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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이해
세계종교의 신앙과 수행생활
- 힌두교,불교,이슬람교,유대교,기독교 -
조정근 프란시스 신부
1.힌두교
무엇을 깨달으라는 것인가?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인 ‘브라흐만 Brahman(범)’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브라흐만은 무엇인가? ‘네티 네티 neti-neti'라고 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해 도저히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범주안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자에 대한 이런 태도를 취하는 신학을 서양신학사에서는 ‘부정의 신학 negative theology' 또는 ’아포파틱 신학 apopathic theology'라고 한다.
한편 그 절대적인 브라흐만은 단순한 추상적인 원리만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의 본질이며 참된 자아(아트만 atman)자체다. 나 자신은 바로 그 브라흐만이 구체화된 상태로서 “나는 곧 브라흐만이다.”. 이것을 한문으로 ‘범아일여 梵我一如’라고 한다.
여기서 아트만은 인간의 본질을 의미한다.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이 영원불멸하고 가장 고귀한 실재라고 가르친다.
아내가 사랑스러운 것은 아내의 사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아트만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오.
자식이 사랑스러운 것은 자식의 사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식 안에 있는 아트만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오. (중략)
신들이 사랑스러운 것은 신의 사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아트만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오.
이렇게 내가 곧 브라흐만이요, 브라흐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무명 無明이요, 이를 몸소 체득해서 깨닫는 것이 바로 목샤 moksha(해탈 解脫)라고 본다.
즉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와 내 마음 안에 있는 근원적 자아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곧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한다. 물론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창조주의 피조물 사이의 구분을 인정하기 때문에 힌두교의 범아일여사상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빌라의 테레사가 경험한 신비체험은 이것과 그래도 가깝지 않을까 생각.
“물방울이 강에 떨어진 것 같이 혼란이 없이 영혼은 고요하고 잠잠해 집니다.”(영혼의 성, 234쪽)
삶의 네 단계
상류 세 계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평생을 통해 네 단계를 지나간다고 말한다.
첫째, ‘학생’ 단계. 8세에서 12세 정도까지 집을 떠나 스승과 함께 살면서 ‘베다’등 경전을 읽고 배운다.
둘째, ‘재가자’단계. 결혼하고 자식을 기르는 등 사회에서 주어진 임무 성실하게 수행.
셋째, ‘숲 속 거주자’ 단계. 자식이 다 자라고 가장으로서 사회에서 할 일이 끝났으면 숲으로 들어가 명상도 하고 신에게 제사도 지내며 산다.
- ‘아내에게’
마이트레이여, 나는 속세를 버리기로 마음먹었으며 포기의 생활을 시작하겠소. 그러므로 내 재산을 당신과 또 다른 아내 카타야니와 분배하기를 바라오.
- 야그나발카, 우파니샤드
넷째, 본격적인 ‘출가 수행자’단계. 부인과 결별하고 완전히 속세를 떠나 걸식을 하며 고행과 명상에 전념한다. 산야신 Sanyasin 의 길이라고 한다.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여자는 출가자가 될 수 없었다. 여자에게도 출가를 허용한 것은 자이나교와 불교에와서이다.
힌두 전통에서 좀 더 자세히 이 목샤, 즉 해탈을 궁극의 목표라고 하며 이를 이루기 위해서 세가지 길을 간다.
첫째, 행동의 길. 계율이나 도덕 규범을 잘 지키고 이웃에 선행을 많이 하여 구원의 길에 이르려는 것.
둘째, 신애의 길. 어느 신을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받드는 일. 세가지 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
셋째. 지혜의 길. 궁극실재를 직접 꿰뚫어 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 등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는 것. 無知無明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므로 이를 없애야 한다고 본다.
결국 이러한 길을 통해 ‘자기’를 잊는 것.
2.불교의 수행방법
사성제와 팔정도
사성제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즉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가지를 설하신 부처님 최초의 법문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 낸 다음,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 집→멸'을 알고
멸에 이르는 바른길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 고성제(苦聖諦)
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경전은 8가지 괴로움을 들고 있다. 생노병사와 애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 원증회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하는 괴로움), 구부득고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 오음성고 (오온<색,수,상,행,식)에 집착하는 괴로움) 등 8가지이다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2) 집성제(集聖諦)
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집(集)이라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이는 괴로움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경에서는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로서 격렬한 탐욕에 묶여 있으며, 여기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욕애(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
무유애(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등이다'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 (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3) 멸성제(滅聖諦)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고의 원인이 애 탐등의 집기라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 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를 원적, 혹은 열반이라고 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명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4) 도성제 (道聖諦)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을 말한다. 그 방법은 여덟가지의 수행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가 곧 팔정도의 수행방법이다.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항목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걸어가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실천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 집 멸 도의 네가지 진리이다. 고는 집의 결과 즉 현실 이며 집은 고의 원인이다. 멸은 도의 결과 즉 현실 이며 도는 멸의 원인이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라 불리우는 팔정도가 있다.
