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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그리고 내가 아는 작가 이병주
이유식
나림(那林) 이병주 선생과 나 사이에는 넓고도 깊은 인연이 있다. 지연적 인연에다 종친으로서의 인연, 거기에다 문단 데뷔 할 당시의 인연도 있다.
선생의 고향은 하동군 북천면이고, 나의 고향은 북천면과 면계를 하고 있는 옥종면이다. 버스로 진주와 옥종을 오가려면 반드시 북천면을 거쳐야 한다.
내가 옥종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중․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주말을 이용해 간혹 버스를 타고 옥종과 진주를 오갈 때 이곳을 거치면서 사람들로부터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하동에서 몇 안 되는 일본 유학파라는 것, 어쩌다 보니 좌익적 성향이 좀 있다는 것, 진주농고 선생을 거쳐 진주농대와 해인대학의 교수로 있는데 문학은 물론 영어와 불어에도 능통하고 박식도 하다는 등등의 이야기였다.
종친으로서의 인연은 파만 다르다 뿐이지 같은 합천 이씨다. 그리고 문단 데뷔 당시의 인연이라면 선생의 데뷔작인 「소설․알렉산드리아」가 1965년 <세대>지에 발표될 당시 나는 그 월간지의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 원고의 편집과 교정을 내가 직접 보았고 또 해당 잡지가 나오자 그 당시 남산 밑에 있는 외교구락부로 몇 십 권의 책을 가져다 달라기에 영업부 직원과 함께 책을 택시에 싣고 전달도 해주었다. 학병 출신의 모임이 있어 축하 자리도 겸한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인연이 있었기에 그 후 내가 <세대>사를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데 마침 중앙일보가 창간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오라 잘되었구나 싶어 언론계 출신이기에 얼핏 그쪽과 연이 닿으시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당시 서울에서 처음 지어진 마포 아파트 댁으로 방문했다. 한국일보 출신이 편집국장으로 내정되어 있다면서 마침 경력기자들을 스카웃 중이니 한번 알아봐 주겠다는 확답을 듣고 나왔다.
결국 그 일은 성사가 되진 못했다. 그러나 고향의 새까만 후배를 위해 힘을 써신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성사는 되지 못했지만 오히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던 것이 불찰이었다. 지금 밝혀보는 사실이지만 평론가로서 또 <세대>지 기자로서 약간의 경력만 있을 뿐 불과 30세도 안된 새파란 나이에 문화부 차장 정도를 부탁했으니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싶다. 차라리 평기자 쯤 이었다면 성사의 가능성은 아주 높았으리라 본다. 당시는 좀 서운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아닌가도 싶다. 교수로서 아무 탈 없이 정년을 맞이하였고 또 그나마 글을 열심히 쓸 수 있었던 점을 떠올려 보아서 그렇다. 만약 신문기자가 되었다면 언론인으로서는 입신을 했을는지 모르겠지만 본격적인 문학 활동에는 큰 지장을 받았을 성 싶다. 기껏 2~3권 정도의 책이지 않았겠느냐 싶다. 나림에 비하면 나의 저서량은 ‘새발의 피’이지만 그나마 순수 평론집과 수필집 그리고 기타를 합해 부족하지만 아쉬운대로 30여 권이 되니 일단 전화위복의 자위는 된다.
그 후 나림 선생을 또 종종 뵈올 수 있었던 시기는 주로 70년대였다. 그때가 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문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전성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그 당시 이른바 ‘나림사단’의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단골 아지트는 조선일보사 옆 골목에 있었던 아리스 다방이었고, 저녁시간 쯤의 단골 술집은 역시 그 골목에 있었던 일식집이었다. 오후만 되면 다방에 나와 손님들을 만나고 또 원고도 전달했으며, 이런 일이 끝나면 곧장 일식집 행차였다.
