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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무렵, 저는 우리 학교 짱 이 단연코 나라고 믿었습니다. 하루는 장성 사는
학교친구 창건이가 대인 동 애들 때문에 통학하기 불편하다면서 친구인 제게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친구 얘기로는 대인 동 놈들이 백양사에 캠핑을 왔었고, 구역관리
차원에서 제 친구가 낀 장성 애들이 집단 린치를 가한 모양입니다. 영화 “친구”와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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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은 80년 무법천지 광주를 저항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것도 질풍노도의 시기에, 저의 고해는 광주민주화 항쟁 전 후 쯤으로 기억합니다.
친구와 함께 표를 끊고 장성 행 부스로 막 들어갈 참인데 교복 단추를 두 개쯤 내린 고삐리
세 명이 길을 막더니 우리한테 볼일이 있답니다. 약간은 겁이 났지만 3:2정도야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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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보다 보폭에 힘을 실고 스넥 코너 뒤편 계단으로 따라 올라갔습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공용터미널은 행락객들과 통학생들로 많이 붐볐습니다. 계단을 두 블록쯤 올라간 것 같은데
“형님, 다음은 옥상입니다! “ 어쩐지 느낌이 쌔 하더니 갑자기 사람들의 발굽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앗, 함정입니다. 삼면이 담 벽이고 20명쯤 되는 마귀들이 남은 입구를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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섰으니 홍길동이라고 해도 사면초가가 아닙니까? 수많은 눈빛사이로 친구에게 급 사인을
보냈지만 포기한 표정입니다. 여기서 쫄면 질 것 같았습니다. “G랄, 죽이라고! 만약에 나를
당장 못 죽이면 니들은 내 손에 다 죽는다.”지금 생각해도 너무 멋있었습니다.
그동안 정읍을 오가는 사이 스스로 많이 야물어 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내가 이렇듯 실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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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처럼 폼 나게 하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30분 이상 죽도록 쇠파이프 다구리를
맞았는데도 저는 죽지 않고 살아서 막걸리를 얻어먹었습니다. 그 이후로 한 달 동안 창피
해서 학교를 결석했는데 그 바닥에서 훈장하나를 달았고 나의 전국구 생활은 물 만난
고기처럼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되었습니다. 세월 참 빠릅니다. 치기로 얼룩진 나의 20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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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박할 새 흘러가버렸습니다. 저는 내 동생 진호랑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모험
심은 제가 많았고 뭐든 생각한 것을 바로 실행에 옮기는 반면, 진호는 훨씬 신중했던 것
같습니다. 진호는 내 비서면서 친구였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어째 거꾸로 내가 진호의
꼬붕이 된 느낌입니다. 어느 날 진호가 나를 교회 수련회에 데리고 갔다 오면서 이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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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일어났고, 그 후로 진호의 존재감은 내 장자 방을 넘어 형 같은 아우가 되어있습니다.
함께 자위를 한 것 같은데 그 짓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고 동생 놈이 형에게 알려줬습니다.
1981 여름 수련회로 기억합니다. 오다가다 교회 관계자들을 만나면 꼭 수련회에 오랍니다.
특히나 진호 친구 갑수, 성환, 광수, 상묵이가 하도 강청을 하는 바람에 못이기는 척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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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 3000원인가 하는 회비를 진호 아니면 광호 형이 내줬을 것입니다.
교회 청소년 수련회는 누군가가 대신 회비를 내주는 수련회가 전도차원에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리엔테이션 할 때 전도사님인지 누난지 하는 분이 저더러 잘생긴 형제님
이라고 불러줘서 약간은 부끄럽기도 하고 뭔가 잘해야겠다는 마음에 담배를 나만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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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에다 감춰두고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열라 따라 불렀습니다.
라면 땅 받아먹으러 다닐 때의 동심과 부흥회 스타일이 묘한 케미를 일으키면서 율동을 따라
하게 합니다. 확실히 오순절이나 경배와 찬양 같은 뉴 에이지 음악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1981' 입암 산상 수련회'의 기억은 이후 내 신앙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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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교회가 대한예수교 장로교인데 거의 담양 읍교회와 분위기가 별반 다르지 않은 걸보면
담양 읍교회도 통합측 교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는 기도회하면 내 동생 진호, 영숙이
누나, 용석이 형네 형수, 혜란이 그리고 "우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여 주를 찬양합니다"가
자동으로 세팅됩니다. 고삐리들 한테는 퀴즈 대회가 먹히는데 느닷없이 밥줄을 외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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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얻었으니 누구든지 이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요3:16) “아-싸 제가 유일하게 지금까지 외우는 성경구절입니다.