팔정도
(1) 정견 (正見)
정견은 [바로봄]을 뜻한다. 곧 올바른 견해이다. 이 정견은 유무(有無)의 편견을 벗어난 정중(正中)의 견해이다. 곧 사(사)와 정(正)을 분별하는 견해이고 바른 견해로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도 한다.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2) 정사유(正思惟)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입장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바르게 사유한다.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이다
(3) 정어 (正語) 올바른 말,
곧 온갖 망어(妄語) 사어(사語)등을 하지 않는 말이 정어이다. 올바른 생각에 의해 하는 말이고 항상 바른 생각과 바른 말을 하여 구업을 짖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
이는 '진실되고 올바른 언어생활'을 말한다. 즉 거짓말, 꾸며대는 말, 서로 이간시키는 말, 남을 성나게 하는 말 등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이다.
(4) 정업 (正業)
올바른 행위, 살생이나 도둑질 따위의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인 것이다.
(5) 정명 (正命)
'올바른 생활 수단'을 말하는 것으로 바른 견해에 입각한 전체적인 생활에 있어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으로 남과 나를 다같이 이롭게 하는 바른 직업을 갖는 것도 그 뜻의 하나이다.
(6) 정정진 (正精進)
올바른 노력, 한 마음으로 노력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노력으로 인하여 아직 발생하지 아니한 악을 나지 못하게 하며, 나지 아니한 선을 발생하게 하는 일이며, 옳은 일에는 물러섬이 없고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불자의 구도 자세라 할 수 있다.
(7) 정념(正念)
올바른 정신과 생각, 사념을 버리고 항상 향상을 위하여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을 말하며 바른 생각을 말한다. 또한 '바르게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참된 진리를 항상 명심하고 기억하여 다른 잡념이 일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사유와 함께 내면적인 마음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마음속에 정견 (正見)이 가득차고 항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8) 정정 (正定)
'바르게 집중(集中)'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인데 '삼매(三昧)' 라는 음역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는 정념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서, 정념의 성취로 몸과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지극히 잘 조화되고 통일된 마음에 온갖 번뇌와 어지러운 대상이 모두 쉬게 되면서 마치 가을 하늘에 지혜의 달이 뚜렷이 빛나는 경지를 뜻한다.
초기 불교에서 출가생활을 하는 비구, 비구니들과 일반 재가 신자들의 추구 목표가 달랐다. 즉 출가자들은 다시는 태어남이 없는 완전한 해탈을 목표. 일반 재가 신자들은 천계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공덕을 쌓았다.
여기에는 출가자가 되어야만 궁극적인 열반에 들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재가 신자들은 현세에서 공덕을 많이 쌓아 천계에 태어나기를 희망, 또 그러한 윤회의 삶을 몇 번 거치다가 마침내 미래의 어느 생에선가 출가자가 되어 그 때 완전한 해탈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후대의 대승불교에 와서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티벳불교 수도자들은 주류가 독신생활을 원칙으로 하는 승려. 일본불교는 재가 승려가 대부분. 그래서 승려직과 사찰은 세습된다. 대승불교 안에서도 실제로 출가생활의 양태에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계종과 천태종은 승려들의 독신을 의무로 규정한다. 그러나 태고종을 비롯한 다른 종단은 선택사항이다.
재가와 출가 수행
「유마경」은 초기 대승경전 가운데 백미로 손꼽히는 경전이다. 이 경전은 상업도시 비야리성에 사는 장자 유마힐이 주인공으로, 부처님의 제자들과의 대화가 희곡적 형식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경전으로서 이경의 본 제목은 「불설유마힐소설경(佛說維摩詰所說經)」이다.
