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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회 이현래 목사의 구속의 복음
답을 찾아서
2023. 3. 5
우수에 대동강물이 녹고 경칩이면 개구리가 입이 떨어진다고 한다. 우리 형제들도 다 입이 떨어져서 복음 전하는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에 나가면 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벨로 가자는 것이다. “바벨로 가자. 그래서 우리 이름을 빛내자. 하늘에 닿게 하자.” 이것이 세상이 나가는 길이다.
그런데 교회는 지금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답이 없다. 종교개혁 당시에 칼빈은 길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완전한 타락, 그리고 완전한 구원, 이 세 가지를 가지고 그의 명석한 두뇌로 성경을 있는 데까지 다 찾아서 길을 만들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고 뜻이니까 몰라도 무조건 믿으라.”고 했다. 그래서 믿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믿음으로 애를 썼는데 잘 안된다.
그래서 “장벽이 높다. 너무 고루하다.” 이런 비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누가 했는가? 20세기에 바르트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런 구호를 걸고 “인간의 이성이 있는데 이성을 가지고 검토해 보자. 그래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못받아들일 것은 못받아들인다. 무조건 다 받아들일 수 없다.” 하고 나섰다. 그래서 칼빈이 제시한 원론을 하나 하나 이성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람은 원래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런데 자유주의에 있다 보니까 거기서는 너무 계시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면 안되겠다. 계시도 살리고 인간의 이성도 살려야겠다.’고 다시 돌아왔다. 그래서 신정통주의라고 한다. 자유주의도 아니고 보수주의도 아닌 중간 상태다. 그가 재단할 수 있는 것은 다 재단해 버리고 나니까 알맹이가 없다. 그래서 답이 없어져 버렸다. 여러분이 잘 들어보시면 알 것이다. 듣기는 쉬운데 답이 없다.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도 없고 어떻게 되어 있다는 것도 없다.
그래서 그의 시대는 가고 이어서 몰트만이라는 사람이 나왔다.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으로 나도 30대에 그에 대해서 처음 들었다. 그분을 소개한 사람은 서남동 교수라고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분이 몰트만을 소개하면서 희망의 신학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멸망에 이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 않겠느냐고 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는 답을 제시하려고 나온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인터넷에 소개된 것을 알아보니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서 3년을 옥고를 치르고 나왔는데 거기서 얻은 경험은 절망하는 사람은 다 죽었고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받은 중요한 교훈이었다고 한다. 19세기에 니이체라는 유명한 사람이 나와서 신은 죽었다고 했다. 어떤 신이 죽었다는 것인가? 기독교가 말하는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그렇지만 우리는 희망을 갖자. 그럴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갖자.” 이것이 몰트만이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애매모호하다. 우리가 희망을 갖느냐 못 갖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그래. 희망을 갖자.’고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막연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 토론회 때 직접 참여한 적이 있었다. 서남동 교수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때 말하는 것을 들으니 하나님이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알 수 없기에 질문서에 “교수님은 하나님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질문했다. 다른 질문에는 다 대답을 해 주었는데 내 질문에는 대답을 안했다. 그런 경험이 30대 초반에 있었는데 그때는 몰트만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몰랐다.
몰트만은 바르트라는 대 신학자를 뒤이어 나온 사람이다. 바르트 신학에서 답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그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여러분은 많이 들었을 것이다. 듣기는 좋은데 답이 없다.
나는 답을 제시했는데 아니라고 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내가 유일한 복음이라고 하니까 ‘유일한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고 최종적인 복음이라고 하니까 ‘최종적인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니까 답을 제시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답을 제시해 보라고 했더니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답이 없다. 그런데도 아니라고만 한다. 답답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이것이 분명히 답인데 답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나보고 “장벽을 높이 쌓는다. 어렵게 한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 사람도 어느 생물학자에게 물었더니 생명체는 다 자기 방어를 위한 벽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 몸의 세포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벽이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주머니가 터지면 세포도 터져버린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를 보존하는 보호벽을 갖고 있다.
