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명인을 찾아서
1. 사물놀이의 김덕수
◎신기의 장단 세계를 매료/격렬한 휘몰이에 한국의 신명/5살부터 남사당패 따라다녀… 작년 「한울림」 새출범/농악·무속가락 정리 세계의 소리로… 현대음악과 접목등 실험도 94년은 국악의 해. 수천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국악이 양악에 밀려 뒷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는 것은 문화민족을 자랑해온 우리에게는 분명 부끄러운 부분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산천 곳곳에는 끈질긴 예맥을 탕탕히 이어가고 있는 재인들이 버티고 있고 마을사람 모두가 예술가인 예향도 적지않다. 때로는 한맺힌 가락으로,때로는 멋과 해학의 예술로 민족의 희로애락을 담아온 우리 소리. 그 자취를 찾아보는 「소리여행」을 시리즈로 엮는다.【편집자주】 김덕수(42). 그는 이전의 모든 장구 명인들이 그랬듯 왼손잡이이다. 밥먹을때고 전화기 단추를 누를때고 한결같이 오른손을 쓰지만 장구채만은 왼손으로 잡는다. 다섯살때부터 남사당패의 당당한 일원이 된 그가 어른들과 쌍장구를 치면서 든 버릇이다. 그의 신묘한 왼손에 장구채가 들리면 그것은 더이상 나무막대기가 아니다. 『하나아 두울』.호흡을 고르며 장구를 구스르다가 북채의 움직임이 눈에 잡히지 않을만큼 휘몰아칠 즈음 그는 마침내 장구와 하나가 된다. 장구가 김덕수인지, 김덕수가 장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땀을 사방에 흩뿌리며 장구채를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릴때 그의 얼굴에는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옆자리의 동료들을 바라보며 벙긋이 웃는다. 휘모리니 굿거리 보다는 차라리 산들바람, 보슬비, 소나기, 천둥, 번개, 태풍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차라리 쉬운 신기에 가까운 연주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관객들은 김덕수의 벙끗 웃음에 비로소 긴장을 풀고 어깨춤을 들썩거리게 마련이다. 지난해 12월18일 연세대학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가진 송년연주회에서도 그랬다. 78년 서울 원서동 공간사랑에서 첫 두드림을 시작한 이래 15년간 사물놀이패로 활동해온 그에게 93년은 일대 변신을 꾀한 뜻깊은 한해였다. 그는 각 분야의 예인, 공연 기획자등과 함께 사물놀이 한울림을 발족시켰고 20명 내외의 규모로 사물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엑스포가 열린 한밭벌에서 각나라의 북 명인들과 함께 「세계 북잔치」를 열었고 군인, 국민학생, 고등학생들 1천여명이 동원된 「천명 사물놀이」를 펼쳤다. 그런가하면 11월에는 뉴욕에 첫 해외지부를 설립했다. 해외에 사물놀이 전용무대를 갖고싶다는 꿈이 실현될 날도 멀지않은 셈이다. 12월18일의 공연은 그 모든 큼직한 공연과 사업들을 모두 안으로 끌어들여 정리하고 한울림 예술단의 1년간의 성장을 보여주는 조촐한 자리였다. 『혼인대사 주당살, 마루대청 성주님살, 건넌방에는 근옹살, 내외지간에 공방살…일체액살 휘몰아가다가 금일 정성 대를 받쳐 원강천리 소멸하니 만사가 대길하고 백사가 여일하고 마음과 뜻 잡순대로 소원성취 발원이다』 비나리로 시작된 이날 공연에서 16명의 설장구가락, 16명 사물오케스트라가 첫 선을 보였다. 한 할머니의 『거참 직사박사하게 두들겨 버리네. 참말로 재주있는 사람들이여』라는 걸쭉한 감탄이 한울림의 우렁찬 북소리에 잦아들었다. 예술가 김덕수의 첫번째 모습은 조선말 최고의 종합예술집단인 남사당패의 천재소년,그것이다. 법고잡이였던 부친 김문학씨(78년 작고)를 따라 처음 섰던 무대가 조치원의 란장. 당시 5세였던 그는 양도일씨등 당대의 뜬쇠(각 장르의 1인자)들에게 상모돌리기, 법고, 장구, 쇠, 춤, 버나(접시 돌리기), 덜미(꼭두각시), 어름(줄타기)을 다 배웠다. 그는 태어나길 예인으로 난 마지막 세대라는 자부심이 짱짱하다. 『이맘때쯤이면 너무 추워서 울면서 업혀다녔어요. 해뜨기전에 우리끼리의 의식을 치르고 나면 밤에 하는 밤굿까지 모두가 공연이고 그게다 공부였지요. 예술을 했다기 보다는 살아남기위한 끝없는 투쟁이었다는 편이 옳아요. 먹고 살기위해서는 둘째여서는 안됐지요』 7살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탄 어린 대가는 12살때 동경올림픽에 참가한 이래 줄곧 해외공연을 다녔다. 그렇게 견문을 넓히면서 어르신들 하던 것만 되풀이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김용배,최종실,이광수등을 규합했다. 공간사랑에서 실험적으로 선보인 웃다리 농악이 호평을 받자 청년 넷은 합숙까지 하며 삼도농악, 무속가락을 현장 연구,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사물놀이이다. 우리가 아는 「김덕수패」는 김용배씨가 뜻밖에 자살하고 최종실씨가 대학진학을 위해 떠났으며 지난해 이광수씨마저 민족음악원을 창립, 떨어져 나감으로써 모두 흩어져버렸다. 김용배씨의 빈자리를 메웠던 강민석씨만이 그의 옆에 남아있다. 『우리들은 보통 친구 사이가 아니었어요. 코흘리개 시절부터 사물을 함께 해왔으니까요. 저가 나였고 내가 저였는데 세월이 흐르니 헤어지게도 되더군요.아프지 않은건 아니예요. 그렇지만 농사꾼이 아프다고해서 농사 안지을수도 없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네사람이 연주해냈던 절묘한 소리를 잊지못한다. 그들은 현해탄 선상, 뮌헨의 무기창고, 시부야 거리, 뉴욕의 센트럴파크,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 등 어디에서나 판을 벌였고 외국인들을 매료시켰다. 가장 원초적 악기인 북, 꽹과리등을 단지 「두드릴뿐」인데 보고 듣는 사람들은 재즈보다, 록보다 더 현대적이고 감동적이라고 감탄한다. 미국의 대아시아문화창구인 아시아 소사이어티는 한 단체에 한번만 초청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김덕수패」만은 다섯번 불러들였다. 그 단체의 총감독인 비아터 고든은 『사물놀이는 하나의 사건이다.음악의 심장은 리듬인데 이들은 메트로놈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리듬을 갖고있다』고 말했다. 김덕수씨는 해외에서 사물놀이 캠프를 열때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한국이 어디있는지부터 말해준다. 그다음에 우리말로 하나, 둘, 셋, 넷을 외우게 하고 우리식으로 숨쉬기를 가르친다. 그는 뉴욕타임스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 음악을 지켜나갈 수 있는것은 우리 조상과 신령 덕택』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으며 지난해 첫회를 벌인 북잔치는 영어로도 역시 「북 페스티벌」이라고 썼다. 그 결과가 세계 곳곳에 포진한 사물노리안(Samulnorian)들이다.악기로만 계산해도 매년 2백세트 이상의 사물을 내보내 현재 우리 북, 꽹과리, 장구, 징을 갖고있는 사람들이 1만여명에 이른다.올해 우리나라 전체의 화두가 「국제화」인데 이토록 흐뭇한 국제화를 이룬 경우는태권도 말고는 일찍이 없었다. 서울 대현동에 자리잡은 사물놀이 공연장겸 연습장 「난장」을 찾았을때 그는 젊은 놀이패 20여명과 함께 앉은반을 연습중이었다. 『휘몰이가 더 힘들것같지. 하지만 시냇물 흘러가듯 잦아지는 부분이 더 중요해. 풍요롭게,살풀이 추듯이』. 김덕수씨는 예의 쉰듯한 목청으로 단원들을 독려했다. 연습이 끝난후 그는 기자에게 『한울림 창단공연때보다 어떻습니까. 훨씬 낫지요』하고 물었다. 특별히 대답을 원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땀을 흘리고있는 단원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평균 25세입니다. 2천년대의 사물놀이는 저사람들이 끌어나가겠지요. 아마 잘 해낼겁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당대의 영광에 만족하지않고 미래를 내다보는 뜬쇠이다.〈한혜진기자〉 ◎「사물놀이」란/북·꽹과리·장구·징 사물의 공연 사물놀이란 말은 김덕수패와 함께 태어난 신조어이다.북, 꽹과리, 장구, 징등 네가지 타악기를 일컫는 「사물」과 농악대나 걸립패의 공연을 가리키는 「놀이」를 결합시킨 계기를 만든것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김용배(84년 작고). 남사당패의 마지막 후손으로 각각 타악기의 귀재로 손꼽히던 젊은이 4명이 78 년2월 서울 원서동의 공간사랑에서 농악가락을 선보였다. 당시 이들의 진지함과 예술성에 매료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이 두번째 공연을 갖자 민속학자 심우성씨가 사물놀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동안 사물놀이라 함은 이들 4명의 걸출한 놀이패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고 김용배씨가 국립국악원에서 국악원 사물놀이를 만든것을 시작으로 부산의 메구놀이패, 국립무용단 풍물놀이, 시립무용단 앉은반등이 생기면서 「소규모의 농악 또는 걸립패 형태의 전통공연양식」이란 뜻을 가진 보통명사로 바뀌었다. 그때문에 애초의 사물놀이는 다른 패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김덕수패」라는 머리를 덧씌우게됐다.지금은 풍물패 사물놀이, 뜬쇠 사물놀이, 진쇠 사물놀이등 전국에 걸쳐 50여개 직업팀이 생겨났고 각 대학이나 직장의 농악패까지 합치면 그 숫자를 이루 밝히기 어려울 정도이다.
2. 풍어제
◎사흘밤낮 장구치며 치성/굿장단 신묘한 세습무당/“나 죽기전에 전수시켜 현대무대화 해야 할텐데…” 우리나라에 인간문화재가 많긴해도 김석출씨(72)만큼 재주많은 이는 드물다. 그는 강릉에서 부산까지 동해안 일대에서 벌어지는 동해안 별신굿(중요 무형문화재 82호)의 똑떨어진 제일인자이다. 그의 35박 동해안 굿거리장단은 말그대로 신묘해서 한다하는 국악인중에 그에게서 장단을 전수받은 이들이 많다. 부인 김유선씨(동해안 별신굿 기능보유자)와 함께 덩실덩실 간드러지게 추는 춤도 빼어나다. 어디 그뿐인가. 그는 최초이자 유일한 호적 산조 연주자이며 종이꽃(지화)만드는 데에도 달리 비길 사람이 없다. 굿판에서도 그렇지만 피아노, 재즈 드럼, 첼로등 온갖 양악기와 함께 호적협연을 하고있는 그를 보면 70대 노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7∼8년쯤 전부터 다리가 저리는 병을 얻어 행보가 마냥 자유롭지 못한데도 그는 새삼스레 「장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대단한 열정과 힘을 과시하고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호적불기 시작하면 화장실 안가고도 사흘은 버틴다』. ○설움받은 무당아들 김석출씨는 세습무이다. 『석출이네 짚누리는 3년만 되면 춤춘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길 정도로 일가붙이 하나하나가 모두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굿판 주변에서 잔뼈가 굵었다. 경북 영일군 흥해읍 환호동 26에 뿌리내린 그의 집안(김해김씨 삼현공파)은 진작부터 한지장사에 눈을떠 그 지역에서는 소문난 알부자였다. 가문의 내력이 바뀐것은 그의 할아버지 김천득씨대부터였다. 4대독자였던 김천득씨는 아쉬울것없이 돈쓰며 놀기 좋아하던 한량이었는데 어느날 장에 나가 풍어제 구경을 하다가 무녀(이옥분씨)에게 반했다. 그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녀와 결혼하고 무업을 배워 화랑(박수, 남무)이 됐다. 이때부터 무업이 김씨자녀들에까지 이어졌으니 4대째인 셈이다. 부친 성수씨는 물론이고 친모 이선옥씨와 계모 한봉필씨도 세습무가 출신이다. 형 호출씨(작고), 형수(김채봉), 조카며느리(신길자), 조카들(업룡, 용택-김영숙부부)모두가 무인이다. 또 큰아버지인 범수씨쪽에도 사촌형수 신석남씨(강릉단오제 문화재)등 빼어난 무인들이 많다. 김씨의 첫부인 변난호씨 역시 세습무였고 지금 부인인 김유선씨는 비갑이(당대에 새로 배운 예인)였지만 결혼을 하자마자 찰떡처럼 손발이 잘 맞았다. ○부인도 기능보유자 김씨는 무당집 아들이라는 이유로 설움도 많이 겪었다. 하루종일 사이좋게 놀았던 동네 아이들이 『너 무당아들이지?』하고 물어놓고 『맞다』는 대답이 떨어지면 흠씬 패대곤 했다. 연약한 어깨에 북이며 꽹과리등을 잔뜩 싣고 사흘이고 나흘이고 걸어다니다가 일본 순사라도 쫓아오면 목숨을 걸고 줄행랑을 쳐야했던 시절. 그렇다고 무업 배우기는 쉬웠는가. 엇박, 독꺾이 장단, 국덕장단등 김씨 집안에 독특한 장단들을 배우다가 하나라도 틀릴라치면 당장 종아리를 걷어야했다. 『이제야 문화재 세상이 돼서 조금 빛을 보지만…』이라며 추억에 잠기는 그는 요즘 국악인들이 국악원이나 창극단 같은데서 월급을 받아가면서 공부 하는것을 보면 솔직히 『별천지가 다있다 싶다』고 한다. 자녀들(9녀1남)중에선 딸 영희와 동연, 아들 동언, 사위 김동률씨등이 그와 한길을 걷고있다. 동해안 일대에서는 지금도 심심치않게 별신굿판이 벌어진다. 어민들 수가 줄어들어선지 마을마다 굿하는 빈도도 잦아들었지만 그래도 풍어제의 깃발이 끊이지않고 나부끼는 곳은 이제 동해안 뿐이다. 젊은 어촌과장, 계장들이 많아져 촌로대신 젊은이들을 상대해야 하고 굿판에 무속연구하는 교수, 대학원생, 사진작가들이 동네사람들보다 더 많이 몰리는 것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풍경이다. 동해안 별신굿은 세습무이기때문에 신에게 의지하는 굿을 펼치지않는다. 그와 부인 김유선씨가 펼치는 굿을 보면 제의라기보다 공연에 가깝다. 구경꾼도 두려워하고 긴장한다기보다는 긴장을 풀고 한바탕 웃어제끼며 신나게 논다. 김씨 부부가 한구절씩 주거니 받거니 하는 민요가락에도, 어깨를 스칠듯 장단을 맞추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춤사위에도 신명이 담뿍 담겨있다. 사흘을 넘겨가며 계속되는 굿판이라 후덕한 얼굴의 무당과 재주좋은 화랑에게 얼굴을 익힌 동네 사람들은 『어느 부부인지 잘도 한다』고 농을 건다. 그참에 부인 김씨는 『우리가 굿판을 떠돌면서 한때 돈깨나 모았는데 우리 신랑이 계집질, 노름질에 다 날려버려 지금껏 돌아다닙니다. 소문이 많이 났지예』하고 은근슬쩍 꼬집기도 한다. 간단히 차린 제물을 배에 싣고 솟대를 꽂고는 바다에 나가 한바탕 사설을 읊은후 촌장격인 어른에게 솟대를 잡게 하고 무당은 바라를 두드리면서 『온동네 만사태평하겠습니까』하고 묻는다. 공수를 받아 『걱정마라. 어느 자손이라고 받들어주고 누구 자손이라고 안 받들어주겠느냐』고 대답한다. 사흘동안 치성을 들인 동네 사람들이 안도하는 순간이다. 또 『한잔 마시면 실수할수있으니 말조심하고, 삼재가 들었으니 잔치는 석달열흘 지난후 치르라』는 당부도 잊지않는다. ○첫 호적산조 연주가 김석출씨는 요즘은 호적에 열을 올리고있다. 호적은 일명 날라리, 쇄납, 태평소로 불리는데 최근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들 노래 「하여가」에 태평소 가락을 넣어서 청소년들의 귀에도 설지 않게 된 악기이다. 엄청난 소리때문에 시끄럽다는지청구깨나 들으며 54년이나 불어댄 끝에 이젠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못한 호적 산조를 만들어냈다. 그의 솜씨에 관한 소문은 일본에서 더하다. NHK방송사와 빅터 레코드사가 부산에 녹음기계 일습을 싣고 와서 그의 태평소, 꽹과리 장단들을 며칠동안 녹음해 가고 일본의 명인들도 와서 주법을 배워갔다. 그는 『김석출이 죽기전에 CD고 비디오고 다 떠놓겠다는 속셈이지』하고 설명한다. 국내에 우리 가락과 소리를 담은 변변한 음반, 영상자료가 없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생각해내지 않을수없다. 그가 말끝마다 『나 죽기전에』라고 말하는 뜻을 이제는 짐작할수 있을것 같다. 미신이다 뭐다 해서 한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굿, 그 독특하고 황홀한 의식을 보전하고 오늘의 무대에 맞게 공연형식화해야 한다는 소망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한혜진기자〉 ◎「동해안 별신굿」이란/어촌평안 비는 열두거리 마을굿 지난85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82호로 지정된 동해안별신굿은 어촌의 평안과 풍어를 비는 축제이다. 고기를 잡으러 멀고 가까운 바다로 노를저어 나가는 어부들 작업상의 위험과 정신적인 불안을 신앙심으로 극복한다는 취지를 갖고있다. 별신굿은 풍어제라고 불리는데 일종의 마을굿이다. 굿 자체는 여러 형태로 전국 각지에 전승돼왔으나 오늘날까지 행해지는것은 동해안 풍어제 뿐이다. 특히 매년 동해안에서만 고기잡이 사고로 1백여명의 어부들이 숨지고있어 죽은 영혼들을 위한 수망 오구굿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있다. 4대째 세습무인 김석출씨네에 의해 진행되는 동해안 별신굿은 굿판을 화려하게 장식한 각양각색의 지화, 그리고 누구도 따라잡기 어려운 무속가락에 있다고 할것이다. 문굿, 세존굿, 성주굿, 군웅굿, 장수굿, 용선가, 꽃춤등 모두 12거리로 구성돼있다. 분단전에 김씨 일가는 동해안의 최남단인 부산에서부터 최북단인 서수라를 거쳐 목단강을 건너 만주 봉천까지 돌아다니며 굿을 벌이곤 했다고 한다.
