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산 밑, 용당동 그리고 파란대문집, 바로 내가 기억하는 어린시절 나의 고향집이다.
그때만 해도 개울가에 물이 참으로 맑고 깨끗해서 피라미 새끼도 고무신으로 가득 잡아
올릴수가 있었다.
어느 장마가 끝다던 늦여름에, 개울가에 버려진 헝겉 인형을 발견했다. 키가 쾌나 커서 ,
대략 50센티 정도 대는 인형이었는데, 팔 다리가 조금씩 뜯겨서 나갔지만,
인형 얼굴만은 그런대로 깨끗했다.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땐 그 인형을
주워올 용기도 내지 못한채 그냥 다리 난간 밑을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마 내가 여섯, 일곱살 때 였던것 같다.
나이가 마흔이 훌쩍 넘어서도, 내 방엔 인형이 10개가 넘는다.
길에서 주운것도 있고, 모두 헐값주고 산 중고인형들이다.
난 한번도 안아주거나 말을 걸어 본적이 없다.
나에게 있어 인형은, 가까이 하고 싶은 장난감이 아니라 항상 가질수없을 것 같은
사치품이었던 것 같다.
어느 장대비가 내리던 아침, 난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그치기를 기다렸건만,
학교 등교시간이 되도록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결국 엄마는 비료봉지를 꺼내어서
싹뚝싹뚝 내 키와 머리에 맞게 잘라주며, “어서 쓰고 학교 가거라” 하셨다.
난 아무말도 못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우산따위에 돈을 헛되이 쓰면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전문 노름꾼인 타짜셨다. 멋진 이름과는 달리 항상 허름한 쓰봉에
거무스레한 티셔츠를 입고 계셨다. 한달에 한번 정도 아버지 얼굴을 볼까 말까 했다.
가끔씩 새벽녁에 들어오신 아버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엄마랑 얘기 나누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잠에서 깨면, 아버지는 매번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혼자서 참 고생이 많으셨다.
어쨌던, 국민학교 3학년이었던 난 너무 창피하고 용기가 나질않아서,
정상적으로 학교가는 길을 버리고, 왕자산을 넘어서 가기로 했다.
자갈밭과 흙탕물로 나의 낡아 빠진 운동화는 이미 발목까지 척척했다.
그래도, 아무도 나의 비료푸대기 우산을 보지않아서 다행이었다.
학교가 눈에 보이면, 난 얼른 비료푸대기를 벗어서 큰 도팍 밑에 잘 숨기고,
학교까지 냅따 달려갔다.
가끔 황당한것은 학교가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비료푸대기 우산을 어느
도팍밑에 두었는지 헷갈려서, 아까운 우산을 잃어 버린적도 있었다.
다시 재활용했어야 하는데…
내가 다니던 용해 국민학교는 왕자산 밑 우리집 닭 비닐하우스 를 지나
왕자산을 넘으면 나왔다. 오빠는 아마도 국민학교 6학년 이었지싶다.
둘째언니는 3학년, 난 1학년 그리고 막둥이 남동생은 4살, 이렇게 넷이서,
학교가 파하면 다들 떠나고 없는 학교 운동장에서 엄마가 산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엄마는 새벽녁에 다라 한 가득 산 닭을 이고, 난봉꾼들이나, 색시들,
그리고 돈 쾌나 자랑하고 싶은 한량들이 할 일없이 시간을 보내며
인생을 허비하던 곳, 즉 별장이란 곳에 닭을 팔러 가셨다.
엄마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들, 그 속에 가끔 아버지도 계셨다.
엄마는 그때 무거운 다라를 많이 이셔기때문에 , 지금도 왼쪽이마와 눈 밑에
검은 피 얼룩 훈장을 갖고 계신다. 어린시절, 가난이 뭔지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우리들, 그래서 갖고 싶은것도 먹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밥상에 오른대로 먹고, 손에 닿는 것으로 가지고 놀았다.
가끔 아주 드물게 너무도 행복한 날들도 있었다.
난봉꾼인 아버지를 잘 둔덕에, 거짓말 조금 보태면,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아메사탕, 향긋하고 노오란 코쟁이들이 먹는 몽키 바나나,
그리고 하얀 봉지에 가득 들어 있는 양과자.
그땐, 우리 아버지가 노름꾼인게 정말로 좋았다. 순전히 달콤한 뇌물때문에…
이 세상에 존경받을 만한 업적과 인물됨이 큰 그릇은 많다.