밥 먹고 점심시간에 가마솥 누룽지를 긁어서 먹는데 어찌나 꼬들꼬들하고 파삭파삭
한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네요. 2박3일을 갔는데 마지막 날 기대했던 캠프파이어 대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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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집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동생들 무리들에 끼어 들판에 앉아 있는데 노 상채 장로님이
특강을 한 걸로 기억합니다. 저 양반이 우리 학교 문 광 례 선생님 남편이란 말은 들었지만
직접 대면하긴 처음입니다. 무슨 애기를 하나 하고 잘 들어봤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걸
보면 내 친구 안 홍욱이가 하는 강의처럼 들렸습니다. 나는 촛불이 꺼질까봐 조심조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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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고만 모다들 통성기도를 하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회중이 초상집에서 깽판 치는 목
소리를 하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원 매, 이것이 뭐다냐? 갑수는 자기 아버지가 죽었고,
상묵이는 지 누나 미옥이가 집을 나간 모양입니다. 동생친구들이 다 미쳤으니 믿을 놈은
내 동생뿐입니다. 진호에게 가야겠습니다. 근데 진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자식은 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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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어?” 사방 천지에 내가 숨을 곳도 갈 곳도 없습니다. 나는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기도회가 끝나고 몇 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어서 꼼짝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동생친구들이 내 주위로 몰려왔습니다. 당시엔 창피하고 쪽팔린 상황 속에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했습니다. 성령파인 갑수가 내 안에 자아가 깨지는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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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삼층 천을 경험했다고 하고, 입신에 방언을 한 사람을
수없이 보았고 만났지만, 저는 지금도 그때 왜 내 다리가 풀렸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신앙생활3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방언을 못합니다. 그리고 성경신학을 해서
오순절을 비롯한 빈야드 식 신 사도운동을 기겁하지만, 개별적으로 임한 성령의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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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이 제게는 바울의 다메섹 체험이었습니다.
제가 복음을 받기까지 10년 정도의 시간이 더 걸렸는데 수련회를 다녀온 후로 3-4년 선배인
광호 형이 지속적으로 내게 이웃사랑을 베풀려고 애를 쓴 것 같습니다. 이후로 저는 일도
어머니에게 픽업되어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일도가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강호 형과 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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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에서 한 번 만났습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걸어서 귀가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냐고”
물어봅니다. 나도 모르게 은혜 받았다고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진호친구들을 중심으로
삼삼오오 내려오는데 이런 기분이 뭐지 했습니다. 야구 모자를 쓴 복순이 자매가 해맑게 웃습니다.
당시 제가 담양여고 칠 공주들하고 어울렸기 때문에 객사리 위쪽 여자들은 거의 다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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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순이는 3남1녀의 외동딸입니다. 용곤이 용만이 성만이 복순이가 그 집 족보입니다.
용곤이 형은 담양의 기춘이 형 같은 존재입니다. 진흥 고를 다녔던 기춘이 형의 존재감은
태촌이 형을 능가했습니다. 저는 아직 메이저 급이어서 늘 깡패는 영곤이 형 같아야 한다고
믿고 그의 비주얼 따라 하기를 군대 가기 전까지 벤치마킹했습니다. 항상 삐 카 번쩍한 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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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에, 검정색 일자 통바지의 용곤이 형은 나의 우상입니다. 수련회를 기점으로 해서
복순이가 우리 집을 들락거렸습니다. 담양 태권도장 근처 어딘가에 6개월 정도 산 적이
있었는데 애들끼리만 사는 우리가 불쌍했는지 밥도 해놓고 반찬도 만들어 주고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보로 덮여진 단초한 밥상위에 메모지가 예쁘게 접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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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나랑 사귀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도 그 애가 싫지 않았지만
왠지 그 애를 건드리면 죄받을 것 같았습니다. “꼬맹이 아가씨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요.
조금 더 크면 사귀자” 18살 촌놈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필시 수련회 때 내 다리가 후달린 이후 내가 착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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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10년 정도가 지나서 나는 진짜 성령체험을 하는 사건을 만납니다.
