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제기 : 공연 연습실로 변해가는 예배당
신학교수이다 보니 전국으로 설교나 강의를 많이 다니고 있다. 대부분의 강의 일정 앞에 (특히 젊은이들의 집회의 경우에) 긴 찬양 시간이 있다. 짧게는 15분, 길게는 30분 정도이다. 집회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찬양팀만 열심히 부를 뿐 대부분의 청중들은 소수를 제외하고 그저 찬양팀의 노래를 멍하게 구경할 뿐이다. 찬양시간을 마치고 설교단에 올라가 청중들을 둘러보면 이미 기운이 많이 빠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설교와 강의를 제대로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대형교회는 그나마 여유와 절제가 있지만 소형교회는 상당히 무질서하다. 어떤 교회당은 장소는 협소한데 온갖 음향기구들이 교회당을 차지하고 있다. 전면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으로 인해 십자가가 가려지거나 한 쪽 측면으로 이동된 지 오래다.
이상하게도 십자가는 우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스크린은 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스크린은 예배 인도자를 위해 예배당 뒷면에도 설치되어 있다.
교회사를 전공한 필자의 눈에는 강단 앞에는 성모상이 있고 강단 뒤에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는 천주교의 성당과 유사하게 보인다.
찬양팀을 위해서 여러 개의 보면대, 드럼, 2-3개의 키보드, 여러 개의 마이크 설치대, 수십 개도 넘는 어지러운 전선들, 프로젝트, 조명 등이 마련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의 성당이 갖가지 성상으로 가득 차 있다면, 개신교의 교회당은 여러 가지 음악 용품들로 가득 차 있다. 작은 교회의 예배당은 거의 창고 수준이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당은 누가 보아도 공연 연습실로 변해가고 있다. 실제로 최근에 새로 지은 예배당을 보면 거의 100%가 극장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한국교회의 강단은 어느새 무대로 바뀌고 말았다.
목사의 직무유기
이렇게 된 배경에는 80년대 후반의 ‘경배와 찬양’ 운동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경배와 찬양 운동은 기존의 예배를 대치하면서 이제는 한국교회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대형교회에서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소형교회에까지 확대되어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찬양팀을 운영하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
이제 음악은 교회에 있어서 설교와 성례를 능가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예배당 구조나 시설물도 설교보다는 찬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당시 ‘경배와 찬양’은 하나의 거대한 예배 개혁의 물결이었다. 특별히 젊은이들이 거의 맹목적으로 좋아하다 보니 어느 누구도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유행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물 간 구시대의 유물을 대부분의 교회들이 따르고 있다.
이 구시대의 유물이 여전히 교회의 한 중심 요소인 이유는 적절한 대안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예배의 인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목사의 책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교단 헌법에 따르면 찬송을 지도하는 일은 목사의 직무 중에 하나이다. 즉 찬송을 가르치고 설명하고 인도하는 것은 목사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목사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을 다른 사람들(찬양대장, 찬양팀장)에게 맡겨 버린다. 이것은 목사의 중요한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상황이 신대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목사 후보생들은 3년 동안 찬송을 거의 배우지 않고 졸업한다. 찬송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찬송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결과 목사 후보생들은 각자의 소견에 따라 좋아하는 찬송을 부를 뿐이다. 목회자 후보생을 양성하는 신대원이 찬송을 교육함에 있어서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온 교회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시편찬송의 중요성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불신자들(이방인들)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도한다. 이것을 간단하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성을 보시고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생각은 이교도들의 생각이며 완전히 비성경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거짓된 신과는 달리 유일하시고 참되신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먼저 있어야 할 줄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방인처럼 우리의 뜻을 간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며, 이것을 찬송에 적용시킨다면 우리가 불러야 할 찬송은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노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종류의 타락이 그러하듯이 찬송이 오늘날 타락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예배시간을 차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찬송을 선정함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이 노래를 정말로 좋아하실까?’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면 그만이지’라는 사고방식이 보편화 되어 있다. 찬송에 있어서 실천적 무신론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오늘도 찬송을 받는 분에 대한 고려 없이 찬송을 부르고 있는 형편이다.
‘어떤 찬송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가?’ 이 문제야 말로 찬송 역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논쟁 중에 하나이다. 이 글에서 이와 관련된 세밀한 논쟁을 다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확실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만든 모든 찬송을 다 기뻐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이 자기 백성들에게 부르라고 직접 지어 주신 노래는 다 기뻐 받으신다는 사실이다.
시편찬송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편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에게 직접 선물로 주신 찬송이다. 에베소서 5장의 가르침에 따르면 정말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시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다(아쉽게도 한글 성경은 ‘시편’을 ‘시’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시편찬송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복종해야 하는 본분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개혁교회는 시편찬송을 예배 속에서 부르는 전통을 발전시켰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모든 면을 초대교회로 회복시켰다. 종교개혁가들은 일부만이 성가대를 통하여 특별한 찬송을 부르는 전통을 거부하고 온 성도들이 찬송을 부르게 하는 회중찬송의 전통을 확립시켰고, 특별한 고급 언어(라틴어)가 아니라 일반적인 모국어로 모든 평범한 성도들이 찬송을 부르게 하였으며, 인간이 만든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시편으로 찬송하게 하였다.
