이었다. 이러한 읍은 군사적, 정치적 중요도와 읍 자체의 경제적 능력 등에 따라 읍의 중심을 성곽 등으로 둘러쌓기도 하였는데 이를 邑城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읍성의 분포는 해안선과 북부 국경지방에 집중되었으며, 도별 읍성의 분포와 보유비율을 살펴보면 읍성은 근본적으로 군사적 목적에 의해 건설되었음을 알수 있다. 조선시대 전체 읍성 130여 개소 중 64% 이상이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에 집중되었으며, 이들 지방의 읍성 보유비율은 타지방에 비해 상당히 높고, 경상도, 전라도의 읍성도시가 조선중기 이후에 급증하였음이 이러한 사실을 설명한다. 읍성의 보유비율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데 이는 그 시대 상황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행정위계(都, 府, 大都護府, 牧, 都護府, 郡, 縣)가 높을수록 읍성의 보유비율이 높으며, 내륙에 존재하는 읍성은 서울로 향하는 주 교통로변에 위치한 것, 행정위계가 높은 고을, 그리고 평야지의 곡물약탈에 대비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읍성으로 가장 작은 읍성은 강원도 흡곡읍성으로 293尺이고, 가장 큰 읍성은 평안도 영변읍성으로 26,815尺이다. 조선시대의 읍성 중 2,000尺 이하의 소규모 읍성은 전체의 약 19.1%를 차지하며, 2,000尺~5,000尺의 중규모 읍성은 전체의 약 57.5%로서 조선시대에 가장 흔히 축조된 읍성의 규모로 볼 수 있으며, 5,000尺 이상의 대규모 읍성은 전체의 약 23.4%를 차지한다. 지역별로 보면 내륙의 국경선부근 읍성은 대규모 읍성이 69.2%로 중소규모 읍성보다 우세하며, 해안선부근과 내륙의 읍성은 전체 읍성의 규모별 비율과 유사함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내륙 국경선부근 입지의 읍성은 지형상의 이유로 많은 수의 읍성을 축조할 수 없었는데 비해 해안선과 내륙 입지의 읍성은 지형상의 제약이 적어 많은 수의 읍성을 축조할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내륙 국경선부근 입지의 읍성은 읍성수의 부족을 대규모 읍성을 축조하여 만회하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해안선부근 입지의 읍성은 몇 개의 대규모 읍성보다는 여러 개의 소규모 읍성의 축조가 방어에 유리하고, 지형상의 제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소규모 읍성의 축조가 더 많았다. 그리고 북방민족의 침입은 영토확장을 꾀하려는 의도가 다분한데 반해 남쪽의 왜구 침입은 영토의 확장보다는 곡물의 약탈을 꾀하였기에 다수의 읍성이 필요하였다. 아울러 내륙 국경선 부근 입지의 읍성은 조선초 북방민족을 물리치고 축조한 계획도시로서 자생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주민을 이주, 정착시킨 점은 다른 지역의 읍성과 구별되는 요소이다.
읍성은 거의 동서남북에 4개의 문을 가지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이 4개의 문을 연결하는 십자형의 도로망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4개의 문을 가졌다 해서 반드시 십자형의 도로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고 이용이 빈번하지 않거나 산 등으로 인하여 문을 내지 못하는 경우는 2개나 3개의 문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형성되기도 하고, 한 곳의 문에서만 읍성의 중심으로 연결되는 1개의 도로망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는 읍성 입지조건과 인접 읍성과 연결되는 교통로와도 관련이 있었다.
3. 조선시대 장시의 시장권 형성과 상설시장화
16세기 들어 전국적으로 개설되고 있는 장시는 兩亂을 거치면서 정부가 종래 고수해오던 장시금압 정책을 어느 정도 완화하고 숙종대에 이르러 場稅를 징수하여 관아의 재정을 충당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장시는 급격히 발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시의 상호간에 분산, 고립적으로 존재하던 장시가 차츰 경제적인 연계성을 가지게 되었다.
1770년대 下三道의 읍당 평균 장시수를 보면 전라도가 53개 읍에 216개로 읍당 평균 4强이며, 경상도는 71개 읍에 276개로 읍당 4弱, 충청도는 53개 읍에 157개로 읍당 3개 정도로 읍당 평균 장시수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순이 된다. 그런데 장시 감소 수치를 보면 장시밀도가 높은 도에서 장시수의 감소현상이 보다 빠른 시기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러한 장시수의 변화는 각 지방의 산업발달의 정도, 인구수의 증감, 지리적, 사회적인 조건 등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설립되고 소멸하였다.
