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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주 동서교역의 역사 II. Report (메디치, .hwp
<제10주> 동서교역의 역사 II. Report: 메디치, 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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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제적자유와평등] <메디치, 푸거> 화학신소재학과, 20070847, 이용민.
보낸날짜 2010-10-27 18:32:10
코시모 메디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14세기 초부터 직물 교역을 통해 부를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반니 디 비치(1360~1429)가 은행업을 크게 일으켜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 되었다. 조반니 디 비치는 정치적으로는 평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힘써 신망을 얻었다. 코시모 메디치는 그런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막대한 부와 함께 사업 수완도 물려받은 그는 유럽 전역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교황청의 막대한 자금도 코시모의 은행이 운용했고, 유럽의 많은 군주들이 코시모의 은행을 통해 자금을 융통했다. 그는 메디치 가문에서 믿을 만한 이들을 유럽 각지로 보내 지점을 열었다. 몇 년 사이 지점은 피사, 밀라노, 바젤, 제네바, 리옹, 아비뇽, 브뤼주, 안트베르펜, 런던 등 당시 유럽의 주요 10여 개 도시에 설치되었다. 이 지점들은 상품교역도 담당했다. 코시모는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한 직물제품을 유럽은 물론 중동 지역에까지 수출하고 향신료, 설탕, 견과류를 수입해 큰 이윤을 남겼다.
코시모는 분권화된 경영을 펼쳤다. 유럽 전역에 걸친 사업 네트워크를 당시의 취약한 통신망으로는 충분히 커버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공동 투자자로 자리매김하고, 현지 공동 투자자들에게 자율권을 보장했다. 대신 코시모 자신은 전략적 결정이나 사업성과에 대한 평가, 사업상 중요한 인물을 만나는 것 등에 몰두했다. 코시모의 이러한 경영 방식을 두고 오늘날의 많은 경영학자들은 그가 현대의 대기업 집단의 회장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자신의 명의 또는 동업자 명의로 되어 있는 10여 개 기업의 대주주 구실을 했고, 그 기업들은 모두 법적으로 독립된 회사 형태를 취했다. 오늘날의 대기업 집단과 비슷한 구조인 셈이다. 능력 있는 직원을 파격적으로 후대하는 것도 그의 경영방식의 특징이다. 예컨대 그는 피렌체 은행 하급 서기로 일을 시작한 조반니 아메리고 데 벤치를 최고 직위까지 승진시키면서 사실상 동업자로 대우했다.
피렌체의 왕 아닌 왕
코시모 메디치는 막대한 부를 배경으로 피렌체의 권력까지 장악했다. 종종 치러진 투표에서도 그가 가진 부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물론이다. 정치 분야에서 그는 매우 영리했다. 공식적으로는 관직을 자주 맡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야심이 크지 않은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중요한 모든 결정은 코시모가 막후의 실권자로서 좌지우지했다. "코시모의 저택 안에서 전쟁과 평화가 결정되고, 누가 공직을 맡을 것인지 선택된다. 그는 공식적인 칭호만 제외하면 사실상 왕이다." 당대 사람들은 코시모를 이렇게 ‘무관의 제왕’으로 여겼다. 그러나 코시모가 정치적으로 늘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피렌체의 정치는 부유한 유력 가문들이 좌우했다. 코시모의 영향력이 커지자 팔라 스트로지, 리날도 알비치 등의 인물들이 코시모를 몰아내려 했다. 결국 1433년 알비치 가문의 주도로 코시모는 축출 당했다. 코시모는 수감 당했지만 행정장관을 매수해 베네치아로 망명할 수 있었다. 코시모가 떠난 이후 피렌체는 막대한 자본 유출로 재정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결국 그의 추방령을 철회하라는 여론이 높아졌다. 그런 가운데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정부의회를 장악했다. 1년 만에 피렌체로 돌아온 코시모는 자신의 뜻에 맞게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권력 기반을 다졌다.
