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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sakha
[펌]☞ http://blog.daum.net/smilesun/10376572
단군조선 실존 증명▷ 소련 과학원 시베리아 분원의 역사언어철학연구소가 발표한 학술서적 「고조선」의 주요내용을 간단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1982.11.11 경향신문에 소개)
*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뿐 아니라 만주와 요동지역을 포함하며, 만주와 요동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했다.
* 고조선은 1천년간 중국지배를 받지 않고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조선문화의 특징은 비파형단검 문화다.
* 중국계 기자(箕子)가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기자조선은 한(漢)대에 허위로 꾸며진 것이다.
* 한사군(漢四郡)은 현재의 한반도 밖에 존재했다.
* 고조선 지역 청동기의 시작은 기원전 2천년 후반기로, 고조선은 국가단계로서 초기 철기시대로 추정된다. --> 이러한 내용들은 지금 우리 국사교과서의 내용과 다르며 강단 비주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가깝다. 강단 주류 사학자가 국사교과서이 내용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이들 주장이 반영된 국사교과서에는 "청동기가 시작된 BC 1000년경에 와서야 국가단계로 발전했다"고 쓰여 있다.(한사군은 교과서에서 삭제되었지만 여전히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자들도 있음
▷ 일본의 五鄕淸彦(아고 교히꼬)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中原)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마치 중국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을 벌인 것이다. 한나라의 한(漢)이라는 국호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한(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간 것에 불과하다."
▷ 대만의 사학자 서량지(徐亮之)
서량지교수는 그의 저서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은나라, 주나라 무렵 동이족(東夷族)의 활동범위는 중국 산동반도, 하북성(북경 등지), 발해연안, 하남성, 강소성(상해 등지), 안휘성, 호북성, 요동반도, 조선반도 등이며 그 활동 중심지는 산동반도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학자 이제(李濟)는 물론 부사년(傅斯年)도 단군조선족(東夷)의 문화라고 인정한 용산문화(흑도문화)가 감숙성 옆 섬서성 지역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충분히 입증되는 사실이다. 또한 홍콩대학 임혜상교수나 서량지(徐亮之)는 은나라를 건설한 주인공들이 동이족이라고 밝혔다.[고사변(古史辯)] 결국 황하문명의 주인공이 은나라이므로 황하문명 건설의 주역은 동이족인 셈이다.
▷ 김병모 한양대 박물관장
그는 <상고사 왜곡, 그 실체와 대안>이란 글에서 한국의 청동기문화가 “중국대륙이 은왕조로부터 주왕조로 교체되는 정치적 혼란기인 3100년 전에 랴오닝(요녕) 반도 일대에 살고있던 동이족의 일파가 주변의 여러 종족의 압박으로부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으로 결속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사회적 결속의 주요 계기인 제사와 전쟁에 사용한 유물이 청동검·청동방울·청동거울인데, 이는 당대 중국인들의 청동기 유물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각각 고조선식 청동검·방울·거울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고조선식 동검이란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비파형동검’이라 불러온 것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 ‘고조선식 동검’을 사용하던 사회가 오늘날의 랴오닝반도에서 세력을 굳힌 뒤 팽창하여 송화강유역에서 대동강·금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그 지도자가 바로 단군이라는 것이다.
▷ 단국대 윤내현(61) 교수
윤내현교수는 그의 저서<고조선 연구>에서 중국 랴오닝성에 분포하고 있는 우하량과 홍산 등의 후기 신석기시대 유적지들이 중국 하·상·주왕조가 근거한 황허 유적지와는 다른 성격의 문화이며, 이들을 동이족의 문화에 귀속시켜 고조선과 연결짓는다. 윤교수는 특히 이 지역에서 ‘돌무지무덤’이 함께 발굴됐음에 주목한다. ‘돌무지무덤’은 베이징 이남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으며, 고구려의 돌무지무덤과 연결되는 우리겨레 고유의 무덤양식이라는 주장이다. 우하량 유적과 홍산문화를 고조선에 연결지으면, 랴오허의 서쪽까지도 고조선의 강역에 들어간다는 주장이 된다.
▷ 단군관련 史書 日왕실도서관에 가득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군조선'의 실체를 알릴 자료가 어딘가에 쌓여있다면 우리 상고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을 것이다. 상고사에 관한 국내의 기록은 수많은 전란(戰亂)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삼국유사 등 일부 서책에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 일제때 조선총독부가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에 관한 책들을 몽땅 약탈해 태워버렸다는 설까지 있다. 해방후 출간된 '군국일본 조선강점36년사'나 '제헌국회사' 등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명령에 의해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말까지 1년2개월 동안 고사서 51종 20여만권을 약탈했으며, '단군조선'에 관한 서적 대부분이 이때 소실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본 궁내청 쇼료부(書陵部:일명 황실도서관)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있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 관심을 끈다.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자료에 목말라 하는 상고사 연구자들에겐 '단비'와 같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 주장을 한 사람은 1962년에 사망한 박창화(朴昌和)씨, 1933년부터 12년간 쇼료부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던 朴씨는 해방후 이 사실을 최기철(崔基哲) 서울대 명예교수(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게 털어놨으며, 최근 崔교수가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1900년초 한성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충북 영동(永同)소학교와 배제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친 朴씨는 한국상고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있어 쇼료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게 됐다고 한다.
崔 교수는 "내가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45년에 朴 씨를 역사교사로 채용했으며, 그 후 쇼료부에 단군조선 관련 서적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으나 나와 전공이 무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며 "당시 朴 씨가 쇼료부에서 읽었던 단군조선 관련 서적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으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쇼료부 소장본들은 목록으로 정리된 것들만 접근이 가능해 朴씨의 말이 사실이라도 확인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혹시 새로운 한·일교류의 시대를 맞아 일본측이 쇼료부 문을 활짝 열어준다면 몰라도.》 (중앙일보 99.12.6일자 19면)
▷ 일제(日帝) "단군 존재 인정" - 총독부시절 문헌 발견
《일제시대 일본이 단군의 존재를 인정한 자료와 함께 단군에 대해 종합적으로 연구한 문헌 3권이 발견됐다. 서지학자 이종학(李種學·독도박물관장) 씨는 2일 단군 존재를 인정한 이왕직(李王職)의 문서 일부(9쪽)와 단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 발행 조선사료(朝鮮史料) 3권을 공개했다.