3. 대금정악 조창훈
◎「민족의 한」 삭인 청아한 정율/맥잇기 40년… 이제 “몰아지경”/“찬사도 싫고 명예 부귀도 싫어… 제자들이 대견할뿐” 80년5월 빛고을의 통곡은 미학적 허세로 치유될 수 없는 검은 그림자다. 해마다 5월이면 광주의 원혼을 달래주는 호곡이 이땅의 대나무숲에서 제일먼저 시작된다. 우리 민족의 아픔을 가장 절박하게 치대는 대나무피리―대금. 장중하고 청아한 대금소리는 이시대 어느 곳에서 비롯되는가. 우리 시대의 찬사를 등지고 광주에서 호곡의 일선에 서있는 대금정악연주자 조창훈씨(54). 지방에서 활동하지만 국악인이면 누구나 대금정악의 1인자로 그를 꼽는다. 올해로 단소생활 40년. 92 년 KBS국악대상을 수상했고 곧 신나라레코드사에서 2장의 디스크도 출반한다. 고박정희대통령의 단소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조씨는 찬사도 싫고 명예와 부귀도 싫다. 3자 남짓의 젓대(대금) 하나면 세상이 그의 마음이다. 외양에 초월한 그는 전수이수자 지정도 89년에야 받았다. 국악사양성소 1기생으로 화려한 각광을 받으며 연주무대에 섰지만 이제는 초야의 무아경을 소중히 여긴다. 대금정악연주 인간문화재인 김성진씨(79·국립국악원 사범)의 수제자인 그는 스승이 어려워 개인연주회를 갖지 않는다. 대금정악은 다른 국악기와 달리 계파가 없고 김씨를 축으로 하나의 흐름을 자랑하는 고고한 연주다. 통일신라의 신문왕이 대나무피리를 불어 나라를 평안케하고 백성을 위안했다는 「만파식적」의 전설처럼 청아하고 장중한 대금정악가락은 누구의 심란함도 치유해준다. 숱한 역경을 겪은 때문일까. 그의 대금소리는 아버지의 죽음앞에서 울음을 참는 맏형의 어깨떨림처럼 억제된 감정이 잔잔히 파도친다. 조창훈씨는 전남 승주군 주암면 대광리에서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한통운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2살때 서울로 이사온 그는 가난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결정됐다고 설명한다. 『휴전후 56 년쯤 경제불황이니 학교다닐 형편이 돼야죠. 마침 국립국악고등학교 전신인 국악사양성소에서 국비로 1기생을 모집한다기에 입학했죠』. 당시 입학생은 모든게 무료였다. 교복과 책은 물론 용돈까지 받았으니 호강에 겨운 조건이었다. 입학생은 30명. 중등부 3년, 고등부 3년의 6년제였는데 61년 17명이 졸업했고 현재는 조재선(서울예전교수) 박영안(부산시립국악관현악장) 최충웅 김중섭 이흥구(이상 국립국악원)씨등 7명이 맥을 잇는 1기생이다. 국악사양성소에 들어간 조씨는 1학년때 편종 단소 대금등 모든 국악기를 섭렵했다. 그러나 2학년초 스승들의 권유로 대금을 평생 운명으로 삼게 된다. 처음엔 손가락이 짧아 대금을 불기가 힘들었는데 밤마다 손가락에 대나무를 깎아 벌어지도록 끼워놓고 자다보니 손이 커지고 손가락도 길어졌다. 폐활량도 컸기에 연주실력은 자연 늘어갔다. ○제2의 인생 시작 『대금만큼 폐활량을 필요로 하는 악기가 없어요. 스승의 칭찬을 받고싶어 눈물이 쏟아지도록 오래 불려고 기를 썼죠』. 도시락을 4개씩 싸가지고 다닐만큼 연습벌레였다. 새벽4시에 마포 집에서 출발, 학교에서 밤9시까지 연습후 집에 가곤했다. 당시 대금 스승이던 김성진씨는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군고구마를 사들고 어린 제자들이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교실에 들르곤 했다. 제자들이 어쩌다 연습을 하지않고 일찍 파했을 때는 전달되지 못해 굳어진 고구마를 다음날 아침 말없이 건네며 은연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김선생님은 마음이 여려 개미도 죽이질 못하세요. 그런분 앞에서 차가워진 고구마나 굳어진 빵을 입에 넣으려면 전날 연습을 안하고 일찍 도망친게 어찌나 송구스럽던지…』 그당시 국악사양성소는 국비생들에게 월1만5천환(화폐개혁전)씩의 용돈도 지급했는데 학생들은 교통비로 3천환씩만 받았을 뿐이다. 교사들은 나머지 1만2천환으로 필요한 학용품을 사도록 조처했다. 학생들이 돈을 모두 집에 가져가면 그돈으로 학용품은 커녕 끼니가 오갈데 없는 식구들의 배를 채울게 뻔했기 때문인다. 61년 국악사양성소 졸업후 국립국악원 연구원으로 들어간 조씨는 64년 국가고시 4급(현7급)애 합격해 국악사보가 됐고 70년까지 국악원에 재직하며 연주활동을 했다. 그의 연주실력이 무대주변에 알려지자 영화사에서 사극의 배경음악을 맡아달라는 제의도 들어왔다. 「폭군 연산군」「맹진사댁 경사」「단종애사」등의 영화에는 그의 신들린 연주가 녹아있다. 고박정희대통령과의 만남도 국악원 연구원시절에 이뤄졌다. 1963년 우리 국악계에서 가장 「잘 부는 사람」으로 추천받은 조씨는 박전대통령과 독대했다. 그자리에서 조씨는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불에 그을린 박대통령의 단소를 보았다. 한달에 두세번정도 대통령에게 단소를 가르쳤는데 사례금은 매번 1만원의 금일봉이었다. 당시 조씨의 월급이 3천원정도였다. 강습은 67년까지 4년간 계속됐다. 그러나 청와대출입은 박대통령의 비극적 종말만큼이나 그에게도 최악의 시련을 주었다. 밀수사건에 연루돼 3년간 지명수배를 받았고 1억원의 빚까지 졌다. 인사동의 한옥 한채에 1백50만원하던 당시였으니 1억원을 갚는다는 것은 죽으라는 얘기였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어요. 주택건설면허를 획득해 주택공사가 발주하는 공사를 수주했죠. 17평짜리 단독주택 5백채를 맡았는데 그것으로 빚을 갚았어요』. 곱게 연주나 할 것을 돈때문에 악몽을 꾼 그는 70년 국악원에 사표를 냈다. 심기를 다스린 뒤 부산으로 내려간 조씨는 부산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고 초대단장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부산시립무용단의 「달사비」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로부터 한푼의 지원도 못받는 연주단이었으니 조씨로선 막막할 따름이었다. 점심은 굶기 예사였다. 차비대기도 어려웠다. 결국 부산국악원장이던 조백진씨의 학원을 빌려 학생들을 지도하고 레슨비를 모았다. 단원들에게 한그릇에 20원하는 칼국수라도 사먹이면 흐뭇할 뿐이었다. 그러나 고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힘든 객지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73년 서울 인사동에 학원을 차린 조씨는 동양화가들과 교류하며 그림에 심취했다. 마음고생 심한 국악이 싫었다. 10년간 화랑을 경영했지만 가짜그림만 사모은 탓에 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사군자를 치고 서화를 수집하는 안목이 생기기까지 속아 산 그림이 엄청나지요. 30년간 그림을 벗하고 사는 것도 업인가봐요』 ○둘째아들 뒤이어 화랑을 폐업하고 다시 시작한 국악의 길. 82년 광주시립국악원원장으로 부임했다. 광주항쟁의 뒷자락이 드리운 그곳을 제2의 고향으로 다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의 화려한 무대도 싫었다. 그러나 정악을 전공한 그로서는 민속악이 주류를 이루는 광주 그자체가 모험이었다. 결국 88년 광주시립국악원이 폐쇄되자 학원을 차렸다. 『광주는 대금산조의 진원지여서 대금정악이 환영을 받지 못했어요. 지역적 특성때문에 국악원이 폐쇄된거죠』. 예향으로 불리는 광주에 국악원은 커녕 국악단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더욱 광주에 애착이 간다고 했다. 현재 그는 광주학원에서 4일, 서울학원에서 3일을 지낸다. 대학출강도 부산대 조선대 전주우석대등 세군데로 줄였다. 『하루도 쉬지않고 바깥으로 돌아다니니 전국 어디에나 제자들이 있지요』. 묵묵히 대금정악을 배우는 제자들을 볼때마다 대견할 따름이다. 직접 대나무로 대금도 만드는데 자신의 제자들에게만 제작해 준다. 『가야금은 줄로 음을 조절할 수 있지만 대금은 한번 구멍을 뚫으면 음이 정해지기 때문에 세심한 배려가 최우선』이라고 한다. 영화감독을 지망하려던 그의 둘째아들 충석씨(27·추계예대 국악과3년)도 5년전부터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정인화기자〉 ◎궁중에서 연주되던 우아한 아악 대금정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다. 정악은 속되지 아니하고 고상한 풍류를 지닌 아악으로 옛날 궁중에서 연주되던 음악을 지칭한다. 대금정악은 장중하고 고고한 가락이 특징이다. 속악인 대금산조가 감정표현에 치우치고 애조띤 음색을 내는 것과는 완전 대칭을 이룬다. 대금정악의 범위는 궁정음악계통인 아악곡으로 1백여곡의 대부분이 합주음악이고 독주곡은 「평조회상」중의 「상령산」「청성자진한잎」(일명 요천순일지곡)「헌천수」등 특징적인 몇곡이 있을 뿐이다.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예능보유자로 김성진씨(79)가 인정됐다. 이수자는 11명. 홍종진 조성내 임진옥 조창훈 임재원 이철이 신룡문 홍도후 김철호 김승근 윤병천씨다. 예부터 대금은 관현합주를 할 때 모든 악기의 음높이를 정하는 표준악기의 구실을 해왔다. 「삼국사기」에 신라 삼죽으로 소개된 대금은 중앙아시아나 중국대륙에서 사용되던 것이 고구려를 통해 신라에 정착됐다고 전해진다. 신나말 9세기 이후에 성립된 삼현삼죽(거문고 가야금 향비파, 대금 중금 소금)의 하나인 대금은 거문고와 함께 국악연주의 기본악기로 꼽히기도 한다. 몸체에 뚫어진 구멍이 6개이고 김을 불어넣는 강도에 따라 저취 평취 역취로 구분된다. 대금을 만드는 재료는 해가 오래 묵은 황죽이나 살이 두꺼운 쌍골죽. 특히 쌍골죽은 마디 사이가 짧고 살이 두껍고 단단해 호흡으로 인한 습기에 잘 견디며 맑고 여문 소리를 내기때문에 최고로 친다.
4. 동초제 오정숙
◎다섯마당 완창한 최초 여명창/가사문학성 중시… 정확한 사설·정교한 너름새가 특징 ○김연수소리 한평생 터질만큼 가득찬 한이 곰삭으면 그 심연에선 투명한 관능이 출렁거린다. 우리 민족은 자정할 수 없는 한을 낯선 강에 띄우고 역사의 바다에 동참한다. 우리의 상처는 소리로 거듭나고 우리의 한은 오장육부를 돌아 역사를 이룬다. 여유명창중 유일하게 판소리다섯마당을 완창한 오정숙씨(60). 동초제의 유일한 인간문화재이다. 소리·발림(연기)·아니리(사설)등 판소리가 요구하는 삼박자를 두루 갖춘 국악계의 여왕. 단단하고 밝은 소리에 다른 이보다 몇배나 긴 달우(바이브레이션)를 떠는 신비함. 오정숙은 타고난 목청과 흡인력,비상한 머리로 김연수소리를 잇는데 성공했다. 74년 국립극장소극장은 오정숙의 「수궁가」완창무대를 감상하려는 청중들로 꽉 찼다. 「춘향가」「흥보가」완창에 이어 또다시 세번째 마당에 도전하는 그의 열창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나 오씨는 초조할 따름이었다. 공연시간이 임박해도 자신과 함께 무대에서야할 고수 김동준씨가 나타나질 않는 것이다. 또한 객석의 동료들이 자꾸만 우는 것이 아닌가. 「수궁가」는 슬픈 소리가 아닌데도. 그의 공연이 끝나자 무대옆에 섰던 고수 이정업씨(동초선생의 지정고수)는 그제서야 두다리를 뻗대며 『갔어. 김연수가 갔어』하며 울부짖는 것이었다. 오정숙은 자신의 완창공연이 있던 날을 떠올릴 때마다 목이 멘다. 하필 그날 스승 김연수선생이 돌아가시다니. 고수 김동준씨는 스승의 빈소를 지켰고 정작 김연수선생의 유일한 후계자인 오씨는 이를 까맣게 모른 채 무대에 오른 것이다.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요. 아무 것도 모르고 소리에 빠져있었으니.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사실을 숨겼던 주변사람들의 심정은 오죽 했겠어요』 김연수선생의 소리제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고 있는 유일한 명창 오정숙은 간암으로 돌아가신 스승과의 어이없는 이별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뜨겁다. 동초 김연수문하에서 소리공부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모두 곁길로 나갔고 동초제를 지켜 세상에 퍼뜨린 이는 오정숙뿐이다. 판소리는구전돼왔는데 아무리 명창이라도 갑자기 가사가 떠오르지 않으면 붙임새를 이용해 위기를 모면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초선생은 이런 얼버무림을 허락치 않았다. 아니리 발림 가사전달이 정확하고 마디의 맺고 끊음이 분명해야 한다는 원칙이 그의 대쪽같은 성격을 말해주기도 한다. 선생은 사설의 오자을 바로잡기위해 한학자의 자문을 받았고 「춘향가」염불대사확인을 위해 큰스님을 찾았다. 또 「수궁가」약성가를 정리할 때는 한의사를 찾았고 그가 기록한 「수궁가」약성가의 방문대로 설사약을 지었더니 그대로 나았다는 일화는 이제 전설로 남았다. 제자들에게 연극을 해야 판소리도 할 수 있다며 연기를 강조하기도 했다. 엄한 교육못지 않게 험구도 대단했다. 오정숙은 『스승의 엄한 교육을 대물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머리속에 있는 소리를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구전하려니 호랑이선생이 될 수 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청중휘어잡는 연기 정정렬―김연수를 잇는 오정숙은 국악계의 작은 거인이다. 신장1백50㎝의 아담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힘찬 소리는 기적에 가깝다. 무대에서 청중을 사로잡는 능력 또한 그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마녀의 신비다. 오정숙은 1935년 오삼룡과 문설앵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외가가 있던 진주에서 났지만 고향은 선친을 따라 전주다. 부친이 44세,모친이 41세때 얻은 귀한 자식이었지만 3년후 어머니의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았다. 농사지으며 딸에게 전력투구했다. 평소 판소리를 좋아하고 꽹과리를 즐겨 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소리에 익숙해있던 셈이다. 일곱살부터는 남도민요를 흥얼거리며 귀동냥한 판소리사설까지 읊어댔다. 동네에선 신동한번 구경하자고 줄곧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정숙의 운명이 현실의 무게를 싣고 굽이치기 시작한 것은 14 세때였다. 광주 박동실선생이 이끄는 아성창극단이 전주에 왔다. 『그 단체엔 지금도 활동 중인 성창순 박옥진씨 등이 활약하고 있었죠. 당시 국극계 비극의 여왕으로 불리던 박옥진씨가 부러워 아성창극단에 입단했어요. 내 운명의 화살이 시위를 떠난거죠』 박옥진 성창순씨와 함께 트로이카시대를 연 그는 이듬해 김연수창극단으로 옮겼다. 박옥진이 춘향이면 오정숙은 향단이었으니 섭섭할 수 밖에 없었다. 김연수창극단원으로 4년간 수행하는 동안 동초의 「춘향전」을 배웠다.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백일독공 7차례나 19세부터는 박보아·병기·옥진남매가 이끄는 삼성여성국극단에서 2년간 두각을 나타냈다. 21세때부터는 판소리학습에 주력했고 김소희선생의 「심청가」를 사사했다. 그러나 10년간의 순회공연에 지친 몸이 아파왔고 정신적으로도 쇄잔했다. 소리에 젖어들 수 없을만큼 허약해져 1년간 칩거했다. 오늘이 있기까지 유일한 쉼표로 꼽히는 기간이었다. 1959년부터는 동초선생의 전수생으로 본격적인 판소리수업이 시작됐다.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등 다섯마당을 마쳤고 동초와의 백일독공도 세차례나 가졌다. 백일독공은 산중 절이나 재각등에 선생을 모시고 들어가 1백일동안 소리공부만 해야하는 처절한 배움이다. 보통 한달도 어려운 고행인데 오씨는 73년부터 완창공연이 있을 때마다 홀로 네차례나 백일독공을 시도했다. 『백일독공 한번하면 그기가 10년 간대요. 완창공연을 앞두고 백일독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68년 이이소라단에서 동초와 백일독공하던 때의 일. 소리의 상성이 나오질 않아 울면서 소리연습을 해댔더니 배가 붓고 허리를 구부리질 못했다. 허리가 아파 문안인사를 못하고 있는데 동초는 『자네 배가 많이 부었는가?』물었다. 오정숙은 『어휴 살았네. 오늘 좀 쉬겠네』좋아했지만 『그래도 계속하소. 중단하면 시작안한 것만 못하네』매몰찬 격려가 이어졌다. 자신의 소리제를 똑똑한 제자에게 제대로 전하기 위해 오정숙을 택한 동초의 집념과 동초제에 일생을 걸겠다는 오정숙의 각오가 의기투합했으니 70년대 오정숙의 소리격정은 장관을 이뤘다. 72년 「춘향가」(8시간30분),73년 「흥보가」(5시간),74년「수궁가」(3시간30분),75년「심청가」(6시간),76년「적벽가」(3시간)를 완창해 여창최고지에 올랐다. 동초도 생전 판소리전판공연을 가지지 못했으니 오씨의 완창은 동초제최초의 전판공연이었다. 특히 8시간30분 걸리는 「춘향가」완창은 오정숙의 인기를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그의 맑은 소리는 다소 쉰듯한 소리가 어울리는 판소리계에 생소함을 주기도 했지만 힘있게 뻗는 소리맛과 청중을 휘어잡는 연기등 공연능력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 상복도 터졌다. 75년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판소리장원을 한 이래 83남도문화재 대통령상, 84KBS국악대상등 수많은 판소리경창대회에서 장원하였다. 91년에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됐고 브리태니커레이블로 「흥보가」완창판소리판도 출반했다. 그의 뒤를 이은 제자들도 판소리대회 대통령상수상자들이 쏟아졌는데 수제자리일주(58·전북지방무형문화재·전주대사습놀이 제5회대통령상),민소완(학원장),조소녀(54·제2회 남도문화제판소리대통령상),은희진(48·국립창극단원),김성애, 김소영(44·전북도립창극단수석), 방성춘씨등 7명이 그들이다. 또 연극배우 강선숙(34),판소리 석사1호인 박미애(27),양명희(28)등이 그 뒤를 이었다. ○평양시민들도 울려 세계각국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나라가 없을 만큼 한국을 대표한 해외공연도 수없다. 90년10월 통일음악제에선 평양시민을 울리고 말았다. 『「심청가」중 부녀상봉대목을 부르는데 북한동포들이 울음을 참다참다 몰래 눈물을 닦아내곤 하데요. 감정을 함부로 표현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겠죠』 오씨의 안전을 책임진 기관원이 『심청이가 아바이를 부를 때 눈물이 뿍 나왔시요』라며 생소한 어투로 감명깊었음을 고백할 땐 콧날이 시큰했다. 인간문화재·다섯마당완창·제자양성·수상·해외공연등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복은 모두 누린 셈이다. 또한 남편 배기봉씨(60·전북예총회장)의 뒷바라지도 오정숙소리공력의 숨은 힘이다. 그는 샘이 많다. 판소리인생45년. 남이 자기보다 소리를 더 잘하면 참질 못한다. 마치 백설공주의 계모처럼. 그의 예술은 이제 양보할 수 없는 무의식의 심연에서 투명하게 자라고 있다.〈유인화기자〉 ◎동초제/우람한 동편·아련한 서편제 “융합”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는 조선조시대의 축조물이다.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서울을 중심으로한 영·정조시대의 경제,충청지역의 중고제,경상도지역의 동편제,전라도의 서편제로 명맥을 이으며 부침을 거듭해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편제·서편제는 섬진강의 동·서편을 중심으로 발생한 소리며 낙동강권과 남한강상류지역에도 풍진이 남아있다. 판소리의 현대적 이행인 김연수소리는 김씨의 아호를 따 동초제로 불린다. 동초제판소리는 김연수(1907∼74·1964년 인간문화재 지정)선생이 말년에 새로 짠 소리로 동편제의 우람한 소리와 서편제의 아련한 소리를 뽑아 만든 소리다. 학식이 높은 그는 다섯마당의 사설을 정리했고 오자한자를 바로잡기위해 한학자의 자문을 구했다. 임방울씨와 함께 현대판소리계의 쌍벽을 이루던 김씨는 판소리의 두 핵심인 이면(가사·문학성)과 소리(음악성)중 이면을 중시했다. 자연 소리를 중시한 임방울씨와는 끝없는 논쟁을 벌여온 것도 사실이다. 서울중동학교유학후 고향 고흥으로 내려간 김연수선생은 판소리에 발의,7년동안 유성기로 판소리를 독습했고 순천 ▦성준에게 「수궁가」,송만갑에게 「흥보가」와 「심청가」,정정렬에게서 「적벽가」 「춘향가」를 떼는 등2년만에 다섯마당을 습득했다. 30년대 초반 여러 선생들로부터 배운 소리중에서 좋은 점만을 골라 자신의 소리로 만든 그는 판소리의 창극화를 통해 동초제를 전파했다. 특히 그의 동초제는 정교한 너름새(동작),정확한 사설,다양한 부침새 기교의 사용으로 합리성을 극대화했다. 동초는 30세에 조선성악연구회이사(1937)가 됐고 조선창극단대표(1939),대한국악원장(1957),국립국극단장(1962)등 국악계를 대표하며 판소리의 새로운 지평을 연 명창이다.