돈키호테 성향이 강한 난 18세부터(고1) 유원지 장사를 하고, 사춘기에 가장이 되어
식구들을 지키고 살았습니다. 내 뜻과 상관없이 광주항쟁, 순화 교육대를 거치다보니
환경에 떠밀려 학생 깡패를 하다가 지방대 응용미술과 한 학기를 채 끝내지 못한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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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부름에 응했고 헌병대로 차출되었습니다. 남들도 다 하는 군 생활이 제겐 얼마나
긴지 전출에, 영창에,나라 지키려 간 것이 아니라 사고 치러 군대 온 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나이 스물 셋에 만기 전역을 하고 악의 경쟁력을 거의 다 갖춘 나는
범 단(범죄조직단체)에 적을 두진 않았지만 독고다이로 전국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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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이대로 무엇이 될 것인가?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이 내게 임하였던지 여자도 깡패 짓도 시들해졌고 27살 무렵 동생의
권유로 교회 수련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발톱을 감춘 악동을 형제로 받아준 공동체 덕에 큰
거부반응 없이 교회 생활을 하였는데 어느 날 지금껏 나 한사람을 성도로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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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회 등록한 날 부터 시작한 성경공부와 큐 티 생활은 25년 내 내 나의 훌륭한 몽학선생이
되어주었습니다. 회개란 내 삶을 유턴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이상 내 삶을 전면 수정
하라는 요구 앞에 멘 탈 붕괴가 일어났지요. 27년 동안 길들여진 나를 바꾸라니 코흘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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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은 충격 속에 상심하고 절망하였습니다. 어떻게 27년 동안 내 몸 깊숙이 배인 습관
이며 이성들을 한방에 반전시킨단 말인가, 그렇지만 어쩔 것인가?
남들 하는 대로 해보니 솔직히 잘 모르는 예수가 싫지는 않지만 어떻게 내가 없어지고 나를
또 다른 누가 조종한단 말인가? 성격상 뭘 하면 제대로 해야 하는 스타일이라 대우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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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점에 다니던 난 음란의 죄를 줄이겠다고 서둘러 신 결혼을 하였고(속도위반,) 청년
공동체에 깊숙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가족 찬양대회, 청년부G B S, 큐 티, 경찰병원 찬양
선교, 떼쓰기 철야기도까지 싹쓸이한 나의 참여 식 신앙에도 불구하고 내 속은 허전했고,
주말이면 한방에 무너지는 묻지 마 인생이었습니다. 이처럼 현실과 내속의 양심이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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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구를 던지는 생활 가운데 스스로의 올무에 묶여 갈등하다가 번번이 무너졌던 인생에
대 반전이 시작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무렵 동계수련회를 가게 되었고 고 윤 종하
총무님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분의 큐 티 강의는 이성과 합리성을
주장하는 내 요구에 큰 공감대를 주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분의 묘한 스피치에 이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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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동안 신봉해온 자아의 껍질을 처음 한 겹을 벗게 됩니다.
내 나이 44세까지 17년 동안 단 한 번도 큐 티를 거른 적이 없고 하루 평균 5시간을 성경책을
붙들고 살았으니 죄지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질색하던 공부가 취미가 되어버렸고 사색하는
훈련 덕에 내 육감적인 성향이 이성으로 컨트롤 되고 있었는데 몇 번의 큰 사건을 만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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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나는 돌파구를 찾으려 했고 사단의 나와바리로 들어가는
돌 직구를 감행하였습니다. 아, 지난 5년은 지옥생활이었습니다.
10년도 넘게 된 영화 첫사랑 궐기 대회를 보았습니다. 오 종록 감독이 만든 로맨틱 코미디
인데요, 손 예진, 차 태연, 유 동근 씨가 나옵니다. 영화를 보는 시각은 모두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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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 한 가지는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서 영화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극중 주 일애의 아버지이자 고등학교 선생님이기도 한 주영달의(유 동근) 열연은 화장지를
계속해서 풀게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건 내가 딸을 키우는 애비이기
때문입니다. 엄마 젖을 같이 먹고 자란 일매를 사랑하는 태일(차 태현)이 첫 사랑 일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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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기 위해 일매 아버지 영달의 눈에 들려고 안 하던 공부를 다하고 지극정성을 들이는
내용이 눈물겹습니다만 저는 아버지의 통곡에서 가슴이 쓰라렸습니다. 결혼식에서 딸에게
하는 말은 압권입니다. “나는 네 엄마를 천국으로 보냈어도 사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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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다. 너를 내게 주고 간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는데,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영화든 은혜든, 감동이란 이런 식으로 달려듭니다. 뭐 어떤가?
어디서든 눈물이 나면 그만 아닌가?
2013.9.11.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