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면사무소입니다.
본래 안읍현에 속하였으나, 1895년(조선 고종 32) 안내면으로 바뀐 뒤 1914년 보은군 수한면의 질신리 일부와 회인군 노성리를 병합하였다. 1973년 용호리와 막지리를 군북면에 내주고, 대신 장계리와 안남면의 오덕리·인포리를 병합해 오늘에 이른다.
산지가 많은 면 내의 지형은 내천(川) 모양으로, 산맥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어 경지가 빈약한 편이다. 비교적 경지가 발달한 곳은 동부지역의 덕대산(德大山 : 613m)· 금적산(金積山 : 652m)을 잇는 산맥과 거명산(494m)·가재봉(460m)을 잇는 산맥 사이에 발달한 하곡평야이며, 이를 중심으로 서대리(西大里)·도이리(挑李里)·정방리(正芳里) 등 자연부락이 발달하였다. 이 밖에도 도가실, 밤티, 월외 등의 부락이 있습니다.
본관 백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 문열(文烈).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생.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정주교수(定州敎授)가 되고, 1572년(선조 5) 정자(正字)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된 뒤 곧 저작(著作)에 기용되고,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감찰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거쳐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754년(영조 30) 영의정에 추증,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聖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중봉집》이 있고, 저서에 《동환봉사》등이 있다.
1986년 대청호의 자연 경관을 이용하여 6만 평 부지에 조성되었다. 향토전시관, 놀이시설, 사계절썰매장, 물놀이장, 인공 폭포 및 연못, 분수대 등의 위락시설을 비롯하여 야외취사장·휴게소·원두막·상가·식당·주차장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향토전시관을 제외한 나머지 시설은 민자시설업체가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주변에 금강유원지·장용산휴양림·속리산국립공원이 있다.
찾아가려면 옥천읍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안내면 장계리행 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를 타고 경부고속도로 옥천인터체인지에서 37번 국도로 빠져나와 보은(속리산) 방면으로 10분 정도 가면 나온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옹기를 조미료와 주식 ·부식물의 저장용구, 주류 발효 도구, 음료수 저장 용구 등으로 사용하였다. 삼국시대부터 만든 옹기는 세계에서 한민족만이 가지는 독특한 음식 저장 용기이다. 옹기점의 시설로서는 토기제작장과 요성장(窯成場)이 있는데, 토기제작장에서는 날그릇을 주로 다루고, 요성장에서는 날그릇을 구워 완전한 그릇을 만들어낸다.
옹기를 만드는 과정은, 먼저 흙을 반죽해서 응달에 약간 말린 뒤 떡매로 쳐서 벽돌 모양으로 만들고, 바닥에 쳐서 판자 모양의 타래미로 만든다. 이를 ‘판장질’이라고 한다. 그 다음 타래미를 물레 위에 올려 놓고 방망이로 타림질(다듬는 일)을 한다.
옹기의 모양은 물레의 속도, 손놀림에 따라 결정된다. 이렇게 만드는 옹기가 플라스틱 ·스테인리스 그릇의 등장으로 1960년대 말부터 점점 쇠퇴하여 질그릇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문화부에서는 옹기보호책으로 1989년 5월 옹기인간문화재를 지정하였고, 1990년 옹기장(옹기 만드는 기술자)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하였다.
창말 초입에 지금도 옹기점이 있습니다. 한번 방문해보시지요.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에 있는 공립중학교이다. 1954년 5월 24일 3학급으로 개교하였으며 1959년 4월 7일 인포리로, 1980년 7월 15일 수몰로 인하여 인포리 289번지로 교사 이전하였다. 2003년 8월 29일 심야전기교실 난방시설을 완공하였으며 2005년 10월 26일 디지털 도서관 및 과학실을 리모델링하였다. 교훈은 '수월성을 추구하는 진취적인 학생'이며 교목은 느티나무, 교화는 개나리이다. 남녀공학 3학급으로 편성되어있으며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인포리 289번지에 있다.
저는 이 학교가 아니라 지금은 수몰된 중학교를 일년정도 다녔습니다. 1학년 3반. 담임 정정기선생님! 그 시절의 중학교 풍경이 훨씬 더 아름더웠던 듯 합니다. 사진 한 장 남겨놓지 못하고 개발이라는 이름 앞에 그만 그 아름다운 풍경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현리에 있는 공립초등학교이다. 1921년 5월 2일 안내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41년 4월 1일 안내공민학교를, 1965년 3월 1일 용촌국민학교를, 1973년 3월 1일 대동국민학교를 분립하였다. 1989년 9월 1일 용촌분교장을, 1992년 9월 1일 대동분교장을 편입하였으며 1993년 3월 1일 대동분교장을, 1995년 3월 1일 용촌분교장을 통폐합하였다.
2001년 3월 1일 도지정 통일교육 시범학교로, 2002년 2월 15일 한국수자원공사지정 물사랑 교육 시범학교로, 2005년 충청북도교육청지정 녹색학교로 지정되었다. 교훈은 '슬기롭고 예의 바르며 튼튼한 어린이'이며 교목은 은행나무, 교화는 개나리이다. 초등 6학급으로 편성되어있으며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현리 117-2번지에 있다.
제가 안내초등학교 49회입니다. 맞나? ㅎㅎㅎ. 제가 다닐 때만해도 학생수가 참으로 많았었는데, 지금은 에궁~~~~. 가끔 고향길에 찾아가봅니다. 흑백사진 속에 두고온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