코시모는 피렌체,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사이의 세력 균형을 창출하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감소시켜 북부 이탈리아에 평화를 가져왔다. 코시모의 전 유럽에 걸친 사업 네트워크가 외교에서도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1439년에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설득해 공의회를 페라라에서 피렌체로 옮기도록 했다. 피렌체에서 열린 공의회에는 비잔티움제국 황제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도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여 동방 그리스 교회와 로마 교회의 통합을 추진했다. 코시모는 외교 무대의 막후에서 종종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문과 예술 후원자의 대명사
“지난 수십 년 간 나는 돈 벌고 돈 쓰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돈 쓰는 것은 돈 버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 코시모가 돈 쓰는 즐거움을 느낀 것은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일에서였다. 그는 유럽은 물론 오스만제국에까지 사람을 보내 문헌을 수집했다. 그가 수집한 문헌은 비블리오테카 메디체아 라우렌치아나, 일명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핵심 컬렉션을 이룬다. 베르길리우스 작품 초기 텍스트,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그리스 및 로마 고전 문헌과 성서 관련 문헌, 그 밖의 다양한 희귀본이 포함되어 있다. 고대 사본이 1만 점 넘고 파피루스 사본도 2,500여 점에 달한다. 이 특별한 도서관은 피렌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그는 많은 필경사들을 고용해 고전 필사본을 펴냈고, 스스로도 플라톤에 심취해 연구를 지원하고 강의에도 직접 참석했다. 그는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세워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책임자로 임명해 그로 하여금 플라톤 번역과 편찬을 이끌게 했다. 코시모는 이러한 학문 후원 활동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철학적, 사상적 기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건축가 미켈로초 디바르톨롬메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 도나텔로, 화가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프라 안젤리코, 프라 필리포 리피, 베노초 고촐리. 코시모는 이렇게 당대 최고 수준의 예술가들에게 작업을 맡겼다. 당시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의 사회적 위상은 높지 못했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예술가라기보다는 수공업 장인(匠人)에 가까운 처지였다. 그러나 코시모는 그런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넉넉하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많은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코시모와의 인연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예컨대 미켈로초가 건축한 메디치가의 저택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는 15세기 이탈리아 건축의 걸작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브루넬레스키가 산타마리아델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코시모의 재력 덕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멸의 전설을 만들다
코시모는 자선사업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지 순례자들 가운데 병든 이를 구제하기 위한 병원을 세웠고, 피렌체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단체를 세워 후원했다.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에는 별도로 거액을 기부했다. 피렌체시의 종교 행사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도 코시모의 후원이 뒤따랐다. 피렌체 시민들 가운데 어떤 형태로든 코시모의 기부, 자선, 후원의 덕을 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자선활동을 두고 피렌체 시민의 우호적 여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피렌체 시민 사이의 좋은 평판이야말로 메디치 가문 권력의 기반이자 정당성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막대한 부를 아낌없이 쓰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메디치 가문은 코시모가 세상을 떠난 1464년 이후로도 1737년 지안 가스토네 대공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 시대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피렌체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이루었고, 토스카나 대공(大公) 코시모 1세(1569∼1574) 때는 피렌체가 유럽 굴지의 강국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로 성장했다. 메디치 가문은 레오 10세, 레오 11세, 클레멘스 7세 등 세 명의 교황을 배출했고 코시모 1세의 딸 마리아 데 메디치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비가 되는 등, 유럽 여러 나라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코시모는 1464년 8월 1일 세상을 떠나 산로렌초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당으로 향하는 그의 시신 뒤로 피렌체의 수많은 시민이 뒤따랐다. 코시모는 ‘조국의 아버지’, 즉 국부(國父)의 칭호를 얻었다. 그는 피렌체의 문예와 산업을 진흥시키고 메디치 가문 300년 역사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학문과 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까지도 메디치라는 이름이 그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의미를 크게 부여 받으며 회자되는 데에는 코시모 메디치의 역할이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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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콥 푸거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시기에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독일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에스파냐 왕, 포루트갈 왕의 왕가로 유럽 최대의 왕가로 부상한다. 특히 ‘마지막 기사’라고 불리는 막시밀리안 1세는 재통합된 합스부르크 왕가의 번영의 바탕을 마련한 황제로 평가된다. 또한 칼 5세/카를로스 1세 황제는 조부인 막시밀리안의 유산인 합스부르크 영지와 부르고뉴 영지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모국 스페인의 유산까지 물려받아 그의 영토는 ‘해가 지지 않을’ 정도로 광대했다. 하지만 경제적 스폰서가 없었다면, 이 두 명의 신성 로마 황제는 역사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띠었을 것이다. 그 후원자는 국제적인 푸거기업의 경영자이자 은행가인 야콥 푸거이다. 야콥 푸거의 재산과 그의 기업의 가치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국민 소득의 10%가 넘는 정도라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 갑부이자 거상이었다.