이왕직이란 일제시대에 조선왕족의 재산 등을 관리하던 기관. 이 기관에서 1938년 발행한 제목·필자미상의 문서 중 종묘(宗廟)의 기원 부분에 "단군은 정사(正史)에 전하지 않아 설이 분분하지만 단군에 대한 기록을 사실로 본다"며 "특히 사마천의 기록과 삼국유사·동사 고기 등 많은 역사서를 참고해볼 때 단군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조선사료 중 '단군조선(檀君朝鮮)' '단군건국설(檀君建國說)' '기자조선(箕子朝鮮)' 편은 단군의 출생과 이동, 그리고 신화의 구체적인 내용 등을 삼국유사·동국통감·동사강목 등 다양한 역사책을 바탕으로 총정리해놓고 있어 일제의 단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반영한다.
李관장은 "한반도 강점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단군의 존재를 부정했던 일제가 발행한 문서에 단군의 존재가 인정돼 있는 것은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중앙일보 99.10.3일자 10면)
▷ 고조선토기 출현 - 미송리형 토기
◎ 國內 소장가 ‘미송리型’ 7점 첫 공개/그동안 實物없어 중앙박물관은 자료사진으로 전시/59년 北韓 평북동굴에서 발굴한 것보다 완벽한 상태
남한에서 모습을 드러내리라곤 상상도 못하던 고조선토기들이 대거 출현해 학계는 놀라움과 함께 흥분에 싸여 있다. 그동안 국내에는 실물이 한점도 없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북한의 자료사진만을 전시하고 있던 고조선 미송리형(美松里刑)토기가 한 소장가에 의해 31일 7점이나 공개됐다.
경기도 의왕시에 사는 김영길(金永吉·81)옹이 소장한 이 유물은 그의 부친인 김봉명(金鳳明·북한에서 생사불명)씨가 일제때 구입한 것으로 지금까지 가치를 모른 채 보관해 오다가 이날 공개한 것. 토기들이 일상에 쓰인 후 실로 3천년만에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고조선 미송리형 토기는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까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문토기로 지난 59년 3월 북한이 평북 의주군 미송리 동굴유적에서 발굴해 널리 알려졌고, 북한에서는 비파형(琵琶型) 동검(銅劍)과 함께 고조선의 표지(標識)유물로 ‘최고의 토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토기는 북한 박물관이 소장한 토기들보다 상태가 더 온전해 놀라움을 더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토기에는 표주박의 위아래를 잘라낸 모양에 표면이 매끄럽고 고리모양의 손잡이까지 달린 전형적인 미송리형 토기 2점을 비롯, 목부분이 짧거나 바루(鉢盂) 모양의 토기 등 변형 미송리형 토기들이 5점이나 포함돼 있어 연구자들에겐 그 자태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 정영호(鄭永鎬·교원대 박물관장) 교수는 “광복 이래 고고학계에 내린 최대의 선물”이라며 한동안 상기된 표정이었다. (중앙일보1998-04-01 1면)
◎ 모두 國寶級… "고고학 대사건" 學界 흥분/日帝때 北서 수집… 가치몰라 50년 방치
고조선토기의 국내출현은 근래 보기드문 고고학적 대사건이다. 미송리형 토기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토기이기 때문. 학계가 흥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유전(趙由典)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아, 때가 되니 다 나오는구먼…”하며 반가움을 표시할 정도. 이번 유물의 등장은 ‘고조선 붐’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우리 학계의 고조선연구는 북한과 중국의 논문 등을 바탕으로한 간접연구에 그쳤던 게 사실. 이번 유물의 출현으로 1차자료를 근거로한 생생한 연구가 가능해졌다. ........ (중앙일보1998-04-01 3면)
▷ 근래의 고고학 발굴과 그 연구결과
근래의 고고학 발굴과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단군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개시는 다른 지역보다 늦지 않았으며,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는 황하(黃河)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 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날에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문화의 발전이 늦을 것으로 믿어왔다.
지금까지 확인된「청동기문화」연대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주거지 유적)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유적(고인돌 무덤)에서 서기전 2500년경으로, 만주(요녕성)에서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에서 서기전 241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중국 황하유역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에서는 서기전 2200년경으로, 시베리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문화인 미누신스크문화는 서기전 17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문화 개시연대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근래의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한민족은 외부로부터의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거나, "그 주체가 예·맥족(濊·貊族)이었을 것이다"는 등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한민족은 외부로부터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그리고 예·맥이라는 것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이다. 일제는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하여 한반도에는 청동기 유물조차 없다고 부인했다. 또한 우리문화의 기원을「시베리아 → 연해주 → 한반도」로 이어지는「전파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도 이렇게 교육되어지고 있다.
임효재(任孝宰; 1941∼)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전 한국고고학회 회장)가 발굴한 8천년(서기전 6천년경)된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유적(주거지 유적) 등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고유문화를 형성한 후, 전파문화를 흡수했음이 분명하다(흑요석제 석기는 백두산이 원산지임). 오산리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시베리아 신석기 유적보다 2천년이상이나 앞서는데 현재까지도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는 '한민족의 기원'은 물론, '문화전파설'은 하루 빨리 수정돼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단군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음으로 해서 청동기문화의 전개연대를 서기전 1000년경으로 못박아 단군조선 중기나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다거나, 특히 단군조선을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분리, 이를 바탕으로 아예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까지 있었다.
현행 국사교과서를 보게 되면 ·단군조선 건국: 서기전(BC) 2333년·청동기 시대: 서기전 1000년 ) 1300년(?) 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철기문화의 보급연대를 단군조선 후기인 서기전 300년경으로 잡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최근 발굴된 자료들에 의하면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800년경부터였고, 서기전 300년경부터는 강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단군조선인들이 청동과 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역사상에서도 매우 이를 뿐만 아니라, 그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다.
