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광사는 신라의 옛 사찰로서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고 보경사, 천곡사, 광흥사 등을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웅장하였으나 지금은 주춧돌만으로 옛 모습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다. 법광사는 신라 진흥왕 10년에 중국 양나라 사신 심호가 불사리 22과를 신라에 들여오자, 이것을 신라 제26대 진평왕이 원효대사에게 법광사를 창건하여 봉안토록 명하여 세워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신라의 대가람으로 불국사와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한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법광사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들이 전해온다.
조선 영조 2년(1746년) 겨울에 대중들이 탑이 허물어져 가는 것을 철거하고, 다시 재건할 것을 의논하여 명옥, 효헌 등의 비구가 안내설을 맡고, 사람을 모아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다 탑의 최하 일층의 석탑을 봉합한 옥함 하나를 발견하여 열어보니, 함 가운데 순금제 합이 있고, 그 안에 비단으로 된 주머니에 작은 옥패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옥패의 한면에 석가모니 불사리라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주머니 속의 불사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22과가 녹두색에 약간 황색을 띤 듯한 맑은 빛으로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보고 비로소 석가세존의 전신사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실 때 정성을 다하기 위하여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워 단을 설치하고, 대웅전 내에 옮겨 안치하였더니 그 날 초목과 암석, 마을 전체가 빛을 받아 대낮같이 밝았다고 한다.
이를 본 대중들은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서둘러 치석 사업과 영선 공사를 시작하고, 별도로 다시 동함을 조성하고 옥함과 순은함, 비단 주머니 안에 있던 사리 22과를 그 전처럼 새롭게 조성한 탑신 2층에 봉안하고, 다시 옥패를 작성, 탑의 중수를 기록, 이 전의 옥패와 함께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22과였던 사리가 9과만 전해오고, 13과의 소재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또 하나 법광사에서는 영조 때 중수 작업이 한창일 무렵, 어느 벙어리가 이 절에 걸식하러 온 것을 대중들이 희롱하여 "네가 성심으로 탑불사에 도움을 준다면 부처님께서 너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할 것이다"고 하였더니 이 벙어리는 시키는 대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여 탑불사가 끝나갈 무렵, 한밤중에 홀연히 큰 소리를 내더니 "꿈에 어느 노승이 금으로 된 칼로 내 입을 찔렀다"고 소리쳤다. 그 후로부터 이 벙어리는 말도 잘하게 되고, 노래도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법광사는 조선조 말엽 철종 14년경 이 지역 토호의 부탁을 밭은 무명의 나무꾼의 방화로 소실되었는데, 구전으로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법광사가 소실되기 3개월 전, 신광면 죽성(대골)리에 거주하던 박노래라는 노인이 17세 가량의 소년시절에 어느 날 밤 소변을 보러 마당에 나갔다가 법광사 쪽에서 불꽃등과 같은 큰 불덩어리가 하늘 높이 치솟아 비학산 정상까지 올라가더니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법광사 일대가 대낮같이 밝았다고 한다. 박소년이 그 다음날 80여세 된 서씨라는 풍수 노인에게 어젯밤의 법광사의 이상한 불덩어리의 광경을 얘기하였더니 서씨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소년의 얘기를 다 듣고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제는 법광사의 기운과 산천 정기가 다 떨어졌구나 ! 법광사는 가까운 장래에 폐사가 될 것이고, 양산 통도사가 이제 융성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박소년은 서씨노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서노인이 대답하기를 "비학산을 중심으로 한 신광지역은 옛부터 학이 알을 안고, 호수에 접하여 있는 지형인데, 호리쪽 계곡의 호수를 메워 신광분지를 조성한지 천년이 지났고, 학은 호수변에 서식하는 조류로서 호수가 없어진 이 땅에 비학산의 지운과 정기가 장구하게 머물리가 만무하다. 따라서 어젯밤에 네가 보았다는 화광등같은 불덩어리는 이 땅의 지정이며, 이 땅은 산강 수약하니 어찌 장구하게 머물리가 있겠느냐? 그 지정이 남으로 날아가 버렸으니 필시 산강 수다한 양산의 통도사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머지않아 법광사는 폐사가 될 것이고, 또 비학산 남쪽 30여리 도은산 밑에 있는 천곡사도 머지 않아 폐사가 될 것이 분명하니 개탄할 일이로구나!" 이에 박소년이 "법광사는 폐사가 된다 하더라도 이해가 가나 천곡사는 무슨 관련이 있기에 폐사가 됩니까?" 라고 반문하자, 서씨노인은 "천곡사도 비학산의 일맥이니 비학산의 지정이 뜨면 천곡사도 폐사가 될 것이 분명한 일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신기하게도 이런 일이 있은 후 3개월이 지난 후에 법광사가 불이나 폐사가 되었다고 하며, 그 후 천곡사도 오래가지 않아 6.25 사변 시에 소실되고 말았다고 전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