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은 세례 요한이 죽게 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1 그 무렵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자기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2 "이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 때문에 그가 이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3 헤롯은 일찍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요한을 붙잡아다가 묶어서,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그것은 요한이 헤롯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그래서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민중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봉왕 헤롯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지역은 로마에서 파송된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다스렸고, 갈릴리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렸고, 요단강 동북쪽 지역은 헤롯 빌립이 다스렸습니다.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두 분봉왕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팔레스틴 지역 전체를 다스렸던 헤롯대왕의 아들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분봉왕이라는 말은 원래 하나였던 통치구역이 나뉘어져서 그 중 하나를 다스린 왕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분봉왕 헤롯은, 갈릴리 지역을 다스린 헤롯 안티파스로 행실이 좋지 못한 폭군이었습니다. 그 헤롯이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 이유는 요한이 헤롯에게 형제인 빌립의 아내를 차지한 것을 비판했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빌립은, 요단강 동북쪽을 다스린 분봉왕 헤롯 빌립과 이름은 같지만 다른 사람입니다. 헤롯대왕의 여러 아들 중의 하나이고, 헤롯 안티파스와는 이복형제가 되는데, 그의 부인이 헤로디아였습니다.
그러니까 헤롯 안티파스가 이복형제인 빌립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인데, 세례 요한이 이런 부도덕한 행위를 비판했기에, 헤롯 안티파스가 요한을 죽이고 싶어했지만 민중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헤롯의 생일날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헤롯을 즐겁게 해주었는데, 헤롯이 그 소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맹세했고,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달라고 요구하여 요한이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이 이야기가 복음서에 수록된 이유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공동체 사람들의 경외심 때문이라고 보수적인 성서학자들은 해석합니다. 그러나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본문을 봅니다. 아직도 세례 요한의 위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까지도 세례 요한을 따르는 공동체의 영향력이 살아있었고 예수공동체와 경쟁관계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서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 같지만 이 세례 요한의 끔찍한 죽음 이야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서 정치적인 요소가 다분히 담겨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메시지에서는 이런 정치적인 메시지가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역시 세례 요한처럼 정치적인 부패를 지적하는 발언을 많이 하셨을 것이라고 현대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정치적인 메시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이 있지만 그걸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냥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백성이기에 로마에 대한 세금도 낼 수밖에 없고, 유대사람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의무도 해야 한다는 원칙론을 얘기한 것뿐이니까요.
한국 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성격에 따라 사회참여에 대한 해석에서 늘 반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진보교회는 정치적인 부패나 인권문제, 환경문제 등 사회문제 전반에 대해 비교적 적극적으로 참여해왔습니다. 반면에 보수교회는, 그런 일은 세상적인 일이고 교회는 영적인 일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는 논리로 사회문제에는 비교적 눈을 감아왔는데, 최근에는 극우적인 정치성향을 띠고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교회도 일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득권자 편에 서셨는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편에 서셨는지는 복음서를 통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기득권자의 부패를 비판하셨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정치적인 언급은 복음서에 거의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이 실제로 정치적인 발언을 안 하신 것인지 복음서 기자들이 정치적인 문제는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인지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쟁 중인 문제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정치적인 문제들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서 기자들이 일부러 그 문제는 기록에서 제외했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서가 쓰여진 시대가 유대 독립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후였고, 로마의 비위를 거스렸다가는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공동체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비정치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여느 때처럼 자신을 만나려고 모인 무리를 보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는데,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무리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건의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이후에 벌어진 일에 대해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15~21절을 보겠습니다.
15 저녁때가 되니,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서 아뢰었다. "여기는 빈 들이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흩어 보내서,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1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물러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17 제자들이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18 이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들을 이리로 가져 오너라."
19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풀밭에 앉게 하시고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이를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 밖에,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쯤 되었다.
이런 기록들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설화로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기록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믿으면, 우리는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서 신화와 전설의 시대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마치 <해리 포터> 영화에서, 사람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장면을 본 어린아이가 실제로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병이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 전승 과정을 거치면서 변형된 설화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설화의 원형은, 제자들이 얼마 안 되는 음식을 나누어주자 모인 사람들도 각자 싸온 도시락을 서로 나누어서, 모였던 사람 모두 굶는 사람 없이 함께 식사를 했을 것이라고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또 하나의 유명한 기적설화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22~27절을 보겠습니다.
22 예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자기보다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무리를 헤쳐 보내셨다.
23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올라가셨다. 날이 이미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홀로 거기에 계셨다.
24 제자들이 탄 배는, 그 사이에 이미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풍랑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슬러서 불어왔기 때문이다.
25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가셨다.
26 제자들이,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였다.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27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심하여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셨다.
제자들이 탄 배가 갈릴리 호수를 건너다가 풍랑이 일어 큰 위기에 빠지게 되자 예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을 구해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는 ‘바다’라고 되어 있지만 호수입니다. 헬라어로 talassa 라는 단어인데, 바다라는 뜻과 호수라는 뜻이 함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설화의 전반부 주인공이 예수님이었다면 후반부의 주인공은 베드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베드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실제로 물 위를 걷게 되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불자 베드로는 무서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지게 되었고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외치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으로 설교할 때, 설교자들이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라고 예수께서 베드로를 질책하시는 부분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합리적인 의심을 하다가도 설교자의 그런 질타를 듣고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은 세뇌의 길, 맹신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