당시 비야리성은 중인도 갠지스강 지류인 간다아크강의 연안을 따라 발전한, 상업과 공업이 발달한 비야리성은, 진취적이고도 자유로운 정신이 넘치던 곳이었다. 장자 유마힐이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유마경」의 내용을 토론 하고 했다는 「유마경」의 배경설정은 그런 만큼, 이런 전체적인 도시 분위기를 떠나서는 살피기 힘들 것이다.
참고로 오늘 경전의 노디를 놓기 위해 잠시 「채근담」에서 한 말씀을 인용한다.
집안에도 한 분의 참 부처가 있고 일상생활을 속에도 하나의 진정한 도(道)가 있다. 사람이 능히 마음을 성실하게 하고 기운을 부드럽게 하며 얼굴빛을 유쾌하게 하고 말을 완곡하게 하여 부모형제간으로 하여금 한 덩어리가 되게 하고 뜻이 통하게 한다면, 이야말로 숨결을 고르게 하고 마음을 관찰하는 것보다 만 배나 더 나으리라.
家庭에 有個眞佛하고 日用에 有種眞道니라. 人能誠心和氣하고 愉色婉言하여 使父母兄弟間으로 形骸兩釋하고 意氣交流하면 勝於調息觀心萬倍矣니라.
여기서 저자는 부처라든지 도라든지 하는 것은 일상생활을 벗어난 구름 위, 하늘나라의 어느 멀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불(眞佛)과 진도(眞道)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타좌 수행을 무시하라는 법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일상속의 참된 부처, 참된 도란 말인가? 그것은 바로 화목한 가정, 성실한 마음, 온화한 기운, 유쾌한 눈빛, 부드러운 말씨로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가정을 한 마음 한 뜻으로 융화시키고 서로 말과 뜻이 통하여 단란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이 곧 수행이란 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곧 도가의 양생술(養生術)의 하나인 숨고르기 즉 조식(調息)이나 불가의 수양법인 참선하는 것보다 만 배나 더 나은 것이라 말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출가하여 독신 수도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반면에 가정을 꾸리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면서 닦아 나아가야 할 경우도 있다. 그 어느 것이든 소중하지 않으랴! 도란 반드시 세속을 떠난 곳에만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이것이 대승(大乘)의 정신이다. 그 어떤 것이든 중요한 것은 나와 함께 하는 가족을 포함 일체의 중생을 더불어 살아가는 자비행이야말로 수행자가 잊지 말고 닦아야할 덕목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유마경이란 경전이 있다. 여기나오는 대표적인 주인공은 유마거사는 재가불자다. 그는 가정을 꾸리고 사업을 하면서 이것을 수행으로 승화시킨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유마거사의 인품과 수행방법을 잘 드러내는 유마경 방편품(方便品)의 몇 구절을 인용한다.
비록 백의(白衣)로 있지만 사문의 청정한 계행을 받들어 가지며,
비록 세속 사람이 사는 집에 살지만 삼계를 탐하지 아니한다.
비록 아내 딸들이 있지만 항상 범행을 닦아 행하며,
비록 권속들이 있음을 나타내지만 그러나 항상 거기에서 멀리 벗어남을 좋아한다.
비록 보배로 꾸민 것들을 입지만 항상 상호로 몸을 장엄하며,
비록 세속적인 음식을 먹고 마시지만 선열(禪悅)을 맛으로 여기고,
심지어 바둑과 장기놀이를 하는 곳에 이르러서도 그것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제도한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것을 공양 가운데 으뜸으로 여기며,
바른 법으로 어른과 어린이들을 섭화하며,
온갖 방법으로 생산에 종사하며 해우(諧偶)등으로 세속적인 이익을 얻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을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
여러 음사에 들어가서는 음욕의 허물을 보여 주고,
여러 술집에 들어가서는 능히 자기의 뜻을 세운다.
만약 장자들 속에 있으면 장자 가운데 으뜸이어서 그들을 위하여 수승한 법을 말하여 주고,
만일 거사들 속에 있으며 탐욕에 집착하는 마음을 끊게 하여주고,
만일 대신 들 속에 있으면 바른 법을 가르쳐주고,
만일 왕자들 속에 있으면 충효로써 보여 주고,
만일 내관들 속에 있으면 궁녀들을 교화하여 주고,
만일 서민들 속에 있으면 그들로 하여금 복의 힘을 일으키게 하여 주고,
......
장자인 유마힐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방편들을 가지고 모든 중생들을 요익하게 하였다.
