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어느 마을 한가운데에 누구나 양들을 끌고 와서 먹일 수 있는 무성한 목초지가 있었습니다. 이 목초지는 공유지였기 때문에 누구나 아무 제한 없이 먹이를 먹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풀이 다시 자라날 수 있도록 한꺼번에 먹이는 양의 수를 제한해야만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 목초지를 관리하고 목초지에 방목된 양의 수를 제한해보기도 하였지만 별 성과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모든 농부들은 목초지가 망가지기 전에 자기 양 떼를 먹이려 했고, 삽시간에 양들이 모여들어 목초지는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오세훈 서울 시장과 시의원들 간에 벌어진 이념 다툼이 신문 머리기사를 장식했던 적이 있습니다. 시의원 측은 무상급식은 복지의 첫걸음이라 주장했고, 오세훈 시장은 이는 망국 포퓰리즘이라고 맞받아치면서 서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복지정책 전반에 대한 여야의 대립도 치열해졌습니다. 여당은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야당은 부자감세 철회를 통해 보편적 복지 실현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정치인들의 주장이 어떻든 간에 저도 복지 혜택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좋다는 데 찬성합니다. 세월이 갈수록 살기도 어려워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늘어나니, 국민연금도 지급액을 팍팍 늘려줬으면 좋겠고 아무리 나쁜 병에 걸려도 무상으로 치료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월급명세서에서 왕창 떼어가는 세금을 보면 슬픔을 넘어 분노의 감정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내가 애써 번 돈으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혜택을 누리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리면 사회 정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왜 이렇게 입장에 따라 생각이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공동의 복지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돈을 내놓기는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면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게 가능이나 할까요?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나오지 않는 이상, 이기심 속에서 공공의 행복에 대한 관심은 말라 죽어가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서두에 기술한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현상입니다. 이 현상은 원래 미국의 생물학자인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이 제안한 개념으로 지하자원, 공기, 물 등 공동체가 함께 사용해야 할 자원을 시장경제에 맡겨놓으면 모든 사람의 이기심 때문에 큰 위기에 봉착한다는 이론입니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페르(Ernst Fehr)는 개인과 개인의 거래에서의 공유지의 비극 현상에 대한 실험을 행했습니다.
그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10달러를 준 후, 각자에게 얼마씩을 기여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참가자들에게 돈을 걷어 일정 금액이 걷히면 이 총액의 두 배의 금액을 피험자 수로 나누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금액을 지급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확실한 투자만 있다면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만약 모든 사람이 10달러씩을 투자했다면 아무런 노력을 안 해도 20달러씩을 돌려받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한 회 한 회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기여 액수는 줄어들었고,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들이 한 푼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요?
문제는 이 중 누군가는 돈을 내지 않아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은 무임승차하면서 배당금만 타가는 사람이 있음을 눈치챘습니다. 단 한 명만이라도 이런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면 모든 사람의 신의는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나름대로의 정의감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더라도 남 배불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페르는 이러한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고, 결국 한 가지 효과적인 방안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 이런 무임승차객을 발견하면 신고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단 신고를 할 때는 사법 비용으로 1달러를 내게 했고, 고발을 당한 사람은 2달러의 벌금을 내게 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3달러는 기여액으로 모여져서 다시 모든 사람에게 공평히 배분되었습니다. 이렇듯 자기 돈을 잃어서라도 얌체들을 응징할 수 있는 제도하에서만 시스템은 안정되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무상급식과 관련된 논쟁에서의 핵심은 크게 보았을 때는 복지 포퓰리즘이나 예산 부족 등의 문제가 되겠지만, 서민 각각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여기에 결부된 정의의 논리가 핵심일 것입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급식을 위한 예산이 어디선가 펑하고 나타나서 해결이 되는 게 아닌 이상 모두가 세금이란 형태로 일정 부분 기여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분명 힘 있고 요령 좋은 사람들은 무임승차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문제를 밀고 나가는 시의원이나 정치인들이 자기 재산을 내놓으면서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 누가 걱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일반 서민들의 걱정은, 지난 수십 년간의 한국 역사를 짚어 보았을 때 바로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얌체 짓을 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모두가 기여해서 우리 아이들의 복지가 향상되는 긍정적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하더라도, 심리 내면에 자리한 부조리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 때문에 쉽사리 찬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페르가 제시한 해결책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부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정의를 구현하고 싶어하며, 이런 길을 마련해주면 시스템은 예상 외로 잘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공유지가 황폐해지지 않고 끊임없이 양들에게 풀과 물을 제공하기 위해선, 서로 간의 감시의 눈길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합니다.
공유지를 축내는 자는 벌을 받아야 하며, 이에 더해 이렇게 정의가 구현되는 과정에 바로 ‘내’가 참여할 수 있어야만 사람들의 마음은 비로소 달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 시장이나 시의원 여러분, 그리고 반값 등록금 사태로 혼란 중에 있는 여야 국회의원이나 청와대 비서관들 모두들 한 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유지의 비극 [Tragedy of the Commons] - 남 배불리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 (사람을 움직이는 100가지 심리법칙, 2011. 10. 20., 케이엔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