5. 가야금 산조 강문득
◎한을 풀어내듯 깊고 애절한 선율/여성적 떨림의 음색/5살부터 김병호선생 밑에서 사사… 신체장애 불운 가야금으로 분출 우리의 바다는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인간에 저항하는 생존의 바다였다.그러나 넘실대는 허무주의가 애끊는 물결로 다가올 때 바다는 이미 「푸르른 생존」의 의미를 떠난다. 그것은 가야금 12줄에 튕기는 맑고 투명한 한의 승화로 이어진다. ○부친 독려로 시작 강문득(49)은 별난 국악인이다. 경기중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국립국악원 국악사양성소에 다시 입학한 경력이 재미있다. 평소 낙천적인 성격에 다정다감하지만 국악콩쿠르를 앞두고는 다른 사람이 돼버린다. 제자들을 닦달하며 재떨이를 던지는 장이기질도 그답지 않다. 92년4월 부산에서 열린 제3회 개인연주회에는 정원4백명의 3배인 1천2백여명이 몰리는 바람에 공연장출입문의 유리창이 깨지는 등 국악공연사의 이변을 낳기도 했다. 자신이 가르친 성애순(전남대교수) 김남순(부산대〃) 서원숙(단국대〃)씨등 교수제자들이 수두룩하지만 정작 자신은 38세에 대학을 들어간 만학도인 점도 독특하다. 강문득은 5살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야금이란 운명의 끈에 그가 접선된 것은 4살때였다. 누가 알았을까. 4살바기 천사가 관절염으로 애끓는 삶의 문을 열게 될 줄을. 왼쪽대퇴부에 염증이 퍼지기 시작했고 부모들은 울며 보채는 아기를 안고 한약방과 침집에서 살다시피했다. 차도가 있을 무렵이었다. 하필 6·25전쟁이 터졌다. 의사치료는 커녕 페니실린을 구하기도 수월치 않았다. 그의 운명은 「다리를 사용하지말고 앉아서 가야금을 뜯으라」는 주문에 걸려든 것이다.『정말 운명이에요. 가야금을 걸쳐야하는 오른쪽다리는 멀쩡했거든요』.낙천적인 그의 어투는 단순한 명랑함이 아니다. 남들처럼 뛰놀고 싶고 천진난만해야할 어린시절의 공백이 가져다준 달관의 색채가 배어있다. 그는 1945년 강장원씨(62년작고)와 임유앵씨(64년작고)의 2남중 차남으로 서울 원서동에서 태어났다. 강장원씨는 판소리명창으로 국립국악원에서 후학을 지도했고 임유앵씨도 판소리명창이었다. 특히 임유앵씨의 여동생은 국극의 여왕 임춘앵씨였고 막내여동생의 아들들은 진경국악단을 이끈 김진진·김경수형제. 천재소리를 들어가며 경기중학교를 다니다 국악사양성소로 옮긴 이유도 부모의 권유때문이다. 강문득은 5세부터 임유앵씨가 소속된 국극단악사인 김병호씨를 독선생으로 가야금을 배웠다. 배움은 김씨가 작고할 때까지 18년간 계속됐다. 그당시 충청도 만석꾼의 후손이었던 강장원씨는 국악인들의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우리가 알만한 국악인들의 대부분이 강장원씨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고 오갈데 없는 국악인들은 그의 집에서 기거했다. 또 아들의 불편한 몸을 생각한 그는 집동네인 원서동에 김병호씨의 주택을 구입해 줄 만큼 아들을 위해 힘을 쏟았다.김병호선생의 가야금지도는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선생의 지도는 하루에 1시간이지만 연습은 매일7시간씩이었다. 중학교때부터 10년간을 줄곧 그랬다. 선생은 연습방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마이크줄을 자신의 방에 있는 스피커와 연결해 시도 때도 없이 연습여부를 점검했다. ○집념의 채보작업 『말이 7시간이지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겨울이었어요. 하루는 잠깐 연습을 멈췄는데 하필 그때 선생님께서 스피커를 트셨어요. 난리가 났죠. 선생님께 찬물세례를 받고 팬티바람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가야금을 탔죠』 연습도중 가야금줄이 튕겨나가며 얼굴에 피가 날 만큼 살이 찢어져도 가야금을 계속 타야했다. 그는 친구도 없었다. 놀고 싶었지만 7시간의 연습이 끝나면 지쳐 잠들기에 바빴다. 가야금외엔 아무것도 없었다.가야금에 욕심을 내다보니 다른 선생의 가야금산조도 배우고 싶었다. 여성적인 김병호류와 대조되는 강태홍류가 탐났던 것이다. 『김병호류는 심도깊은 농현으로 깊고도 애조띤 가락과 섬세한 음색이 특징인데 남성적이고 호쾌한 류를 배우고 싶었죠』 1965년부터 1969년까지 고원옥화씨에게 강태홍류를 사사, 4년간은 두 선생을 섬겼다. 그러나 김병호선생의 예리한 눈길을 속일 순 없었다. 강태홍류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게된 김선생은 노발대발이었다. 인연을 끊자며 강문득의 김병호류 산조후계자인정을 거부했다.김병호류 가야금산조는 깊은 농현때문에 율폭이 깊고 넓어서주법을 익히는데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강문득의 가야금생활 45년가운데 김병호씨를 사사한 18년간은 긴장의 나날이었다.그가 공부할 당시는 김병호의 가락들이 채보되지 않은 상태여서 오로지 선생의 구음에 의존해 주법을 익히고 외워야 했다.『자연 악보상에서 표현될 수 없는 절묘한 기법과 변화무쌍한 장단과 붙임새등 실제 연주와 구음을 통해서 배우고 익힐 수 있음은 천혜였죠』. 어렵게 배운 만큼 선생의 업적을 갈무리하는 작업도 그의 몫. 김병호류산조의 채보작업을 완성했고 지난해 11월 「김병호류 가야금산조 보존연구회」를 발족하며 발족기념연주회도 가졌다. 강문득은 스승이 살아 계시던 1967년 제1회 5·16민족음악상 기악부 대통령상을 수상, 스승의 은혜에 보답한다. 그때 고 박정희대통령은 강문득에게 소원을 물었는데 딱히 유학도 필요없는 강씨는 다리를 고쳐달라고 했다. 대통령의 지시로 국립의료원에서 다리수술을 받은 그는 뼈가 붙지않아 2년간 입원했다. 다행히 아픈 다리에 힘이 생겼고 연주생활에 몰입할 수 있었다. 1973년부터는 부산에서 제2의 삶이 시작됐다. 부산국악계에선 최초로 5선지악보를 사용했고 민요채보도 「최초」 「최다」를 기록했다. 결혼도 했다. ○20년후배와 결혼 『국악이 번성한 서울보다는 국악불모지인 부산에 살면서 가야금의 뿌리를 내리고 싶었어요』. 38살에 부산대국악과(83학번)에 입학한 그는 2학년때 만난 같은 과후배 정혜자씨(29)와 결혼했다. 나이차이20년.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다. 제자들이 자식일 뿐이다. 『청중에게 기쁨을 주려면 연주가는 그 몇배의 슬픔을 겪어야 합니다』. 청중을 배려하면서도 앙코르는 사절이다. 연주때마다 너무 지쳐 뒷풀이의 여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78년 국립국악원에서의 첫독주회이후 부산문화회관개관기념공연, 가야금산조여섯바탕 전독주 등 2백여회의 무대에 섰고 91년 KBS국악대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경력이지만 강씨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가야금산조 일곱장단에 온힘을 쏟아붓고 탈진한 채 무대를 떠나는 것이다. 푸르른 부산바다의 무수한 모습을 가슴에 지닌 채.<부산=유인화기자> ◎「가야금산조」란/장구반주의 독주곡… 유파 다양 가야금산조는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기악독주곡이다. 장단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굿거리 늦은자진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단모리중 3백17개의 장단에 의한 악장으로 구성되며 반드시 장구반주가 따른다. 19세기말 김창조(1865∼1918)에 의해 틀이 짜여진후 오늘날과 같은 산조의 체계가 세워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김창조이후 배출된 가야금명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가락을 첨가하고 변형하며 자신의 이름을 붙인 바디(유)를 전하고 있다.대략30분∼1시간정도 소요되는 산조는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됐으며 기능보유자로는 성금연 김죽파 함동정월씨가 지정됐다. 유파로는 강태홍류 김병호류 김윤덕류 김종기류 김죽파류 성금연류 심상건류 최옥산류등 다양한 연주방식이 전해지고 있다. 김병호류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단모리등 7개악장 4백51장단으로 구성됐다. 악조는 우조 평조 계면조 진계면조 경조 강산제등 7가지로 이뤄졌다.
6. 동편제 강도근
◎장중한 창속에 걸쭉한 해학이…/폭포와 피나는 싸움으로 득음/당대의 일인자 송만갑스승 만나 50연 소리외길로/“나 죽고나면 남정네 소리꾼은 이제 끝이여” 대끊어질까 큰 걱정 ○무형문화재 5호로 「보고지고 보고지고/한양낭군 보고지고」 전라도 남원하면 누구나 춘향의 러브스토리를 생각하고 그와 함께 판소리 한자락을 떠올리게 된다. 천황봉, 반야봉등 지리산의 주봉들을 베고 있는 남원땅은 바로 판소리 다섯마당 가운데 「춘향가」와 「흥보가」를 잉태한 판소리의 메카다. 「남원에서 소리자랑 하지말라」는 옛말이 있을 만큼 남원은 판소리의 성지로 명맥을 이어왔다. 실제로 영조때부터 조선말까지의 소리광대 90명을 망라한 「조선창극사」의 광대열전을 보더라도 전라도 출신이 그 60% 이상을 차지하고 그 가운데서 전라북도 출신이 전라남도 출신보다 곱절이 넘는다고 나와 있다. 그 전라북도 광대의 대부분은 남원출신. ▦이곳에는 반백년을 한결같이 「남원소리」를 갈고 닦아온 판소리 동편제의 마지막 보루 강도근명창(76·본명 강맹근·남원시 향교동 547)이 있다. 판소리 동편제의 최후의 전수자이자 무형문화재 5호인 강옹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남원시 동충동 4번지. 중앙국민학교옆 허름한 슬라브건물 3층이다. 「강도근후계자양성소」라는 간판이 시사하듯 강옹은 예나 지금이나 동편제의 대가 끊길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동편제소리가 그물코가 큰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 같이 꿋꿋하고 장엄한 반면 서편제소리는 그물코가 작은 그물로 굵은 고기는 물론 잔챙이도 빠뜨리지 않는게 특징이제. 그런디 판소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모두 여자라 남정네들이 하는 동편제소리는 인자 내 죽고 나면 끝이여 끝』 그가 취재진을 위해 읊어주는 춘향가 한 대목을 듣노라면 열여섯밖에 안된 춘향이가 이도령과 첫대면을 한 그날 밤 한 이불밑에서 운우를 즐길만큼 「발랑까진」 바람끼가 몸을 감싸오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하다. 게다가 이도령이 한양으로 떠날 수 밖에 없는 사정을 호소하자 대번에 초마자락을 쫙쫙 찢고 명경, 체경을 내던져 와그르르르 박살내며 『허이고 여보 도련님. 이제 허신 그 말씸이 재담이요, 농담이요, 실담이요, 패담이요. 오늘 도련님이 사람죽는 구경 한번 허실라요』하고 박박 악을 써대는 장면이 바로 코앞에 벌어진 듯하다. 1918년 남원 향교리 지금의 집에서 태어난 강옹이 소리꾼의 길로 접어든 것은 다른 소리꾼보다 많이 늦은 그의 나이 열여덟살 때.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녀, 하도 주위에서 소리가 괜찮다고 추켜세워 우쭐한 기분으로 찾아 간거지』 타고난 목소리가 남달리 우렁차 소리를 배워보라는 주위의 권유로 당시 남원군 주천면에 살고 있던 판소리의 대가인 김정문을 만나면서 강옹의 50년 외길역사가 시작된다. 조선조말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격인 송흥녹의 손자로 국창이라 불리던 송만갑의 제자이던 김정문의 문하에는 당시 박녹주를 비롯, 훗날 한국국악계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즐비했다. ○18살때 뒤늦은 입문 강옹은 김정문문하에서 8년간 사숙한끝에 판소리 다섯마당을 익혔으며 스승이 40세를 일기로 요절하자 내친김에 상경, 당시 익선동에 있는 당대의 일인자 송만갑을 찾아갔다. 사조(사조)를 스승으로 삼는 기이한 인연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북채로 맞고 목침이 날아오는 속에서 공부를 혔어. 요즘 소리하는 사람들은 이런 얘기혀 봐야 믿지도 안을 거여. 녹음기가 있나, 교재가 있나, 그저 정신 바짝 차리고 있다가 스승이 한차례 일러주면 외는 게 수여』. 송만갑의 휘하에 있던 강옹은 스승이 작고하자 조선창극단, 동일창극단등지에서 활동하다 느낀 바 있어 경남 하동의 쌍계사 기슭으로 찾아 들었다. 『폭포를 잡아먹겠다는 것이였제. 매일 폭포하고 소리내기 경쟁하는거여』. 마뿌리를 삼키며 목에서 시커먼 피가 넘어오는 8년간의 독공끝에 강옹은 마흔을 넘기며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득음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소리 혀도 믿을지 몰러. 당시 소리꾼들은 인분을 먹는 게 유행이었어. 아, 뜨뜻한 인분을 그냥 먹는다는 게 아녀. 논기슭에서 한겨울을 넘긴 잘익은 인분액은 부기를 가라앉히는 데는 최고였응께. 아마 드럼통으로 서너통은 먹었을 꺼여』 그는 『송흥녹선생이 귀곡성을 얻기 위해 3년동안 비만 오면공동묘지를 찾아가 밤을 새웠고 권삼득선생은 소리를 얻기 위해 구룡폭포 아래서 소리 한마디 한 후 콩 한알을 던져 모두 한말을 채웠다』고 소개하며 자신의 이같은 공부는 공부도 아니라고 겸손해 했다. 인분먹으며 맹연습 강옹의 이같은 노력은 마침내 세상에 알려지고 지난 88년 판소리 흥보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돼 중요무형문화재 5호로 지정된다.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소리에 비해 당국의 이같은 결정은 오히려 늦은 것이었다. 특히 강옹의 문화재 지정을 둘러싸고 빚어졌던 우여곡절은 아직도 국악계에는 부끄러운 기록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다. 그의 창의 특징은 감칠 맛 나는 전라도 억양에다 남원 사투리가 그대로 섞인 점이다. 바로 그 구수한 사투리를 이유로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트집을 잡았던 것. 『아, 50년동안 굳은 소린디 이제 와서 인간문화재가 되것다고 바꿀수야 없잖것소』 판소리라는 게 악보와 가사로 확연히 전해지는 양악과는 달리 오로지 구전되기 때문에 전수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게 마련. 그러나 강옹의 심한사투리창은 심사위원들의 귀에는 구제불능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판소리를 배우는 사람은 서울사람도 충청도양반도 경상도사람도 모두 강옹의 전라북도말, 정확히 말하자면 남원사투리를 일부러 배우고 쓴다. 그것은 마치 일찍이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나 「운명의 힘」을 공연할 때 영국신사도, 자기나라말이 아니면 죽고 못산다는 프랑스사람도 모두 베르디의 고향말인 이태리말로 노래하고 이 땅의 내로라하는 성악가들도 프란츠 슈베르트의 연가곡 「빈터라이저(겨울나그네)」를 부를 때는 독일말로 부르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전라도말은 바로 판소리무대에서는 곧 표준말인 셈이다. 그것은 평생을 지배받고 살았던 민초들의 시달림과 슬픔이 담긴 말이다. ○전라도말이 표준어 비록 뒤늦게 인정받았지만 강옹은 행복한 표정이다. 양성소 실내 벽면에 즐비한 각종 상장·상패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난 91년 정부가 뒤늦게 수여한 목관문화훈장과 전국에서 몰려온 제자들이 그의 명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30여년동안 그의 문하에선 수백명의 국악인이 배출돼 동편제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안숙선, 홍성덕, 오갑순, 강정홍, 이난초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동편제명창의 대부분은 그의 매를 거쳐 갔다. 몇해전 복막염으로 큰 수술을 받은 후 그의 기력은 급격히 쇠잔해졌고 청력은 거의 상실돼 아마 후학이 하는소리의 즐거움을 그가 직접 느끼기엔 무리인 듯하지만 일곱살짜리 예비명창을 가르치는 그의 목청만은 20대 못지않게 찌렁찌렁하기만 하다. 『소리한판 하고난 뒤엔 한산도(한라산을 말하는 듯)가 최고여』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젊은 애인이 사줬다는 미놀(인후청량제)을 삼키는 강옹의 몸에서 「아이고 젊은 년이 서방이별 웬말이여▦도련님 말고삐에 목을 매어 죽고지고」라고 외치는 춘향이의 앙탈이, 「행인림발우개봉」을 뇌까리는 방자의 걱정스런 중얼거림이 지척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올해가 국악의 해라매, 너무 야단들 말고 꾸준히 지켜봐 줘』 취재를 마치고 떠나는 기자에게 강옹은 참았던 한마디 당부의 말을 전해 왔다. 만일에 이 땅에 판소리가 없었던들 우리의 문화예술이 얼마나 적적했으며 강옹이 없는 동편제는 또 그얼마나 외로웠을까.【남원=김동률기자】 ◎「동편제」란/전라도 섬진강 동쪽에서 파생… 힘있고 남성적인 가락 판소리는 흔히 대가들이 살아온 지역에 따라 동·서편제로 분류된다. 전라도 섬진강을 경계로 남원, 구례, 고부, 흥덕은 동쪽이라서 동편제이고 광주, 나주, 보성, 장흥등지는 서쪽이므로 서편제라 부른다. 여기에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고제가 파생되나 사실상 동편제에 가까운 소리이다. 동편가락은 우조(꿋꿋하고 장엄하며 엄격한 맛을 지님)를 내세우며 창의 음성이 뱃속에서 우러나오므로 소리가 장중하면서도 온화하고 씩씩한 남성적인 면을 보여준다. 단전에서 뽑아내고 쇠망치로 내리찍는 것같은 철성이 많아 소리하기가 그만큼 고되고 힘이 많이 들어간다. 이에 반해 서편제는 애원처절한 계면조에다 섬세하고 여성적이며 가녀린 맛이 그 특징이다.동편제는 전라좌도를 중심으로 형성됐으며 송흥녹을 시조로 송만갑,정춘풍,김창녹,박만순,김세종,강도근으로 맥을 잇고 있고 서편제는 전라우도를 중심으로 박유전, 이날치, 정창업, 김채만, 임방울로 이어지고 있다.