단군조선은 전기와 중기의 청동기시대로부터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된, 그리고 앞으로 발견될 이 기간의 청동기와 초기 철기의 유적과 유물은 모두 단군조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최고의 희귀 장신구인 '유리'가 단군조선시대인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우리나라에서 제작·사용됐음이 밝혀져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동아일보 1997년 4월 12일자 29면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최 주(崔 炷: 65·책임연구원) 박사팀은 1995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유리구슬에 대해 성분분석을 한 결과, 이 구슬이 서기전 5세기쯤 한반도에서 나는 납을 혼합해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간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리문화가 초기 철기문화와 함께 서기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밝혔었다. 이 유리구슬은 바륨(Ba)이 섞여 있는 중국계통의 유리와는 달리 바륨이 들어있지 않는 등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이 땅에 일찍이 유리문화가 뿌리 내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성분분석 결과 유리구슬에 산화납(pbo)이 1.7% 함유되어 있음이 증명됐는데 산화납은 낮은 온도에서 유리를 만들 수 있게 하면서 유리의 내구성을 높여주는 첨가물질로, 따라서 산화납의 존재는 유리제조 기술이 매우 앞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기전 5세기경의 유리구슬에서도 산화납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주 박사가 "금강유역에 발달한 청동기문화는 중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실험결과로 유리 제조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개발되었다는「새로운 역사」를 밝혀낸 것이다. 우리나라 '국보급'원로과학자인 최 주 박사는 특히 비파형동검이 남한의 원료를 써서 만들어진 것임을 입증, 중국으로부터의 유입설을 뒤엎었다. 그의 지적으로 우리 교과서의 단군조선 유물인 청동기 등 고대금속유물의 기원과 성분 특성 등에 대한 수정이 이뤄지고 있다. 중앙일보 1998년 4월 1일자 1면과 3면에 보면, 국내에 한점도 없던 단군조선의 미송리형 토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 최태영 박사 - 개신교도. YMCA원로회 회장
"오늘날 개신교에서 단군을 반대하는 것은 다 무식해서 그렇다.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단군은 역사인물… 신화 아니다
최태영 박사 회고록 '인간 단군을 찾아서' 펴내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 권두의 기이(奇異) 제1 단군을 얘기하는 항목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 (昔有桓國 석유환인)'는 '옛날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因 석유환국)'를 일본인들이 변조한 내용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법학자로서 반세기 또 상고사 연구자로서 사반세기를 꼿꼿하게 살아온 최태영(100, 학술원 회원) 박사는 최근 회고록 '인간 단군을 찾아서'(학고재)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桓因과 桓國을 둘러싸고 민족주의 사학자와 강단 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을 펴왔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증거를 내놓지 못해 논란이 계속돼 왔다. 그러나 최박사는 이번 회고록을 통해 서울대 소장본 '삼국유사'와 1902년 도쿄대가 발행한 '교정 삼국유사'를 증거물로 제시 '桓因'은 '桓國'의 잘못임을 밝혀냈다. 따라서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수록된 '삼국유사'의 '桓因(하느님)의 아들..' 부분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학계의 지루한 논쟁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최태영 박사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인용한 고기(古記)에는 '옛날에는 환국이 있었다. 그 나라에 높은 서자 벼슬을 하는 환웅이 있었고 마지막 환웅대에 단군이 나타나 조선을 세웠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국시대 이후 지배이념이 된 불교의 영향으로 어떤 책들은 桓國을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帝釋) 또는 桓因으로 변조함으로써 현재 전해지는 삼국유사'의 판본에는 '昔有桓國'이 '昔有桓因'으로 변조되어 있고 급기야 1920년대 한국사 왜곡에 나선 일본인들이 이 점을 결정적 빌미로 삼아 이를 변조한 후 정본으로 내세워 단군을 말살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최 박사에 따르면 '桓國'이 '桓因'으로 바뀐 것은 원래 환국시대가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것임에 반해 불교적이고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은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다. 왜냐하면 불교의 부처는 단군의 고조선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후대의 존재이므로, 환국은 불교가 생기기도 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연은 '삼국유사'에 고기를 인용하여 분명히 桓國이라고 역사와 종교를 구별해서 기록했다"면서 "'昔有桓國'으로 기록된 '삼국유사'에도 그 아래 주를 달아 '환국이 말하자면 제석'이라는 설명을 달아놓았지만 주(註)는 일연 이후 후세인들이 달아 놓은 것으로 별 신빙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최박사는 최근 입수한 '조선사편수회 회의록'을 인용, 최남선도 昔有桓國이 昔有桓因으로 변조한 데 대해 일제에 항의했음을 밝히고 있다. '... 회의록'은 "한자의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문(全文)의 해석상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크다. '삼국유사'의 단군 고기 중에 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던 것을 昔有桓因이라고 고친 천인 이마니시 류의 망필을 인용한 것이 바로 그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는 5월 2일(음 3월 28일)로 만 100세를 맞는 최태영 박사는 이번 회고록을 통해 일본 후지산 아래에 있는 지하서고에 1200년 동안 보관되어온 '미야시타(宮下) 문서: 신황기(新皇紀)'를 직접 탐방,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들을 깨우치고 천황이 됐다"는 역사적 사실도 확인했다. 이와 함께 강단파의 거주 고(故)이병도 박사가 최박사의 설득으로 식민사학을 반성하고 '단군은 실재 인물'이라는 논지를 발표하게 된 배경도 증언하고 있어 주목된다. 최태영 박사는 "우리나라는 신시(新市) 시대는 몰라도 단군의 고조선 개국부터는 분명한 역사이지 신화가 아니다. 단군은 곰의 아들도 아니요, 하느님도 아니요, 단지 우리 조상인 자연인"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일제가 나서서 학계를 동원하고 군-관이 합작해 신라가 한국사의 시작이라며 일본에 없는 수천년의 한국고대사와 단군조선을 미신으로 돌려 잘라 버리고 일본 고대사는 엿가락처럼 늘렸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4월 24일자 - 노정용 기자)
고조선이 실존했다는 것은 국사광복회 최재인 회장 등 재야사학자는 물론이고 신용하(서울대)·윤내현(단국대)교수 등 강단의 비주류학자나 노태돈(서울대)·이만열(숙명여대)교수 등 강단의 주류사학자들까지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다만 고조선의 국가성립시기가 BC2333년이냐 BC10세기냐, 고조선 중심지는 ‘요하’냐 ‘평양’이냐, 한사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나, 안에 있었나 등의 쟁점에 대해 통일된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삼국유사의 신화적 서술만을 문제삼아 단군을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단국대 윤내현 교수는 "이런 시각은 신화가 역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피상적 분석"이라고 지적한다. 윤 교수는 "단군신화는 고조선이 건국되기까지 우리 민족이 성장한 과정을 신화란 형식을 빌려 말해주는 역사적 자료이며 따라서 단군사화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늘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부족(환웅)이 곰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부족(웅녀)과 연맹을 맺고 그 연맹이 강성해져 고조선을 세웠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며 "환웅과 웅녀의 결혼은 후기 신석기 시대 여러 마을이 연맹을 맺었던 고을나라 시대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주간조선 1999.10.28 /1575호)
강단의 주류학자에 속하는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조차도 "단군을 볼 때 '역사적 실체'와 '역사인식'을 혼돈하는 데서 단군 논란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학계에서는 단군을 고유명사가 아닌 고조선 군장의 칭호 즉, 왕이란 뜻의 일반명사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라며 "고조선이 역사의 실체인 이상, 그 나라의 군장으로서 단군이 존재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단군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일부의 시각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벌어진 단군상 훼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종교적 상징이 아닌 민족적 상징으로서 세운 단군상을 훼손한 것은 유감스런 사태다. 현대는 종교 다원주의 사회다. 다른 종교에 대해 포용적이고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더구나 신앙의 대상이 아닌 민족의 상징에 대해 지나친 거부반응을 낼 필요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기독교인들은 의식한, 아주 몸을 사린, 조심스럽고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다.