한편 장시수의 변동을 단순히 장시의 수적인 증감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이 시기 여러 분야에서 나타난 변화와 결부시켜 보면 장시의 발달이 수적인 증가보다는 장시내부의 질적인 변화에 따른 置廢가 다양하게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시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한 『동국문헌비고』와 『임원경제지』의 장시수를 비교하여 보면 장시변동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두 문헌비교를 통한 1770~1830년 사이에 전라도 지방에서는 58개의 장시가 신설되고 86개의 장시가 폐지되어 모두 144개의 장시가 변화를 겪고 있는데 이는 다른 도에 비교하여 가장 많은 것이다.
전국적으로는 333개소가 신설되고, 361개소가 폐지되어 총 694개의 장시기 변동을 겪고 있다. 그리고 이시기에 황해도와 함경도에서처럼 폐지되는 장시수보다 신설되는 장시가 많은 곳에서는 전체적인 수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충청도와 평안도에서처럼 반대의 현상도 없지는 않으나 폐지되는 장시수가 신설되는 장시수보다 많은 경기, 전라, 경상, 강원도에서는 전체적인 장시수에서 감소하고 있다.
18세기말까지도 장시의 신설, 이설, 폐지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나, 19세기에 들어서 장시는 양적인 증가보다는 장시내부의 질적인 발달을 보이며 인접한 장시 상호간에 개시일을 조정하고 시장권을 형성하며 일부 장시에서는 상설화의 경향이 나타나는 등 앞시기와 구별되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Ⅲ. 조선후기 육상교통망의 발달
1. 조선 후기 간선도로의 확대
18세기 이후 상품유통의 발달에 따라 육상교통과 해상교통도 발달하였다. 『續大典』에는 八道路程을 청나라의 예처럼 周尺2)을 사용하여 측량하도록 규정하여 각 지역간 거리를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3) 西路(서울-의주간)는 騎撥로 45站(= 1,350리 = 606.8㎞4))을 두었으며, 南北路(서울-동래간)는 步撥로 35站(= 1,050리 = 472㎞), 南北路(서울-경성간)는 步撥로 59站(= 1,770리 = 795.6㎞)을 두도록 규정하였다.5) 그리고 路程記를 외국인에게 넘겼을 때는 사형에 처할 정도로 엄격히 통제되었음에도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道里考』나 『程里攷』등 도로교통에 관한 私撰書籍이 널리 편찬되었다. 또한 1797년에는 正祖 자신이 『道里摠攷序』를 저술하였으며, 민간뿐만 아니라 관료, 왕에 이르기까지 도로교통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림 1. 주척
『萬機要覽』에 규정된 撥站을 보면 西路는 騎撥로서 경기 京營站에서 황해도 舊官門站(금천)을 거쳐 평안도 所串站(의주)에 이르기까지 38站이었고, 北路는 경기 豆險川站(양주)에서 강원도 豊田站(철원)을 거쳐 함경도 阿吾地站(경흥)에 이르기까지 64참이었다. 또한 南路는 경기 新川站(광주)에서 충청도 林烏站(충주)을 거쳐 경상도 草梁站(동래)에 이르기까지 34참이었다.6)
1770년 신경준의 ≪道路攷≫ 서문에서 “6대로의 교통로를 기록할 때 10리를 기준 정밀하게 기록하여 행상들이 물건을 운반할 때 참조하기에 유익하도록 편찬하였다”고 밝혔듯이 조선 후기의 교통로는 군사적이나 행정의 편의보다는 상품유통의 편리를 위하여 편찬된 것이었다.
『道路攷』에는 우리나라 6대 간선도로를 서울-義州路(제1로 : 서대문-무악재-파주-개성-봉산-평양-안주-의주), 서울-慶興西水羅路(제2로 : 동대문-누원-회양-철령-원산-함흥-북청-경성-경흥), 서울-平海路(제3로 : 동대문-망우리-양근-원주-대관령-강릉-삼척-울진-평해), 서울-東來路(제4로 : 남대문-한강진-용인-충주-조령-유곡-낙동진-대구-부산), 서울-濟州路(제5로)7), 서울-江華路(제6로 : 남대문-양화도-김포-통진-강화) 등 6대로로 기록하였다. 이밖에도 팔도 각읍의 경계에서 인근 감영과 서울까지의 거리를 기록하였고, 四沿路라 하여 白頭山路, 鴨綠江沿路, 豆滿江 沿路를 기록하였다. 또한 바닷가를 육지에서 연결하는 도로인 海沿路를 각 도별로 기록하였으며, 驛路, 擺撥路, 烽路, 그리고 事大交隣8) 使行路와 더불어 해상교통의 중요성을 반영하여 潮汐, 風雨 기록하였고 각 읍별 장시오 그 개시일을 수록하였다.
