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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9:1
바울의 사도 권을 무시하는 고린도 교회의 어떤 자들이 바울이 사례비를 안 받고
목회 하는 것을 빌미로 도전해오자,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리가
무엇인지부터 밝힙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8). “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는 것은 소 자체보다 주인을 위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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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는 이들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는 당연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도리어 이러한 바울의 중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오히려 강압적으로 목회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은 잘 따랐습니다. 고린도후서 11:19-20절을 보면 “너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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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 도다.”
고린도후서 11:4절에도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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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라고 했지요.
그들은 바울의 사도됨을 부인하면서도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영을 받게 하는 거짓
선생들은 잘도 용납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결국 교만해 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 권을 무시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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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자랑거리들 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고린도교회에 성령의 은사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많은 은사들이 나타나니, 자기들이 마치 무언가 특별한
사람들이어서 그런 은사가 주어진 줄로 생각하고 서로 자기들의 은사를 자랑하였던
것입니다.은사가 임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그들의 부족함을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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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교회는 사실, 은사가 필요 없습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잘 받아 나가면 됩니다.
은사가 임했다는 것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인데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
교회의 부족함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부족하고 못났으면 은사가
주어졌겠습니까?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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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4:7).”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임한 모든 은사들은 도토리를 추가로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능력이 없기에 은혜가 더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무언가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인 양 자기를 자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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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하도 자기를 자랑하기에 고후12장에서 하는 수 없이
자신도 자랑을 한다고 합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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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1,2).“ 바울 사도는 자신이 삼층 천까지 이끌려 올라갔다
왔다고 합니다. 바울은 하늘나라를 보고 왔는데 그 영광은 사람의 말로는 다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고 왔지만 그것이 주의
은혜로 된 것이지 자신이 잘 나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계시가 너무 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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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자고하지 않도록 사단의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단의 가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바울이 지니고 있던 육체의 고질병으로 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자신의 육체의 가시가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시며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약한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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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는 자기가 약해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에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어떤 사도보다 못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혈통적으로나 신분으로나 학식으로나 못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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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자랑하는 것을 어리석은 자의 자랑으로 여기고 좀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고도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나를
자랑하라면 나의 연약함만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의 수고만이
아니라 자기가 보았던 그 영광의 나라에 대해서는 말로 다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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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한국교회에는 천국을 보고 왔다는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을 보고 왔다는 자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천국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복의 내용도 천국에서 자기가 사는 집의 평수가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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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천국에 온 사람은 자기 집이 없어서 합숙소에 있고, 전도와
십일조와 구제와 봉사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고급 맨션에서 그것도 넓은 평수에서
산다고 합니다. 만약 천국이 이런 곳이라면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 것입니다.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땅의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어 놓고서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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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거짓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들의 말을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천국에 갔다 온 바울 사도는 도저히 사람의 말로는 그것을 말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들은 세상의 이름다운 말로 천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외의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려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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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어디로 다 사라져 버리고,
인간들의 탐욕에 찬 경쟁심만이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삯꾼 목자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경쟁심을 북돋우어서 전도에 열심을 내게 하고, 헌금에 열심을 내게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을 끌어 모우고 많은 돈으로 큰 예배당과 교육관을 짓고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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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을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가리켜 기업이라고 합니다.
기업 같은 교회 제가 얼른 세봐도 손가락 10개는 구부러집니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사탄이 천국을 인간들의 욕망의 투기장으로 바꾸어 놓고서 그런 자들을 간증자로
모셔다가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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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을 그대로 고정시켜 버리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심판을
이런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16).”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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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간증 집회는 깨진 얘기라고 말하면서 결국 자기 교회, 자기 목사님 자랑일색입니다.
사실 교회 비판을 하는 사람을 청빙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이 이상하겠지만 말입니다.
천국을 갔다 왔다는 자들의 간증의 내용을 보면 이 땅에서 자기가 전도를 하거나, 헌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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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나, 봉사를 하거나 간에 그러한 헌신의 것들이 재료가 되어서 하늘나라에서 집이
지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전도한 것이 자기 자랑이나 공로나 재료가
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른 성경에는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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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6:27)”그렇습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상급론을 갖다
붙이면 안 됩니다. 솔직히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였습니까? 아니지요? 모든 우선순위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나중에 보상을 바라고 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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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주님 앞에서 지옥 가야 마땅한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자기의 행함을 자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붙드시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자기가 전도한 것이 자기 자랑이 될 수가 없는 이유는 부득불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득불 할 일이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땅함으로, 감사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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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바울 사도 자신이 복음을 선택하거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 사람이라면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자신은 도리어 복
음을 핍박한 사람입니다. 복음을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던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던 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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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에 사로잡힌바 되고 복음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종이 되고 복음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마땅한 자세입니까?
복음에 정복당하고 보니 그 복음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복음을 위하여 내가 얼마나 헌신하고 내가 얼마나 열심을
내는가를 자랑할 수는 결코 없다는 말입니다. 복음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에 내가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나의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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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라고 합니다. 직분을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어느 정도의 충성입니까?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종이 하루 종일 수고하며 일하고
돌아와서도 주인의 밥상을 차려드리고 시중을 다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사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주인이 아무런 사례를 하지 않을지라도 종은 무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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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합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직분을
맡은 자의 마땅히 할일 인 것입니다(눅 17:10). 그런데 이 직분이 얼마나 놀라운 직분이며,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인지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한다.”고 했고, “죽는 것도 유익이라”고 했습니다(빌1:20,21).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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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사도 권 주장(1-2)
사도로서 바울의 권리(3-14)
a.바울의 권리에 대한 주장:3-6
b.바울의 권리에 대한 증거:7-11
c.바울은 복음을 위해 권리를 포기함:12-14
바울이 권리를 포기한 이유(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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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예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복음이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롬 4:5).
이 복음에 참예하기 위하여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을 행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복음에
참예시켜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마땅함으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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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참예시켜 주셨기에 자신은 종이 되어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 상이란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계 2:10)입니다.
이 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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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았다면 그것이 영광이요, 그것이 생명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거짓된 자들은
이러한 묵시적인 상의 개념을 이 땅의 물질적인 개념으로 바꾸어서 천국에서 상의
차등을 이야기 하면서 인간들이 상상한 천국과 상급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상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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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18)”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상이 무엇이냐고 반문 합니까? 그리고 자신이 대답을 합니다. 자신의 상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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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임의로 아니
할지라도 직분으로 받았기에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받았는데 그 상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있는 권한을 다 사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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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접촉된 자는 세상에서 볼 때는 미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접촉된 자는 주님의 그 사랑에 눈이 멀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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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없이 주신 주님의 그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도의 권리 포기, 복음을 위한 권리 포기. 사도의 상으로서 권리 포기,
내가 감사하면서 검소하게 살고 저축해야 하는 이유가 이 복음 때문임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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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게도 정당한 대우를 해주시니 고맙고 감사합니다.
자비량 선교의 유익을 충분히 활용하는 일꾼이 더 많아져서 현대교회의 세습화와
계급화가 무색케 되게 하옵소서. 또한 재정적으로 여유 있는 교회(교역자)는 더
절제하고, 어려운 교회(교역자)는 더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므로 교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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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다워지게 하옵소서.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하신 주님,
내가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기억하고 내 모든 야망과 바쁜 일정을 포기합니다.
이 모든 이유가 주님 가시는 그 길을 따라 가기 위함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곡식을 대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기쁘게
적용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2015.11.15.sun.헤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