고조선이 실존했다면 그 고조선을 통치하는 통치자가 존재했을 것이고 그 통치자의 칭호가 "단군" 오늘날로 치자면 "대통령"인 것인데, 그러한 단군을 신화라 하며,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인물로 간주하는 것은 단군조선사 2,000여 년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 없으니 조선왕조 500년을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약 기독교인들이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동상은 우상이라서 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려면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세종대왕, 이순신 동상 등도 다 때려 부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국조 단군보다 절을 더 많이 받고 있는 분들이 전국 도처에 널려 있다. 국조 단군이야 단군교니 대종교 빼고는 누가 그 앞에서 절을 하고 있나? 오히려 현충사에 계시는 이순신 장군동상이 절을 받았으면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니 그 동상을 한 번 부숴 보라! 왜 그 동상들은 손도 까닥 못하면서 단군의 동상만 부수는가? 한마디로 만만하기 때문이다. 지키려면 철저하게 지키든지 말려면 말든지 ......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는 자들이 ........
단군동상을 훼손한 자들이 구속을 당하고 실형을 선고받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용서를 비는 꼴이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다. 그렇게 나약한 신념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과연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있는지 살펴보자.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레위기26:1]
목상은 십자가 상이며, 주상은 예수의 상이다. 석상은 마리아 상이니 성서는 오늘에 일어날 일을 너무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책이다. 이사야서45장20절에는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니라."라고 쓰여 있다.
2천 년 전에 죽은, 다시 말해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신(예수)에게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의 목에는 나무십자가가 걸려있다. 십계명의 제2계명에도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고 하지 않았는가?
십자가는 로마시대에 살인범이나 강도, 범법자, 국가시해사범 등을 벌주기 위해 나무로 만들었던 사형틀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러한 저주의 사형틀을 목에 걸고 다니며 집안에 걸어 놓기도 하고 교회 지붕 꼭대기에 세워 놓고 바라보며 기도하고 우상숭배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예수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이라고 쓴 나무 십자가를 들고 다니며 전철이나 공원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떠들고 다니는 광신자들이 많다. 개신교인들은 천주교인더러 우상숭배 운운하며 욕할 입장이 못된다. 그들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십보 백보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자신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구실 삼아 우리 민족 국조의 목을 자르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의 무지와 반민족적 성향은 널리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 족보나 역사를 줄줄 외울 줄은 알아도, 외침에 의해,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고 잘려진 우리 민족사의 신음소리가 안중에나 있을 것인가?
그들은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일지사)나 서희건 현 조선일보 80년사사(社史) 편찬실장이〈주간조선〉에 1985년 10월 20일자부터 1986년 10월 26일자까지 총 51회에 걸쳐 '특별기획'으로 연재한「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그 뒤 책으로 나옴-≪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전3권, 고려원)] 등의 서적이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할뿐더러, 설령 있다는 것을 알아도 <성경>을 한번이라도 더 읽으면 더 읽었지 우리민족의 역사서를 한번이라도 읽어 봤겠는가?
황사영이 한 짓(백서 사건)을 보면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들에게는 민족보다 전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들이 집안에 걸어놓고 있는 예수의 초상화도 넓게 보면 우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초상화를 누군가가 훼손한다면 기분 좋겠는가? 참으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자기네 우물 안 세상만 진리고, 우물 밖은 다 거짓 세상이란 말인가? 자기네 상(像)은 우상(偶像)이 아니고, 남의 상(像)은 우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
[펌]☞ http://blog.daum.net/smilesun/1037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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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니 고조선을 보는구나, 미송리형토기
미송리형 토기(美松里型土器)
이 토기는 기원전 10~5세기까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문토기이며, 고조선(古朝鮮)시대의 토기이다. 1959년 평북 의주군 미송리의 동굴유적에서 고조선토기가 발굴되자, 학계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 토기는 구연부(입 부분)는 넓으나 목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점 좁아져 동체부(둥근 몸체)와 연결되었다. 또 동체부는 목부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배가 불러오다가 밑으로 내려가면서 점점 축약된 모양이다. 동체부만을 보면 세로로 타원형을 이루고, 전체적인 모양은 표주박 위아래를 잘라버린 것같은 단지이다. 그리고 제일 배가 부른 부위에 물동이형 손잡이가 1쌍 달려 쓰임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언젠가는 빛을 볼 지 모른다
1998년 4월초이다. 「중앙 일보」는 《고조선 토기 3천년만에 햇빛》이란 기사를 독점으로 게재하며, 잊혀진 왕국 고조선을 20세기말의 우리에게 새롭게 각인시켰다. 의왕시에 사는 김영길(金永吉, 1917~ )이 대를 이어 소장한 토기 7점과 고구려시대의 금제품들을 공개한 기사이다. 토기가 일상생활에 쓰인지 실로 3,000년만에 햇빛을 본 것으로, 근래 보기드문 고고학적 대사건이었다. 그동안 북한과 중국 논문에 바탕을 두고 근근히 연구되어온 고조선연구가 바야흐로 ‘고조선 붐’을 예고하였다. 고고학계가 흥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분야의 권위자인 정한덕(鄭漢德)교수는 ‘미송리형 토기가 여기서 나타나다니…’하며 말을 잇지 못했고, 조유전(趙由典) 관장은 ‘아, 때가 되니 다 나오는구나.’하며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김영길은 강원도 안변에서 김봉명(金鳳明)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봉명은 소금장수로 주로 청진에서 물건을 사서 압록강, 두만강 주변의 도시나 만주지방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장사한 돈으로 다량의 고미술품을 수집해 일제때에 이미 상당한 양이었다고 한다. 김영길이 그 소장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 김영길은 17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23살 때에 중앙 대학교 법학과를 들어갔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인민군들이 친일파라고 몰아세웠다. 생각다 못한 그는 1946년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월남하였다. 그런데 1947년 서울집으로 동생 김영관(金永寬)이 찾아왔다. 그때만 해도 기찻길은 끊어졌지만 남북왕래는 비교적 수월했다. 김영관은 부친의 말을 전하며 10상자나 되는 고미술품을 김영길의 집으로 가져왔다.