내가 말한 이 생명의 복음도 그러하다. 이 생명을 지키기 위한 벽이 있어야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을 벽이라고 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벽이 있는 셈이다. 어떤 것도 벽이 없는 것은 없다. 혈관으로 피가 지나간다. 혈관이 없으면 피가 못흐른다.
혈관이라는 벽이 없어지면 출혈이 생긴다. 수술한 후에 외과 의사들이 제일 애를 먹는 것이 그것이라고 한다. 겉에서가 아니라 속에서 피가 안멎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또 수술해도 마찬가지니까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한다. 박기민 형제도 그렇게 죽었다. 속에서 출혈이 있으니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혈관도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벽이다.
뼈를 보면 바깥에 막이 있다. 그것을 간막이라고 한다는데 그 막에 의해서 몸에 있는 영양분이 뼈속으로 들어가고 뼈에서 만들어진 피가 밖으로 나와서 몸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는가. 그 벽 하나가 그런 작용을 하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서 뼈가 부러져도 그 벽만 있으면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벽이 깨져버리면 아무리 경하게 다쳤어도 다시 접합이 안된다고 한다. 벽이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무릎 수술을 하면 간막 안에 있는 뼈를 다 잘라내 버린다. 그러면 껍데기만 남는다. 그 안에 인공관절을 넣어준다. 그래도 껍데기가 있으니까 살아가는 것이다.
벽 없는 생명은 없다. 생명의 벽을 벽으로 느끼면 벽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복음이 가장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우리의 운명인데 그것을 벽이라고 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이 복음이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말을 하려고 한다. 이렇게만 살 것이 아니라 답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더군다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른다면 벽이 없게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사람이 예수를 만나는 자리에 따라서 일생을 살게 된다. 여러분이 잘 아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병을 고치는 데서 예수를 만났다. 평생 그의 사역은 병 고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에 파킨슨 병에 걸렸다. 그것을 못고치고 죽었다. 꼭 그분만 그런 것이 아니다. 평생 신유의 사역을 했는데 막상 자기 병은 못고친 사람이 많다. 단위 교회로 70만 신자를 가진 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밖에 없다. 기네스 북에도 올랐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를 만난 자리가 그 자리뿐이다. 그래서 젊어서나 죽을 때나 똑같았다. 파킨슨 병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 마지막 설교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내용은 똑같았다. 병을 고치는 데서 예수를 만나면 평생 그 자리에 산다. 남을 위로하는 데서 예수를 만나서 그 사람은 평생 위로하는 사역을 했다. 같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같이 뒹굴고 살았다.
일본에 하천풍운이라는 유명한 분은 성자라고 불린 분이다. 나병환자, 결핵환자와 같이 살았다. 자기도 병에 걸리는데도 같이 살았다. 그래서 일본에서 성자라고 불렸다. 그가 인도에 가서 간디를 만났을 때 간디가 “지금 대동아전쟁이 성전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니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간디는 더 이상 말하지 않으려고 돌아앉았다고 한다. “대동아공영권을 만들어서 같이 살자.”는 명분을 걸고 중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 대동아전쟁이다. 그래서 동남아 일대를 다 차지했다. 일본 사람이 볼 때는 거룩한 전쟁이라고 보았는데 인도의 간디는 그 앞에서 돌아앉았다고 한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이러하다. 두 분 다 이성이 있는 사람이 그러했던 것이다. 예수 만난 자리에서도 그대로 산다. 만난 자리에서 더 이상 가지 못한다.
나는 예수를 어떻게 만났는가.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다.” 하는 그 자리에서 만났다.