야콥 푸거와 막시밀리안과의 첫 만남은 1489년 프랑크푸르트 박람회였다. 이 무렵 야콥은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 은 광산 사업에서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있었지만, 한계에 봉착하여 사업 방향을 모색할 때였다.
1485년부터 인스부르크의 지사를 경영하며, 푸거기업의 티롤지방 은 광산 사업을 총괄하던 야콥은 티롤 공작령의 지그문트 대공을 후원했다. 당시 지그문트 대공은 채광권을 일반인들에게 나눠주며 그 대가로 수입의 일부를 징수하고 있었다. 대공의 광산업 수입은 그때 기준으로 엄청나서 “돈 많은 이”라는 별명이 따라 다녔지만, 사치스런 궁전생활로 늘 돈에 쪼들렸다. 게다가 1487년 베네치아를 상대로 벌인 전쟁 결과로 10만 굴덴을 보상금으로 지불해야만 할 지경에 몰렸을 때 야콥 푸거가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해결해 준다. 직접적 반대급부는 아니었지만 야콥의 뛰어난 경영수완으로 결국 티롤 전체 은 거래가 푸거 가문에 의해 이루어진다. 당연히 다른 상인들로부터 비난이 쏟아졌다. 쇠퇴해져가던 대공의 정치력으로는 더 이상 보호막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푸거가 만난 것이 젊은 막시밀리안 이었다.
야콥 푸거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향후 독일에서 가장 큰 세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자신과 비슷한 나이인 막시밀리안 1세를 재정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면에서도 후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490년 3월 16일 지크문트 공장과 티롤의 영주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작은 사업상 실패와 낭비에 대한 비판에 직면했지만, 막시밀리안이 그의 모든 부채를 지불 보증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퇴위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야콥 푸거의 사전 정치작업이 있었고, 이 자리에 막시밀리안 왕이 합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로써 푸거기업은 막시밀리안의 가장 중요한 채권자이자 자금줄이 된 동시에, 은 광산 사업도 보장받았다. 또한 1498년 야콥은 막시밀리안의 도움으로 그의 영토 내 모든 구리광산을 인수하는 데 성공하여, 실질적으로 유럽 구리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1507년 7월 15일 막시밀리안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다. 이는 야콥 푸거가 선거 비용으로 5만 굴덴을 지원한 덕분이었다. 물론 은행이 손해 볼 일은 하지 않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지역(티롤 서부와 독일 바이에른 지역)을 담보로 잡긴 했다. 그러나 이는 황제와 후원자 관계의 연장선상이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또 하나 있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공식적으로 이자놀이를 금지하였기 때문에, 교회 관계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대놓고 투자를 할 수 없었다. 이들을 위해 푸거기업이 재산증식을 맡았는데, 말하자면 펀드회사였던 것이다. 푸거가문의 VVIP고객은 당시 이탈이아 브릭센의 제후이자 주교였던 멜키어였다. 1479년 그는 몰래 재산증식을 위해 10만 굴덴을 푸거 은행에 맡겼는데, 1509년 그가 사망했을 때 그 금액은 30만 굴덴으로 3배나 늘어났다. 그런데 이 금액을 일시에 지불한다는 것은 바로 회사의 파산을 의미했기 때문에, 푸거가문은 정치적 해결을 모색했다. 즉 여기에 막시밀리안 황제를 끌어들인 것이다. 황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교황을 위해 베네치아와 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다. 그 대신 막시밀리안 황제는 죽은 멜키어 추기경의 유산을 상속하는 것을 승인받는다. 순식간에 푸거 기업은 10만 굴덴의 유산을 황제 빚으로 정산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해 황제는 반대급부를 요구했고, 야콥 푸거는 황제의 베네치아 원정 시 비용으로 17만 굴덴을 지원해준다.
1510년 야콥 푸거는 귀족 신분으로 격상되었고, 1514년 역사상 상인으로 처음으로 제국 백작의 작위를 받는다. 그의 봉토로는 바이센호른, 부흐, 마슈테텐, 비버바흐였는데, 이것 역시 담보설정으로 얻은 것이다.