“유물을 가지고 있다가 고생할 수도 있고, 또 서울에서는 빛을 볼지 모른다.”
그의 부친이 한 말이다. 그렇지만 김영길은 고미술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관만 했다. 난리통에도 그대로 집에 둔 채로 피난을 갔고, 그 이후는 사회활동에 바빠서 아예 잊고 살았다. 이 고미술품이 세상에 빛을 보게된 것은 아들인 김대환(金大煥)에 의해서이다.
김대환은 6년에 걸쳐 전국 도요지를 샅샅이 답사하며 도자파편을 수집할 만큼 우리 문화재를 아끼는 사람이다. 현재도 도자사 연구에 꼭 필요한 도자파편을 시대별로 분리하여 도록을 만드는 중이다. 1993년 한중 수교 이후에 중국과 북한의 문화재 문헌을 보던 김대환은 집에 소장된 고미술품들이 고구려유물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1994년 <고구려특별대전>에 일부 유물을 출품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전시회는 고구려산성과 고분벽화를 위주로 한 전시회였는데, 자발적으로 출품하였다. 1996년 6월, 김대환은 그 동안 소장하던 5세기경의 청동삼환삼족정(靑銅三環三足鼎)을 위시하여 32여점이나 되는 고구려유물을 「한국미술품경매전」에 출품하였다. 하얏트호텔 리젼씨룸에서 열린 경매에서 20여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낙찰되었다. 천년을 넘게 전해져온 귀중한 유물이 공공기관으로 들어가 연구자료로 활용되게 되었다.
출처가 불분명하다
그런데 1년 세월이 지났을 때다. 고고학계 내에서 학자간에 불협화음이 들리더니, 한병삼(韓炳三)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경매를 통해 구입한 김대환의 소장품이 가짜일지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심지어 김영길이 인사동 골동가게를 뻔질나게 출입하는 장사꾼이란 음해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이 나라 고고학계의 해묵은 알륵싸움으로, 김대환은 대단히 화가 났다. 그래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비장해온 나머지 고구려유물을 모두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왕 공개할 바에는 고구려연구회의 김희찬박사가 고조선 토기라고 확인한 것까지 모두 공개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세상의 의심은 한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사의 원류(源流)로 인식되는 까닭에 학자나 일반인에게 모두 지대한 관심거리이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관심을 가지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지적호기심까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자마다 주장이 상이하여 궁금증만 더해 갔다. 명확한 사실로 밝혀진 것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국시기만 해도 기원전 4, 5세기경이라는 학설과 기원전 3,000년 이전에 이미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등 다양하다. 또한 고조선의 정확한 위치와 그 영토에 대해서도 논쟁이 분분하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안에 위치했다는 학설과 요하(遼河)에서 청천강까지 뻗쳐 있었다는 요동(遼東)중심설이 혼재되어 주장된다. 어떤 경우는 애국심 논쟁까지도 비화되었다. 최근에는 단군능(檀君陵) 조성과 함께 북한은 그 중심지를 대동강으로 못박았고, 한국의 학계는 여전히 요동을 그 중심지로 보고 있다.
이처럼 고조선에 대한 역사해석이 분분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료(史料)부족 때문이다. 그 결과 국내의 고조선연구는 한마디로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다. 비록 청동기유물이 남아있긴 하지만, 대부분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것들이고, 또 일제시대에 북한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극소수만 남한에 전해질 뿐 정작 미송리형 토기는 한점도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실물없이 빛바랜 사진만을 전시해 놓았을 뿐이다.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남한측보다는 북한측이 더 적극적이다. 북한당국은 1959년 미송리유적을 발굴하고, 이어서 64년에 평북 용천군 신암리 유적을 발굴하는 등 고조선연구가 활발하였다. 특히 60년대에 중국과도 협약을 맺어 만주지역의 고조선유적을 발굴하고 이때 출토된 많은 고조선유물을 북한으로 반입하였다. 1993년 단군릉을 조성한 북한은 고조선이 동양최초로 금속문화를 창출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학설을 뒷받침해줄 만한 역사적 자료는 아직 부족한 상태이다.
김영길이 공개한 고구려 금제품들은 고구려의 공예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다양하였다. 현재까지 고구려 연구는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만 집중돼 왔고, 최근에는 훼손된 벽화로 한,중 간에 잡음이 일자 중국측은 아예 고분입구를 봉쇄해 버렸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고구려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금제품들이 출현하자, 학계는 국내에서도 고구려연구가 한층 활발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중간 고리 귀걸이’는 중간 장식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독특한 형식이고, ‘금낚시바늘’은 실구멍이 없어 부장용으로 별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로 생활과 부장 풍습에 대한 새로운 연구자료이다. 또 금바늘과 금실은 처음 나타난 것들로 출토된 무덤이 왕이나 수장급의 것이었다고 생각든다.
미송리형 토기와 고구려 금제품들이 공개되자, 연구도 활발해져 서길수(徐吉洙) 교수는 「고구려 수공품에 대하여」, 서영수(徐永洙)․김희찬(金希燦) 교수는 「미송리형 토기와 청동기시대 유물에 대하여」란 논문을 각각 발표하였다.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연구가치는 매우 크다고 보겠다.
김대환은 가족회의를 열어 유물의 처리를 의논하였다. 세상에 널리 소문이 났으니 이 기회에 이용하여 기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다음날, 김대환은 미송리형 토기를 포함한 고구려유물 71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겠다는 생각으로 박물관을 찾아갔다. 발걸음에 온갖 생각이 교차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물려준 문화유산이 제대로 평가되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연구할 수 있다면 후손된 도리로써 조상에 대해 부끄럽지 않겠다고 생각 들었다.