불가전통에서 이렇듯 몸은 세속에 있으면서도 세속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가지고 교화의 방법으로 쓸 줄 아는 유마거사야 말로 진정한 대보살로 여겨지고 있다. 진정한 도(道)는 반드시 세속을 떠난 곳에만 있는 아니고, 세속에 없는 것도 아니다. 유마거사의 행을 통하여 볼 때 참된 진리는 불이(不二)법문, 즉 세속(世俗)과 성역(聖域)이 둘로 나눌 수 없는 한 데 어우러진 것이란 사실이다. 즉, 중생과 부처, 너와 나, 색과 공 모든 것이 둘이 아님을 참구하라는 것이다. 절대 평등적 깨달음의 경지로 이끄는 방법으로서 그를 통하여 상대 차별적 미혹의 세계를 초월 극복하게 하는 인식과 수행을 뜻하며, 모든 진리 법과 둘이 아닌 즉, 나누어짐이 없는 바, 하나인 도리가 구도의 근본이고 모든 수행자가 이 방법으로 실상을 깨달아 들어가고 중생을 구제하려 나오므로 법문이라고 이름한다. 그러기에 살아가는 그 모든 것 가정생활이나 직업생활이나 그 어느 하나 수행이 아닌 것이 없다.
유마거사는 자신의 다양한 방편을 통하여 붓다의 자비사상 즉, 일체 중생을 내 몸같이 생각하는 동체대비심을 일으켰다. 동체대비(同體大悲)란 깨달은 이 중생과 자신이 동일체, 즉 한 몸이라고 생각하는 큰 자비심을 말한다.
불자였던 춘원 이광수 시인이 지은 이런 시가 있다.
임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布施)를 배웠노라
임에게 보이고자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持戒)를 배웠노라
임이 주시는 것이면 때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忍辱)을 배웠노라
자나깨나 쉴 사이 없이 임을 그리워하고 임 곁으로만 도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精進)을 배웠노라
천하(天下) 하고많은 사람 중에 오직 임만을 사모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선정(禪定)을 배웠노라
내가 임의 품에 안길 때에 기쁨도 슬픔도 나와의 존재도 잊을 때에
나는 반야(般若)를 배웠노라
인제 알았노라 임은
이 몸께 바라밀을 가르치려고 짐짓 애인의 몸을 나툰 부처시라고
- 춘원 이광수님의 시 「애인 육바라밀(六波羅蜜)」
대부분의 영적 수행담은 깨달음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어떨까? 대각을 한 선사가 처자식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될까? 존경받는 구루가 주차 문제로 시비가 생긴다면 어떨까? 대형 쇼핑몰을 헤매는 신비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 깨달음 이후의 삶은 어떠할까?
영적 깨달음과 일상의 빨랫감, 이 양쪽을 포용하는 지혜가 과연 가능할까?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버스에 태워 등교시키는 일은 추운 새벽에 대웅전에서 염불을 외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어느 쪽이 어느 쪽보다 낫지도 않고 더 훌륭하지도 않다. 또한 둘 다 매우 지겨운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수행과 일상이 모두 중요하며 사실은 하나라는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수행은 삶에서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직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게리 스나이더 시인, 수행자
3.이슬람의 수행생활
수피즘은 이슬람 신앙의 형식주의, 행위의 표면만을 보고 심판하는 이슬람법(샤리아) 등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되어 8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된 후 시아파에서 나타난 신앙이다. 수피즘은 이슬람의 초창기에 금욕·고행을 중시하는 개인적 신비주의 경험에서 출발해 차츰 수행 방법이 정비되고, 그리스사상과 유태교·그리스도교·불교 등을 받아들이면서 이슬람교가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피(신비적)라는 아랍 용어는 초기 이슬람의 금욕주의자들이 입고 다니던 옷인 ‘양모’라는 뜻의 수프(uf)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수피즘은 도취 상태에서 지상(至上)의 경지를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타와클(신뢰)·마리파(은총)·파나(망아)와 같은 수피즘 특유의 용어가 그러한 경향을 표현하고 있다.