처녀가 어떻게 아들을 낳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모른다. 그런데 이사야서를 인용한 말씀이라서 그대로 가야 했다. 거기서 나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것을 믿지 않을 것인지 믿을 것인가?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나는 믿는다.”고 결단을 내리고 들어갔던 것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도 그러하다.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되겠는가. 물이 포도주가 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여기서 또 다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 문제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나는 무엇을 취할 것인가?’ 결단해야 했다. 이것을 실존적 결단이라고 한다고 한다. 나는 몰랐는데 뒤에 알고 보니 이것이 실존적 결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복음서에서 예수를 보고 모르는 점이 너무 많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만을 결단해서 내가 먹고 편하고 좋은 것을 교회에 공급했다. 내가 편하고 좋으니 받아먹는 사람도 좋았다. 내가 일단 먹고 소화해서 좋은 것을 내놓았으니까 우리 교회처럼 자유롭고 편안한 교회가 없었다. 나는 어려운 것을 못한다. 그래서 자연히 쉬운 것을 찾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여러분에게 전도를 하라고 하면 못해도 “우리 교회에 와 보라. 우리 교회처럼 좋은 데가 없다.” 이 말은 여러분이 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러했다. 어떤 분이 다락방 쪽에서 와서 보니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한참 있다 보니까 뭐하는 데인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 된다고 나에게 왔기에 “참 잘왔다. 정말 잘왔다. 우리 교회처럼 좋은 교회가 없다. 그러니까 말씀을 깊이 들어라. 그러면 그 안에 답이 다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 동안에 쌓인 신뢰가 있어서 그렇게 해 보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여러분이 간증을 들어서 아실 테지만 이용순 자매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답이 못된다. 뭔가 내가 길을 제시했어야 하는데 길을 애매하게 했다. 이런 식이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러면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다가 사람답게 죽으면 되는 것 아니냐.”라고 대답했다. 말이 되기는 하는데 뭔가 확실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나도 그것이 좋고 만족하니까 그렇게 했다. 현재 교회생활도 만족하고 내 사역에 대해서도 만족했다.
그런데 밖에서 외풍이 불어왔다. 어떤 외풍이냐 하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실체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는데 뒤로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아무리 어떤 사람을 잘 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다른 데 소개하려고 하면 그 사람과 똑같은 그림을 그려내기 어렵다. 그렇지 않겠는가. 다 같이 금강산을 보고 왔어도 이야기하는 것이 다 다르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금강산을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이것은 신화다.” 하는 외풍이 불어왔다. 예수도 그 시대 사람들이 신화적인 시대 사람들이었으니까 신화적인 방법으로 예수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신화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사실이 그렇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는데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나왔다니 이런 역사적인 사실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당시에는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었다. 그래서 예수도 그렇게 신화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갓난아기가 갑자기 열이 나면, 그때 사람들은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모르니까 아기를 점지해 주는 삼시랑이 노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못들어오게 금줄을 쳤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 알아보고 안들어왔다. 이것이 신화적인 시대의 사람들이 사건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예수 시대에도 그러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보고 들은 ”예수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말이 다 신화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서 10%는 알고 90%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그 10%를 내가 실존적인 결단을 해서 양식으로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몰랐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몰라도 할 수 없지. 내가 어떻게 예수님 같은 분을 다 알 수 있는가.’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 모르는 부분이 어딘가 하면 신화적인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신약성서만 평생 연구했던 불트만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연구한 것이 신화라면 안되니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껍데기를 벗기기 시작했다. 역사비평을 통해서 벗겨보니까 딱 어느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덮어두고 예수를 실존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것만은 신화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도 신화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의 실체에서는 밝히지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거기서 ‘아, 역사적인 예수는 십자가에서 알아야겠구나.’라는 희망을 가졌다. 왜냐하면 다른 데서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알려고 구체적으로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검토해 보니까 다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가 안 것이 아니었다. 역사성이 애매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역사라는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보니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분노를 사서 죽은 것이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 누군가. “네가 있는 곳에서 신을 벗으라.” 하신 분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 길도 없고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광야에서 40년을 배회하면서 기어코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신 그 하나님 아닌가.