7. 정선 아라지 최봉출
◎두메산골 민초으 삶 응어리 풀어가듯…/대따라 수많은 노랫말 탄생/기교없고 단조로운 곡조 누구든지 쉽게 따라불러/태어나면서 부터 듣고 불러온 무형문화재 최옹 “토종 소리꾼” ○투박하고 애처롭고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사시장철 물살을 안고 빙글뱅글 도는데/우리집의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 왜 모르나」「앞남산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파는데/우리집에 저 멍텅구리는 뚫어진 XX도 못 파나」 강원도 감자가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정선아리랑만큼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강원도를 연상시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인 강원도 정선은 해뜨자 해넘어가는 두메산골이다. 정선사람들은 그들만의 삶의 노래를 「정선아리랑」이라 부르지 않고 「정선아라리」라 부른다. 그들이 특별한 뜻도 모르면서 「아리랑」보다 「아라리」라 부름은 자신들의 노래가 아리랑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뭔가가 있다는 데서 기인한 듯하다. 실제로 「아리랑」이 그렇듯이 「아라리」의 기원 또한 수많은 학설이 분분할 뿐 아직 의미도유래도 규명되지 않고 있다. 정선지방의 아라리는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나 「와이리 좋노 와이리 좋노」로 시작하는 격동적이고 적극적인 밀양아리랑이나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가/구부야 구부야(구비구비마다) 눈물이 난다」는 진도아리랑의 뛰어난 기교나 화려함과는 애시당초 거리가 멀다. 부르는 이에게 세련된 기교나 긴장된 호흡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조롭고 유장하고 애처롭고 그래서 그저 누구나 부담없이 따라 부를 수 있는 그런 가락이다. 정선아라리의 이같은 단조로움과 애처로움은 첩첩산중에 위치한 정선지방의 유폐감, 그리고 깊은 임간에서 오는 필연적인 궁핍과 살아가기의 쓰라림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사실 아라리의 고향 정선은 몹시 궁벽하고 외지다. 서울을 떠나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원주, 횡성, 평창을 거쳐 정선에 도착하기에는 다섯 시간이 부족하다. 원주를 지나 평창으로 접어들면서부터 태백산맥이 쏟아 내린 수직의 낭떠러지가 하늘에 맞닿아 있다. 「아질아질 성마령아 야속하다 관음베루/지옥같은 정선읍내 10년간들 어이 가리./아질아질 꽃베루 지루하다 성마령/지옥같은 이 정선을 그 누구따라 나 여기 왔나」 조선중엽 정선수령으로 부임해 오던 오홍묵의 부인이 정선길의 아득함을 한탄하며 불렀다는 이 한 구절은 곧 이지방이 하늘아래 첫 동네임을 대변하고 있다. 그래서 정선사람들은 여름밤 뒷동산에 올라가서 별을 한움큼 딸 수도 있고, 앞산과 뒷산을 연결한 빨랫줄에 적삼을 넌다고들 한다. ○고립무원의 유폐지 일찍이 조선중기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무릇 나흘동안 길을 걸었는데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었다」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정선에서 바라보는 하늘이란 마치 깊은 우물에 비치는 하늘만큼이나 좁다」며 이 고을의 가파른 산세를 강조하고 있다. 정선아라리는 바로 이 고립무원한 지역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정선군 북면 여량리의 아우라지 나루터는 정선아라리 기원설화의 중요한 근거지이다. 『이 나루터로 흘러 들어오는 오대산쪽의 송천은 물살이 빠르고 힘차서 사람들은 그 물을 양수라 부르고 동편 태백산맥에서 흘러 들어오는골지천은 그 물살이 느리고 젖빛이어서 음수라고 부른다』고 동행한 최봉출옹(76·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정선군 북면 구절3리)이 귀띔한다. 정선아라리의 상징적인 창자로 지난 71년 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된 최옹은 정선읍 애산리태생. 젖꼭지를 물면서부터 아라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의 소리는 61년 정선군 아리랑경창대회 최우수상, 70년 광주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아 때묻지 않은 「토종소리꾼」임을 입증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싸릿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싸이지/잠시잠깐 임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이 아우라지 나루터는 남한강 뗏목의 발원지였다. 아우라지에서 떠내려 보낸 뗏목은 영월에서 묶여지면서 커지고, 기나 긴 한강물을 따라 송파나루를 거쳐 마포나루에 다다르게 된다. 뗏목을 타고 가던 사공들과 나물캐던 이 지방처녀들이 주고 받은 그리움은 정선아라리의 중요한 노랫말을 잉태시켰다. 특히 강을 따라 흘러가 버린 바람둥이 총각사공을 연모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여량처녀의 한은 오늘 아우라지 나루터의 동상으로 우뚝 서 그 날의 슬픈 사연을 증언하고 있다. ○여량처녀의 한 증언 하지만 정선아라리가 이같은 기층민중의 삶을 담았다고 해서 반드시 소박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정선아라리의 바탕인 정선지방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역사와도 일치한다. 동학교조 최제우가 참수당하자 그의 처자가 도망쳐 와 은거했고 2대 교주 최시형이 남면 문곡2리에서 훗날을 기약하는 등 정선땅은 잠시동안 동학세력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으며 강원도지역에서 항일투쟁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정선아라리는 가사가 비교적 제한된 다른 아리랑과는 달리 곡조는 동일하면서 가사는 시대를 따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특이한 구조로 수많은 노래말을 탄생시켰다. 노래말의 내용 또한 다양하기 그지 없다. 깊은 산속에 묻혀 사는 설움, 세상을 등진 한, 어리거나 늙은 남편에 대한 성적 불만, 산골로 시집보낸 부모와 중매쟁이에 대한 원망, 부정하고도 은밀한 외도등이 그 주류이다. 하지만 이런 가사들조차도 아라리가락에서 불려질 때는 추하거나 천하기는 커녕 오히려 건강하고 싱싱한 생명력으로 되살아 나고 있다. 안내를 맡은 시인 진용선씨(32·정선아라리문화연구소대표·정선군 신동읍 조동5리)는 『정선아라리 가사가 다른 아리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고 부르는 사람들의 층이 두터운 것은 곡조가 간단하고 최고음과 최저음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며 『지금까지 채록된 것만도 1천여 수가 넘는다』고 밝히고 있다. ○가사 1천여수 채록 또한 정선아라리 연구가인 강등학교수(43·강릉대)도 『정선아라리의 특징은 즉흥적인 자작가사를 무한정 붙일 수 있는 현장성에 있다』며 『곡자체의 흥미보단 바로 이같은 표출기능이 다른 어느 아리랑보다도 뛰어나다』고 분석하고 있다. 정선아라리는 1876년 명창 고덕명을 탄생시킨 이래 모두 최봉출, 김병하(47), 유영란(39)씨등 3명의 도지정 기능보유자를 배출했다. 『산비탈 묵정밭을 갈며 시름에 겨워 부르던 어머니의 구슬픈 아라리가 평생을 정선아라리와 함께 하게 만들었다』고 밝힌 김병하씨는 자신의 딸 길자씨(26)까지도 정선아라리의 이수자로 키워 사실상 3대에 걸친 아라리가족이다. 그러나 정선도 이제는 더이상 산자수명한 은둔의 고장은 아니다. 지난 66년 화전민의 너와집 몇 채만이 웅크리고 있던 정선읍 황무지에 태백탄전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역사가 세워졌고 닭우는 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메아리쳤다는 산골에는 채탄기계소리가 가득하다. 거기다가 석탄공사 함백탄전소에서 흘러내리는 녹물이 온 마을을 붉게 물들이고 있고 골짜기마다 흐르는 가축폐수는 들여다 보기가 민망할 정도. 아라리가락이 구슬프던 아우라지 나루터와 노래속의 물레방아는 매운탕집이 즐비한 국민관광지로 변해버렸다. 『정선아라리도 이젠 끝입니다. 이 산골아이들에게조차 랩송과 「서태지와 아이들」이 최고의 인기지요』 김씨의 고백처럼 정선아라리도 이제는 여운을 남기고 사라져 가는 기적과 같은 것이 되고 있다.<정선=김동율기자> ◎「정선아라리」란/강원도 정선지방서 구전돼온 민요 「정선아라리」란 강원도 정선지방의 민요로 정선아리랑의 사투리격이다. 노래말의 형식은 장절형식으로 여음이 붙어 있고 사설은 부른 사람에 의해 즉흥적으로 덧붙여질 수 있다. 가창방식은 주로 혼자 부르는 독창의 경우가 많으나 여럿이 부를 때는 메기고 받는 선후창형식으로 불려진다. 곡조는 메나리토리(민요곡조의 하나. 구슬프고 처량한 느낌을 준다)로 가락이 늘어지고 애조를 띠고 있으며 비음이 많다. 처음에는 빠른 가락으로 나가다가 중반 이후 노래가 늘어지면서 제 가락으로 들어간다. 후렴부분은 느린 세마치 장단을 근간으로 늘렸다 줄였다 하는데 후렴구도 합창으로 받지 않고 계속 독창으로 부른다. 특히 느린 이 후렴구는 구슬프고도 아름다워 듣는 이로 하여금 애처로움을 자아내는데 장식구가 발달되지 않아 진도아리랑이나 밀양아리랑의 기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조롭다. 정선아라리는 본래 강원도아리랑에 연이어서 부르는 노래로 많은 사설을 이야기하듯 엮어가기 때문에 「엮음아리랑」이라고 하기도 한다. 고려말 유신들이 지었다는 설과 아우라지 나루터의 여량처녀가 불렀다는 설등 수많은 기원설화가 있으나 어느 것도 분명하지는 않다.
8. 상주 모심기 노래 육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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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해학·시정에 농사시름 잊고…/경상도지역서 구전돼온 농요/89년 마산민속경연서 수상… 일약 대중적 노래로/유일한 기능보유자 「육」씨… 전수자 없어 맥잇기 걱정 ○영남 남성기질 표현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께/ 이내 품에 잠자 주오」 「잠자 주기는 어렵지 않으나/ 연분이 아니라 못 자겠네/ 연분 꽃분 따로 있나/ 연분 꽃분이 따로 있나」 상주 모심기노래는 연밥따는 마을처녀에게 건네는 구애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경상도지역의 대표적인 민요이다. 인연맺기를 거절하는 처자에게 연분이 따로 있느냐며 집요하게 연정을 호소하는 이 노래는 영남 남성들의 끈덕지고도 짓궂은 검질긴 기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 흔히 「채련요」 또는 「공갈못노래」로 불리는 이 노래는 낙동강연안의 경상도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남북도 일부지역에서도 불려지는등 한수이남에서 가장 대중성이 뛰어난 노래로 알려지고 있다. 「채련요」의 기원은 중국의 양나라시대로 올라간다. 양나라 무제(502∼549)는 연꽃을 좋아한나머지 「채련곡」이라는 악부를 직접 지었고 이후 후세사람들이 가사를 바꾸어 가며 지속적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특히 진흙탕속에서 피는 연꽃의 이미지는 곧 성리학에서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고결한 성정을 상징한다 하여 두고두고 유가의 사랑을 받아 왔고 송대의 주돈신(1017∼73) 같은 문장가는 「애련설」을 통해 「향원익청」(멀리 할수록 향기는 더욱 진하다는 뜻으로 결국 고매한 인격은 널리 퍼진다는 의미)이라 하여 연꽃을 극찬한 바 있다. 또한 불교에서도 고뇌에서 벗어난 해탈의 경지를 연꽃에 비유했고 그래서 연꽃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한 유교및 불교문화권에서 사랑을 받아 왔다. 이같은 다소 독특한 배경설화를 지니고 있는 상주모심기노래의 무대인 공갈못은 경북 상주시에서 북쪽으로 약 30리 정도 떨어진 상주군 공검면 양정리에 위치하고 있다. 상주는 예로부터 「삼백의 고장」으로 불려왔는데 이 곳에서 나는 쌀, 목화, 누에고치의 세가지 특산물이 모두 흰색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세가지 산물은 곧 이 고장이 남정네는 농사를 짓고 아낙네는 길쌈을 하는 전형적인 농경생활을 유지해 왔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해방이후 점차로 목화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곶감이 차지해 지금의 삼백은 쌀, 누에고치, 곶감을 말한다. 어쨌든 상주는 이처럼 경북지방에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며 가장 많은 양의 쌀농사를 지어 예로부터 한수이남지역의 요충지로 인정되어 왔다. 오늘날 경상남북도를 이야기하는 「경상도」가 바로 경주와 상주의 첫 글자임은 그 좋은 예이다. 따라서 이 지방 농사의 필수적인 동반자로 공갈못이 존재한다. 이 공갈못의 원래 이름은 공검지. 제천의 의림지, 김제의 벽골제와 함께 삼한시대에 축조되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다만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함창읍지」편에 따르면 「서반에는 몇리에 걸쳐 연꽃이 피어 있어 마치 중국의 전당(절강성하류지방·약야계지방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연꽃이 아름다운 지역)을 방불케하는 풍취를 지녔다(서반유하화 련범수리 의연유전당지취)」며 연꽃이 풍요로웠던 옛날의 풍경을증언하고 있다. ○가사·형식 크게 변화 또한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비」에도 「공갈못이 중국의 오호나 동정호같은 큰 규모를 지녔다」고 기록돼 있어 규모의 엄청남을 짐작케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공갈못의 대부분이 논밭으로 변해 있고 상주∼함창간 3번국도 옆에 덩그라니 서 있는 유허비가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채련요」로 통칭되는 이 노래는 오랫동안 구전되고 널리 전파되는 사이 여러가지 내용과 형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내용에 따라 련정요, 사친요, 완월관어요, 호련요(연밥일랑 따더라도 연뿌릴랑 캐지마라)등으로 나누어지며 형식면에서는 기본형, 생략형, 복합형, 후렴 첨가형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곡조면에서는 집단유희에서 불려지는 유흥요와 늙은이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파적요, 노동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노동요 등으로 분류된다. 수천년간 민간에서만 불려지던 이 노래가 널리 알려진 것은 지난 89년 마산에서 열린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당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면서 주목을 받은 이 노래는 유장하고 시정이 넘치는 곡조로 일약 대중적인 인기를 끌어 FM라디오를 통해 널리 퍼졌다. 이 노래는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 줄께 우리 부모 모셔 주오」와 같이 완곡한 연모의 표현이 있는가 하면 「여기 꽂고 저기 꽂고 주인네 마누라 거기도 꽂고」. 「문경아 새재야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 홍두깨 방망이 팔자도 좋아/ 큰 애기 손길로 놀아난다」등 듣기에 부담스런 파격적인 노랫말까지 거느렸다. 특히 곡조가 처연하면서도 비교적 단조로워 금방 친숙해질 수 있어 누구나 한 번 정도 듣거나 따라 부르면 곧바로 흥얼거릴수 있을 정도이다. ○농사일하며 곡배워 상주모심기노래의 기능보유자는 농사꾼 육종덕씨(64·상주시 초산동 236). 지난 89년 경상북도지정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그는 어릴때부터 이웃 노인들의 소리를 듣고 이 가락을 흥얼거렸고 예순을 넘긴 뒤늦게야 기능보유자가 된 전형적인 토박이 노래꾼이다. 곧 일체의 사숙이나 전문교습이 없이 농사일을 하며 눈치껏 배운 것이 육씨노래의 전부이다. 무형문화재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 온 인위적인 소리꾼들과 좋은 대조가 된다. 『어릴 때만 하더라도 공갈못은 연잎이 무성해 비가 오면 연잎을 따다가 비를 긋고 밭매다 시장하면 연밥으로 허기를 채웠다』는 육씨는 이젠 나이가 들어 그 많은 가사를 모두 외우기가 힘에 부친다고 말한다. ○옛 공갈못 복원공사 육씨는 또 『상주민요를 계승하려는 젊은이들이 없어 후보자로 등록된 김화경씨(60·상주시 초산동 157)조차도 이수자로는 전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며 『모심기 노래가락의 맥이 끊어질까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노래의 맥이 끊어질까 노심초사하는 육씨와는 달리 공갈못 주변에는 때아닌 겨울공사가 한창이다. 모심기노래가 최근 들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국악의 해를 맞아 우리가락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자 당국에서는 부랴부랴 정비공사에 착수, 복원에 열심이다. 「말을 타고 한바퀴 도는데만 한 나절 이상 걸렸다」는 엄청난 크기의 못은 이미 농경지로 불하된지 오래다. 겨우 1천여평 정도의작은 연못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당국에서는 인근 농지를 1천여평 매입, 올해안에 제법 그럴듯하게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군관계자는 『올봄에 수만뿌리의 연근을 이식해 연꽃이 아름다웠던 옛날의 공갈못으로 꾸미겠다』며 『연꽃이 만발할 때면 다시 찾아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공갈못은 농약오염으로 인해 더이상 물고기가 살 수 없는 죽음의 못』이라며 육씨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바로 옆에 위치한 대형 「공갈못노래방」에서 흘러 나오는 오래된 팝송 「예스터데이 원스모어」(옛날이여 다시한번)만이 겨울 못둑을 위무하고 있다. ◎「상주 모심기」 노래란/「공갈못노래」 「초산민요」로 더 알려져 경상북도 상주지방에 전래되어온 농요의 하나. 일반적으로는 「공갈못 노래」 또는 「채련요」로 불려지고있다. 이 노래는 상주 초산동 농민들이 86년 논농사와 관련되는 민요들을 엮어 무대예술로 연출,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입상한이래 수차례에 걸쳐 연달아 입상, 주목을 받아왔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모심기 노래」로 알려져있다. 주로 불리고 전수되는 동네이름을 따 최근엔 「초산민요」라고도 한다. 상주 모심기노래는 모찌는 소리, 모심기 소리, 논매기 소리로 구분된다. 음악 구조는 경상도 지역 특유의 메나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기고 받는 문답체 형식으로 되어 있다. 애초에 후렴구가 없었기 때문에 모심기 때에는 선소리 꾼이 앞소리를 매기면 나머지 사람들이 받아 부르는 반복형태를 취하고 있다. 논매기소리는 대개 초벌,두벌,세벌 논을 맬때마다 조금씩 빨라지나 그 음악적 내용은 비슷하다. 특히 이 지방의 모심기 노래는 여러가지 내용과 형식으로 널리 발전되고 퍼져 전국적으로 일종의 「공갈못 노래」군을 이루고 있다. 현재는 「상주민요보존회」가 구성되어 보급에 힘쓰고 있다 |