막시밀리안 황제 1세가 1519년 1월 서거하자 야콥 푸거는 또 한 번 본격적으로 황제선거 로비에 뛰어듭니다. 칼 5세는 조부로부터 왕국만 물려받은 거시 아니라 부채 역시 넘겨받았는데, 푸거기업에서 볼 때 칼 5세를 황제로 등극시켜야 그간 투자한 것을 장기적으로 보장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콥은 ‘핸드크림’이라고 불리는 뇌물을 독일 선제후에게 뿌렸는데, 그 금액은 자그만치 85만2천 굴덴이었다. 당시 금의 구매가치가 오늘날에 비해 훨씬 크지만, 단순히 현재 금시세로만 환산하면 150억에 달한다. 경쟁후보이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조차도 황제 선거에서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푸거가 10만 굴덴에 그 표를 매수했던 것이다. 푸거 은행은 전체 금액 중 2/3인 54만 4천 굴덴을 직접 부담했고, 나머지는 벨스 가문과 이탈리아 은행이 뒷돈을 댔다. 칼 5세는 이 덕택에 “해가 전혀 지지 않는”왕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었지만, 푸거가문에 엄청난 빚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1521년 황제는 스페인의 소금광산, 구리광산, 금광산을 양도해서 그간 빚진 것을 상당히 되갚습니다. 2년이 지난 뒤인 1523년 뉘른베르크 제국의회에서 상업 자본의 제한과 지점 수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에도 독점의 폐해를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 푸거는 칼 5세 황제에게 선거 때 자신에게 진 빚을 상기시킨다. “잘 알려진 사실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제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황제 폐하께서는 로마 황제관을 쓰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칼 5세 황제의 도움으로 독점 제한에 관련된 조치는 더 이상 논의될 수 없었고 유야무야되었다. 황제메이커의 영향력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1525년 사망한 야콥 푸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사람이다. 두 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만들어낸 황제메이커인 동시에 평생을 스폰서로 후원한 사람이었다. 기업가로서 경제적 이익 측면에서 황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겠지만, 그가 지닌 정치적 견해를 보면 황제를 충실하게 따른 보수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칼 황제 일이라면 “무조건 헌신적으로 나섰던 야콥 푸거”였기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운명과 푸거기업이 수십 년간 지속되며 뒤얽힐 수밖에 없었고”, 경영자로서 결정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흥망과 성쇄에 직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푸거 기업은 다음 세대에 그 절정에 달하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어 가는 것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야콥 푸거는 단순히 경제적 스폰서라기보다 정치적 동반자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오늘날 스폰서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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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제적 자유와 평등] <메디치>, <푸거> 산업정보경영공학과, 20091420, 김유정
보낸사람 김유정 <conceptual_na@nate.com>
보낸날짜 2010-10-30 00:19:27
<메디치>
메디치 가문:
메디치 가문(이탈리아어: Medici) 또는 메디치가(Medici家)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세 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레오 11세)과 피렌체의 통치자(그 가운데서도 위대한 로렌초는 르네상스 예술의 후원자로 가장 유명함)를 배출하였으며, 나중에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왕실의 일원까지 되었다.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그들도 자기네 도시 정부를 지배하였다.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의 권력 아래 피렌체를 두었으며, 예술과 인문주의가 융성한 환경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밀라노의 비스콘티와 스포르차, 페라라의 에스테, 만토바의 곤차가 등 다른 위대한 귀족 가문과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하였다.
가문의 유래와 성장: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농업 지방인 무겔로에 왔다고 하며,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230년대 문헌에서였다. 비록 메디치가 이탈리아어로 “의사”를 뜻하는 말이지만, 명칭의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다. 14세기 초, 메디치 일족들은 특히 프랑스, 스페인과 더불어 모직물 교역의 걸출한 집단으로 자랐다. 도시 정부 시설에서 일부 메디치 사람들이 참석했음에도 아직 알비치나 스트로치와 같은 저명한 가문들보다 중요성이 떨어졌다.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라는 사람은 치옴피의 난 동안 모직물 제작자 조합의 의장직을 맡았으며, 1396년 안토니오라는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1400년에 메디치 일가는 또 다른 음모와 연루되어 두 명만 제외하고 20년 동안 피렌체의 정치에서 추방되었다. 이 둘 중의 한 사람인 아베라르도(비치) 데 메디치는 나중에 메디치 왕조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아베라르도의 아들 조반니 디 비치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가문의 재산을 늘렸으며,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비록 얼마간의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그는 가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조반니 디 비치 이후 메디치가의 계통은 둘로 나누어진다. 조반니 디 비치의 장자 국부 코시모(Cosimo de' Medici 'Pater Patriae') 계통과 조반니 디 비치의 차남인 대 로렌초(Lorenzo di Cosimo de'Medici)의 계통이다.