그런데 박물관 관계자는 종이를 한장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양식에 뭐 이외에 몇 점이라 기제하고, 유물을 가져오면 됩니다.” 참으로 황당한 경우를 만났다. 평생을 마음 졸이며 소장한 문화재이며 나아가 세상에서 몇십억 원은 호가한다고 하는 고미술품이다. 나라를 생각하여 큰맘 먹고 기증한다고 해도 그들은 반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물건으로 치부하며 귀찮아하는 표정이었다. 양식 한 장을 들고 필자를 찾아왔을 때, ‘기증하려면 모든 내용을 꼼꼼히 적어 사진까지 남겨 놓은 다음에 하세요.’라고 말해 주었다. 그후에도 기증 의사를 다시 타진했더니, 국립중앙박물관은 무슨 영문인지 기증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유물 자체는 진품 고조선토기라는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데다 북한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로 확인될 경우 북한과 말썽의 소지가 있어 기증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1998년 9월, 박영복(朴永福) 유물관리부장이 한 말이다. 황당하다 못해 웃음이 터질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20여 만점의 유물 중에서 과연 출처가 확실한 것이 몇점이나 되겠는가? 이를 두고 어떤 학자는 “박물관 운영을 공무원에게 맡겨서는 안되는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 예이다. 유물을 탐내지 않는 박물관 관계자들이 한심스럽고, 관계 전문가들이 연구할 길마저 막아버렸다,” 라고 개탄하였다.
그런데 한국고고학회(회장 김종철)만은 ‘불법적으로 외국에서 흘러들어왔을지 모를 유물을 민족문화의 상징기관이 기증받을 수는 없다. 중앙박물관의 이번 결정이 국․ 공․ 사립․ 대학 박물관을 막론하고 당연한 듯 이뤄지는 불법문화재의 구입관행을 근절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출처를 따지지 않고 고미술품을 구입하는 관행이 문화재 도굴을 부추길 것을 염려해 한 말이었으나 본말이 전도된 억지논리이다. 국내에 소장된 고미술품에 대해 한국고고학회는 과연 몇점이나 그 출처와 내력을 밝혀냈는가? 국보급 문화재라도 그 내력을 밝혀 우리 문화재를 더 소중히 생각할 기회를 주었더라면 필자가 굳이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소장보다는 국가에서 보관할 때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연구와 감상의 기회를 준다는 공공성에 있다.
하지만, 고미술품은 때에 따라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다. 스스로 자기 갈 곳을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받길 거부했다는 뉴스가 나가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려대학교의 김정배총장이었다. “저희 대학교박물관에 기증해 주십시오,”
김영길은 생각했다. 외아들인 김대환도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자기 또한 경영대학원 연구과정을 수료한 고려대학교이다. 결코 거부하기 어려운 인연이 중압감으로 몰려왔다. 라마다르네상스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김영길과 김총장은 그자리에서 기증날짜와 유물내역을 정해버렸다. 고조선 미송리형 토기 7점을 포함하여 고구려 금귀걸이 등 모두 65점이었다. 1998년 9월 30일, 고려대학교는 보직 교수 1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영길이 평생을 소장했던 귀한 문화유산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증받았다. 그 대가로 박물관 내에 기증자의 뜻을 살린 전시실을 별도로 꾸미기로 하였다. “이 문화재가 교육과 연구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길 바랍니다.” 짧은 인사말을 마친 김영길의 눈에 북쪽에 남겨둔 부친에 대한 그리움이 스쳐 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참고: ①「고구려연구 제 5집」․고구려연구회․학연문화사, ②김대환의 증언)
[펌]☞동북아시아 청동기문화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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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미송리식토기
예맥족(穢貊族)의 유물로 추정되며, 1959년 평북 의주군(義州郡) 미송리동굴유적의 윗층인 민무늬토기문화층에서 전형적인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미송리식 토기’ 또는 ‘미송리형 단지’라고도 부른다. 이 토기는 미송리 외에도 현재까지 평북 용천군(龍川郡) 신암리(新岩里), 압록강 상류의 자강도(慈江道) 중강군(中江郡) 장성리(長城里) 및 토성리(土城里), 청천강 유역의 세죽리(細竹里) 및 구룡리(九龍里), 대동강·재령강 유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즉 이런 것을 고려하여 미송리식 토기는 비파형동검과 더불어 고조선의 세력권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왜냐하면, 미송리식 토기가 출토되는 지역에서는 다른 토기들이 나오지 않는 데다가 문헌상 고조선영역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한반도의 서·중·남부 지구, 중국 길림·장춘 지구, 요녕 동부지구, 요서지구, 요동반도 일대에 분포한다.
종류에는 항아리, 굽 달린 발[鉢], 단지[壺]가 있고 청동도끼도 더러 있다. 그러나 단지가 주로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미송리형 토기라 함은 단지형태를 말한다. 이 토기의 모양을 보면, 대체로 몸체는 표주박 아래위를 수평으로 조금씩 잘라낸 형태이다. 밑면은 납작바닥 혹은 들린바닥이다. 윗부분은 밖으로 바라진 넓은 아가리가 조금 높게 얹혀있다. 몸체 중간부분에는 다리모양, 입술모양 또는 젖꼭지모양 등의 손잡이가 한쌍 내지 두쌍씩, 혹은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 각 한쌍씩 대칭으로 붙어있는 것도 있다. 특징적인 것은, 몸체 윗부분에 5∼6개 선을 한 단위로 하는 집선(集線)무늬가 가로로 3단 둘러져있는 것이 주종이라는 것이다. 사용된 흙은 사질(砂質)의 태토(胎土)에 운모가 섞여있고 겉면은 매끄럽게 갈아져 있다. 크기는 대개 높이가 20∼30cm이고 색깔은 거의 회갈색, 흑갈색, 적갈색이다.
[펌]☞[청동기]미송리식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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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송리형 질그릇(높이:19.5cm) 보시기(높이:14cm) 질그릇(높이:1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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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설은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농간
경기대 법대 교수이자 국사찾기협의회 부회장인 고준환 교수가 개천절을 맞아 '개천절과 단군조선사'를 기고해 왔다. 고 교수는 언론인 출신으로 우리 상고사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바 있다....편집자 주
지금부터 4336년전 10월 3일은 왕검단군께서 첫 민족국가 조선(고조선 또는 단군조선)을 개국하신 날이다. 우리는 10월 3일을 4대 국경일의 하나인 개천절로 자랑스럽게 경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47대 단군 2095년의 단군조선사를 실사(實史)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신화로만 생각하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실사로 생각하겠지만, 사대식민사학자를 비롯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신화로 생각하는 것이 실정인 것 같다. 지금은 남북해외의 한민족 8천만이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민족대통일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려면, 주인의식을 갖고, 그 뿌리인 민족자주 역사를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한 바, 사대식민사관이나 유물계급사관등으로 왜곡돼서 잘못 알려진「2천년 반도의 패배사」를 극복하고, 단군조선사를 포함한「반만년 대륙민족의 영광사」를 되찾아 자리매김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단군조선사 2천여년이 신화로 몰려 부정되는 엄청나게 잘못된 사태가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따른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의 조작왜곡 농간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일제식민사학의 첫 기록은 일본의 사학자 동경제대의 시라도리(白鳥庫吉)교수가 AD 1894년 단군고에서 단군사적은 불교설화에 근거하여 가공한 선담이라 했고 이어서 나가통세(那珂通世)가 AD 1897년 사학잡지 5·6집에 발표한 조선고사(朝鮮古史)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승도(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대사를 지칭)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라고 조작했고, 그에 이어 1902년 금서룡(今西龍 = 이마니시류 이병도박사의 스승)의 「단군고」등이 뒷받침하여 단군을 철저히 부정했다.