그렇게 큰 그릇들중에 한 그릇을 난 잘 알고 있다. 나랑 굉장히 친하고,
나랑 얘기도 많이 나누고 같이 웃고, 같이 밥도 먹는다. 대단한 특권이 아닐수 없다.
그 큰 그릇은 바로 내가 제일 존경하는 나의 오빠다. 완벽한 얼굴에 미스코리아에게도
성형전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이 있듯이, 오빠에게도 중학교 1학년 시절이 있었다.
오빠 교복 소매는 항상 콧물로 멘질멘질 하고, 같은 동네 얼굴짱, 몸짱 승권이
오빠의 책가방 대신들어주는 under dog 이였고, 한술 더 떠서, 매타작도 당했다.
엄마는 그런 오빠가 짠해서, 승권이 집에 사탕이랑, 먹을것을 들고 자주 들락거렸다.
엄마의 사탕몰이 덕분에 승권이오빠에게 덜 맞았다고 들었다.
국민학교 시절, 오빠는 펠레보다도 축구를 잘찼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공을 머리에서 발로, 발에서 윗 몸통으로, 아무튼 축구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잘 찼다.
그리고 자전거도 뱀이 지나가듯 요리조리 재주를 부리며 잘 탔다.
그리고 그 재주를 엄마를 위해서도 썼다.
중학생이던 오빠는 저녁때가 되면 아버지의 무거운 짐 자전차를 힘들게 밟으며,
공설 운동장으로갔다. 우린 더 이상 학교 운동장에서 엄마를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오빠가 자전거를 타면서부터, 엄마의 퇴근길은 오빠가 자전거로 책임졌다.
엄마가 닭을 모두 파는 날이면, 빈 다라로 집에 오신적이 없다.
딸기가 가득 아니면 토마토가 가득 아니면 뻥튀기가 가득가득 다라에서 넘실됐다.
그 덕분에 내 똥배도 지금도 항상 넘실거린다.
이렇듯 오빠는 될성 싶은 나무였다. 아버지가 계셔도 안 계신 우리 집안에서,
못 배웠지만 강인한 생활력과,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가진 엄마 밑에서 엄마의
단 하나뿐인 사랑을 받고 자랐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왜 엄마가 오빠에게만 모든 사랑을 쏟았는지 알게 되었다.
가난이 죄였다.
세상을 살면서 겪지 말아야 할 경험이 바로 가난 인것이다.
엄마는 훌륭한 교육자이셨다.
나는 오빠를 여러가지 닉네임으로 부른다.
J. 디오게네스가 찾고자 하던 인간
J .살아 있는 현인
J. 떠오르면 눈물이 먼저 나오는 사람
J.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오빠같은 훌륭한 사람을 만나고, 또 그 사람이
나와 피를 나눈 오빠라는 사실.
그리고 목포 대만동 고아원 아이들에겐 안경쓴 아저씨,
육교 위 나물파는 할머니에겐 고마운 떨이 총각. 난 자세히는 모른다.
오빠는 왼손이 하는 선행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시기 때문이다.
내 주위엔 별로 사람이 없다. 그래도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진실할려고
최소한 노력하는 정직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나보다도 오빠를 더 잘안다.
한번도 만난적이 없으면서…
오빠를 떠 오르면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몇 편있다.
오빠가 그 유명한 남상고를 우등생으로 다니던때, 항상 교복 칼라에
금뺏지를 달고 다녔다. 유명한 노벨평화상을 받으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모교이기도 한 남상고의 전통이었다.
우등생이었던 오빠의 점심, 저녁 도시락은 정말 우등생감이었다.
반찬 뚜껑을 짠 하고 열면,맛난 냄새가 교실안을 진동했다.
그건 다름 아닌, 엄마의 아이디어로 만든 참깨가루와 짜디짠 소금이었다.
깨를 으깨서 소금과 섞은후, 막 해올린 밥과 함께 점심을 싸주곤 했는데,
뜨거운 밥 수증기때문에, 깨소금 반찬은 비오는날 둘째언니의 “안녕하세요”
머리가 되기 일쑤였다. 앞머리를 드라이러로 반쯤 동그랗게 말아서 그 상태를
유지하기위해 스프레이를 엄청 뿌려서 만든 스타일인데,
짝 가라앉은 게, 영 아니었다.
이렇듯, 가난한 집안에서 오빠는 우리집안의 희망이었고, 오빠는
엄마의 자랑이기도 했다. 집안 형편상 공부말고는 성공할 길이 없었던 관계로
오빠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오빠의 고등학교 1 학년시절 소풍날이었다. 그때 부엌 담당은 나였다.