수피즘은 12~13세기의 사회적 혼란기에 대중화되기 시작해 타리까라고 불리는 수피 종단이 결성되어 사회운동으로 발전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확대되어갔다. 이 시기는 오스만 왕조 투르크가 14세기 이후 소아시아에서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16세기 초 술레이만 대제는 소아시아와 멀리 발칸 반도와 예멘에 이르기까지 지중해 주변 아랍 지역들을 정복해 통일 국가를 이루고, 술탄은 칼리프라고 자칭하여 수니파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로 등장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수피즘은 신과 인간의 본성을 확인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의 사랑과 지혜를 체험하는 다양한 신비적 실천 방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단계의 수련 과정을 거치는데, 수피들은 디크르(신앙을 고백하는 주문)로 수행을 하고, 신에 대한 개인의 체험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는 등 신의 진리에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또한 수피즘은 자발적인 가난, 금욕 생활, 명상, 하염없이 계속 원을 그리면서 빙빙 도는 수행무 같은 행위를 통해 이기심을 버리며 자신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자신의 의도와 행동에서 절대적 순수성을 찾아 신에게 가까이 가려 한다.
수피가 찻집에서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피는 전통으로 내려오는 고대 격언을 읊었습니다.
“모든 것은 완벽하다. 삶은 완벽하다. 모든 인간은 완벽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는 꼽추였습니다.
“삶이 완벽하다고? 나를 보시오. 이 힘겨운 꼴을! 이 정도면 삶이 완벽하다는 당신 생각을 뒤엎기에 충분하지 않소?”
꼽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피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본 꼽추 가운데서 가장 완벽하오.”
“네 가슴 거울이 흐릿하다면
표면에 묻은 때가
씻기지 않은 것이다.”
- 본문 중에서
4.유대교의 수행
우리의 욕망은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의 본질 자체이다.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고 몸이 움직이는 것은 바로 오로지 채우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카발리스트 라브 애쉴라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어떤 내적 욕구가 동하지 않고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적 만족, 지적성취, 종교적 충족, 물질적 만족, 명성, 깨달음, 여행과 모험, 고독을 목적으로 삼는다.
영성에 이르는 단계는 다음의 단계를 거친다.
유대교의 카발라 식으로 말하자면 욕망은 그릇이다. 빨주노초파남보는 하나의 빛에서 분화되었다. 그 빛은 근원의 빛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은 ‘빛을 향한 욕망’이다.
빛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 빛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에너지이다.
- 받고자 하는 욕망 : 인간의 에고이즘(늘 고통을 가져온다)
- 주고자 하는 의지 : 창조주의 성품
이 주고자 하는 창조주의 성품을 닮아갈 때 우리는 고통에서부터 벗어난다. 바로 그릇 넓히기 과정이다.
장애물은 우리가 빛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다.
창세기 39:11 감옥에서 고통받는 요셉...
장애물이 클수록 잠재되어 있는 빛도 크다.
예) 모세의 출애굽 예화. 두려운 홍해바다를 향하여 과감히 발을 집어넣었을 때...
우리 삶에 하느님의 무한한 힘을 불러들일 것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그 인물은 바로 내 안의 성품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600,000가지의 욕망이 있다. 성경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이다. 그 에고이스트인 나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가는 여정을 담았다. 바로 내가 하느님과 일치하는 영적 변형의 이야기인 것이다.
구약성경을 보자.
창세기 17장 5절.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창세기 28:12절...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는 신성으로 향한 영혼의 문이 열렸음을 상징...
창세기 32:29 야곱이 이스라엘로...(이때 조하르에서는 야곱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졌다고 한다...즉 유대인이 머리에 쓰는 키폿은 하느님의 현존이 늘 그에게 머물러 있음을 뜻한다.)
사도행전 9장의 사울이 바울로가 되는 사건...바로 변형의 사건...(교리적 지식적 유대교인에서 그리스도와 만나 변형되는 영적인 사람으로...)
바로 쉐키나..(하느님의 영광)이 늘 변형된 성스러운 사람의 머리위에 임해있다.
1. 한 젊은 랍비가 리진의 랍비에게 불평을 했다.
“내 자신이 수행에 열중하는 동안에는
생명과 빛을 느낄 수 있지만
수행을 중단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립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리진의 랍비가 대답했다.
“그것은 마치 한 사람이 어두운 밤에 숲속을 걷는데
당분간은 등불을 든 다른 사람과 함께 걷다가
갈림길에 이르러 등불을 든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의 등불을 들고 다닌다면
어떤 어둠이 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 축제기간의 마지막 날에 랍비 위시카르가
모기엘리카의 랍비를 창문쪽으로 불러서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모기엘리카의 랍비여, 그대는 보이는가?