또 AD 1910년 한·일 합방이후 일제가 전국에서 민족고유사서 20만권을 모아 불사르고 조선사편수회를 만들고, 한국사를 일본역사 2600여년보다 짧은 2천년이하로 하기 위하여 단군조선사 2천여년을 빼버리고 본격적으로 단군신화론을 왜곡하여 널리 전파하였다.
8·15광복 후에 이승만정권은 민족정기를 찾는데 노력을 경주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를 탄압하고 해체하는 등 반민족적 행태를 나타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우리 역사 말살·왜곡에 참여한 이병도박사(서울대 사학과 주임교수), 신석호박사(고려대 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초대 위원장)등이 해방 후에도 식민사학에 대한 반성없이 강단사학을 사실상 장악하여 일제식민사학이 유지되고 전파되게 한데 큰 원인이 있다 하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2천여년의 단군조선사를 실증과학적으로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단군조선 시대의 유물유적과 사료인 문헌자료를 살펴보는 것인바, 먼저 단군조선의 유물유적을 살펴보자.
△ 왕검단군이 단기 51년 부루태자 등을 시켜 강화도에 쌓은 정족산성과 마니산 참성단
△평양 강동군 대밝산의 구을단군릉
△흘달단군 50년(BC 1733년)에 벌어진 5성취루(五星聚婁)현상의 과학적 입증(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와 라대일박사가 천문과학으로 입증)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 정효공주 묘비(환단고기 기록 입증)
△ 광개토대왕비와 충주시 노은면 불상(장수왕 연호가 건흥이라는 환단고기 기록 입증)
△ 단군조선의 성터(평양 낙랑성터, 하얼빈 대전자성터, 지가영자성터, 내몽고 적봉성터 등 60여곳)
△ 단군조선시대 암각화(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령 양전리 암각화, 함안 도항리 암각화 등)
△ 단군조선시대 고인돌(세계고인돌의 반이 한반도에 몰려있다. 그중에도 많은 곳은 강화도, 평양 문흥리 등 10개 지역, 경기 파주군 옥석리, 전북 고창, 전남 화순, 대구 대봉동 지역 등)
△ 단군조선의 청동기문화출토(초기 청동기유적∼요동지역, 평북 신암리 세죽리유적, 평양시 금탄리유적, 황해도 봉산군 신흥동 등 7개 유적, 함북과 길림성 50개이상 지역에서 출토) (발달된 비파형청동검∼단기 13세기 요동지방부터 한반도를 거쳐 단기 20세기경에는 일본구주지방까지 전파됨.)
△ 미송리형토기(단군조선의 대표적 토기, 평북 의주군 미송리동굴서 질그릇과 유골2구등 발굴), 채색토기, 흑색토기, 나무곽무덤, 귀뜰무덤, 벽돌무덤 등 다양한 출토물들 많음.
다음엔 단군조선사에 관한 문헌자료를 살펴보자.
단군조선에 관련된 사서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 응제시주, 해동역사, 산해경, 위서(魏書), 사기(史記)등 많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민족자주사학자와 강단식민사학자 사이에 사료적 가치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서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이다.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에 대하여 내용을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위서로 몰고가는 편에선 강단사학자는 이기백, 조인성, 송호정, 박광용, 송찬식 교수등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 선 것은 조인성교수로 민족자주사학자들은 본다.
진정한 국사를 찾는 남·북사학계의 결론은 규원사화는 사료적 가치가 있음은 물론 위서가 아닌 참된 사서임에 틀림없고, 환단고기는 부분적으로 가필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에 있어 이를 더 연구해야하나,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조인성교수는 AD 1988년 논문 "규원사화와 환단고기(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 일조각 71쪽)등 여러 논문에서 일부용어가 현대어라든지,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 규원사화 단군기를 기술하는데, 저본인 진역유기나 원저본인 조대기(朝代記)를 안보았을 것이라는 것 등을 내세워 위서로 몰고 갔으나, 민족자주사학자인 이상시 변호사가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여 제압하고, 규원사화 단군기는 단군조선의 실사라고 결론지었다.(이상시,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고려원, 1990, 192면 참조)
조인성교수의 이론을 제압하는 이상시 변호사의 글과 대동소이한 글이 북한에서도 나왔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북한 국사학계를 사실상 대표하는 후보원사 원로교수인 손영종박사는 AD 2002년 10월 3일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개천절 남·북민족공동행사의 하나로 진행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공동학술토론회"(필자참석)에서 "단군 및 고조선 관계비사들에 대한 이해 -규원사화를 중심으로-"에서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니며, 참된 사서로서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은바, 이를 발췌해 본다.
《규원사화》는 저자인 북애자에 의하면 고려말의 청평산인 이명이 쓴《진역유기》(3권)을 대본으로 삼고 거기에 저자가 안팎의 사서들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들을 뽑아서 추가하고 일정한 자기식의 설명을 가하기도 한 것이며《진역유기》는 발해사람들이 편찬한《조대기》를 참고하여 쓴 것이다.《규원사화》가 위서가 아니라고 보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 내용에서 이 책의 저술년대인 1675년 이후에 추가기입하였다고 볼만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① 우선 인명에서 이 책에 보이는 사람이름들은 다 옛스러운 느낌을 주며 다른 비사들에서 보는바와 같은 중국식성씨를 가진 인물은 없다.
② 다음 지명 역시 매우 옛스러운 고장이름으로 된 지명이거나 소밀성, 길림 등과 같이 17세기 중엽에는 조선에도 잘 알려 진 지명들이다.