9. 거문고 산조 원광호
◎한도 흥도 하나로 녹여내는 신기의 선율/음만들기 47년… 두견성 득음/유려한 한갑득류에 호방한 신쾌동류 함께 이어받아/“제자 4명 같은길 걸어 마음 든든”… 7순에도 끊임없는 수련 ○24세까지 명창수업 한뼘이나 될까. 가늘고 단단한 술대가 허공을 가른다. 여섯개의 줄이 부르르 떨며 운다. 뼈속까지 파고드는 거문고 소리. 「백악지장」이라 일컬었던 선인들의 예지가 놀랍다. 거문고는 하나의 역사다. 서기 5세기 이전 고구려 재상 왕산악이 만든 거문고. 1천5백여년을 넘는 유구한 세월을 우리 겨레와 함께 해왔다. 그러나 옛선비의 고고한 기품을 닮아 좀처럼 속내를 비치지 않는 탓일까. 물오른 버들가지같은 가야금을 타는 이는 많아도 거문고 연주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것이 현실이다. 『거문고가 어려운 탓이제. 이미 정해져있는 음을 찾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음을 만들어내야 되는 것이니께』 47년을 거문고와 함께 살아온 원광호씨(72·본명 광홍). 지난해 1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다. 그는 신쾌동류와 함께 거문고산조의 양대산맥인 한갑득류의 맥을잇는 명인. 그러나 결코 한갑득류의 특징인 화려한 기교에만 치우치지는 않는다.그의 가락은 섬세하면서도 유려한 한갑득의 바디를 기본으로 하되 웅심화평하면서도 호탕한 신쾌동의 성음을 구비했다는 평을 듣는다. 그래서 국립국악원 거문고수석 이오규씨는 그의 선율을 가리켜 「잘생겨 호탕하되 거칠지 않고,유려하되 되바라지지 않아 광대하며,아늑하고 섬세한 아름다움까지 겸비한 신기의 경지」라고 평하기도 했다. 또 문화재전문위원 이보형씨는 『그의 거문고는 참 호탕하다. 술대를 들어 대점을 내려치면 높은 산에서 굴러내리는 큰 돌과 같은 우람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손을 들어 괘(현을 괴는 기둥)를 어루만질 때마다 한갑득선생에게 터득한 비장의 가락이 굽이굽이 수놓듯 펼쳐지는 것은 가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말로 그를 찬탄했다. 그의 거문고 가락에는 삶의 굽이굽이에서 응어리진 애끊는 정한이 넘치지만 결코 폭발하지 않는다. 자유롭고 변화있는 가락, 원숙하고 푸근한 멋으로 그 모든 정한을 감싸안는다. 원씨의 고향은 풍류의 고장 전남 담양. 그의 외할아버지, 아버지, 조카가 3대를 이어 대금을 부는 예인집안 출신이다. 집안에서 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으니 7세때부터 소리를 흉내내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13세때 담양국교에 들어간 뒤에도 「큰 명창 나겠다」는 주위의 칭찬을 들으며 소리 공부를 계속했다. 「명창 되어 봐야 아편쟁이 노릇이나 하고 못쓴다」는 부친의 염려도 그를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소연명창」소리를 듣던 그의 목청도 변성기에 들자 갈라지고 만다. 산속에서 피가 터지도록 수련을 쌓기도 했지만 결론은 소리를 포기하고 낙향하는 길뿐이었다. 낙담한 그는 성악 대신 기악의 길로 들어선다. 향제풍류(현악 영산회상)명인 김용근의 문하에서 거문고에 입문한 것이 25세때. 그는 선비출신의 김용근에게서 꿋꿋하고 위엄있는 정악을 익혔으며 신쾌동에게는 산조를 배웠다. 『어릴적부터 소리를 했기 때문에 거문고 배우는 속도가 빨랐제』 30세. 율객으로서 그의 인생은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전쟁통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한갑득을 만나 제자가 된 것. 평생의 스승 한갑득과의 질긴 인연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10년간을 노상 쫓아다녔제. 그리고 그뒤로도 1년에 2∼3번씩은 찾아가서 선생님이 만들어 내신 새로운 가락을 배웠제』 스승 한갑득의 재기는 놀라웠다. 번뜩이는 천재성은 흥이 오르면 즉흥연주로 나타났다. 스승이 신명이 올라 새로운 가락을 지어 낼 때면 그는 그때의 탄법을 기억했다가 『내가 아까 어떻게 했던가』하고 스승이 물을 때 대답하곤 했다. ○「백일공부」로 채찍질 한갑득의 제자인 원옹이 신쾌동의 웅혼한 기상까지 이어받은 데는 다 까닭이 있다. 신쾌동과 한갑득. 두사람은 당대를 주름잡은 신금이요, 거장이었다. 신의 엇모리가 일품이었다면 한의 자진모리·휘모리는 당대제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훌륭한 가락을 만들어내면 다른쪽이 겸허한 자세로 배워 가는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두 천재의 개성이 교류하면서 거문고산조의 세계를 심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로 인해 원옹은한갑득의 제자이면서도 신쾌동의 가락도 익힐 수 있었다. 원옹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는 밤톨만한 혹이 박혀 있다. 47년간 술대를 끼워 잡은 흔적이다. 명인이 되기 위한 수련의 과정은 이토록 가혹했다. 게을러진다 싶을 때면 자기를 더 엄혹하게 다루기 위해 「백일공부」를 감행했다. 60년에는 전주 남고산성에서, 61년에는 합천 해인사에서, 그리고 64년에는 구례 화엄사 봉천암에서 백일공부를 했다. 봉천암에서의 목표는 두견성을 얻는 것이었다. 두견성은 이른바 앵성(꾀꼬리소리)이라고도 일컫는 소리로 좀처럼 오르기 힘든 경지여서 득음성이라고도 불린다. 『밤에 공부를 하고 있는디 말이여,글씨,두견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내 그때 심정을 읊은 시 한 수가 있는디 들어볼란가』 「칠야삼경 야밤중에 스리렁둥덩 다징징 거문고 타니/산상의 두견새소리 내 장전에 들려온다/두견아 물어보자/초국흥망 애국한으로 슬피 우느냐/임이 그리워서 슬피 우느냐/애국한으로 슬피 운다면 나의 한을 들어봐라/나는 국금이 되려고 날새워 거문고 타니/너는 애국한으로 슬피 울고/나는 국금이 되려고 슬피 타고/타고 울고 울고 타고 날새우자」 물아일체라. 원옹은 30년전 그날밤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혹독한 수련의 과정은 차츰 눈에 보이는 성과물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66년 광주 기독교방송주최 국악연주대회 문공부장관상 수상, 67년 호남예술제 최우수상 수상, 일본 5개도시 순회초청공연, 88년 KBS국악대상 수상, 91년 국립국악원 개원 마흔돌잔치 거문고산조 독주…. ○가락 떠오르면 기록 「국악계의 재야」에서 당당한 인간문화재가 된 원옹. 현존하는 최고의 명인임을 공인받았음에도 그의 새벽5시 기상습관은 변함이 없다. 제자 유창현씨(37·추계예대졸업)는 스승의 샘솟는 예술혼에 혀를 내두른다. 『공부욕심이 많은 분입니다. 고령인데도 끊임없이 연습하고 가락을 만드시거든요. 그래서 남들보다 다양한 가락을 연주할 수 있지요. 주무시다가도 새로운 가락이 떠오르면 일어나 기록하셔야만 직성이 풀리는 분이죠』 원옹은 지금도 일력에 매일 몇시간이나 연습했는지 표시해 놓는 철저한 면을갖고 있다. 제자들에 대한 지도 역시 무서우리만치 빈틈이 없다. 『인간문화재가 되고 보니 어깨에 무거운 짐을 한 짐 짊어진 것 같어.제자들을 많이 키워내야 할틴디…』 그는 제자들을 탓하지 않는다. 선생이 잘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전통가락을 가르친다고 해서 「무조건 나만 따라 해라」는 식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무슨 성음이 나오는지 이론과 실기를 함께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해. 배우는 사람의 성격과 개성을 잘 파악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옹은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4명의 제자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다. 딸 수련양(25·중앙대 국악과졸)도 가야금을 전공, 같은 길을 걷고 있어 그의 마음은 든든하다. 『서양음악은 과학문명의 예술이라 청중을 흥분시켜. 하지만 우리 음악은 자연의 예술이라 듣는 이의 마음을 가라앉히게 마련이야. 왜냐하면 우리 음악은 한도, 흥도, 욕망도 모두 한덩어리로 녹여내거든』 원광호. 그는 온갖 풍상 속에서도 고고한 선비의 품격을 지켜 온 우리 시대의 명인이다.<김민아기자> ◎「거문고 산조」란/거문고 독주곡… 김윤덕류 등 3개 유파 거문고산조란 거문고로 연주하는 기악독주곡을 뜻한다. 산조는 주로 남도소리의 시나위가락을 「장단」이라는 틀에 넣어 연주하는 음악으로 거문고산조는 모든 산조 가운데 가장 정악적인 점이 특색이다. 1896년(고종33년) 백낙준(1876∼1930)에 의해 창시된 거문고산조는 초기에는 상류층이 즐기던 정악세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하다가 개화의 물결을 타고 점차 그 음악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백낙준은 김종기·박석기·신쾌동에게 거문고산조를 전수했으며 박석기는 한갑득에게 전수,또다른 흐름을 낳았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거문고산조로는 신쾌동류,한갑득류,김윤덕류 등 3개유파가 있다. 이들을 백낙준제와 비교하면 장단형의 구성은 3개의 악장으로 돼 있는 김윤덕류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하지만 조성면에서는 초기와 현재가 상당한차이를 보인다. 백낙준제는 전악장을 통해 거의 모두 계면조로 일관하고 있지만 현재는 보다 다양한 조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신쾌동류는 백낙준의 가락을 가장 많이 이어받았으며 박력 넘치는 시원시원한 가락이 특징. 이 가락은 신쾌동의 제자인 조위민·구윤국 등에게 전해지고 있다. 한갑득류는 신쾌동류에 비해 섬세하고 기교적이다. 또 새로운 가락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연주시간이 상당히 길며 원광호·이재화 등에게로 맥이 이어지고 있다. 김윤덕류는 신쾌동류와 한갑득류를 혼용한 가락으로 볼 수 있으며 김선한 등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10. 석전대제 문묘제례악
장중한 「약」 하늘의 문 두드리듯…/절제된 창 집례분위기 이끌어/64명의 무용수가 추는 팔일무 단순하고 질서정연/영신·축문읽기 등 봉행절차 8개… 원형 완벽하게 보존 ○천6백년 뿌리내려 하늘의 소리는 태초의 비밀을 여는 문이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소리는 신의 어루만짐이고 파도치는 운명의 속삭임이다. 그래서 하늘을 의지하며 사는 우리에게 「소리」는 「흔적」 그 자체이다. 하늘에 보내는 우리의 소리는 간절한 삶의 기원이고 하늘에서 인간에게 보내는 소리는 혼의 다스림이다. 하늘과 인간을 잇는 유일한 통로는 소리, 제례의 소리뿐이다. 그 소리는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악이 아니다. 하늘이 내린 업이다. 석전대제. 석전의 소리는 인간의 철학으로 다듬어진 보석이다. 지난 12일 오전10시 성균관 대성전에서는 춘계 석전대제가 봉행됐다. 이날의 석전대제를 진행한 집례는 손태민씨(유도회 대구지부장). 손씨는 끝이 약간 올려지는 일정한 높낮이의 4구8절 창을 불러 제례의 순서를 일목요연하게 이어주었다. 집례는 창(홀기)을 불러 8부분으로 나뉜 제례를 하나의 완벽한 행사로 이끄는 만큼 석전대제의 꽃으로 꼽히고 있다. 1천6백여년동안 뿌리를 내린 예인지라 집례선정을 둘러싸고 벌이는 유생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집례를 맡을 경우 가문의 족보에 그 영광을 남길수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성균관 대성전앞에 집례가 서고 제례를 주관하는 집사가 연주자들과 일무(일무)를 추는 무용수들을 거느리고 들어와 각자의 자리에 섰다. 다른 집사들도 입장해 네번 절했다. 그후 첫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 초헌관이 들어오고 뒤따라 둘째잔을 올리는 아헌관, 마지막 셋째잔을 올리는 종헌관, 고기로 된 제사음식을 올리는 천조관이 들어온다. 이들 4인은 모두 동쪽계단아래에서 서쪽을 향해 선다. 뜰위 성전에는 헌관, 집례, 대축등 20명의 집사와 21 명의 국립국악원악사가 자리했다. 성전아래 너른 뜰에는 헌관의 대표격인 김경수성균관장을 비롯한 5명의 집사와 20명의 악사, 64 명의 국악고등학교무용단이 제례를위해 정좌했다. 연주단은 당상악(등가)과 당하악(헌가)으로 구분하며 두악단이 함께 연주하는 법이 없다. 또 전국의 유교신도와 여성유도회원, 성균관식구등 5백여명의 일반인이 성전아래 뜰을 가득 메웠다. 드디어 석전대제의 첫순서인 전폐례봉행을 알리는 영신의 절차가 서두를 장식하는 순간. 성전앞에 서있는 집례가 응안지악과 열문지무를 연주하면서 타악기들이 『딱딱딱 쿵』소리를 울렸다. 이어서 아홉곡의 문묘악이 계속 연주됐고 무용단이 일무를 시작했다. 영신과 전폐례후 초헌례가 시작될 때도 역시 집례가 초헌에 연주되는 성안지악과 열문지무를 명한다. 이윽고 『드오』소리와 함께 음악이 연주됐다. 헌관이 공자신위에 술을 올린후 엎드렸다가 일어나 뒤로 물러나 꿇어앉으니 음악이 그친다. 이어 축문읽기를 마치면 박이 한번 울리고 연주가 시작된다. 헌관은 이런순으로 모든 신위에 잔을 올렸다. 연주는 의식의 빠르고 느림에 따라 몇번이고 반복됐다. 아울러 일무도 곁들여졌다. 공악례는 아무런 의식없이 음악연주와 일무만 있는 절차. 일종의 간주곡인셈이다. 아헌례와 종헌례도 헌관이 술잔을 올리는 순서후 연주와 일무가 따랐다.음복례에선 성현의 위패에 올렸던 잔을 초헌관이 대표로 음복했다. 제례후 제기를 덮는 절차인 철변두에서도 음악은 어우러졌다. 망요례는 석전대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순서다. 초헌관이 서쪽의 망료자리에서 축문을 불사를 때도 음악이 연주됐는데 축문을 다 태우자 음악이 그쳤다. 이렇듯 석전에 쓰이는 문묘악은 악기와 창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표출하는 하늘과 인간의 통로인 셈이다. 그 음은 매우 질서정연하고 장중하다. 석전에서의 「악」은 「화합」이라는 사회적 구실을 수행하는 것이다. 문묘악의 특징은 시작과 함께 음이 퍼지고 다시 합쳐진후 응어리진 소리가 풀어지는데 있다. 이 특징이야말로 인간사와 상통하는 것이다. 고악기로만 연주되는 근엄한 가락들은 역사의 풍경을 이룬다. 집례가 부르는 절도있는 창(홀기)은 우주만물을 감싼다. ○장식없고 규칙적 음 문묘는 문선왕묘를 말하고 문선왕은 세계4대 성인의 한명인 공자를 지칭하는 만큼 문묘악 역시 엄격하고 한없이 깊은 무게를 지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광활한 대지를 온몸으로 껴안고 전율하는 교감의 송가와도 같다. 또 단순한 제사의식이 아니라 조선의 국립대학인 성균관학생들이 신학기를 시작하는 음력 2월과 8월에 새마음으로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다짐의식이기도 해 석전대제의 숭고함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믿음직한 그림자로 남아있다. 석전대제에서 연주되는 문묘악이 언제 비롯됐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고려사」에의하면 1116년 예종 11년에 아악이 태묘의 제향에 사용된후 문묘악에도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세종12년에는 「대성악보」에 보이는 여러 곡중에서 15곡을 채택해 사용했다. 그러나 현재 연주되는 곡은 황종궁 고선궁 중려궁 이칙궁 남려궁 송신황종궁등 6곡에 지나지 않는다. 한 곡은 4음8절식 32박으로 구성됐는데 음계는 7음계, 율은 12률 4청성의 범주를 넘지 못해 완만한 박을 지닌다. 서양식으로 하면 4음이 한마디이고 모두 8마디로 된 형식이다. 문묘악은 궁 상 각 변치 치 우 변궁의 7음인 점이 특징. 선율은 장식음이 전혀 없고 리듬은 규칙적이며 각 음의 길이가 일정하다. 아울러 제한된 음역을 원곡의 음정과 다르게 들쭉날쭉 특이한 방법으로 조옮김하기때문에 같은 음에서 시작하는 15곡이 전혀 다른 곡처럼 들리는 것도 지혜롭다. 또한 우리가 연주하고 있는 문묘악이 6곡뿐이지만 이곡들은 중국에서 연주되는 문묘악보다 더 원형에 드는 음악으로 주나라의 제도에 보다 가까운 음악이라는 점도 중요대목이다. ○마지막에 분향·음복 문묘악의 소리는 연주와 창이다. 연주는 뜰위에서 연주하는 당상악과 뜰아래서 연주하는 당하악으로 나뉜다. 즉 당상악인 등가는 특종 특경 편종 편경 축 어 절고(이상 타악기), 금 슬 (이상 현악기), 소 지 적 약 훈(이상 취악기), 도창으로 구성된다. 당하악인 헌가는 편종 편경 축 어 진고 노고 노도 부 지 약 적 훈으로 구성된다. 주로 관악기와 타악기가 중심인데 무기를 이용한 정벌을 상징하는 무무가 따르기 때문에 타악기소리와 우렁찬 관악기가 연주되는 것이다. 등가와 헌가는 각각 집박악사가 지휘했고 절차에 따라 체주할 뿐 절대로 합동연주를 할 수 없다. 팔일무는 문무와 무무로 나뉘며 가로세로 각8명씩 줄을 이뤄 춤추는 의식이다. 문묘악의 일무는 4음단위로 이루어져있는 음악에 맞추기 때문에 같은 동작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되는 단순한 춤이다. 집례가 부르는 악장은 석전대제의 여덟부분가운데 영신 전례 초헌 아종헌 철변두 송신등 여섯부분에 들어간다. 각 악장은 네글자씩 8구절로 돼있는데 「대제선성 도덕존숭…」식의 글자를 음의 고저와 꺾음으로 노래한다. 1시간10분정도의 석전대제봉행절차는 망료예로 끝난다. 초헌관이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고 그 재를 땅에 묻는 의식후에 문묘악은 대미를 장식한다. 이어 참석자들은 분향과 음복으로 의례를 마친다. 소리로 하늘에 이르려는 인간의 염원. 그 바람은 하늘의 열매로 빚은 곡주를 우리몸에 적실 때 삶의 철학으로 다가온다.<유인화기자> ◎「석전대제」란/공자의 덕을 기리는 제사의식 석전대제는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덕을 기리는 제례다. 석은 「놓다」「두다」의 뜻이고 전은 「그치다」의 뜻. 「석채」 「사전」 「정제」 「상정제」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우리나라의 석전대제는 1986년11월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성균관과 남한지방의 2백32개 향교에서는 해마다 춘추길일인 음력 2월과 8월 첫번○ 정일에 동시에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금년에는 지난 3월12일 서울 정도6백주년기념 석전대제가 열렸다. 현재 석전대제를 봉행하는 성균관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 우리나라의 성현 18위와 중국의 성현 21위등 모두 39위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한국 석전역사는 이땅에 태학이 설립된 고구려 소수림왕2년(372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인 태학설립과 함께 석전이 봉행됐고 고려시대에도 국학에 문묘(공자를 모신 사당)를 모시고 석전을 올렸다. 석전이 봉행된 태학 국학 성균관 등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민족정통대학.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인재를 양성해온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석전대제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그 원형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가치를 인정받고있다. 유교발생지인 중국에서도 이미 사라진 석전을 배우기위해 한국을 찾는 실정이다. 실상 우리도 90년이전까지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10변10두와 유건도복의 석전대제를 봉행했는데 90년7월 성균관전례연구위원회 발의로 중국과 대등한 독립국위치에서 12변12두와 금관제복의 석전례를 봉행하게 됐다.