그대는 저것이 보이는가?“
축제가 끝난 뒤 모기엘리카의 랍비는
탁자 둘레를 춤추면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불렀다.
“우리의 늙은 형제, 성스러운 이가
나에게 빛을 보여주었네.
그가 나에게 보여준 빛
실로 놀라와라.
그러나 누가 아는가?
그 빛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야 하며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우리는 잠자야 하는지
그 빛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3. 한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이자 달인에게 다가가서 외다리로 균형을 잡고 서는 데 걸리는 짧은 시간 안에 우주의 모든 비밀과 장엄한 신비를 푸는 답을 가르쳐 달라고 청한다. 그 비범한 달인은 이 지상에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정신적 거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열성적인 제자의 요청을 받고는 그 질문에 대하여 아주 신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는 무한한 자애로 눈을 빛내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그대 이웃을 그대 자신처럼 사랑하라.
나머지는 모두 해설에 불과하다.
자, 어서 가서 배우라.
5.기독교와 수행
기독교 수도원의 역사
시소에스 압바가 말했다. “하느님을 찾으라.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찾지 말고.”
`독방에 머무시오. 독방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오.` - 압바 모세
실바누스 압바의 제자인 제노 압바가 말했다.
“잘 알려진 곳에서 살지 말고, 유명한 사람과 함께 있지 말며, 앞으로 자신이 수도할 집을 지으려고 마음 먹은 곳에 터를 닦지도 말라.”
기독교는 신비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삶이다. 신비주의자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원은 곧 신비주의자들의 모임과도 같다. 수많은 신비주의 성인이 수도원을 통해서 나왔고, 수도원을 세웠고, 훗날 그들을 본받는 자들의 수도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1) 수도원의 시작
수도원의 기본 이상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삶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수없이 던졌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로서, 즉 "금욕과 고행의 행태"인데 이것이 수도원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 된다. 처음엔 개인적 금욕이나 고행의 형태가 나타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직화 되고 제도적 기관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것이 수도원이다.
2) 수도원의 광야 생활
초창기 로마제국의 박해와 교회 내의 이단들이 생겨남에 따라 교회는 혼란을 겪게 되었고, 결국 3세기경에 교회 내의 금욕자나 고행자들로 하여금 광야에 나가게 했다. 처음엔 개별적 고립된 생활을 했으나, 필요에 따라 접촉도 하고, 공동생활도 하게 되었으며, 파코미우스에 의해 이집트 남쪽의 테바이스 지역에 공동체 수도원을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수도원 규칙을 제정했다. 이때의 수도원 생활은 노동, 순종, 가난, 명상, 기도, 금식 등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초대기독교의 모습은 금욕과 고행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곧 금욕이요 고행이라는 것이다.
3) 수도원의 서방 전래
동방교회의 수도사적 삶의 방식 중 하나로서 '방랑 금욕가'는 서방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서방교회 지도자들은 이들을 비난하는 입장이었지만, 기독교인의 삶은 금욕과 고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들을 한 곳에 정주해 살도록 했는데, 이것은 당시 로마의 귀족 계급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로마 사람들로 하여금 번거로운 세상사를 벗어나서 한적한 시골이나 전원에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도시에 있든 시골에 있든 수도원은 서방교회에 급속도로 로마, 북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 아일랜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서방 수도원의 여러 가지 특징, 즉 부유한 귀족 계급들의 수도원 건립, 교회와 수도원의 긴밀한 유대관계 및 신학적 사상의 공유, 그리고 동방교회에 비해 고행이나 금욕 사상이 현저히 약한 것 등의 특징으로 인해 급속한 발전을 거듭해서 6세기경에는 유럽 전체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수도사들 또한 선교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켈틱 교회와 수도원 제도
켈틱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도원의 중요성을 빼놓지 않으면 안 된다. 켈틱 그리스도교는 인생의 단조롭고 지루한 시간이건 환희로 가득찬 시간이건 간에 하느님의 현존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신앙인 것이다. 켈틱 그리스도교는 또한 당신과 나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현존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진정 하느님의 따스한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이다.
결혼, 육아, 직장, 농사, 목축 이 모든 일상의 삶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는 성사들이다. 그래서 켈틱 그리스도교 안에는 그 후손인 오늘날의 성공회와 같이 기혼사제들도 허락되었다. 독신수도자들뿐만 아니라 기혼 수도자들도 있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 삶의 곳곳에 육화되어 있었다.
