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우 목사를 기억하며
김유훈 (밴쿠버 문인협회)
지난 4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나는 택사스로 물건을 배달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은 카나다 중부 지역인 마니토바와 사스카치온을 지나 에드몬튼까지 물건을 배달하는 일이였다. 이미 4월이지만 마니토바와 사스카치온은 한 겨울 처럼 흰 눈이 내리고 영하의 날씨였다. 나는 이른 아침 16번도로를 따라 에드몬튼으로 가는 길에 어는 시골의 교회와 공동묘지를 지나게 되었다. 그 때 어느 차가 눈 쌓인 공동묘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머리가 하얗게 흰 할아버지가 홀로 차에서 내린 뒤 꽃을 한다발을 들고 천천히 묘지로 걸어갔다. 그 묘지앞에 선 노인이 한 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나는 트럭을 천천히 운전하며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곳은 마침 사스카치온 지역이여서 나는 문득 한 친구가 생각났다. 몇 해 전 장신대 동문들의 모임이 써리에 한 음식점에서 있었다. 그곳에는 대 선배인 조 목사님과 오목사님도 이미 와 계셨다. 두 분은 나와의 인연이 꽤 오래되었다. 조 목사님 은 내가 전도사하던 시절 담임목사의 친한 친구로 그 교회에 자주오셨던 분이시다. 그리고 내가 교회 사택에서 어렵게 살고 고생하고 살던 그 모습을 보신 증인이시다. 그리고 오목사님은 그 분의 고모님이 내 모교회인 동신교회분이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절친한 두 분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때 어는 젊은 목사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얼른 "김유훈 목사님! ,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이렇게 환하십니까?, 제일 밝으십니다. " 하였다. 나는 "아! 그래요 ? 감사합니다."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 젊은 목사는 어린 애기 둘을 유모차에 데리고 온 사모와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식사시간 동안 서로 소개도 하고 근황도 이야기하였다.
그 젊은 친구의 이름은 이 장우 였고 장신대 졸업 후 토론토 낙스 신학 대학원에 유학 중 그 곳에서 목회를 하다 이 곳 아보츠포드에 있는 교회로 오게 되었다. 그가 낙스신학을 이야기 할 때 나 역시 리젠트의 유학시절을 이야기 하며 공감을 갖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얼굴 표정이 여 불안하게 보여 내가 물어보았다." 이곳의 목회는 어떠냐?"하며 , 그러자 그 친구 얼른 "네!, 힘들어요 !" 하며 대답하였다. 그때 나는 "그래서 나는 일찍 명퇴하였습니다" 라고 하자 옆에 계시던 조 목사님께서 " 명퇴가 아니라 용퇴야, 용퇴!" 라고 하였다. 나는 "네?", 하고 물으니 조 목사님은 "용기있게 은퇴했단 말이야! , 알어?", 하시며 웃으셨다. 나는 물론 옆에 있던 많은 목사들이 함께 웃었고 이장우목사도 같이 따라 웃었다.
그 후 시간이 많이 흘러 나는 그 때 만났던 이장우 목사에 대해 한 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에 그 젊은 목사가 아보츠포드에서 사스카치온으로 간 후 얼마 안되어 결핵으로 고생하다 갑짜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동시에 "가슴 아픔니다." , "그게 진실인가요?", "아보츠포드에서 시무하셨던 그 분?", 등등 ..., 여러 사연들이 올라왔다. 이렇게 동정적인 글들도 있었고 가끔 악플도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 그 분 돌아가셨습니다". 라는 글로 상황이 끝났다.
이민 목회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면 박사과정까지 한 젊은 목사가 밴쿠버 근처까지 왔다가 몇 년을 못 견디고 또 다시 동토의 땅 사스카치온으로 떠나갔나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리듯 아파왔다. 그것도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홀로 살아가야 할 젊은 아내를 이 외국 땅에 홀로 남겨 두고 말 없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이장우 목사가 한 동안 내 눈에 아른 거렸다.
나는 비록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 때의 만남이였지만 나 보다 나이가 20년이나 젊은 이장우목사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목사님 얼굴이 제일 밝고 환하십니다"라고 한 말이 지금도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 당시 처음 만나 내 얼굴을 보며 그 말을 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 친구 그 때 참으로 힘든 시절이였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이미 목회를 그만 두고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마음 껏 날아 누구의 간섭도 없이 지내고 있어 얼굴이 밝을 수 있지만 그 젊은 목사는 사명과 책임이라는 굴레에서 한 없이 가슴이 아파 하며 힘들게 목회하다 그의 젊음까지 바치게 되었다. 나 역시 이민 목회 5년 가까이 하면서 힘든 시절을 보낸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지쳐서 내 힘에부쳐 스스로 두 손들고 목회를 포기하였지만 만약 더 힘들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 지 모른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목회자의 길이지만 그 아픔을 아무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내가 리젠트 신학 대학원에서 Paul Stevens교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장우 목사처럼 목숨이 다 하도록 사역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의 신학영향으로 어려운 시절 목회를 포기하고 가정을 지키며 이민의 생활전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의 결정이 잘 된 일인지 혹 그 반대인 지는 인간으로 판단 할 수 없지만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이 외국 땅에서 우리 가정을 지키려고 고민과 기도 끝에 내린 나의 결정은 높은 곳에 계신 분께서 판단해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외로운 이민의 땅에서 누구에게도 그 어려움을 말하지 못하고 힘들게 목회하고 있는 동문들을 위로하고 격려를 해 주고 싶다. 특히 고생만하다 먼저 떠난 이장우목사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