그 당시는 내가 서울에서 외국어학원을 운영할 때였다. 간혹 아는 분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들리곤 할 때 여러 번 주석에 끼일 때도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 오갔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농을 한번 슬쩍 던진 일과 또 사람에 관한 정보였다. 나림 선생은 나보다는 17살이나 위이니 인생의 대선배요 큰 어르신인 셈이다. 평소에는 감히 농을 못할 처지었지만 술 힘을 믿고 용감하게 농을 한번 던져보았다. “선생님, 문단 서열로 보면 이래 뵈도 제가 4년 선배, 선배입니다.”라고 강조하듯 익살을 부려도 보았다. 역시 농에는 농이라 순간 주춤하시더니 웃으시면서 “선배님 대접 잘 할테니, 평론가님 잘 봐주시게” 라고 하시면서 술잔을 쑥 내미는 것이었다. 그 여유스러운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또 하루는 술자리에서 서울시장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현옥 씨와는 나림 선생이 각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터에 마침 그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경쟁이라도 하듯 나도 아주 잘 안다고 거드름을 피워 보았다. 사실 나림과 김현옥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물론 두 분이 진주와 서로 연고가 있다는 것도 일단은 큰 인연이겠지만 이 보다도 더 큰 개인적 인연이 있다. 5.16 혁명이 나기 바로 앞이었다. 그 당시 김현옥은 부산의 육군 제3 항만사령관으로 있었고, 나림은 국제신보의 주필로 있었다. 김현옥이 지난 시절의 고마움도 있고 해서 인사차 주필실로 찾아간 일이 있다. 그 고마움이란 다름이 아니라 김현옥 자신이 진주중학 사환 시절에 심부름 차 자전거를 타고 공문서류를 갖고 진주농고에 전달해 주려고 갔을 때 보호를 받은 일이다.학교에 들어서자 그만 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서류를 빼았긴 일이 생겼다. 그때 마침 우연히도 이 장면을 지켜본 나림이 상급반 학생으로서 그 학생들을 나무라고 일이 무사히 끝나도록 도와 주었다.결국 주필실의 방문은 이에 대한 옛 인연의 고마움 표시의 인사차였다. 그 이후 세상이 바뀌어 김현옥은 부산시장을 거쳐 서울시장이 되었으니 서로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그리고 김현옥은 지난 날의 빚을 갚는다는 마음에서 나림에게 예외적인 많은 특혜를 주었다. 이런 점을 익히 남에게서 듣고 알고 있는지라 젊은 객기에 나도 잘 안다고 일부러 거드름을 한번 피워본 것이다.
그러자 약간은 의아해 하는 눈치이시라 내친 김에 쭉 설명을 드렸다. 내 종이모님이 그분의 숙모가 되는데 한때 내가 진주고등학교를 다닐 때 종이모님 댁에서 하숙을 하고 있을 때부터 잘 안다고 했다. 대령으로서 부산 구포수송학교 교장으로 있을 당시 숙모님 집에 인사차 들렸을 때 처음 알게 되었고, 그날 중국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까지 얻어먹었다고 제법 자랑스럽게 이야기도 했다. 또 이런 연고로 부산시장 시절 '문화시장'임을 표방했기에 부산 문인들 중 더욱 가깝게 지냈다고 하자 그때서야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곧바로 술 한잔이 나에게로 넘어왔다.