특별히 켈틱 교회 내의 신앙공동체는 하나의 영적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제나 평신도나 역할이 다를 뿐 모두가 수도자였다. 모두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영적 여정에서 함께 가는 동반자였다.
그리스도교는 주후 6세기까지 아일랜드 전역에 걸쳐서 잘 설립되어 있었으며, 그리하여 수도원의 확산시기가 도래하였다. 아일랜드 그리스도교의 강한 수도원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차라ㅖ로 아일랜드의 수도원 제도는 아일랜드에 사회에 적응해 감에 따라 독특한 켈틱적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 6세기의 아일랜드는 마을도 도시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도원들은 점차적으로 아일랜드 사회의 주요한 교계적이며 행정적인 중심이 되었다. 수도원장들은 자주 주교의 직무를 떠맡게 되었다.
아일랜드에서 발전된 켈틱 수도원제도는 유럽대륙에서 발전된 규칙적이면서도 질서정연한 수도회들과는 자못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수도원의 초창기부터 켈틱 수도원들은 금욕적이면서도 은수적인 외관을 취하였다. 그리고 항상 성 베네딕트와 같은 공동적인 규율보다는 에집트의 안토니와 같은 사막 교부들의 예를 따르는 보다 느슨하게 조직된 채로 남아있었다.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은 고립과 참회의 삶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었으며, 전형적인 수도원은 개인적인 수도사들이 정주한 상태가 모여있는 형태이자 함께 하는 교회의 형태를 취하였다. 그리고 수도원에서는 공동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영적인 삶을 추구하였다.
10세기의 아일랜드인은 ‘몇 명의 현자 제자들이 있고...내 거처가 될 광야의 비밀스러운 오두막’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러한 것은 수많은 켈틱 성인들의 바람이었다.
내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멀리 떨어져서 숨겨진 작은 통나무 집에 살면서
거룩한 하늘 앞에서 내 양심을 바로 세우고
흠없이 살고 파라.
이 땅을 굳게 디디면서, 좋은 수도복을 입은 채로
내 몸을 거룩하게 만들고 싶어라.
내 욕심을 용서받으려는 듯 연약한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구나.
- 은수자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켈틱 수도사들의 영성은 아주 매력적으로 보인다.
자연 가까이 살면서, 자연세계에 이미 머무는 문화의 존재로서, 이러한 수도사들과 은수자들은 그들 주변의 아름다운 안에서 하느님을 뵈올 수 밖에 없었다. 자연에 대한 그들의 애착은 그들의 글, 가정의 선택, 및 동물들과 식물들이 가까이 얽히어 보여지는 그들의 그래픽 아트 작품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맺는 말
불교는 수도원과 사원이 함께 간다. 즉 아무리 작은 사찰일지라도 그 곳 안에서 조석으로 예불을 드린다. 명상을 하고 활동을 하면서 수도 규칙안에서 생활한다.
성공회 종교개혁이후 평신도도 성무일도 드리도록 조만도의 두가지 구조로 개편하였다. 바로 수도원적으로 살라는 것이다.
교회가 바로 콘스탄틴의 칙령이후 로마 국교화되면서부터 안타까와진 것 중의 하나이다. 바로 수도원과 사원이 교회 안에서 분리된 것이다. 수도원은 오로지 외딴 곳에 떨어진 독신 수도자들의 건물이 되었다. 세속의 교회는 종교예식만 거행하는 곳으로 분리되었다.
하지만 21세기의 교회는 수도원과 사원이 하나로 되는 바로 이것을 회복하여야 한다.
신자개인들도 나의 수도일과를 정해서 조석으로 성무일과 바치고, 침묵 관상기도로 내 영성을 길러야 한다. 사제와 모든 신자들이 세속 안의 수도자여야하고, 본교회는 바로 수도원이 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세계 주요 종교들의 진실 수준이 하락하는 것을 관찰해보면, 음양의 개념에서 ‘음’에 머무는 종교는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순수하게 남는 반면, 세상사에 깊이 관여하는‘양’의 종교는 현저한 수준저하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종교에서나 원칙을 고수하는 과격파들, 열성분자들은 항상 200이하의 낮은 수치를 보이며, 그들은 많은 경우 범죄자들의 의식 수준에서 행동하게 된다.
- 리차드 호킨스, ‘의식혁명’
바로 수행중심, 자기성찰 중심의 음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수행의 종교로 그리스도교가 가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