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메이촌에서 시작하여 장시, 후난, 후베이, 허난, 산시,
허베이, 내몽골을 거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무려 2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만리차로萬里茶路! 이 길은 산시 상인들이 무역상품으로 차를
운반하던 길이자 동시에 다양한 문화가 오가던 길이었다. 만리차로의 시작점인 샤메이촌에 서려 있는 갖가지 전설을 찾아 떠나보자.
산시 상인의 주력 상품, 소금에서 차로 바뀌다
산시 상인들이 부를 축적한 배경에는 소금과 철, 석탄 그리고 차가 있다. 물론 명청 시대의
산시 상인들이 부를 축적하게 된 단초는 소금에 있었다. 산시성 남부, 명장 관우의 고향이 있는 윈청 부근에는 약 30킬로미터에 달하는
‘졔츠’라는 짠물 호수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소금 산지다. 소금과 관련된 사업을 총괄하는 ‘염운사鹽運司’가 그곳에 있었기에
‘윈청(운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신화 속의 주인공이자 중화민족의 시조라고 여겨지는 황제黃帝와 동이 계통 민족의
전쟁의 신이라고 여겨지는 치우蚩尤가 바로 그 소금호수를 놓고 쟁패를 벌였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면 신화일 뿐이든,
그곳은 고대 그 지역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싸워서라도 확보해야 했던 땅임이 틀림없었다. 소금의 확보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졔츠에서 생산된 소금, 즉 하동염(‘황하의 동쪽에서 생산되는 소금’이라는 뜻, 졔츠가 산시 남부 황하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은 산시 상인들이 명나라 때 이후 부를 쌓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청나라 때 산시 상인들의 주력 상품은 차로 옮겨갔다. 캬흐타에서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차의 길, 즉 ‘만리차로’를 통해 산시 중부 지역 상인들은 남부의 푸젠성 우이산의 차를 가져다가 팔았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면서 차의 길이
막히고, 상인들은 푸젠성으로 가기 어려워지자 그보다 북쪽에 있는 후난성 안화에서 차를 가져왔다. 그러나 우이산의 차는 여전히 산시 상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었고, 우이산 차의 중심에 ‘샤메이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이미 청나라 강희제 때부터 중요한 차 시장이 형성된 마을로, 산시(산서)와 산시(섬서) 등지에서 차 상인들이 그곳으로
몰려왔고, 그곳 사람들은 그들을 ‘산시에서 온 손님’ 즉 ‘시커(서객西客)’라 불렀다.
만리차로의 시작점, 샤메이촌
푸젠성 우이산(무이산)에 가면 누구나가 대나무 뗏목을 타고 그 유명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우이산을 대표하는 암차岩茶를 마셔보고, 황제가 내려준 붉은 도포를 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대홍포차大紅袍茶를 구경하러
가기도 한다. 또 저녁이 되면 장이머우 감독의 <인상Impression> 시리즈 중 하나인 <인상대홍포>라는 야외 공연을
보게 될 것이다. 우이산의 차를 소재로 삼은 대형 공연인데, 관객이 앉아 있는 무대가 360도 회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간 여유가 좀 더
있는 사람들은 송나라를 대표하는 유학자 주희의 ‘무이정사’에도 가보게 될 것이다.
그에 비해 샤메이촌은 사람들에겐 아직 낯선 곳이다. 하지만 그 작은 마을은 의외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바로 ‘만리차로’가 시작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2013년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러시아를 방문하여
모스크바국제대학에서 강연을 할 때,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가스 수송관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해 언급하며 ‘만리차로’를 함께
언급했다. 이 가스 수송관이야말로 중국 남부 우이산에서 러시아까지 이어지는 ‘만리차로’와 함께 ‘세기의 동맥’이라 불릴 만하다는 것이다.
‘만리차로’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때 그 말은 과언이 아니다. 2014년 ‘차의 길을 다시 걷다[重走茶葉之路]’라는 행사까지 개최하면서,
만리차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실크로드’나 ‘차마고도’와 함께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무역의 길이자 문화의 집산지
길은 언제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길 너머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길은 무한한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하고 싶어지는 대상이 된다. 그래서 그 길 너머를 꿈꾼 산시 상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황토
고원지대라는 자연환경과 전혀 다른, 습하고 물이 많은 남부로 떠났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남부 우이산 지역의 차가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될 때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뚫었다. 만리차로의 시작점은 남부 우이산 동쪽의 샤메이촌이었지만, 그들은 후난과 후베이의 차
생산지를 새롭게 찾아냈다.