한편 6대로 외에도 의주에서 강계, 강변에 이르는, 즉 압록강을 따라가는 沿路를 밝혀 두었으며, 경흥 서수라로에서 함흥에서 별해출․길주로 가는 길과 갑산에서 단천으로 직행하는 길, 명천에서 팔육산보를 돌아 부령으로 나가는 길, 명천의 사개동에서 개파에 가는 길을 적고 있다. 동래로에서는 서울에서 한강, 신원점, 판교, 용인, 양지, 기안점, 광안, 석원, 충주에 이르는 간선도로 외에도 서울에서 살꽂이다리․송파를 경유, 광주, 경안, 상령점, 이천, 음죽, 장호원, 가흥창, 박달고개, 충주에 도달하는 길을 기록하고 있다.9) 또한 제주로에서는 해남-노량진-벌사근처에 도달하는 길 特記하고 있다. 『道路攷』를 저본으로 하여 신경준이 편찬에 참여했던 『東國文獻備考』輿地考에 나타난 주요 간선도로를 보면 <그림 2>와 같다.
18세기 후반 6대로였던 간선도로가 19세기에는 늘어났다. 19세기 전반에 편찬된 『林園經濟志』에는 태박산(봉화)에 이르는 길이 간선도로로 승격되어 7대로가 되었다. 태백산로의 주요 경유지인 송파, 광주, 경안, 곤지암, 이천 등지에 모두 장시가 개설되었는데, 이 지역은 18세기 후반에 서울의 상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한 상업중심지였다. 이는 18세기말 19세기초에 간선도로의 증가가 행정중심지나 군사요충지를 연결하는 차원이 아니라 상품유통권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道路攷』에서는 서울에서 제주까지의 길이 대로로 표시되어 있는데, 『林園經濟志』에서는 서울-삼례에서 전주, 마치, 남원, 운봉, 팔랑치, 함양, 사근역, 도천, 진주, 사천, 고성, 통영으로 이어지는 길을 대로로 파악하고, 삼례에서 금구, 태인, 정읍, 청암역, 장성, 나주, 영암, 해남, 제주로 이어지는 길을 별로로 나타내고 있다.
『山里攷』에는 7大路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林園經濟志』의 7大路와 동일하다. 그리고 『東輿記略』에는 畿忠全三道間路라 하여 경기, 충청, 전라 3도로 이어지는 대로로서 과천-천안삼거리-충청수영(보령)에 이르른 길, 과천-천안삼거리-삼례-전주-해남에 이르는 길, 과천-천안삼거리-삼례-전주-남원-진주로 이어지는 길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한양으로 천도하고서 우선 전국 각지와 연결되는 도로망을 재편성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 개경으로 집결되던 도로망이 한양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그 출발점이 종로구 일대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세종로 네거리의 里程元標에는 전국 각지로의 거리가 표기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기준지점이었다. 이곳에서 동대문, 서대문, 남대문의 각 방향으로 성문을 나서 전국 각지로 왕래하였다.
『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시대 주요 도로망으로 9개의 노선을 기록하고 있다. 제1로는 서대문-무악재-파주-개성-봉산-평양-안주-의주이고, 제2로는 동대문-누원-회양-철령-원산-함흥-북청-경성-경흥, 제3로는 동대문-망우리-양근-원주-대관령-강릉-삼척-울진-평해, 제4로는 남대문-한강진-용인-충주-조령-유곡-낙동진-대구-부산, 제5로는 남대문-유곡-상주-성주-현풍-함안-진해고성-통영-거제, 제6로는 남대문-동작진-과천-진위-천안-공주-전주-남원-순천, 제7로는 남대문-동작진-은진-삼례-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 제8로는 남대문-동작진-진위-소사-신창-신례원-보령-남포-비인, 제9로는 남대문-양화도-김포-통진-강화로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후반 편찬으로 추정되는 『程里考』에서는 간선도로를 10大路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위에서 파악한 『林園經濟志』의 7大路 외에 서울-수원로(제8로 : 노량진-광주-금천-과천-안양-수원), 서울-충청수영(보령)로(제9로 : 남대문-동작진-진위-소사-신창-신례원-보령-남포-비인), 서울-해남(제주)로(제10로 : 남대문-동작진-은진-삼례-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가 추가되어 10대로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간선도로의 확대는 종전 別路나 間路 등이 대로로 승격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19세기 후반 유통로의 발달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림 2> 18세기 후반 전국 간선도로의 경로(≪東國文獻備考≫ 輿地考)
2. 육상교통로의 발달
이처럼 조선 후기 교통로에 대한 관심이 커짐에 따라 기존 도로가 확충되거나 정비되었고, 새로운 교통로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도로의 규격을 살펴보면 『經國大典』 工典 橋路의 도로의 너비 규정(≪續大典≫ 동일)에 따르면 대로는 56척,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영조척), 도로 양측의 溝渠(도랑)는 각 2척이었다. 『磻溪隨錄』 권 25, 續篇 道路橋梁의 도로의 너비 규정에 의하면 都城內路 중 대로는 36보(2보), 중로는 18보, 소로는 9보(1보)이었고, 地方邑城內路 중 대로는 18보, 중로는 9보, 소로는 6보이었으며, 一般道路의 대로는 12보, 중로는 9보, 소로는 6보이었다. 정조대 간행된 『舟橋指南』에는 御路의 폭을 4把(사방 5尺)로 규정하고 있다.