1434년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인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란 마에스트로의 자리를 인계받았으며, 피렌체 공화국의 비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가문의 장자 계통 -국부 코시모의 계통- 은 1537년 피렌체의 초대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암살 때까지 군림하였다. 수 세기 동안의 긴 통치는 겨우 민란으로 국외추방을 당한 두 번(1494년-1512년 사이, 1527년-1530년)만 중단되었다. 권력은 차남 계통-대 로렌초의 계통- 에게 넘어갔는데, 그의 증손자이며 초대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1세와 함께 시작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권력 상승은 연대기 베네데토 데이(Benedetto Dei)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피에로 데 메디치의 가족을 그려 넣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마니피캇의 성모. 코시모와 그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제조업에 기반을 둔 가문의 재산으로 예술과 문화, 교회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세대에 걸친 출세 기반을 확실하게 잡았다. 아무튼, 피렌체 시민들의 절반은 메디치 가문의 경영 지점에 고용되어 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융에서의 업적:
메디치 은행은 유럽을 통틀어서 가장 부유하고 훌륭한 은행이었다. 그 덕분에 한동안 메디치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유복한 가문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를 토대로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였으며, 나중에는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에까지 확대되었다. 회계 전문직에서의 그들은 신용과 차변을 추적하기 위한 복식부기 체제의 개선이라는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 체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는 회계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15세기:
메디치 가문 주요 인물을 곳곳에 그려 놓은 동방 박사들의 행렬, 베노초 고촐리, 프레스코, 1459년경. 피에로 데 메디치
국부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겨우 5년(1464-1469) 동안 정권을 잡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통풍을 앓고 있어 '통풍병자 피에로(Piero il Gotosso)'라고 불렸으며, 통풍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예술 후원 사업에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다. 병에 걸린 그는 집권기 동안 시간 대부분을 자택에서 보냈으며, 그 결과 피렌체에 대한 메디치의 지배력은 점차 약해져 갔다. 그와 같이 메디치의 통치는 그의 아들 로렌초가 물려받을 때까지 정체되어 있었다.
로렌초: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에게는 도시를 이끌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죽은 후에 그는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또한, 그는 자기 아이들에게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었다. 로렌초는 자신의 성공적인 도시경영을 계속 이어가게 하고자 아이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그들의 미래와 직업을 설계하였다. 1478년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는 부활절에 교회에서 암살당했다. 로렌초는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였다. 로렌초가 죽자 능력 없는 그의 아들 피에로 2세가 피렌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는데, 피에로는 1494년에서 1512년 동안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가톨릭 교회에서의 활동:
메디치 가문은 가톨릭 교회에서도 영향력을 끼쳐 16세기 유명한 두 명의 교황들(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을 배출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교회에서의 영향력은 로마와 피렌체 두 곳을 손에 넣어 이탈리아의 지배자로서 살아남게 하였다. 그들 모두 예술을 후원하였지만, 신학분야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또 다른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으로는 알레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레오 11세)가 있다.
코시모 1세:
16세기 메디치 일족 가운데 가장 우수한 풍채를 가진 사람은 코시모 1세였다. 무젤로로 물러갔다가 돌아온 그는 대부분의 피렌체 시민들이 싫어했던 맞수 시에나를 정복하고서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토스카나 대공국을 창건하면서 토스카나 전 지역에 대한 패권을 잡게 된다.
유명한 인물: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 (1331–1388), 치옴피의 난을 진압하여 피렌체의 절대 권력자로 등극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 (1360–1429), 메디치 가문의 재산을 회복시켜 유럽 최고의 부유한 집안으로 만듦
코시모 데 메디치 (1389–1464), 메디치 왕조의 개조
로렌초 데 메디치 (1449–1492), 르네상스 황금기 동안의 피렌체 군주
조반니 데 메디치 (1475–1523), 교황 레오 10세
줄리오 데 메디치 (1478–1534), 교황 클레멘스 7세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 (1498–1526), 교황군 용병대장. 어머니는 카테리나 스포르차, 대공 코시모의 아버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1519–1574), 메디치의 영광을 회복하여 토스카나의 초대 군주로 등극
카트린느 드 메디치 (1519–1589), 프랑스의 왕비
알레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 (1535–1605), 교황 레오 11세
마리 드 메디시스 (1575–1642), 프랑스의 왕비이자 섭정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 (1667–1743)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일족
출처사이트
‘http://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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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거>
야콥푸거:
야코프 푸거 (Jacob Fugger, 1459년 3월 6일 ~ 1525년 12월 30일) 는 독일의 은행가이다. 조상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은행·광산 등에 손을 대어 막대한 부자가 되었다. 마침내 그의 집안은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여러 나라에도 자금을 대주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가 황제가 되는 것을 여러 면에서 도와 많은 땅을 얻어서 영주가 되었다.