11. 웃다리 농악 상쇠 송순갑
◎사물장단·노래·춤의 종합예술/풍물생활 77년의 송옹… 8순에도 쇠가락잡으면 신들린듯 ○무형문화재로 지정 농악은 꽹과리와 징, 장구와 북으로 장단을 치며 날나리(태평소)를 불고 상모를 돌리며 농부가의 구성진 가락에 맞춰 신명난 춤사위를 펼치는 종합예술이다. 민속극·민속무용·민속놀이의 배경음악으로 빼어놓을 수 없는 다정다감한 우리의 가락이다. 겨레의 숨결이며 한국인의 흥과 멋이 어우러진 민족의 선율로 생활속에 깊이 뿌리박고 전해내려왔다. 해거름에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도 농악의 안내였고, 길가던 나그네가 옷을 벗어젖히고 논에 뛰어들어 모를 심을 수 있는 원동력도 바로 농악의 고동과 맥박이었다. 연주·노래·춤·놀이·극 등이 융합된 농악을 정병호교수(중앙대)는 「오케스트라형식의 연주 무용」이라고 성격짓고 있다. 『깽마갱깽 깽마갱깽/깽매깽마갱 깽마갱깽』 웃다리농악의 상쇠 송순갑옹(83). 풍물생활 77년의 그의 쇠가락은 신기에 가까워 충청도에선 최고수로 꼽히고 있다. 호남 좌도농악에서 가장 빼어나다는 진안의 김봉렬옹(80)과 천하 제일을 다툰다고 웃다리농악대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대전 웃다리농악은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송옹의 연주기량과 긴 세월동안 민중의 기호와 사회변동에 발맞추어 자신 역시 끊임없이 변신해가는 중에 닦여진 세련된 판제로 꼽히고있다. 웃다리농악의 본거지인 대전시 중구 대흥2동 326의 44 중앙농악회를 찾은 주초의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으나 바람이 제법 살을 파고들었다. 농악회회장인 송옹은 왜소한 체구에 여느 노인과 다를 바없는 인상이었으며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몇분간 잡이들과 소리를 맞춰보고는 꽃술이 달린 상쇠의 꽹과리채를 들어 잡이들을 끌고 나간다. 바로뒤에 부쇠 이규헌(81) 박영길(70) 김창덕(77) 유창렬(40) 안도경(26)씨가 따르고 있다. 이규헌옹 역시 쇠가락이 탁월하고 비나리(고삿소리)가 일품이다. 이어 성운식씨(68)와 농악회 총무인 장택수씨(58)등 징수가 따르고 황흥선(73) 조성호(61) 성리경(65) 성보경(58) 장병천(26·장택수씨의 차남) 조세영 (25·조성호씨의 장남)씨 등 장고수들이 뒤를 받치고 있다. 북수로는 전병학(73) 강정렬(70) 김팔남(70), 소구잡이는 박해석(77) 송덕길(35) 박헌영(30) 김용준(22) 김지춘(26) 복성수(29)한기복(26)씨가, 호적수에는 정필환씨(72) 등이 흥을 돋우고 있다. 덕길씨는 송옹의 외아들로 어머니 김금련씨(72)의 반대로 농악을 하지 않다가 최근에서야 배우기 시작했다. 조동호(72) 김병수(72) 김중렬(70)씨 등 기수들은 용당기와 농기 영기(령기)등에 자리를 잡은지 오래다. 소리가 힘을 받기 시작한 탓일까. 송옹의 쇠가락에 군마치가 들어가면서 발끝이 가뿐해지고 있다. 조였다가는 풀고, 주었다 받으며, 밀고 당기고, 뭉치고 흩어지고는 얽히고 설킴속에서 속도와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고 빨라지기도 한다. 『지난 87년에는 대장수술을 받았어요. 그땐 돌아가시는줄 알고 수의까지 모두 준비했었습니다』 ○칠채오방감기 절묘 정준용 전회장(69)은 『지난해 7월엔 송옹이 서대전광장에서 풍물을 마치고 기력이 쇠진해 쓰러졌다가 소생했다』면서 『힘이 없다가도 쇠만 잡으면 신이들린다』고 말했다. 판굿은 인사굿 돌림법구 당산벌림 칠채오방진 무동쾌자놀이 소구절굿대놀이 가새치기 사통배기 좌우치기 쩍쩍이굿 풍년굿 고사리꺾기 도독굿 소구판굿놀이 무동꽃받기 개인놀이 끝인사 등 17가지로 짜여 있다. 웃다리농악이 자랑하는 오방진법은 별자리 28숙을 뜻해 28채라고도 하는데 반드시 칠채를 치며 상쇠를 따라 동서남북 중앙으로 멍석말이를 계속한다. 중앙의 토에서 시작해 서방 금으로, 북방 수와 동방 목, 그리고 남방 화로 해서 다시 중앙 토에 와서 오행상생법에 따라 생문방을 찾아서 몰아 쌓게 되어있다. 이때 칠채는 늦은 칠채에서 전동작이 2배이상 빨라지는 잦은 칠채로, 다시 늦은 칠채로 절묘한 변화를 추구하고있다. 충청도의 웃다리가락이 잔가락과 음양(강약)으로 무한한 기술을 보일 수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이어 적벽에서 숨진 1백만 원혼을 달래준다는 영산다드라기의 소쩍새울음, 아낙들의 빨래다듬질소리 등이 가락으로 묘사되며 당산벌림·고사리꺾기·절구대놀이·도독굿·사통배기·가새치기·전후좌우치기등 몸동작이나 형태 등이 소리로 이어진다. 송옹은 『몇년전부터 기력이 급격히 쇠진해 살판·자반뒤지기·앉은뱅이모말리기등 땅재주를 부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땅재주는 본래 농악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남사당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옹 역시 남사당 뜬쇠였다. 그의 발자취는 그대로가 민중예술사의 한 토막으로 평가받고 있다. 1912년 부여군 은산면 신대리에서 3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4살때 부모를 여의고 7살때부터 농악판에 뛰어들어 이우문솟대패에서 땅재주를, 17세에는 김승서패에서 박첨지를 배웠다. 꽃나부로 시작해 버꾸·장구잡이를 거쳐 8·15해방뒤 세계사 걸립을 하면서 상쇠를 받았다. 「송버꾸」(법고) 「송장구」등의 별명도 당시에 얻은 것이다. 그의 예능적 소질은 웃다리농악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받기도 했다.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그는 웃다리농악의 대들보이다. 지난해 10월 전주체육관에서 열린 8도대항 전국농악대회에서는 송옹이 지켜보는 가운데 쇠잡이중 가장 젊은 안도경씨가 상쇠를 맡았으나 우승을 할 수 있었다. 쇠를 치지않고 있어도 다른 농악대들이 주눅이 든다는 것이다. 중앙농악회는 8년간 전주대사습에 참가, 2차례나 장원을 차지했으나 86년엔 예선탈락의 쓰라린 경험도 갖고 있다. 사람이 부족한 데다 잦은 교체로 연습을 제대로 못한 탓으로 이는 천하의 송옹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올해도 버꾸(소구)잡이가 부족한 데다 여름엔 대전서 전국농악대회가 있고 가을에는 춘천의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는 대전시 부사동 칠성놀이의 농악대로 참가해야 한다. 『회비를 걷어 농악회를 운영해야 하는 등 경제적인 문제도 크지만 회원들이 노인과 젊디 젊은 층이고 중간패가 없어 큰일이에요』 ○일반인에 농악전수 그래도 요즘엔 토요일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농악을 전수할 수 있는게 보람이다. 송옹에게 쇠와 장구를 배운 제자만도 1천명은 족히 될 것이란다.사물놀이의 김덕수(42) 박은하(34)씨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앙농악회가 장병천·조세영·안도경·김용준 등 젊은 회원으로 창단한 소리마당도 요즘 맹렬한공부와 활동으로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예전엔 논과 밭, 집 등 모두가 놀이마당이었는데…』 두레굿이 펼쳐지던 생산의 현장이나 정초에 벌이던 지신밟기, 걸립굿을 치던 집집의 마당이 농악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길에서 놀면 길놀이, 마당에서 놀면 마당놀이였는데 축원적 농악에서 시작해 노작농악·걸립농악·연희농악으로 발전하면서 점차 현장을 떠나게되고 관중을 의식하게 되면서 박제화하고있다. 상쇠일이 된듯 송옹이 『끙』하는 소리와 함께 왼손으로 꽹과리끈을 얽어 쥐고 채를 들어 가락을 다시 다스려나갔다. 잡이들의 사물과 날나리소리가 흥을 돋우며 감정을 요동치게 한다. 19세기이후 동학혁명과 일제침략기, 한국전쟁과 근대화 등 수난기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명맥을 이어온 농악. 농촌의 황폐화와 UR협상타결 등으로 또다시 격랑에 내몰린 농민의 소리, 농악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어떤 소리를 낼 것인가.<대전=이 용기자> ◎충청 이북지역서 즐긴 놀이/「웃다리 농악」 웃다리농악은 경기·충청 등 중부이북지역에서 성행했고 아랫다리농악은 전라·경상 등 남부지역에서 성행했다. 웃다리농악은 상쇠의 기능이 우세하고 아랫다리농악에선 장구와 소구의 기능이 두드러진다. 대전 웃다리농악(사진)은 1960년 장구·꽹과리에 일가를 이룬 송순갑옹 등 충북 중원의 세계사 걸립패들이 주축이돼 대전에 중앙농악회를 창립하면서 본격적으로 보존 전승되고 있다. 회원들의 계와 당국의 지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대전웃다리농악의 편성은 기 9명, 호적 10명, 꽹과리 4명, 징 2명, 장구 6명, 북 4명, 버꾸 8명, 무동 8명, 잡색 3명 등 54명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모양상의 특징은 농악대들이 머리에 고깔을 쓰지않고 전립을 착용하고 있다. 음악적으로는 판제가 다양하고 특이하며, 경쾌하다. 다른지역 농악에 비해 장단이 세련미가 있고 칠채가락을 쓰며 무동타기가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특색은 황해도의 일부지역 농악과도 상통한다. 잡색은 양반·중·포수 등이 등장하나 기녀는 들어가지 않는다. 대전의 직할시 승격과 함께 칠채 오방감기가락으로 시 무형문화재 제 1호로 지정되었고 송옹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2. 제주 칠머리 당굿
◎바다 달래고 풍어빌고… “어촌축제”/서우젯소리·영감놀이서 굿판절정… 제주굿 원형 보존 푸짐한 술을 단 신칼을 손에 들고 심방(무당의 제주말)이 제상앞에서 한바탕 춤을 벌인다. 느려지고 빨라지는 춤사위. 덩달아 북, 설쇠(꽹과리), 대영(징), 장귀(장구)의 무악가락이 울려퍼진다. 「휘적휘적」 발놀림이 란장이고 「좋지」 「얼쑤」 등 추임새가 뒤따른다. 늦은석(진양조)으로 가라앉다 중판석(중모리)으로 고개를 들어 자진석(자진모리)으로 내달리면 잽이(악사)들의 손놀림이 쉴새 없다. ○신을 부르는 초감제 무용을 주로 하는 「맞이」, 서사무가를 부르는 「본풀이」, 연희적인 요소가 강한 「놀이」로 크게 나뉘는 제주굿은 소리와 가락, 연극이 혼합된 종합예술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 칠머리당굿은 제주굿의 3박자인 맞이, 본풀이, 놀이의 원형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다. 지난 3월25일(음력 2월14일) 오전9시 제주시 건입동 서부두 수협어판장에서 열린 제14회 제주칠머리당굿(중요무형문화재71호) 공개발표회. 이날 굿은 강한 비 바람때문에 사라봉 칠머리당 대신 실내로 옮겨져 열렸다. 굿판에는 칠머리당의 본향신인 도원수지방감찰관, 요왕신을 비롯, 영등대왕신등의 각신위가 모셔지고 선주부인들이 밤새워 마련한 제물상이 차려졌다. 궂은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해녀와 어부들이 줄어든 탓일까. 마을주민은 20여명뿐이고 칠머리굿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진작가, 민속학자, 대학생등 외지인들이 오히려 분주하다. 제상 좌우켠에는 정태진(49) 고순안(48)심방등 보존회회원들이 연물(악기)을 차려 놓고 굿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다. 『천지혼합으로 제이르자』 남색 쾌자위에 분홍색도포를 입고 갓을 쓴 눈부신 차림의 김윤수심방(49)이 소미(소무)들의 연물가락에 맞춰 신을 불러들이는 초감제를 시작했다. 김심방은 천지개벽에서 대한민국 제주도 순으로 좁혀가면서 역사를 노래하고 굿하는 장소의 내력과 왜 굿을 하는지 신에게 아뢰었다.(베포도업침,날과 국성김). 신이 내려와 들어갈 문이 열리면서 신을 맞은 소미들의 연물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린다. 늦은석으로 춤을 추다 중판석으로 이어지고 잦은석의 춤이 휘몰아 치면서 소미들의 종종 발놀림이 숨가쁘게 이어진다. 「좋지」 「좋아」 구경꾼들의 입에서 추임새가 떠나질 않고 선주부인들은 두손을 합장한채 풍어와 해상안전을 기원하며 연신 절을 한다. 초감제는 소미 마치순의 새다림(신이 오는 길을 깨끗이 하는 제차), 김심방의 정대우(1만8천신을 모두 불러들인다), 문순실의 추물공연(신에게 음식을 대접한다)이 이어지며 끝을 맺었다. ○음식실은 짚배 띄워 다음 제차인 본향듦에서는 초감제가 반복되면서 본향당신을 맞아들인다. 특히 흥겨운 가락과 춤으로 신을 놀리는 석살림제차에서는 제주도 전역에서 흥겨운 자리마다 불리는 서우젯소리가 분위기를 돋우었다. 『아아 아하아요 에헤에 에헤에요. 이월이라 열나흗날 영등하라방 가시는 날에 아아 아하아요 에헤에 에헤에요』 김심방의 부인인 이용옥심방이 유장한 곡절로 노래를 풀자 아주머니, 할머니 10여명이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선소리로 메기고 후렴으로 받으며 춤판이 흐드러진다. 서우젯소리는 가락이 빼어나김매는 소리, 멸치후리는 소리 등의 노동요로도 널리 불리고 있는 제주의 소리. 카메라를 멘 학생하나가 소미의 손에 이끌려 「엉거주춤」을 추자 어느새 구경꾼들이 하나 둘 굿판에 끼여든다. 굿이 시작된지 8시간여가 지난 오후5시. 소미들이 가면을 쓰고 영감신으로 변장해 펼치는 영감놀이로 굿판은 최고조에 이른다. 김심방을 비롯, 구경꾼등 20여명이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음식을 가득 채운 짚배를 띄워 영등신의 무사송환을 빌고 소미들은 좁씨를 뿌려 풍년을 기원하며(씨드림) 칠머리당굿의 모든 제차를 끝냈다. 이날 굿판을 펼친 칠머리당굿보존회 김윤수심방(49·기능보유자후보). 제주의 손꼽히는 큰 심방으로 제주굿 76가지의 춤사위, 본풀이(신화로된 사설)는 물론 제주의 소리인 서우젯소리는 도내에서 따를 심방이 없다. 스스로는 『아직 멀었다』고 겸손해 하지만 22 대 세습무로 그야말로 「심방중의 심방」이었던 스승 안사인심방(인간문화재·90년 작고)에 손색이 없다. 이 굿의 보존에 신명을 바치고 있는 김윤수심방은『굿을 청하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든 탓에 심방도 점차 사라지고 있어 굿이 제대로 보존될까 안타깝다』고 말한다. ○세습무 김윤수심방 제주사람들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으레굿을 벌였다. 애가 아프면 불도맞이(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굿)를 했고 마음이 허하면 넋드림을 했다. 「당5백 절5백」의 고장이라고 일컫듯 굿은 제주인의 삶에 뿌리박아 한을 다스리고 삶의 신명을 되살려준 제의이자 마을의 잔치였다. 그러나 심방은 점차 줄어들고 굿과 「제주의 소리」를 찾는 주민들은 대부분 장년층이어서 제주예술의 원형이 제대로 보존될까 하는 것이 굿을 아끼는 이들의 한결같은 안타까움이다. 죽은 자의 넋을 달래고 산자의 아픔을 다스려왔던 제주의 굿. 소리와 가락이 인간의 비원을 하늘로 이어 준다는 태고적 믿음은 보존회 심방들의 기능전수로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었다. 〈제주=최정훈기자〉 ◎「칠머리당굿」/마을의 수호신에 해녀안전과 풍요를 비는 굿 제주 칠머리당굿이란 제주시 건입동의 사라봉중턱 속칭 칠머리당의 본향당신(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굿을 말한다. 지난 80년 무형문화재 71호로 지정된 이 굿은 어부나 해녀의 해상안전과 생업의 풍요를 기원하는 어촌부락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본향당신을 비롯, 비 바람의 신인 영등신(영등할망)을 주신으로 삼아 음력2월1일 영등환영제로부터 시작해 2월15일 영등송별제를 끝으로 보름간 지속된다. 영등굿은 해방이전까지 제주도 전역의 어촌과 농촌에서 행해졌으나요즘에는 제주시 건입동의 칠머리당굿 등 바닷가마을 10여곳의 본향당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칠머리당굿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돼 굿을 보존해오던 세습무 안사인씨(90년작고)의 뒤를 이은 칠머리당굿보존회 회장 김윤수씨(49·보유자후보)와 45명의 회원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신을 부르는 초감제를 시작으로 본향듦, 요왕맞이, 마을 도액막음, 씨드림, 배방선의 제차가 이어지며 신을 돌려보내는 도진을 끝으로 굿판은 마감된다. 제주도의 크고 작은 70여개의 굿중 대표격인 이 굿은 심방(무당)의 춤과 소리, 북·설쇠·대영·장고등 무악기의 흥겨운 가락이어우러져 거친 바다와 싸워온 제주도민의 삶과 한을 달래준다.