어떻게?
시편찬송의 당위성이 확보되더라도 그것을 교회 현실에서 회복시키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무조건 하고 보자는 사고방식은 교회를 오히려 허물어뜨릴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현실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거나 태만의 죄를 지어서도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먼저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우리 교회는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를 회개하는 것에서 찬송의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 없이 형식적 시편찬송의 도입은 교회를 메마르게 할 뿐이다.
먼저 우리는 시편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목사들은 찬송보다는 설교를 통하여 시편 속에 담겨있는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능력 있게 전달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목사들 스스로가 시편을 깊이 연구하여서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찬송이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는 개혁주의 신학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회중들이 시편의 중요성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시편찬송은 그다지 큰 유익을 교회에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찬송을 지도하는 목사부터 회개하여 시편을 깊이 공부해야 한다.
오늘날 시편에 대한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목사들이 성도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시편의 70% 이상은 탄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과 얼마나 다른가? 실제로 성도들의 삶은 탄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일주일 동안 그들은 세상 속에서 정말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가볍고 경쾌한 찬송만 부른다면 그 찬송은 위선일 뿐이다. 주께서 요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시편 51편)이다. 찬송 속에서 성도들이 자신의 탄식을 주님께 쏟아 놓게 하여야 한다.
시편을 제대로 설교한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시편찬송을 배우는 일이다. 최근 들어서 이전과 달리 좋은 시편찬송이 많이 출간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출판사는 음반을 내어서 성도들이 시편찬송을 보다 쉽게 듣고 배울 수 있도록 돕기도 하였다. 열악한 기독교 출판 상황 속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칭송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문제는 교회가 이 시편찬송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해 기쁨으로 즐기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노래가 있어도 그것이 불리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시편찬송의 보급을 위해 고신대 종교음악과의 역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의 기억에 따르면 종교음악과가 시편찬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보급하는 일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이 없다. 이것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고신대의 정체성에 있어서 어떤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찬송이 빠진 교회 음악은 일반 기독교 음악과 아무런 실질적 차별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번에 새로 선출된 총장은 이점을 충분히 인식하여 고신대 종교음악과가 고신대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충분히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시편찬송의 유익
시편 속에 담긴 깊은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시편 찬송을 잘 배워서 익혔다고 하더라도, 심지어 그것이 그리스도의 엄숙한 명령이라고 확신했다 하더라도, 목사의 최종적 관심은 ‘과연 유럽에서 오래 전에 작성된 시편찬송이 21세기의 한국교회에도 적용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아무리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하더라도 성도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시도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찬송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시편찬송을 2년 전부터 예배 시간에 실제로 도입한 필자로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리기를 원한다.
1. 시편찬송은 예배의 하나 됨을 회복시키며 찬송에 있어서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다. 시편찬송은 오늘날 무질서한 찬송 흐름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많은 교회들이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낡은 유물이 되어 버린 ‘경배와 찬양’ 식의 찬송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있다. 그 결과 찬송에 있어서 고신교회는 교회의 하나 됨을 상실해 버렸다.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로서 이제부터라도 시편찬송을 통해 교회의 하나 됨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2. 시편찬송은 찬송에 대한 신뢰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 이번에 개정된 통일찬송가는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이전 찬송가보다 훨씬 퇴보되었다. 찬송가의 수는 많이 늘어났지만 첨가된 새로운 노래들의 대부분은 교회에서 잘 불리지 않는다. 찬송가의 부피만 이전 보다 더 늘어났을 뿐이다.
고신교회에서 불리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노래들도 상당수 삽입되었다. 하지만 시편찬송이 개혁교회에 가장 적합한 찬송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찬송가의 신뢰성이 상실된 상황 속에서 시편찬송은 교회의 찬송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3. 시편찬송은 찬송을 풍성하게 한다. 필자는 시편찬송‘만’ 불러야 한다는 입장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개혁주의 교회는 시편찬송‘도’ 불러야 한다. 개정된 찬송가에는 시편찬송이 5곡도 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시편찬송을 도입한다면 빈약한 우리의 찬송이 매우 풍성해 질 수 있을 것이다
4. 젊은이들도 시편찬송을 좋아할 수 있다. 많은 목사들이 젊은이들은 시편찬송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우려에 대해서 필자의 교회는 주로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물론 모든 젊은이들이 시편찬송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CCM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찬송의 지도자로서 목사가 해야 할 직무는 최선의 노력과 지혜를 사용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찬송을 부르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글·이성호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로 역사적 개혁신앙을 사랑하는 목사이다.
첫댓글 우리 교회는 시편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 시편찬송 중 칼빈의 제네바 시편찬송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위 글에서는 시편찬송을 불러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평일 모임을 통해서 시편찬송을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내년 초 즈음에 다루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