숙종 연간 海防강화책의 일환으로 강화도의 축성과 墩臺 建築이 이루어 졌고, 1704년(숙종 30) 서울과 강화를 잇는 도로 정비(18세기 후반 6大路 포함)되었다. 강화로 가는 도중의 鐵串浦路는 강화로 이어지는 직로일 뿐 아니라 章陵으로 가는 陵行路도 이를 경유하므로 조정에서 자금을 내어 石橋를 건축하였으며, 孔岩津船도 楊花渡로 옮겨 公私가 왕래하는데 편하도록 하였다.
또한 정조 연간에는 수원성 축성으로 수원과 서울을 연결하는 도로가 새로 개설되거나 확장되었다. 노량진에서 수원까지의 도로는 果川․衿川(시흥)․廣州․水原의 4읍에 걸쳐 있었는데, 이 길은 新作路로 불리웠다.10) 과천, 금천, 수원에서는 새로 길을 닦았고, 광주에서는 구도로를 정비하여 노량진에서 수원까지의 길을 확장하였던 것이다.
도로개설과 확장에 4읍민을 부역으로 동원하여 이루어졌지만 그 대가로 하루 1전씩 비용을 지급하였고, 우마에 대한 대금도 하루 1전을 지급하였다. 또한 도로개설 때 사용된 말뚝에 대한 보상은 없었지만 도로 편입된 田畓에 대해서는 보상을 했다.
수원로 개설과 확장은 배다리(舟橋)를 설치한 노량진에서 수원까지 御路였기 때문이지만, 그 배후에는 상품 유통이 발달함에 따른 교통의 편리성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므로 순조 초년(정조 사후)에 노량진에서 肆覲坪(안양)까지 도로가 정조 때 보다 몇 把 이상 폭이 확장되었고, 시흥(구 금천)의 도로도 과천과 광주의 도로에 비해 확장되고 크게 개수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이후 10大路에 포함되는 간선도로로 승격하였던 것이다.
한편 서울과 외방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새로 개척되기도 하였다. 18세기 전반까지 서울에서 동북지역으로 가는 통로는 철령(강원 회양-함경 안변)을 통과하는 길이 주된 길(서울-慶興西水羅路)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평강을 지나는 三防間路 개척되었고, 이길은 덕원․안변에서 서울로 오는 捷路, 北魚商人들이 자주 통행하여 길이 평탄하게 되었다.
삼방간로는 철령을 지나는 것보다 빠르고 편했을 뿐만 아니라 송도의 옛길로 곧장 통하는 길로 평양 등 서북지역과 연결하는데 유리하였다. 19세기 초 평강의 雪雲嶺路 개설되었는데, 이 길은 은계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북관으로 통하는 藥水浦間路 등 다양한 間路 개설되었다.
한편 서울에서 영남지역으로 통하는 嶺南路로 새롭게 개설되고 있었다. 영남로는 좌로와 우로로 구분된다. 左路는 竹嶺이 주요 관문으로 17세기 후반 많은 장시 설치되었고, 유민들이 몰려 마을 형성하였다. 右路는 鳥嶺․秋風嶺․八良峙가 주요 관문이었다.
Ⅳ.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간선도로망의 발달은 고려시대부터 시작하여 조선초기까지는 국가의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인 국경지대와 읍성을 연결하는 도로로부터 시작하였다. 국방의 문제로 인하여 주요한 지점으로의 도로망 구축에만 집중하였고, 여타의 길에 대한 개설에 대하여는 통제하여 국방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조선 초까지의 도로는 각 읍성간을 연결하는 역참을 주축으로 집약되었음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장시의 개설과 시장권의 형성에 따른 주요 장시로의 유통로의 필요성 대두에 따라 군사적 목적으로 개설이 통제되었던 요충지를 포함하여 많은 간선도로망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각 지역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던 읍성을 연결하는 도로가 이 시기에 들어서는 주요한 장시를 연결하는 유통로로 변화하였던 것이다.