또 80년대 중반의 어느 날 일이었다. 나림사단의 몇몇 분들과 어울려 술을 먹고 서로 헤어질 무렵이다. 선생께서 뒤따라 오는 나를 보시고 자가용에 타라면서 집에 같이 가자는 것이다. 지금 어느 곳인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2층 단독주택이었다. 지하 1층에 서재를 꾸며놓고 있었는데 술김에 휙 한번 두리번거려 보니 얼핏 조그마한 도서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주를 몇 잔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책상위의 몽블랑 만년필을 들어 보여주면서 “이 교수, 이 만년필 한 자루로 딸린 식구 10여명을 먹여 살린다네.”라고 약간 자랑스러운 투로 하던 말씀인데, 그때의 웃으시던 환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맞는 말이다 싶었다. 신문과 잡지 기타 지면 6,7곳에 쭉 연재하고 있는 것을 익히 보아온 터라 노무현의 표현을 빌리면 ‘맞습니다 맞고요’였다. 선생은 문단사상 유례가 없는 다산과 다량의 작가였다. 짧다면 짧은 27년간의 작가생활을 통해 무려 10만장 분량의 원고를 쏟아냈으니 작가 유주현 이외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거의없다. 언제 술을 들고, 언제 글을 쓰는지 문단인들이 모두 의아할 정도로 초 정력적인 필력을 과시하였다. 우스개로 문단에서는 ‘소설공장’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리고 소설이 아니더라도 어떤 글을 청탁한다 해도 선생의 머리와 손만 거치면 번듯한 ‘물건’이 만들어 진다는 말이 파다했으니 미상불 다재다능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이다.
아무튼 선생은 문학자로서는 큰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풍운남임도 틀림없다. 하동에서 두어 번 국회의원을 출마해 낙선의 고배도 마셔보았고, 대동아전쟁 시는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에서 해방을 맞아 살아서 돌아왔고, 5.16혁명이 나서는 그의 리버럴한 사상 때문에 약 2년 7개월간 옥살이도 했다. 그리고 내로라하는 언론인 생활을 거쳐 그 당시로 봐서는 아주 늦게 늦깎이로 문단에 나왔다는 사실, 그 후 혁명 정부의 실세들 가령 김현옥, 이후락 등과 어울려 문인으로서는 예외적으로 권력실세들과 깊은 친교를 맺으며 꽤 힘깨나 쓸 수 있는 위치에도 있었지 않았던가. 또 박정희 대통령과는 국제신보 주필 시절에 그의 대구사범 동기인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의 소개로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이었던 그와 두 사람이 자주 술집에 어울린 전력도 있다.
어디 이런 것 뿐 이겠는가. 술도 좋아하고 곁들려 여자도 좋아 했으니 한량임에는 틀림없었다. 내 눈에도 몇 번 목격된 일이 있다. 인사동에서 작곡가 이봉조 누님이 경영하던 주점 '泗川'에 손님 접대를 위해 간혹 들릴 때면 더러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젊은 여성들과 어울려 있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는데 상상컨데 선생의 문명과 한량 끼에 매료된 여성들이 아니었나 싶다.
선생이 92년도에 돌아가셨으니 금년으로 보면 어언 20년이 훨씬 넘었다. 우리 나이로 72세 때였다. 물론 단명이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장수는 아니다. 생각컨데 다른 것은 고사하고 쏟아낸 수많은 집필활동, 여기에다 술과 여자 때문에 그만큼 수명이 단축도 되었지 않았나 싶다.
그분이 살아 있을 7~80년대만 해도 한때 하동 출신으로 작가라면 이병주, 시인이라면 정공채, 평론가라면 이유식이라 했는데 세월 따라 두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어버렸고, 어쩌다 나이가 아래라 나만 남아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들 때가 있다. 문득 그가 남긴 명언이 생각난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바래지면 신화가 된다.’라는 말이다.
그렇다. 선생의 고향땅 북천면의 이명산 자락에 선생의 문학관이 세워져 있으니 좀더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 언젠가 곧 선생의 삶과 문학도 달빛에 바래지어 또 하나의 새로운 신화가 탄생하리라 본다.
그러고 보니 나도 문득 욕심이 하나 생긴다. 언젠가 머지않은 앞날에 나도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 어느 때 쯤 내 고향 옥종의 어느 땅 자락에 나의 기념관도 하나 섰으면 그 얼마나 좋을까도 싶다. 합천 이가 두 종친의 문학관이 바로 이웃 면에 서로 자웅처럼 서 있게 된다면, 훗날 스토리 텔링의 좋은 소재도 되리라 백일몽처럼 상상도 해본다. 그리하여 두 곳을 오가는 방문객에 의해 사후의 새로운 문학 고속도로가 뚫리지 않겠느냐도 싶다. 그 어느 누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던가!