산시 상인들 중에서도 거씨 집안사람들이 가장 먼저 남부 우이산 쪽으로 내려갔다. 우이산에서
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샤메이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마을 입구에 ‘매계’라는 강이 흘러 샤메이촌(하매촌)이라 불린다. 샤메이촌
입구에 들어서면 ‘만리차로의 시작 지점[萬里車路起點]’이라고 새겨진 돌 이정표가 보인다. 그 뒤로는 “우이산으로 차 사러 갑시다!”라고 소리치는
드라마 <교가대원>의 주인공 교치용의 모습이 그려진 홍보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장시, 후난, 후베이, 허난, 산시, 허베이, 내몽골을 거쳐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무려 2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니, ‘만리’라는
단어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길은 무역의 길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인 것들이 오가던 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안으로 물길을 끌어들여 대나무 뗏목이 다닐 수 있는 작은 ‘운하’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당계이다. 900미터에 이르는 당계가 시작되는 곳엔 조사교라는 다리가 있다. 지붕이 있는 그 다리는 마을의 수많은
신들을 위한 제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매달 신들을 위한 제사가 열리는 이곳에서 떠들썩한 공연도 함께 열렸다.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열리는
그 공연을 사람들도 함께 보며 즐거워했으니, 지금도 그 다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차를 실은 뗏목이 하루에 300척씩
오르내렸다(<숭안현지>)”는 그 은성했던 시절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추씨 사람들과 산시 상인들의 따뜻한 ‘국수’ 교류
조사교를 지나 당계를 따라 걸어 내려간다.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눈부신 강가를 따라가다가
시간의 흔적이 두껍게 내려앉은 골목길로 들어가다 보면 그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추씨 집안의 사당[鄒氏家祠]’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건물이
보인다(샤메이촌의 가장 번성한 집안인 추씨 집 건물이다). 본래 장시에서 이주해온 추씨 사람들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차 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집안의 차를 산시 상씨 집안사람들이 가져가곤 했다. 따뜻한 햇살 아래 노르스름한 빛깔을 띤 건물의 벽이 눈부시다. 담장에 걸쳐
세운 나무에 고기를 걸어놓고 말리는 모습 또한 이채롭다. 그 아래에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모습이
참 따뜻해 보인다. 여기저기 벗겨진 흔적이 있는 건물은 그 자체가 보석 같다. 퇴색하고 칠이 벗겨졌어도 그 빛바랜 색깔이 눈부시며, 벽돌 조각과
나무 조각들은 여전히 찬란하다.
사실 그 마을을 처음 찾은 이는 기현 거씨 사람들이었지만,
산시 위츠의 상씨 집안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차를 사고 차 가공 공장을 만들었다. 큰돈을 갖고 와 차를
사가는 ‘시커’들은 샤메이촌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한 손님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샤메이촌에 오면 추씨 집안사람들은 국수를 끓여 대접했다.
자연환경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온 산시 사람들을 위해 국수를 끓인 것이다. 산시의 국수는 매우 유명하다. 고양이 귀처럼 생긴
면, 일종의 칼국수인 ‘도삭면’ 등등 수십 가지의 국수를 먹는 산시 사람들은 고향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추씨 집안의 국수를 먹으며 평온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고, 분명 거래가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워낙에 건조한 황토 고원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남쪽의 습기 많은 땅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실제로 상씨 집안 9대부터 13대까지 396명의 남자들 가운데 원인 불명으로 죽은 사람이 39명이나 된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을 떠날 때가 되면 보자기에 황토를 싸서 들고 와 물을 마실 때나 국을 마실 때 그 흙을 조금씩 넣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자기들
땅에 대한 사랑과 향수가 강했다. 그러니 ‘국수 한 그릇’은 추씨 집안사람들의 비장의 무기였던 셈이다.
올가을, 미인고에 기대어 차 한잔의 여유를!
조사교를 바라보며 당계를 내려다본다. 추씨 집안 형제들이 만든 아홉 개의 작은 나루가 보인다.
그리고 당계 양쪽으로 나무 난간이 있고 의자들이 이어져 있다. 기대어 앉을 수 있는 나무 난간과 의자를
일컬어 ‘미인고(미인이 기대앉는 곳)’라고 부른다. 차를 팔러 먼 길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들이 그 난간에 기대어 앉아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마을에 특히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는데 남편이 떠난 후 그곳에 기대어 앉아 오매불망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인이 잉어로 변하여 물속으로 들어가 남편의 뗏목을 찾아가서 그 주변을 맴돌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남편이
돌아오니 얼른 다시 올라와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던가. 그래서 그 의자를 ‘미인고’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샤메이촌에는 이런 전설들이 곳곳에 서려 있다. 물론 그 의자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앉는 ‘매인고(누구나 기대앉는 곳)’가
돼버렸으나, 아련한 전설은 여전히 유장한 물길을 감싸고 있다. 올가을, 오래된 차의 향기가 코끝에 감도는 그곳에 한 번쯤 찾아가보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