13. 범패
◎깊은 산사 울리는 청아한 독경… 법고·바라춤 이어지며 절정 인간의 아름다움은 무의식의 심연에서 피어오른다. 신기루처럼 잡을 수 없는 생명의 환희도 인간의 자비심에서 돋아난다. 천상의 불덕과 천하의 번뇌가 하나로 만날 때 우리들의 가슴속에 싹트는 깨달음, 그것은 청아하고 그윽한 성음으로 이어진다. 심산유곡의 종소리처럼 인간의상처를 어루만지는 희망의 싹으로 태동한다. ○영산제는 3일의식 범패는 불덕을 찬양하는 가사에 곡조를 붙인 불교특유의 음악이다. 범패가 쓰인 재는 령산재 상주권공재 십왕각배재 생전예수재 수▦재 등 다섯가지.령산재는 가장 규모가 큰 재로 3일이 걸린다. 국가의 안녕과 무사들의 무운장구, 그리고 죽은자를 위해서 행해진다. 범패승들은 처음에 상주권공을 배운 후 마지막으로 령산재를 배운다. 3일이나 걸리는 만큼 절차도 상당히 복잡하다. 1968년 봉원사에서 행해진 령산재에선 50여명의 범패승들이 1백42가지의 소리를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상주권공재는 죽은 자를 위해 행하며 보통 하루가 걸린다. 범패가사는 7언4구와 5언4구로 된 한문정형시와 한문산문으로 구성됐다. 십왕각배재는 저승 10대왕에게 자비를 비는 범패로 구성된다. 생전예수재는 무속의 생오귀굿에 해당하는 내용의 범패로 이어진다. 수륙재는 수중고혼을 위로하는 재로 무속의 용왕굿에 해당된다. 다섯종류가운데 가장 광범한 것이 령산재. 현재 각 사찰에선 재공의식을 올릴 때 필요부분만을 추려 몇시간으로 줄이고 있다. 재기간이 3일이나 걸리다보니 성심력의 인내가 자연 힘들기 때문이다. 범패는 타종교와 유달리 다른 점이 있다. 송암스님(봉원사)은 『다른 종교의 경우 의식이나 기도를 올릴 때 성직자가 신도들과 함께 찬송하는데 범패는 승려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승려들이 신도들과 하나의 원형을 이뤄 정진하며 인간이 생전에 쌓은 모든 업장을 소멸시킬 때도 범패는 스님들의 몫일 뿐』이라고 특징을 설명했다. 원형정진과 함께 그 가운데서는 작공(승무)이 동시에 곁들여진다. 정진후에는 바라춤이 이어진다. 매우 장엄하고 엄숙한 순간의 파도가 신도들의 가슴속에 휘몰아친다. 송암스님은 『모든 불교의식이 범패로 행해지는 만큼 범패의 습득과 체험이 없으면 속칭 「중물이 들지 않았다」고 할만큼 승속의 구별은 범패로써 척도를 삼을 정도』라고 강조했다. 범패는 재의 식순마다 가사내용을 바꿔가며 계속된다. 재의 진행절차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상주권공 시식 봉송 식당작법의 순. 절차에 따라 3현6각(장구 대금 피리 해금),사물(종 북 목어 운판),취타악(소라 북 좌발 호적)의 반주가 따른다. 『재의 소리는 형식상 안채비소리와 바깥채비소리로 나뉘는데 대부분 바깥채비의 홑소리를 많이 부르죠. 바깥채비소리는 안채비소리를 좀 더 불교적으로 경건하게 포장한 점이 특징이에요』. 만춘스님(봉원사)의 설명이다. 법당안에서 거행되는 안채비소리는 의식절차에 따라 목탁을 치고 요령을 흔들면서 독경을 하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바깥채비소리는 안채비소리의 예경과 찬불소리를 확대, 악기반주와 의식무용을 필수로 한다. 즉 3현6각등의 악기연주와 그에 따르는 무용(법고춤 나비춤 바라춤)이 시청각적 효과를 유발, 사람들에게 성대한 볼거리를 준다. ○의식단축 안타까워 만춘스님은 『안채비소리는 순수한 절차인 반면 바깥채비소리는 대중적·토속적·민속적인 요소를 가미, 전통문화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말한다. 바깥채비소리인 홑소리중 「할향」의 경우를 보자. 제1구인 「봉헌일편향」은 모두 5개의 가락으로 구성, 『보옹 오옹 오이―어어 이어 아이오옹』이 「봉」을 이루고 「헌」은 『허어 허헌 이에엥…』「봉」의 몇배길이로 이어진다. 범패중 가장 절정을 이루는 상주권공의 경우 괘불을 내어걸고 그 앞에서 옹호게 찬불게 출산게 산화랑등을 범패로 창하여 부처님의 강림을 발원·찬탄한다. 이때 나비춤과 바라춤이 수반된다. 범패가사는 이해하기 어려운게 당연하다. 『나무 보보재리 가리다리 다타 아다야』『옴 바아라하 사바하』(왼손엄지손가락으로 무명지아랫마디를 누르고 주먹을 쥔다)등 주문같은 소리가락이 대부분이다. 재를 마치고 난 후의 식당작법도 범패로 시작된다. 천주교의 성찬식에 비교되는 의식으로 불교의 생명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의례다.『재에 참여했던 대중들은 공양의례를 통해 생명의 의미를 깨닫는 거죠. 식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뜻도 내포됐어요』. 스님은 목어와 북을 치고 대중은 자리를 잡는다. 이후 가사염불과 바라춤이 이어진다. 남성적인 바라춤과 여성적인 나비춤이 끝나면 법고를 울리고 징을 15번 울린다. 범패는 불교의식의 핵심. 그러나 스님들은 『며칠씩 걸리던 범패가 단 몇시간으로 단축되고 그나마 안채비소리만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사라지는 전통을 안타까워 했다.〈유인화기자〉 ◎범패/영산제등 불교의식때 승려들이 부르는 찬가 범패는 불교의 의식음악을 말한다. 절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소리. 가곡·판소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성악곡이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됐고 예능보유자로 박송암 장벽응 이재호 정지광 등 4명의 스님이 지정됐다. 준보유자 김구해, 이수자는 김혜경 마일운 등 16명. 일명 범음·어산·인도소리·인도소리라고도 한다. 장단이 없는 단성선률로 서양의 그레고리안 성가와견줄 수 있다. 범패는 「삼국유사」 월명사의 두솔가조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신라의 진감선사가 쌍계사에서 수많은 제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전승하기 시작했다. 범패는 당풍·향풍(신나풍)·고풍(일본풍)의 세가지 유형이 있으며 진감선사가 중국에서 배워온 범패는 당풍이었다. 이후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때는 범패가 상당히 성했고 1912년 각본말사법이 제정된 후 쇠해진 게 사실이다. 범패는 음악적 형식으로 분류할 때 안채비소리와 바깥채비소리로 나뉜다. 안채비소리는 흔히 염불이라고 한다. 바깥채비소리는 홑소리·짓소리·화청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흔히 범패라 부르는 소리는 주로 안채비소리와 바깥채비소리인 홑소리다. 원래 짓소리도 많은 비중을 차지했으나 의식이 간략해진 요즘은 연주시간이 긴 짓소리를 생략하는 편이다.
14. 진도 들노래
◎「진도 들노래」/예능보유자 조공례씨 소리에 길손발길 붙들어 삶이 고달파 모진 목숨이 한스러웠다. 왜 그토록 논일 밭일은 켜켜이 쌓이던지. 오금 한번 허리 한번 펴질 못했다. 들녘에 서서 「어이할거나」 장탄식하면 「에헤야」소리가 되고 「덩더꿍」가락이 됐다. 그제서야 신명이 났고 「소리함스루 일함스루 소리함스루 일함스루」할수 있었다. 『어기야 허허 여-허 헤라 머허-난디요/어기야 허허 여-허 헤라 머허-난디요/이고루 걸고 저고루 걸고 다걸고야/어기야 허허 여-허 헤라 머허-난디요』(모뜨는 소리) 목청 좋은 이가 앞소리를 메기면 다른이들이 「어기야 허허」뒷소리를 받는다. 모를 심으며 「어기야 허허―상사로세」를 불러젖힌다. 장단이 빨라져 자진못소리로 내달리면 흥겨운 가락에 어느새 하루가 저문다. 종일토록 모판에서 모를 심고 지심을 매야하는 힘겨운 노동의 현장. 함께 일해(두레)고통을 나누고 갖가지 소리로 흥을 돋워 삶의 고단함을 덜어낸다. ○힘에겨워 흥에겨워 곡창지대로 유명한 전라도 지방은 유달리 소리가 다양했고 소리꾼이 지천이었다. 그중에도 옥주라 부를만큼 땅이 기름진 진도는 들노래를 비롯, 각종민요가 성했다. 남도들노래(중요무형문화재51호) 예능보유자 조공례씨(70·여·진도군 지산면 인지리 274). 『진도에 가서 소리자랑마라』는 옛말이 척 들어맞는 타고난 소리꾼이다. 모뜬소리(모찌는소리), 못소리(모내기소리), 절로소리(김매기소리), 길꼬냉이(길노래)로 구성된 들노래는 물론 강강술래, 방아타령, 상여소리는 길손의 발길조차 멈추게 하는 혼이 담겨있다. 지산면 갈두리에서 나고 17살에 인지리로 시집와 3남1녀를 두고 지금까지 살아온 조씨. 고달픈 삶의 한가운데 소리가 있었고 타고난 목청 덕에 속내에 옹이처럼 박힌 한을 삭여냈다. 『고생 겁나게 했제. 친정아버지가 새끼덜 안 돌보고 바람을 피우더니 서방도 계집이라면 사죽을 못썼응께. 소리 안 배웠으면 속터져 지레 죽었을지도 모르제』 아버지(조정옥)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소리꾼이었다. 바람기에 여자와 눈이맞아 객지로 떠돌면서도 집에만 돌아오면 힘깨나쓰는 농투성이었다. 북잘치고장구잘치고 들노래가 구성져 모내기철마다 동네방네 모셔가려고 난리였다. 밤이면 동네 머슴들이 몰려와 마당에멍석깔고 앉아 소리 한자락 배우려고 아우성이었다. 정작 아버지는 딸에게 한번도 가르쳐준적이 없었지만 조씨는 어깨너머로 소리를 배워 9살때부터 꼴베고 길쌈하면서 흥얼거렸다. 『나가 시방하는 노래들은 다 그때 배웠제. 동네 가시내들하고 모였다하면소리자랑을 했응께』 ○한의 「둥덩에 타령」 밭에 나가면 으레 들노래를 했고 추석명절이면 달빛 아래에서 사정없이 강강술래를 질러댔다. 동네어른들이 『산천풀잎도 떤다. 저렇게 잘 헐까』 감탄했을 정도였다. 『어기야 허허 여―헤라/상사로세(선소리) 어기야 허허 여―헤라/상사로세(뒷소리) 우리 인생은 한번가면/다시를 오지를 못하나니』(못소리) 누에에서 실을 뽑듯 술술 나오는 소리는 『한몸돼서 지랄한다』며 주재소로 잡아가던 일본순사의 공연한 위협도, 아버지를 빗대며 『이년아 소리허면 알제』하던 어머니의 만류도 어쩌지 못했다. 철없던 열일곱시절 일본의 처녀공출을피해서둘렀던 혼례. 남편되는 이도 아버지처럼 몇달씩 집을 비우다 으레 여자를 끼고 나타나 속을 뒤집어 놓고 훌쩍 떠나곤 했다. 예올리고 모신 남편이라고 자식들만 「맹글어」놓았지 삯바느질에서부터 들일은 모두 조씨의 몫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들녘에서 동네 아낙네들과 즐겨 불렀던 「둥덩에타령」가락은 가슴에 송글송글 맺혔다. 『둥덩에 덩 둥덩에 덩 당기 둥덩에 둥덩에 덩/내려온다 내려온다 새신랑이 내려온다/아랫동네 귀동자/새신랑이 내려온다/걸쾌자 걸쾌자/유명갑사 걸쾌자/아무리 보아도 내솜씨가 아니다』 ○딸이 소리3대이어 등잔불 아래서 해입힌 서방님의 걸쾌자가 다른여자의 양복저고리로 뒤바뀐난데없는 경험을 한 그로서는 진양조의 걸쭉한 해학이 담긴 「둥덩에」는 영낙없는 한타령이었다. 『무슨 조화속인지 모르겠어. 아버지·남편이 썩인 속을 소리로 풀며 살아왔는데 그소리로 팔자가 쪼꾀 폈응께』 71년 민속예술경연대회(국무총리상수상)에 마을사람들과 참가해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노래를 그렇게 잘하는 분이 시골에 숨어있었냐』는 치하를 받고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그뒤 그의 들노래는 서울구경을 뻔질나게 했고 워싱턴(81년)구경까지 했다. 요즘에는 소리3대를 잇는 들노래 조교인 딸(박동매·35)과 지산리 인지리 마을아낙들인 이수자·전수자들과 함께 들노래를 보존하며 한달에도 십여명씩 찾아오는 대학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스스로 들에서 부르지 않는 들노래는 소리맛이 없다는 조공례씨. 그는 지금도 초상이 나면 상여가 나가는 진도에서 도맡아 상여소리를 메기며 한의 소리를 뿜어낸다. 『에헤 에헤에야 에허어허 에헤에야/어이가리 어이가리 어이를 갈꺼냐―삼천갑자 동박삭은 삼천갑자를 살았건만/가시는 망제님은 백년도 못살았네―차마 설워서 어이를 갈꺼나』 소리가 목숨이고 사랑이고 밥인 남도사람들. 너그럽고 조급하지 않으며 조용하면서도 익살스럽고 예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갖춘 남도의 소리. 소리꾼의 풍상이 곁들여진 애절한 한의 소리는 진도 들녘을 맥놀이쳐 길손의 발길을 오래오래 붙든다.【진도=최정훈기자】 ◎「진도 들노래」/지산·임회면의 두가지 유형… 가락·형식 조금달라 남도(진도)들노래란 남도지방에서 논일과 밭일을 하면서 부르던 농요중 하나다. 농부들이 모판에서 모를 쪄 심고 밭에서 지심을 매면서 「힘에 겨워 흥을 돋우기 위해」부르던 노래가 들노래다. 진도군 진도읍 지산면 일대에 소리의 원형이 남아 지난 73년 중요무형문화재51호(기능보유자 조공례·70)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도들노래는 그형식과 내용, 가락과 전파지역면에서 지산면과 임회면 두 유형으로 나뉜다. 길다란 만을 끼고 진도의 서남단에 위치한 지산면은 소포항을 통해 목포로 연결되는 해로를 이용해온 반면 임회면은 진도읍과 벽파진을 거쳐 해남으로 연결되는 해로를 이용해왔다. 두 지역권은 지리적으로는 가까웠으나 교류가 거의 없는 생활권으로 나뉘어 서로다른 민요권을 형성했다. 특히 오랫동안 「섬속의 섬」으로 남아있던 지산면은 임회면에 비해 노래곡수가 많고 음악적으로도 세련돼 있다. 논매기 소리인 절로소리만해도 지산면에는 긴절로소리, 중절로소리, 자진절로소리가 있지만 임회면에는 늦은절로소리와 잦은절로소리로만 있어 단조롭다. 남도들노래의 구성은 모뜬소리, 못소리, 절로소리, 길꼬냉이로 크게 나뉘어 8가지형식으로 세분된다. 다른 민요와 마찬가지로 임에 대한 그리움·원망, 충효심과 근로사상의 발양, 인생무상등이 주제를 이룬다.