③ 인용서목도 다 17세기 중엽이전에 출판 또는 필사, 보급되여 있었던 책이다. 또 책이름을 밝힘이 없이 인용 또는 이용한 글도 다 그 이전시기의 책들의 내용이다.
④ 사건, 사실들의 서술과 그에 대한 보충적해설도 조선과 중국의 고전, 역사책들에 나오는 것들과 그것을 가지고 자기식으로 해설한 것으로서 17세기 사람으로서는 능히 그렇게 쓸수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⑤ 관직명을 보아도 중앙관직명인 《단군8가》는 매우 옛스러운 명칭으로 되어 있고 수상(首相)이니, 상장(上將)이니, 호군(護軍)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쓰지 않았으며 지방관직도 여러《후》,《남해상장》(上長)등은 보이지만《태수》니《녹살》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없다. 이 역사 근대이후의 가필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⑥ 사상, 이론, 개념들도 17세기 사람들이 능히 쓸 수 있는 내용과 어휘들로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예컨대《태백일사》등에 보이는《천부경》이나《삼일신고》등은 나오지 않고《서경》같은데도 보이는《대고(大誥)》가 나온다.
⑦ 과학, 기술관계 서술에서도《단기고사》등에 보이는 근대부문과학도서나 비행기, 잠수함 같은 근대기술의 산물은 나오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규원사화》단군기에 보이는《문화의 계발》이라는 표현에서《문화》란 말은 서유럽근대의《Culture, Kultur》를 번역한 말이라고 보지만 그것은《문치, 교화》의 준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고려사》성종 10년조에 나오는 여진관계기사의 연대를《광종 10년》이라고 했으니 같은 내용으로 된《해동역사》를 베낀것이고 따라서 1823년 이후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북애자와 한진서가 다 같이 선행한 어떤 기록을 보고 쓴 것이라고 보면 문제로 될 것이 없다.
북한에서는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태백일사, 삼성기 그리고 발해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 등을 국사서적에 정식으로 인용하여 제1대 단군성조부터 47대 고열가단군까지 47대 단군과 단군세계를 기술하고 있다.(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3. 40쪽 등 참조).
조인성교수가 계연수선생이 펴낸 환단고기를 위서로 모는 대강 요지는
① 국가형성과 관련된 청동기 사용연대에 관하여 BC 10세기 전으로 올라가기 어려운데, 단군조선 건국은 BC 24세기로 올라가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은 한국역사를 일본역사 2600년보다 줄이기 위해 한국 청동기문화를 BC 5세기∼8세기경으로 잡았으나, 만주·몽골·중국등지에서 나오는 청동기문화는 BC 30세기정도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중국사학계의 유력 학설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②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이나 용어가 근대용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寧古塔, 文化, 父權, 原始國家〉등이다. 이들 용어는 옛날에도 사용했을 수도 있고, 필사하고 정서하며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필이나 손질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과학적으로 엄밀히 가필여부를 밝혀야 한다.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지금도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이 있다면, 우선 다음과 같은 6가지 실증사례에 대한 반증을 제시해야 한다.
①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입증한 13세기 흘달단군 50년 천문학적 5성취루 현상
② 발해 3대문왕 대흠무가 "대흥"이라는 환단고기 기록이 정효공주묘비에서 입증된 점
③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를 세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처음 나오는 바, 이것이 김병호씨의 저서 "고구려를 위하여"와 KBS역사스페셜(2001. 5. 16)에서 입증한 점
④ 환단고기 단군세기 왕검단군 51년에 마니산 참성단과 정족산성을 쌓은 바, 지금까지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음
⑤ 평양 강동군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는데, 환단고기에 구을단군이 전국 순행 중 붕어하여 평양 대박산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음
⑥ 규원사화나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사학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원칙에 입각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현재 그런 사람이 없음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자의 거두 이병도박사가 타계직전 과거에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박사와 국사찾기협의회원들의 우정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9일지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반 유물유적과 사료로 볼 때, 왕검단군은 지금부터 4336년전 아사달(백두산 천평 비정)에 첫 민족국가 조선(朝鮮→朝光鮮明에서 따옴)을 건국하셨다. 그 이념은 홍익인간, 광화세계(光化世界=光明理化)를 내용으로 하는 신선도로서 천하평화를 지향하였다.
고조선 초기 국경은 북으로 대황(흑룡강 흥안령 산맥)서는 설유(몽고 훈육), 남은 해대(중국 산동성), 동은 창해(한반도 동해)까지였다고 규원사화는 전하고 있으며, 그 후에 영역의 부침이 있었다. 조선의 수도는 왕검단군때 세번 옮겼으며(백악산 아사달<길림성 돈화, 소밀성>. 요녕성환도산성. 장당경<황해도 문화현>) 그후로 2세 부루단군때(환도산성) 22세 색불루단군때(요동 험독현 창려) 34세 오루문단군때(낙랑홀=지금 평양) 44세 구물단군때(장당경) 각기 천도하였다.
단군조선은 1단군 3한 3사 8가의 기본체제와 화백(和白 고루살이) 민주제와 범금8조법 등의 법제가 있었다. 22세 색불루단군은 우현왕 고등의 자손으로 스스로 봉기하여 단군이 되어 후단군조선을 열었고, 단군조선사 가운데 기자(奇子)조선과 위만조선 및 한사군은 3조선관경의 하나인 변방 번조선(요녕성지역)에서 생멸하였다.
독립운동가요, 민족자주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선생님은 "역사만이 희망이다"라고 하였다. 개천절을 맞아 우리 한민족은 주인의식을 갖고 우리의 뿌리가 되는 역사를 되돌아보아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이루며, 우리나라가 영세중립국이자 세계문화중심국으로서 열린 마음을 갖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오마이뉴스 기자ohmynews@ohmynews.com
[펌]☞ 단군신화설은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농간
첫댓글 이씌 눈알이 뱅글 뱅글 머리가 지끈지끈 이거 운제 다읽노
ㅎㅎㅎㅎㅎ 최여사 미안해...조금 길제...쉬엄쉬엄 읽어...우리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당당하고 꿋꿋하게 활기차고 신나게 살아가자고 올린거니깐....
아이구~ 이걸 읽어, 말어~ 읽자니 머리가 아프고, 안 읽으려 하니 성의가 괘씸코..
재영아! 공부도좋은데 내머리로는 도저히 불가능이다. 이거 읽다가 잠들거 같아서,,,,학교다닐때부터책만펴면 잠오는데~~ 성의가 괘씸해서 읽을라했는데 오늘은 안되겠다.담에꼭읽어볼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