서울의 역사문화도시 조성과 조선시대 도로망 연구와의 연계는 다소 관련성이나 중요성이 부각되지 못하겠지만,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한 도로망의 연구도 역사문화도시 조성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예로 현재 세종로 사거리에 복원되어 있는 이정원표가 그것일 것이고, 서울시에서 1997년 12월 변경 설치한 도로원표 상징조형물과 전국 53개 도시로의 거리를 표시한 것이 그것일 것이다. 도성내의 주요 도로와는 달리 조선 후기 주요 간선도로의 역사문화적인 연결고리는 쉽지 않겠지만, 현재의 도로망의 근간이 조선후기 대로와 많은 부분이 공통적으로 중복되고 있어 향후 주요 간선도로에 대한 역사문화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이 또한 서울의 역사문화도시 조성에 이바지 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고동환, 조선후기 서울 상업발달사 연구, (주)지식산업사, 1998
- 김대길, 조선후기 장시연구, 국학자료원, 1997
- 최완기, 조선시대 서울의 경제생활, 서울학교양총서 1, 서울학연구소, 1994
1) 추용욱외 2, 문화도시 조성을 위한 도시경관 관리방안 연구 -장소의미적 문화공간 조성과 경관재생, 한국도시설계학회
2) 주척이란 이름은 중국의 모든 문물제도가 주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유가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가지 종류의 자들의 기준이 되는 자로서, 주로 가례·상례 등에 사용되었으나 세종 이후로는 도로이수(道路里數)·사장보수(射場步數)·의상규표용(儀象圭表用)으로도 사용케 했는데, 후일 양전용 기준척과 측우기 수위(水位)와 수표교 수위계용(水位計用)으로도 사용되었다. 세종때는 박연의 황종척을 기준으로 다시 만들었다.(세종대 1척 20.81cm, 영조대 1척 20.83cm)
3) ≪續大典≫ 工典 橋路. 이 규정이 제대로 실행되었는지는 의문스럽다.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 道里는 미개발 상태여서 서로 이외에는 대체로 尺量되지 않아 이른바 10리란 것이 혹은 15리가 되고 이른바 1舍(30리 거리 : 군대가 하루에 걷는 거리, 우리나라 잇수로 오륙십리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譯者註)란 것이 혹은 2舍 가까이나 되어 초행자는 낭패하고 허둥대는 일이 많다.”고 하였다(다산연구회, ≪譯註 牧民心書≫ 10부 工典 6條 道路).
4) 1보=주척 6척(124.86㎝), 1리=360步(449.50m), 1식(息, 站)=30里(13,484m)
5) ≪續大典≫ 工典 橋路. 파발제도는 1597년(선조 30)에 설립될 당시에는 騎撥은 25里마다 1站을 두었고, 步撥은 30리마다 1참을 두었다. ≪續大典≫에 서로가 기발인 것은 다산의 지적처럼 길이 잘 닦여 있고 측량도 정확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남로와 북로는 길이 험하고 닦이지 않아 보발로 규정되었다.
6) ≪萬機要覽≫ 軍政篇 1 驛遞 撥站. ≪續大典≫보다 서로와 남로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는 유통로의 발달 결과로 여겨진다. 다만 북로의 경우 59참에서 64참으로 늘어난 것은 북로의 종점이 鏡城에서 慶興으로 북상하였기 때문이다.
7) ≪林園經濟志≫ 倪圭志 권 5, 八域程里表. 서울-삼례-전주-남원-운봉-팔랑치-함양-사근역-도천-진주-사천-통영길을 대로로 표시하고, 삼례-금구-태인-정읍-청암역-장성-나주-영암-해남-제주로 이어지는 길을 別路로 표시
8) 사대는 중국, 교린은 왜국(倭國) 및 여진(女眞)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事大), 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交隣)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조선 개국 이래의 외교방침이다.
9) 이 길이 ≪林園經濟志≫에는 7大路인 서울-태백산(봉화)로로 승격되는 도로
10) 新作路의 명칭은 이 기록과 더불어 수원성을 축조한 전말을 기록한 ≪華城城役儀軌≫에 수원성내 東將臺에서 長安門까지, 그리고 長安門에서 迎華亭까지의 十字大路를 새로 건설하였는데, 이를 新作路라 명명하였다(≪華城城役儀軌≫ 권 6 新作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