<수필>
이슬의 수사학(修辭學)
이슬은 자연이 선물해 준 보석이다. 수정이며 진주다. 이 중 풀잎이나 싸리꽃,연꽃 잎이나 거미줄에 맺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아침이슬이야 말로 수정처럼 영롱하다. 하양,노랑, 빨강,자주 등으로 빛을 발하는 그 이슬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연이 걸어준 이어링이요 목걸이이며 손목걸이요, 물방울의 살아 있는 예술이요 설치 미술이다.
이슬은 이런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유용하고 유익한 점도 있다. 산천초목에 생기를 돌게 하고, 가을 곡식을 영글게도 하고 있다. 또 있다. 시골에서 백로에 콩잎에 내린 이슬은 속병에 좋다고 아침 일찍 밭에 나가 이슬을 받아오는 사람들도 더러 보았다.
지난날 어린 시절, 시골에서 아침 소를 먹이러 다니면서 수없이 보았던 이 이슬들이 지금 마치 환등이 비추어 주듯 내 눈 앞에서 반짝 반짝 빛나고 있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중고교 시절,정지용의 시 '향수'를 읽으면서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쯤에 가서는 이 시의 화자가 바로 내 자신인양 감회에 젖어 보기도 했다. 이 뿐이 아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은 백일홍~'으로 시작되는 유행가 '선창'을 어른들이 즐겨 부르는 것을 더러 들었기에, 마치 그 흉내라도 내듯 혼자서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 노닥거리며 흥얼거려 볼 때에는 고향집 화단의 백일홍을 연상도 해보았다.
그리고 좀 세월이 지나 60년대 전후, 학보병으로 군대생활을 할 때, 어느 밤시간 문득 고향의 할머니나 어머니가 생각나면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로 시작되는 '전선야곡'을 혼자서 역시 흥얼거려 보며 울꺽 치솟는 고향 그리움의 심사를 달래도 보았다.
아니 또 있다. 30대의 장년시절에는 70년 초 양희은이 가수로 데뷔한 노래 '아침이슬'도 즐겨 불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로 시작되는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되기 이전이다. 내가 시골에서 늘 보던 것이라 친근감도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살다보면 서러움과 시련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특히 인생 초년생으로 타향인 이곳 외지 서울생활에서 느낀 여러 심회를 실어 내 삶의 결연한 의지를 담아내 볼 수 있는 내용이라 더러 애창도 해보았다고나 할까.
이슬과 나는 이런 인연과 사연이 있기에 이슬을 더욱 좋아하고 사랑했다.그렇지만 이제는 어느새 나이를 먹다 보니 이슬의 아름다움 쪽보다는 그 인생론을 먼저 생각해 볼 나이가 되었다. 우리의 선인들은 자연현상이나 자연사물을 보고 인생을 곧잘 은유적으로 명상해 보지 않았던가.정처없이 떠가는 구름을 보고 인생의 표랑성이나 잠시성을,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 갈대를 보고 인간의 나약성을, 뿌리 없이 떠다니는 부평초를 보고 인생의 근원적인 불안정성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인생의 허무성을 각각 생각도 해 보거나 시를 읊어보기도 했다. 이에 이슬도 마찬가지다. 해가 나면 곧 없어지는 아침이슬을 보고 덧없고 허망한 인생을 결부시켜 '인생조로'(人生朝露)니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 하지 않았던가.이제는 이런 생각을 나도 더욱 절감하고 있다.
여기서 이슬의 이런 숙명성을 생각하다 보니 문득 나팔꽃도 연상된다. 둘은 영어로 보면 숙명이기나 한듯 비슷한 이름의 쌍생아요, 피 다른 이복형제가 아닌가.영어로 나팔꽃은 Morning glory이고, 아침이슬은 Morning dew이니 '모닝'을 공유하는 이체동형이다. 나팔꽃이 새벽에 봉오리가 열리고 오전 9시경에 활짝 피었다가 강한 햇살을 받기만 하면 금방 시들어 버리듯, 이슬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팔꽃의 꽃말이 '덧없는 사랑'이라면, 이슬의 은유도 인생의 무상이요 덧없음이 아닌가.