국민학교 3학년때부터 밥짓기, 연타불 갈기는 자연스레 내담당이 되었다.
세 살 위에 언니가 있었지만, 항상 아프다고 겔겔거렸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언니의 속옷빨기, 잠자리 이불개는 일은 항상 내 차지였다.
언니는 커서 정치를 할 사람이라고 우겨되는 바람에, 그 물결을
본의 아니게 나도 탔다. 언니는 항상 나보다 잘라 보였고,
정치하는 사람은 나랑은 다른 사람일테니 내가 참기로 했다.
어쨌던 소풍날 아침 나는 항상 준비하던 깨소금 반찬대신, 고등어 한 토막을
굽기로 했다. 그당시 나로선, 맛나 보이는 반찬이었다.
깜박 모르고 물을 챙겨주지 못해서, 오빠는 맨 밥과 고등어를 목에 넘겨야만 했지만,
나중에 다 커서 들은 얘기는 더 짠했다.
국민학교 3학년 여동생이 싸준 소풍 도시락을 들고, 오빠는 나름대로 창피해서
혼자서 따로 한적한 곳으로 이동, 점심을 먹었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물이 없어서 손으로 가슴을 쳐 가며, 맨밥에 고등어자반을
먹었다고 했다. 그 광경을 상상하면서, 얼마나 내 가슴이 메이던지…
이 세상을 다 품을수도있을 만큼 덕이 높고, 디오게네스가 아테네 시장을
등불을 들고 헤메며, 찾고자 했던 인간, 그와 맞짱을 뜰수 있는 이 시대의 디오게네스.
그런 오빠에 짠한 얘기는 이게 다가 아니다.
뒷축이 다 떨어져나간 방위시절에 오빠의군화, 버스안에서 김치도시락추락사건,
내 옷 보따리와 오빠의 눈물…
지금도 시장에서 따뜻한 해장국을 부모님과 드시는 오빠는 능력있고 존경받는
지점장님이 되셨다. 오빠가 지점장님으로 취임하시던날, 오빠의 지점장님실 안의
가죽의자에 앉아서, 잠시 눈을 지긋이감고 계신분이 있었다.
오빠가 기꺼이 그 의자를 내어 주신 분은 어머니였다. 그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며 하시던 말
“ 다 이루었다”.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셨을까?
난 멀리 있었다. 그래도 그 날은 많이 울었다. 기뻐서 울었다.
자랑스러운 나의 오빠. 오빠는 한번이라도 자신의 처지를 원망해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말썽많은 동생들 뒷바라지, 나이드신 노부모님 편안히 모시는일,
정작 오빠에게도 힘이드는 가정사가 있는데도…
여자중엔 없지만, 남자 천명속에 한명정도 있다는 의인, 바로 나의 오빠다.
오빠의 생일이 다가온다. 8월 29일 내 생일은 그 전날이다.
오빠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어서, 그동안 마음만 먹고 있던 단편글
“오빠와 나”을 결국 쓰게 되었다.
미국 여류 작가, 진 웹스터의 Daddy Long Legs 그리고 오스트랄리아 원주민
여류 작가 샐리 모건의 “My place” 두 소설 모두 내 맘에 쏙 드는 작품이다.
나도 유명한 여류작자가 될지도 모른다. 이제 단편한편 끄적거렸는데,
꿈보단 해몽이 좋았나!!!
오빠의 생일선물로 이글을 바친다. 끝.
PS: 오빠,오빠가 옆에 있어서 항상 감사해요. 내 인생에 오빠가 없었다면 , 콩없는 콩엿이죠.
오빠 생일 축하해요. 건강하세요.
9월27일 목요일 2012년 호주에서 동생 윤자가
짠한 내인형들...
첫댓글 멋진 가족사랑 ~ 좋은 오빠와 멋있는 동생이야기 감동입니다. ~
kosoko,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잊고 살아온 추억입니다. 기억을 더듬다보니 이렇듯 글이 써 졌어요.
그곳 날씨는 어떤가요? 늦가을이죠? 흰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가 그립군요.
한 여름에 싼타 옷을 입었는데, 어찌나 안 어울리던지... 지금은 아예 안 입어요. 더워서...
좋은 음악 감사해요. 큰 위안이 됩니다. Take care.
여기는 제가 가장좋아하는 만추의 시기입니다. 감나무에 잎이없고 감만 달려있는 계절 ... 설악에서는 만추가아닌 초겨울의 풍경을 봤는데
이번주에는 선운사 만추를 보려가게될 지... 간다면 사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래서 선운사 사진이 있는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