정경유착의 원조, 야콥 푸거 :
16세기 초. 교황이 유럽지역에서 가장 자금이 풍부한 지역인 프랑스와 영국의 추기경을 불러 얘기한다. “그대들은 한 시간 안에 3톤의 황금을 모을 수 있는가.” 추기경들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자 “시골동네인 아우구스부르크의 일개 시민도 하는 일을 부국의 추기경들이 못 하는가”라는 면박이 돌아온다. 16세기 유럽에서 회자되던 ‘카더라’ 통신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아우구스부르크의 한 시민’으로 불린 이가 바로 16세기 유럽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대상인 야콥 푸거다. 당시 유럽대륙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가문의 정치 시스템에서 제국을 엮는 ‘황금실(golden thread)’로 불렸던 인물. 독일지역에서 거두어진 소위 ‘면죄부(현대 카톨릭에선 라틴어 ‘인둘겐치아’를 정치적으로 편향적으로 해석한 용어라며 ‘대사(大赦)’라고 번역한다.)’의 판매대금을 로마로 송금하는 유통 업무를 담당했던 이 초기 자본주의의 대표적 기업가는 ‘정경유착의 원조’라고 불릴만한 인물이었다.
15세기말 16세기초 막대한 부를 쌓은 야콥 푸거의 위세는 대단했다. 이 독일 남부 아우구스부르크의 대상인은 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남으로는 나폴리, 서로는 잉글랜드와 에스파냐, 동으로는 헝가리와 폴란드에 이르는 전 유럽지역에 푸거가(家) 지점망을 갖추고 은과 동, 화폐와 직물 등의 거래를 사실상 독점했다. 야콥 푸거에 필적할 만한 상인은 유럽 내에 존재하지 않았고 15세기말 16세기초 50년간 합스부르크가가 그들의 영향력 확장을 위해 유럽내에서 행한 수다한 협상과 전쟁의 배후에는 푸거가문의 자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가 외에도 유럽의 각종 수준의 상인들과 일반 여행자는 물론 공공기관, 도시국가 관계자, 영주들, 교황청 모두 유럽 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야콥 푸거의 지점들을 활용해 금전거래와 물자거래를 했다. 예를 들어 돈을 벌기 위해 에스파냐로 간 독일의 광산업자들은 멀리 있는 친척들에게 돈을 부치기 위해 에스파냐 소재 푸거가의 지점을 통해 송금했다. 16세기 초 여행자들은 다른 지역의 푸거가 지점에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 푸거가의 신용장을 미리 사놓곤 했다는 것.
퍼스티안 천 거래로 일어선 아우구스부르크의 대상인 가문인 푸거가문의 지도권을 1490년대에 잡게 된 야콥 푸거는 그의 전임자들이 주력했던 천과 향신료 교역에서 사실상 손을 떼고 광산업과 금융업의 신수종 사업에 집중한다. 물론 기존 사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퍼스티언천과 기타 직조물, 모직의류, 최고급 이탈리아 실크와 벨벳 그리고 향신료 거래는 다양한 푸거가의 사업 중 하나로 남아있긴 했지만 말이다. 대기업을 물려받은 신임회장이 잘나가던 주력산업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하게 하이리스크의 신수종 산업에 올인한 것과 같은 격이다.
야콥 푸거의 지도하에 광산업에서의 이윤과 그에 따른 금융 신용사업이 점차 푸거가의 주력업종으로 자리메김하게 됐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칼5세가 1525년 말했듯 “야콥 푸거는 다른 모든 상업적 행위를 포기하고 광산업에만 몰두”한 셈이다.
특히 헝가리와 티롤 지방의 광산이 야콥 푸거의 관심을 끌었다. 16세기 이 두 광산은 에스파냐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귀금속을 대량으로 수입하기 전까지 유럽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은과 동의 생산지였다. 이곳을 독점한 야콥 푸거는 초기 유럽 산업의 지존 자리에 올랐다. 광산권의 독점 과정에선 야콥 푸거만의 정경유착이 역할을 했다.