15. 남도 육자베기
◎술한잔에 흥돋우면 언제 어디서나 “즉흥소리” 『하나님이 사람을 낼땍에는 별로 구별이 없었건만/어뜬 사람은 팔자가 좋아서 부귀영화로 잘사는데/이놈 팔자 기박하여/날만 새면 지게갈퀴 졸마지고 심산으로 들어가서/여보아라 친구들은 저골을 비고 나는 이골을 비어/떨어진 낙엽이나 부지러진 잡목을/끌고 비고 응등기려 힘끝대로 졸마다가/귀부모 처자식을 극진공대를 허여나볼라네/에헤∼넉화로구나…』(진도군 임해면 남동리에 사는 안성단씨(68·여)의 노래) 육자배기는 남도의 대표적인 노래다. 지게 지고 산을 오르면서 쉬엄쉬엄 부르던 노래, 술 한잔 받아들고 흥이나면 맨처음 나오는 가락이 바로 육자배기다. 판소리와는 달리 누구나 기분이 내키면 멋있게 불러젖힐 수 있는 것이 육자배기이기도 하다. 왜 남도에서만 육자배기가 불려졌을까. 목포대 나승만교수(민속학)는 『한 지역의 노래는 그 지역의 흙의 성격과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한다. 민초들의 노래라는 것이 무대를 따로 마련해 불려졌던게 아니라 일하는 가운데 생겨나는데, 일은 그지역의 자연적·생태적 조건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거친 점토땅과 연관 영산강 유역의 서부 평야지대의 토질은 점토, 즉 차진흙이다. 그런 흙에 농사를 지으려면 빠르고 경쾌한 몸놀림이 불가능하다. 진흙길을 걸을때의 느낌을 연상하면 이해가 쉽다. 남도의 농민들은 힘은 힘대로 들이면서 일의 진척이 더딘데서 오는 어려움을 노래 한 자락으로 달랬다. 지금이야 경운기, 트랙터 등 기계가 발달해서 지루하기만 했던 논밭 이랑도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않는 시절이다. 일손이 부족해서 모내기를 따로 하지않고 나락을 바로 심는 세상에 이웃사람끼리 노래를 주거니 받거니 할 일도 없어졌다. 70세 전후의 노인이 아니면 육자배기 한 구절 부르겠다고 흔쾌히 나서는 이가 없다는 안타까운 사실도 따지고 보면 이즈음의 세태가 낳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백로와 왜가리(천연기념물 211호)의 서식지로 유명한 전남 무안군 무안읍 용월리 상동. 86가구 3백7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살고있는 이 작은 마을은 육자배기나 들노래라면 영산강 유역에서 어깨를 겨룰곳이 없을 정도의 예촌이다. 육자배기라는 멋스러운 노래가 무슨무슨 경연대회라는 자로 잴수있는것은 아니지만 연전에는 여러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기도 했다. 이 마을 이장 김창화씨(58)에게 육자배기 한 소절 듣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을때 처음 들은 답은 『사설도 다 잊어버리고 들려줄게 없으니 오지말라』는 것이었다. 육자배기 솜씨가 빼어났던 촌로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버리고 그분들 어깨너머로 가락과 장단을 배웠던 50∼60대의 소리는 외지사람에게 내놓기에는 「우세스럽기만 하다」는 것이다. ○노래가 사라진 들녘 기자가 이 마을을 방문한 날은 마침 목포시·무안군 행정구역 통합반대 시위날이어서 얼마 안되는 주민들마저 읍내에 나가버혔다. 덕분에 마을 분위기는 농번기임에도 불구, 고즈넉하기만 했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노라면 막걸리 한잔씩 걸치고 노래도 신나게 불렀지요. 그러나 지금은 기계화되어서 빵하나에 음료수 한병이면 일이 후딱 끝나버려요. 노래고 뭐고 부를 겨를도 없는 것이지요』 이장 김창화씨의 설명이다. 박옥석씨(66)는 『육자배기 제대로 부르려면 적어도 3년정도, 논마지기라도 팔아가며 배워야한다. 우리가 하는 것은 어르신들 부를때 흥에 겨워 따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거듭 자신의 실력을 부끄러워했다. 주운 사설이라 뜻의 전달도 제대로 되지않는다는 것이다. 말은 그렇지만 경로당 시렁위에 얹혀있던, 북가죽 곳곳에 관록이 곱게 묻어있는 북을 갖고 논두렁가에 둘러앉자 주거니 받거니 사설들이 흥겹다. 『함평천지 늙은몸이 광주 고향으로 오려하고 제주배 둘러타고 해남으로 건너갈제 흥양에 돋는 해는 보성을 비쳐있고 고산의 높은 안개 영암을 둘러있네』 ○여자에겐 소리금기 전라도의 갖가지 지명이 총동원되는 이 노래는 제목이 「호남가」다. 마을에 상사가 있으면 직접 상여소리를 하는 이 마을의 노래실력은 근린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한 장의사는 마을사람들이 부르는 상여소리를 성능좋은 카세트 테이프에 담아 장례때마다 틀어대곤 해서 헛웃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어르신들이 사랑채에 모여 술한잔 드시면 흥에 겨워북 가져온나 하셨지요. 그 심부름을 하러 가노라면 벌써부터 어깨춤이 덩실덩실 춰졌구요』 박만규씨(65)는 이렇게 회고하며 옛날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노래는 커녕 잔칫집에서 이웃을 초대해도 올까 말까이다. 여자들은 육자배기를 안했느냐는 질문에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여자가 소리를 하면 흉으로 알았다』고 답한다. 나교수가 소리를 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갖고있는 경제력과 비례한다고 말했던것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고기잡고 농사짓는 일에 남자보다 오히려 적극적인 완도나 진도 여자들이 수많은 노동요 레퍼터리를 갖고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서라 세상사 쓸곳없다 군불견▦웃지마라 대장부 평생사업 연년이 넘어가고 동유수 굽이굽이 물결은 바삐바삐▦』 차츰 낯이 상기되면서 육자배기 가락도 농익어갔다. 추임새 하나 제때에 넣기가 힘든 「외지인」은 이 소리가,이 가락이 멀지않아 이 땅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만 조급해졌다. 【전남무안=한혜진기자】 ◎육자배기/전문가가 만든 음악적 기교 뛰어난 민요…남도서만 애창 전라도의 대표적인 노래.서도의 수심가와 함께 한국민요의 쌍벽을 이룬다. 느리고 유연하게 뻗으면서도 음의 폭이 넓고 가락이 장절마다 변화가 있어 예술적 가치가 높다. 흘러내리는 미분음및 시김새에 따른 목구성이 특이하여 전라도사람 외에는 하기 힘들다. 한스럽고 서정적인 내용을 담고있으면서 선율도 아름다워 전라도사람이면 남녀노소, 계층을 막론하고 누구나 즐겨 불렀다. 「육자배기」라 함은 진양 한각인 6박을 짚어간다는 데서 연유한다. 『저건너 갈미봉에 비가 몰려 들어온다 우장을 두르고 지심매러 갈거나/진국명산 만방봉에 바람이 분다 쓰러지며 송죽같은 굳은 절개 매맞는다고 훼절할까…』 백대웅교수(중앙대)는 『육자배기는 그 음악적 특징이나 성격으로 보아서 민요와는 다른 전문가들의 노래이고 작곡자가 밝혀진 것도 많은데 그것을 민중들이 배워서 애창하기 때문에 남도민요의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고 설명하고있다. 결국 전문음악인들이 음악적 기교와 시적 구성력을 가지고 만든 노래가 평민의 공명을 얻어 민중예술의 정화로 피어났다는 설명이다. 창조에 따라서는 흐튼조 육자배기와 정격 육자배기로 나눌 수 있다. 정격 육자배기는 6박이 모여 1각이 되고 4각이 합쳐져서 1장단이 되는 정격 장단을 따르는데 반해 흐튼조 육자배기는 형식이 비교적 자유스러워 육자배기 본연의 모습에 가깝다.
17. 밀양아리랑
◎넉넉한 농심 신명난 장단 절로…/빠르고 경쾌한 「당다꿍」 후렴…애조띤 「정선」「진도」와 대조적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좀보소/ 정든님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뻥긋/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넘겨주소』 할머니 무릎을 베고 어머니가 들었고어머니 무릎을 베고 아이들이 들었던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서러움, 애달픔을 실은 탄식의 노래요 흥과 즐거움을 멋스럽게 다스릴줄도 아는 신명의 노래였다. 정선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이 탄식의 노래라면 밀양아리랑은 신명의 노래다. 가락이 느리고 애조띤 슬픔을 담고있는 두 아리랑에 비해 밀양아리랑은 빠르고 흥겨워 어깨춤이 절로 나게하는 음악적 특징을 띠고있다. 이를두고 김렬규교수(인제대·국문)는 『정선아리랑이 설렁거린다면 진도아리랑은 낭창거리고 밀양아리랑은 쿵닥거린다』고 설명했다. ○풍요로운 곡창지대 밀양아리랑 가락의 경쾌함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밀양은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밀양강(남천강)이 마을의 한가운데를 길게 누워 흐르고 주위를 넓은 평야지대가 감싸안고있다. 이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경남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이자 부산과 대구를 잇는 교통요지로 손꼽힌다. 이 지역 향토민속학자인 임인수씨(61)는 『밀양아리랑의 빠른 가락은 풍요로움이 가져다준 밀양사람들의 낙천적인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편에도 『이 마을 사람들은 생활이 넉넉하였으므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했으며 노래도 경쾌한 것을 즐겨불렀다』고 적고있다. 말하자면 밀양아리랑의 능청스러운 흥겨움과 빠르고 경쾌한 리듬은 지역의 풍요로움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영향인지 예로부터 밀양은 부락제 성격의 민속놀이가 많기로 유명했다. 밀양백중놀이(중요무형문화재68호), 무안용호놀이, 감내게줄당기기등의 농촌공동체놀이는 지금도 보존회를 통해 보존, 계승되고 있다. 흥겨운 농악과 춤으로 짜여진 이 놀이에도 으레 아리랑이 양념으로 곁들여졌음은 물론이다.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어절씨구 잘넘어간다(후렴)』 밀양아리랑이 다른 아리랑과 비교해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당다꿍」후렴이다. 이는 무엇이든 두드려 「당다꿍」장단만 낼수 있으면 족했던 밀양사람들의 풍류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농부는 지게목 장단으로 아낙네는 물동이 장단으로 밀양아리랑을 흥얼댔다. 물동이에다 바가지를 담그고 두드리면(물장구)그것도 훌륭한 악기가 됐다. 물동이를 인 아낙네는 물바가지로 궁둥이를 때리며 「무거움」을 잊었고 농부는 지게목을 두드리며 노동의 고단함을 달랬다. 마침 지난13일에는 1년중 가장 큰행사인 밀양아랑제(16일까지)가 영남루 주변 남천강고수부지에서 전야제를 시작으로 열렸다. 아랑제는 전설상의 주인공인 아랑규수의 정절을 기리고 소멸과정에 있는 민속놀이와 세시풍습을 보전하기 위한 향토문화제. ○농부는 지게목 장단 이번에는 해마다 보여온 주민들의 무관심을 돌리기 위해 불꽃놀이가 곁들인 전야제행사도 마련하는등 치밀한 준비를 했지만 비때문에 많은 행사가 못치러져 올해도 결국 반쪽행사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밀양아리랑은 여고생들의 밀양아리랑대합창으로 구색만 갖춘채 행사진행표에 올라와 있을 뿐이어서 밀양아리랑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었다. 『밀양아리랑이 워낙 많이 알려져 제대로 뽑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줄 알지만 이제 5∼6명에 불과해요. 그분들도 모두 연로해 10여년후면 밀양땅에서조차 밀양아리랑가락이 사라질지 모르죠』 밀양백중놀이보존회 이용만총무(56·농업·밀양군 부북면 감천리)의 안타까운 하소연이다. 밀양아리랑은 현재 백중놀이기능보유자인 김상룡씨(78)와 보존회회원인 임순이(65),김수야(55)씨등만이 밀양풍류대로 부를 수있을 뿐이다. 『내가 어렸을때만 해도 논두렁 밭두렁뿐아니라 안방,빨래터등에서 지게목이든 젓가락이든 두드릴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장단을 맞춰 흥겹게 아리랑을 불렀어. 아이 어른 할것없이 「당다꿍」장단은 제대로 두드렸지』 김상룡씨는 옛날을 회상하며 손에 쥔 지게목으로 박자를 짚었다. ○여러갈래로 편곡도 김씨는 또 『작곡가 박시춘씨의 부친인 박남포씨가 당시(29년경) 읍에서 여관을 하면서 아리랑을 많이 편곡해 「박남포여관에 사장구소리/동문안 큰애기 궁둥춤추네」라는 아리랑이 불렸을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이 말은 아랑의 전설이 담긴 밀양아리랑이 근대로 넘어와 정착했고 독립운동가로, 대중가요로 변해가는 「아리랑의 역사성」을 짚어주는 대목이었다. 보존회회원들에게 아리랑을 청하자 흰저고리와 바지를 받쳐입고 지게를 짊어진채 김씨의 선소리에 따라 후렴을 합창하며 여러 종류의 아리랑을 불러주었다. 『담넘어 갈적엔 큰맘먹고 방들어 올적엔 발발떤다/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씨구 아라리가 났네』 경남지방의 제1루인 영남루 앞을 흐르는 남천강변에서 밀양아리랑의 곡조가 장구장단에 맞춰 신명나게 울려퍼졌다. 「아리당다꿍」 「아라리가 났네」 멋드러지게 한판이 벌어져도 밀양제행사를 찾은 인파는 장사꾼들의 좌판주변을 서성일뿐 끝내 이편으로 발길을 돌리지않았다. 밀양아리랑의 운명을 예고해주는 순간이었다. 【밀양=최정훈기자】◎유래/아랑의 전설담은 영남의 대표적민요 경상도의 대표적인 민요.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과 함께 우리나라 3대아리랑으로 손꼽힌다. 경남 밀양에서 발생된 노래지만 지금은 전국적으로 불리고 있다. 빠르고 경쾌한 가락이 특징으로 남녀노소가 손쉽게 부를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아라리로 통한다. 가락의 쾌활함과 섬세함이 돋보이고 이 지역의 전설인 아랑설화의 영향이 뚜렷히 나타나고 있다. 밀양고을 사또의 딸인 아랑낭자가 정절을 지키려다 봉변을 당한 슬픈전설이 밀양아리랑의 기원을 이루고 있고 가사의 절반가량이 이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전파양상이 다른 아리랑과 뚜렷이 구별된다. 밀양아리랑은 양반의 얘기를 소재로 삼아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양반과 상민 양대계급의 기호를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다. 현재 노래가사는 50여수가 채록되고 있는데 절반이 아랑의 정절을 소재로 한것이고 나머지는 이별과 해학을 주제로 하고 있다. 특히 일부가사중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시구 잘넘어간다』라는 독특한 후렴을 담고있는 점이 이채롭다. 밀양아리랑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근대에 들어와 작곡됐다는 설도 제기되고있어 비교적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것으로 평가된다. 세마치 장단으로 빠른속도로 부르게 돼 있고 16소절이 앞소리(4소절씩), 후렴소리(4소절씩)로 나뉘어 전형적인 2부가요의 형식을 드러내고있다.
18. 보성 서편제
◎보성/서편제/당당한 산세는 “소리꾼 고향”/칠순 촌로들까지 춘향가·흥부가 완창 서편제 소리의 원류는 어디에서 만날수 있을까. 기록에 의하면 섬진강 서쪽의 광주, 나주, 보성, 장흥등지가 서편제의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팝과 레게음악이 판치는 요즘 세상에 판소리가 땅, 사람과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을 찾는다는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지레 들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반갑게도 전남 보성군에 보통사람들로 구성된 보성소리 보존회가 있다고 한다. 판소리는 민요와 달리 전문가의 노래여서 자연부락의 주민들이 직접 소리를 하고 보존하는 모임까지 운영한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닐수없다. 보성만을 바라보고 남쪽 땅끝에 자리잡은 보성은 짙고 푸른 바다, 푸근하면서도 당당한 산세가 예인의 산실임을 예고한다. 유림의 전통을 굳세게 지키고 있는 이곳의 5월은 「보성 녹차」란 명품을 생산하는 고장답게 차향기가 그윽하다. 그중에서도 회천면은 서편제의 시조로 대원군으로부터 총애받던 박유전이 대원군이 세력을 잃자 빈털터리로 낙향해 뼈를 묻은 곳이며 그의 소리를 이어받은 정응민, 정권진이 이나라 제일의 소리꾼들을 키워낸 곳이기도 하다. ○국창급 10여명 배출 얼핏 기억나는 인물들만 해도 임방울, 박기채, 박춘성, 김연수, 조상현, 성창순, 성우향등 국창급만해도 10여명에다가 지금 한창 활약하고있는 중견 소리꾼들을 수백명이나 배출해냈다. 정씨 부자는 소리를 가르친 한편으로 농사도 지었다. 떠돌이 생활을 했던 다른 명창들과는 다르게 정씨 부자가 안정된 기반을 이뤄 제자들을 가르쳤다는것은 판소리의 맥이 이어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권진의 세아들도 모두 국악계에 몸담고있다. 회천씨가 전북대 국악과, 회완씨가 전남도립 국악단, 회석씨가 국립국악원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은 보성소리의 맥을 잇는데도 열성이다. 정회천교수는 이번 여름부터 회천면에서 판소리캠프를 열 계획을 갖고있기도 하다. 정씨 일가는 애초에는 나주에서 살았으나 정응민의 큰아버지 정재근이 박유전과 가까이 지내면서 함께 보성으로 옮겨왔다. 정응민은 큰아버지에게서배워 동편제, 김세종판의 소리를 완성시켰다. 보성소리는 박유전―정재근―정응민으로 이어지는 강산제와 김세종판 춘향가가 공존·융합된 소리이다. 마침 보성군에서는 2억원 정도를 들여 정씨의 주택이 있던 자리에 보성소리 기념관을 세우는등 서편제 고향으로서의 명예를 보전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비포장도로를 5분가량 달려 회천면 영천리 도강마을에 이르자 북모양을 한 비석에 「송계 정응민선생 예적비」라고 새긴 것이 보인다. 그 바로 위 언덕에는 송계초당이라 이름붙인 작은 초가가 나오는데 이곳은 정응민―권진선생의 집터이니 말하자면 보성소리의 유적지이다. ○40여회원 매달 모임 보성소리에 관련된 일이라면 농번기를 가리지않고 모여드는 보성소리 연구회의 열성회원들이 초당앞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다. 평균연령이 75세인 회원 40여명이 매월 1회씩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는 농사짓느라고 바빴으니 정선생에게 직접 배울 기회는 없었지. 그래도 문하생들이 집집마다 하나씩은 기숙하고 있었으니 귀동냥으로 배웠어』. 일부 열성적이었던 사람들은 자기네끼리 모여서 따로 공부를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소리 내력이 어중간한 사람이 여기 와서 뻐기다가는 혼나기 십상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촌로가 「춘향가」와 「흥부가」를 완창하는 데에는 질릴법도 하다. 노래 한소절 듣겠다고 청하자 박삼준옹(76)이 장회장의 북장단에 맞춰 『이산 저산 꽃이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내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하고 소리를 하는데 예사 목청이 아니다. 최근 몹시 앓았기때문에 자신이 없다는 겸사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 ○장단에 밑동팬 노송 이왕에 운을 떼자 박옹은 『이럴줄 알았으면 목좀 축이고 올걸 그랬다』며 신명을 낸다. 『어히 좋다, 얼쑤』 하고 추임새를 매기던 동네 사람들이 『목이 나시네, 목이 나셔』하고 칭찬하자 창자는 『북이 좋은께 소리가 술술나와. 확실히 일고수라는 말이 맞어』하면서 또 한번 겸손이다. 박옹이 춘향이가 이도령 맞이하는 장면을 끝으로 소리를 끝내자 다음번엔 위계호옹(81), 이런식으로 자연스럽게 순서가 돌아간다. 『정응민선생은 소리뿐 아니라 일거일동까지 가르친 참 스승이셨어』 『소리 배우던 여자들이 수십명씩 논가에 서서 소리를 하는것이 얼마나 듣기 좋았던지』 『백년도 더 된 소나무를 두드리며 연습을 하는 바람에 밑동이 푹 패어버렸지』등등 스승과 명창에 얽힌 이야기거리는 그칠줄을 모른다. 이 모임의 회장인 장장수씨(58)는 『우리들은 모두 보성소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우리고장을 품위있는 문화관광지로 가꾸고 싶다』고 포부를 나타냈다. 전통문화가 뿌리째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소리를 지키겠다는 씩씩한 목소리는 든든하기만 하다.【전남 보성=한혜진기자】 ◎유래/섬진강 서쪽유파… 화려한 계면조 주조 동편제와 서편제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역별로 분류된 소리의 유파이다. 섬진강 동쪽의 운봉, 구례, 순창, 흥덕등지에서는 송흥녹의 법제를 표준삼아 동편제가 생겼으며 섬진강 서쪽의 광주, 나주, 보성, 장흥등지에서는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삼아 서편제를 완성했다. 서편제는맑고 높고 아름다우며 애절하고 감상적인 계면조를 주조로 했기때문에 연미부화하고 구절의 끝이 좀 지르르 끌리는 맛이 있다. 반면에 우조를 주조로 한 동편은 호령조가 많고 발성이 진중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 창극사」를 쓴 정노식은 『동편이 담담한 채소의 맛이라면 서편은 진진한 육미이고 동이 천봉에 달뜨는 격이라면 서는 만수에 꽃이 만발한 격』이라고 절묘하게 표현한바 있다. 동편제와 서편제외에도 중고제가 있는데 이는 염계달, 김성옥의 법제를 계승해 경기, 충청지역에서 유행했다. 강산제는 서편제의 원조인 박유전의 고향 강산리의 음을 딴 소리바디로 박유전의 제자인 정응민정권진으로 전해졌다가 김세종판 춘향가와 합쳐져 보성소리의 바탕이 되었다. 보성소리는 장단에 따라 운용의 묘를 보이는것이 특징이다. 때로는 아정하고 웅휘한 창법으로, 때로는 남자가 느껴 우는듯한 처절한 창법으로 불려진다. 성음을 분명히 하는것이 특징이다. 국악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lamjcyong&logNo=100006990417&beginTime=0&jumpingVid=&from=search&redirect=Log&widgetTypeCall=tr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