이에 대해 나이를 별반 의식하지 않을 젊은이라면 몰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큰소리 칠 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어차피 인간의 숙명이요 인간생명의 한계일진데. 인생의 희노애락을 다 경험해 보고 살만큼 살아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불변의 진리 앞에서는 겸손을 배우리라 본다. 노자(老子)선생의 흉내를 내보면 누구나 물 흐는대로, 세월이 흘러 가는데로 마음을 비우고 천명이나 기다리며 겸허히 살아야 하리라 보며, 이런 생각은 곧 근년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그러고 보면 이슬은 인생의 말없는 교사도 된다.
그 다음, 내가 알고 있는 인문학적 교양지식에서 이슬과 관련 있을 수 있는 노래집이라면, 일본 고대의 최고 노래집인 '만요수'(萬葉集)가 먼저 떠오른다. 약 4.500여 수 중 이슬의 언급이 나오는 노래가 그마나 108수다. 자연물과 이슬이 행복하게 어울려 있는 미학적 관점에서 언급되고 있는 경우도 있고 또 이슬을 통해 인간의 삶을 비추어 보며 사랑, 눈물, 외로움, 괴로움, 죽음과 덧없음을 노래하고도 있다.
또 다음 두 가지 천지 창조신화에서도 이슬이 특별한 몫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것도 보았다. 중국 반고(盤古)의 개벽신화와 저 멀리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족의 천지 창조신화이다. 먼저 중국 것을 보면, 반고라는 이름의 거인이 달갈 모양의 우주 껍질 속에서 잠을 자다 드디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어두움 뿐이라 에라 모르겠다 하고 손으로 뚝 치고 보니 그 껍질이 두 조각이 났다. 하나는 하늘이 되고 다른 하나는 땅이 되었다. 그 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이 거인은 무한정으로 몸과 키가 커갔고 드디어 수명이 다해 죽고 만다. 그가 죽자 온 몸이 갈기갈기 부분으로 나뉘어져 천지창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 중 그가 흘린 땀은 비와 이슬이 되었다.
그리고 마오리족의 경우를 보면, 태초에 하늘의 신 랑기와 땅의 신 파파가 있었는데 서로 사랑했고,결혼을 하여 17명의 아들을 두어 그들이 곧 뉴질랜드의 모든 자연과 인간 세상을 맡아 다스렸다. 그러다가 일이 하나 생기게 된다. 애초에 세상이 생겼을 때는 하늘과 땅이 붙어 있었기에 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또 아이들도 장성해 가다 보니 요샛식으로 말하면 대가족이라 사는 공간도 좁아지게 되었다. 이를 내려다 본 아버지 신들은 하는 수 없이 두 부부를 떼어놓기로 했다. 드디어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면서 부득불 남편 랑기는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고, 아내 파파는 땅에 남게 되었는데, 서로 그 이별이 서러워 눈물을 흘렸는데 남편의 눈물은 비가 되어 내렸고, 아내의 눈물은 이슬방울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두 신화에서 이른바 신화비평의 용어를 빌려 보면 이슬은 땀과 눈물의 원형(原型)이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신화들을 생각해 보았는데 이런 이슬 이야기는 없다 싶어 일부러 꽃전설을 살펴도 보았다. 우리의 꽃전설은 웬지 하나 같이 슬프고 애달프다. 굶어서 죽은 딸의 넋이 꽃이 되었다는 백일홍,계모의 등살에 죽어 꽃이 된 진달래꽃, 의지가지 없는 늙은 할머니가 큰손녀를 찾아 갔다가 내쫒김을 당해 하는 수 없어 작은 손녀를 찾아 가다 죽자 그 이듬해 무덤 위에 꽃으로 환생 되었다는 할미꽃 등등. 그 예는 한이 없다. 어쩜, 이런 맥락에서 어떤 말못할 사연으로 죽은 원혼의 눈물이 이슬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을 법은 한데 아예 없다.