야콥 푸거는 그의 형 울리히 푸거가 문을 연 합스부르크가와의 금융컨넥션을 활성화시키면서 광산업 진출을 시도했다. 푸거가는 1487년에 ‘부유하지만 언제나 돈은 모자랐던’ 티롤 공작 지그문트에게 선금을 주고 은과 동을 확보하는 계약을 맺으며 광산업에 발을 들인다. 이후 푸거가는 티롤지방 공작들에게 일정 금액을 선금으로 지불하고 빌려준 돈과 이자가 완납될 때까지 공작 소유 광산에서 나오는 이득을 얻어왔다. 광산업은 오늘날 인식과는 달리 당시에는 고수익 신사업이었다. 역사학자 막스 얀센의 연구에 따르면 푸거가는 푸거가의 성장 초기인 1487-1494년 사이에만도 40만 라인골드굴덴의 수익을 본 것으로 추산된다는 것.
야콥 푸거가 1490년대 지도력을 발휘한 이후에는 이미 확립돼있던 티롤의 지그문트 공작과의 사업관계 외에 지그문트 사후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갖게 된 독일왕이자 후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합스부르크가 막시밀리안1세와 사업관계를 이어갔다.
막시밀리안1세와의 유착관계는 당시까지 티롤지방 합스부르크가 영지로부터 생산되는 은의 구입과 이와 관련한 금융업의 선두주자였던 한스 바움가르트너를 제치는 계기가 된다. 야콥 푸거는 막시밀리안1세가 바이에른 출신인 바움가르트너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정치상황을 십분 활용해 푸거가의 성장을 유도했다. 왕은 이 새로운 아우구스부르크의 비즈니스 리더에 대한 신뢰를 꾸준히 쌓아갔다. 결국 야콥 푸거는 1491년에는 티롤지방 은교역의 우선권을 획득하게 됐다.
푸거가는 1522년 이전에는 티롤지방 광산을 사실상 직접 소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 ‘빽’을 활용해 경쟁자인 마틴 바움가르트너의 파산을 유도, 슈바츠와 라텐베르크, 리엔츠의 중요한 광산권을 획득한 뒤에는 광산업에 직접 관여하게 됐다. 여기에 오스트리아와 잘츠부르크의 은 교역으로 인한 수익도 야콥 푸거의 부를 불려나갔다.
푸거가는 은 외에도 지그문트와 막시밀리안1세와 맺은 티롤지방 동에 관한 계약과 동 교역을 통해서도 부를 축적해 갔다. 특히 푸거가는 이탈리아 기술자이자 상인가문인 투르조(투르조 가문과는 이후 이중삼중 결혼정책으로 결합이 강화된다.)와의 협력을 통해 동의 원광석에서 동을 효율적으로 뽑아내는 기술을 개발, 수익성을 더욱 높이게 됐다. 여기에 푸거가의 금융업은 광산업과 결합돼 확장을 계속했다.
정경유착의 활용은 헝가리 광산진출시 더욱 빛났다. 헝가리 카르파티아 산맥 지역은 오스만투르크와의 접경지대였고 신성로마제국과 적대적 관계를 가진 마자르족 지도자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의 지배하에 있어서 독일 자본가들이 자본을 투자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하지만 범독일과 헝가리 간의 적대간계는 1491년 프레스부르크 화약으로 해소됐고 야콥 푸거는 프레스부르크 화약 직후 헝가리 광산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결단을 보였다.
그는 마자르족 헝가리의 독일 상인에 대한 적대감을 합스부르크를 ‘빽’으로 삼아 극복하며 광산업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합스부르크가가 헝가리 왕실과 이중의 결혼동맹을 맺어 헝가리내에 합스부르크가가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푸거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푸거가의 입지도 물론 다져나갔다.
이 아우구스부르크의 상인은 꾸준한 수익이 창출될 때까지 엄청난 양의 금액을 헝가리 광산과 용해소, 제철소는 물론 광석을 옮길 도로건설 등에 쏟아 부었다. 당시 헝가리의 광산들은 독일 자본이 없었다면 개발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게 야콥 푸거에 대한 매력적인 전기를 쓴 야콥 스트리더의 설명이다.
야콥 푸거의 사업성장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정치권력과의 독점계약 이었다. 야콥 푸거는 두건의 중요한 동 독점계약을 정치권력과 맺었는데 하나는 1514년에 막시밀리안1세와 푸거가 독점으로 맺은 것으로 1515년 크리스마스부터 1520년 크리스마스까지 신성로마제국내 동 독점권을 푸거가가 갔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1520년 크리스마스부터 1523년 크리스마스까지 회히스테터 가문과 공동으로 동 독점권을 소유한다는 것이었다.
야콥 푸거의 정경유착은 정치권력의 대를 이어 계속됐다. 막시밀리안 사후에 야콥 푸거는 그의 후계자인 칼5세와 독점계약을 맺었다. 1525년 에스파냐 톨레도에서 칼5세가 직접 발표한 칙령은 “야콥 푸거와 그의 가문만이 원광석 거래를 합법적으로 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금속 독점권을 바탕으로 푸거가는 유럽 경제권을 장악해갔다. 동유럽 지역에서 생산된 푸거가 소유 동은 우선 한자동맹 상인과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뤼벡이나 함부르크를 거쳐 네덜란드로 갔다. 이어 안트워프의 푸거가 지점으로 집결됐다. 다시 안트워프에서 푸거가의 동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로 갔다. 물론 혈연동맹을 맺었던 이탈리아 투르조가를 통해 육로로 이탈리아 반도와 남유럽으로도 동이 퍼졌다.
이처럼 야콥 푸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롯해 유력한 영주들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았으며 그가 죽기 몇 주 전 순간까지도 여러 영주들에게 선물과 뇌물을 사용하면서 협상과 청탁을 계속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야콥 푸거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헝가리 국왕이 “푸거가가 헝가리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만을 표한다면 전 유럽을 헝가리에 대해 적대적으로 만들 수 잇을 것”이라고 푸념할 정도였다. 역사가들은 후대의 로스차일드 가문을 제외한다면 정치세력과 그토록 꾸준하고 효과적인 커넥션을 지속적으로 유지한 가문은 푸거가문이 유일하다고 지적한다. 독일과 에스파냐에서의 황제의 ‘통큰 정치(grosse Politik)’는 모두 푸거가의 재정적 지원을 필요로 했다.
실제 합스부르크가가 프랑스의 샤를8세와 프랑수아 1세와 대립하고, 플랑드르 공작의 반발을 제압하고, 동쪽의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수행하는데 모두 푸거가의 황금과 야콥 푸거의 고갈되지 않는 신용지원이 배경이 됐다. 그전에 칼5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데도 엄청난 푸거가의 자금이 투입됐음은 물론이다. 여기에 유럽 전역에 뻗어있는 푸거가의 지점망은 합스부르크가의 군대와 외교관들에게 막대한 자금과 정보가 원활하게 스며들 수 있도록 했다.
황실과 제국의 재정담당자들,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 및 다른 유력 정치세력들과의 꾸준한 접촉으로 야콥 푸거는 언제나 정치의 가장 비밀스런 핵심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울러 야콥 푸거의 ‘무거운 입’은 그가 유럽 정치 중앙무대에 영향력을 미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미래의 세력분배 향방을 냉철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데도 큰 도움을 줬다. 그는 자신이 후원한 합스부르크가의 정치적 승리를 자신의 경제적 이익으로 연결하는데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네덜란드나 헝가리, 티롤을 비롯해 합스부르크가가 새로이 얻은 지역에 언제나 합스부르크가와 함께 들어가 이윤을 창출해냈다.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1세는 금은식기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만찬상을 영주와 기사들에게 대접하며 자신의 막대한 부를 과시하려고 했지만 만찬 참석자들은 모두 밥상의 실질적 ‘전주(錢主)’는 야콥 푸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교황청과도 밀착해 교황청 주조 동전의 거의 모든 원료를 공급했으며 면죄부 판매와 수익금 전달에도 깊이 관여했다(이에 따라 당대와 후대 작가들에 의해 과장된 면도 있지만 마틴 루터 공격의 일차 타깃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교황청과의 커넥션은 중요하긴 했지만 효용성과 실적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가졌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푸거가문은 정치권의 몰락으로 발목이 잡혔다. 그의 후계자인 안톤 푸거를 비롯한 후손들은 16-17세기 네덜란드와 에스파냐 정부가 파산하면서 빌려준 돈들을 날려 푸거가문 재정에 결정타를 맞게 된다. 그가 뿌린 유착의 씨앗은 고속성장의 씨앗이기도 했지만 후계자들의 파멸을 잉태한 파괴의 씨앗이기도 했던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donmany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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