그래서 나는 궁한 김에 근년에 스토리 텔링이란 말이 유행하고 또 그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안해 이슬의 새로운 창작 전설도 나왔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고 있다. 이는 곧 지난 날의 눈물타령 식 슬픈 전설류가 아니라 이슬은 곧 노동의 결과로 흘리는 땀이란 콘셉트로 미래지향적 창작 전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튼 이슬이 비록 단명과 덧없음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할지라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상큼하고 청순해 보인다. 그래서 이 단어가 작명에도 선호되어 여아나 아가씨들의 이름에서도 빛을 내고 있다. 이 뿐이 아니다. 전설의 동물 유니콘이 이슬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듯, 술꾼들을 유혹하기 위해 술이름에도 참이슬, 아침이슬이 서로 경쟁을 벌리고 있는 세상이다.
오늘 내가 이런 이슬 이야기를 이렇게 늘어놓다 보니, 문득 시골 고향의 옛시절로 돌아가고픈 생각도 든다. 그러나 마음뿐. 내친 김에 서울에 사는 몇 안 되는 손쉬운 고향의 죽마고우들이나 불러 모아 참이슬이건 아침이슬이건 술이나 한잔 들며 회포나 한번 풀어 볼까 한다.어차피 우리의 인생이 짧은 것이고 그나마 이슬처럼 영롱한 어느 한 순간이라도 있거나 있었다면 그것을 서러운 찬란한 자위로 삼을 도리 밖에 없지 않겠는가. 설사 없다 할지라도 어쩔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문득 모파상의 장편 '여자의 일생'중 끝부분이 생각난다.주인공 잔느가 온갖 세상 풍파를 다 껶고 어느 덧 반백의 할머니가 되어 손녀를 안고 있는 그 앞에서 하녀 로잘리가 "마님,따지고 보면 사람의 한평생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로군요"이라고 한 말이 명답일 수도 있다. 또 아니면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이야"가 바로 명답 중의 명답일 수도 있으리라.
이유식 (사진과약력)
약력: 아호 靑多. 『현대문학』등단(1961). 세종대 박사과정 수료.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강남문인협회 초대회장 역임.
배화여대 교수 정년퇴임. 하동 평사리토지문학제 추진위원장 역임.
현)한국문인협회,한국문학비평가협회,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고문, 청다문학회 이사장, 합천이씨 전국 중앙종친회 고문.
현대문학상, 예총예술문화대상, 한국문학상,남명(조식)문학상 등 다수 수상.
평론집 『반세기 한국문학의 조망』외 8권. 수필집 『세월에 인생을 도박하고』외 8권.
그 외 평전 및 기획 편저 등 도합 3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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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병주 선생 이야기는 같은 고향 사람이라 흥미진진 합니다. 그나저나 청다문학관은 옥종에 서느냐 진주에 서느냐가 문제지 언젠가 서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처럼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수필 <이슬>의 수많은 전거는 다 어디서 온 적인지, 해박한 지식이 경이롭습니다.
김거사, 연휴는 잘 보내고 있으리라 봅니다. 마침 작은아들놈이 왔기에 떡 본김에 제사라고 서둘러 송고했다오.홀가분 하다오.맛있게 읽어 주어 좌우지간 고맙소.지구문학이 아마 다음주 초에 도착하리라 본답니다. 진고 삼총사의 글이 그 책을 장식하리라 본다오. 강희근 후배의 시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이 청다의 평문 또 거사의 수필이 지면을 장식하리라 보오.
감상잘했습니다
나림 이병주 선생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수필 '이슬'은 전에 남강 카페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옥에 티
수필 '이슬' 중간쯤
달갈→달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