약속하신 대로 왕국을 세우게 하셨다. 그러나 그 왕국은 얼마 안되어 망했다. 모세는 기원전 1500경 사람이고 이스라엘이 건국된 해는 500년 후였다. 열두 지파 중 열 지파가 이스라엘 왕국이고 두 지파 반이 유다 왕국이었는데 열 지파는 기원전 700년 경에 앗수르에게 망해서 종적을 알 수 없도록 흩어져 버렸고, 두 지파 반이 남아있다가 기원전 586년 로마에게 정복당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게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되겠는가.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왕국 멸망 직후에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겠다. 그렇게 되는 날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다 하나님을 알기에 아무도 하나님을 알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보편화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선지자나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보편화되어 아무나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로 아무나 다 아는 때가 언제 올까? 지금 우리 기독교 이천 년사를 보면 갈수록 막막해진다. 갈수록 어두워지고 희망이 없어진다. 그래서 희망을 갖자는 신학까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특별한 예를 보자.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는 어린양의 통치를 의미한다. 그 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길가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시절을 좇아 다달이 열매를 맺는다. 그 결과 어둠이 없어지고 슬픔이나 애곡하는 것이 없어지고 인간 세상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요소가 없어진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마지막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고 마쳤다. 완결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날이 과연 올 것인가? 아마 이 말을 진짜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것은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수직적으로 갑자기 내려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어쩌면 우리와 꼭 같은 예수에게 답이 있다.
예수님이 죽은 것 같이 나도 죽는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셨어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여기서 ‘야, 애매하고 모르던 예수가 알만한 예수가 되었네. 알만하네.’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만났다고 교회 앞에 내놓았던 것이다. “나는 예수를 만났다. 90% 모르던 예수를 이제 여기서 만났다.”고 외쳤다. 내가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래서 외쳤는데 아무도 아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 참 이상하네. 이렇게 쉽게 예수를 만나는데 왜 아무도 아멘을 안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찾고 또 찾고, 이유를 찾고 또 찾았다. 그랬더니 나는 단순히 예수를 만났다는 것만으로 좋아했는데 실제로는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 예수를 만나고 싶어 했으나 막상 예수의 실체를 보고 나면 가장 싫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잘 되어 보려고 믿는 것이지 그렇게 폭싹 망하려고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완전히 갈 데 없이 망했으니 끝판 아닌가.
그래도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면 명분이 선다. “다음 세상을 약속하셨다.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할 것이다.”라고 하면 여유가 있다. 충분히 여유가 남아있는 예수를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 보니 끝났다. “It's finished.” 운명하셨다는 말은 끝났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끝난 예수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나의 운명이고 여러분의 운명이고 우리 모두의 운명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지어놓으셨다. 예수를 그렇게 보이신 것은 예수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개는 스스로 ‘나는 왜 개인가. 왜 개로 태어났는가.’라고 할 수 없다. 고치고 싶어도 못고친다.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인간의 운명을 우리 인간이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왜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심히 좋다 하셨을까? 그 이유를 알아내야 되지 않겠는가.
다리가 하나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 되지 다리 하나가 없다고 죽어버리겠는가. 스티븐 호킹 박사는 온몸이 불구다. 그런데도 기계장치를 해서까지 살다가 떠났다. 우리는 그보다 낫지 않은가. 그러니 하여간 살아봐야 한다. 개로 태어났으면 개로, 소로 태어났으면 소로 살아야 한다. 좋든 싫든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운명마다 독특한 특성이 있다.
흙이 그러하다. 어떻게 보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흙이다. 농부를 만나지 않으면 흙은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농부를 만나면 신기한 능력이 나타난다. 흙에 씨를 심으면 열매가 된다. 우리가 평범하게 여겨서 그렇지 사실은 이보다 놀라운 일이 없다. 어떻게 흙에서 열매가 나오는가. 어떻게 흙이 열매를 만들어 내는가. 현대과학으로도 아직 열매를 만들어 낼 과학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눈도 코도 없는 흙에 씨를 심으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만들어 내는가!
하나님이 이렇게 해 놓으신 것은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다면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주인을 만나기만 하면 신이 될 수도 있고, 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실 때 “가라. 내가 너를 신이 되게 하겠다.” 하셨다. 모세는 신이 되어서 애굽에 간 것이다. 그래서 바로가 이백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준 것이지 그냥 내주었겠는가.
길이 없는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끄셨고,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셨으며, 마실 물이 없는 광야에서 생수로 마시게 하셨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을 모세가 했다. 신으로서 한 것이다.
그러나 죽을 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 산에서 홀로 죽었다고 한다. 죽었는데 그의 시체가 없다는 것이다. 왜 시체가 없을까? 하나님이었으니까 더 이상 땅이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같이 되었는데 더 이상 땅에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모세의 시체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우리와 같이 사셨다. 그러나 무덤에서 시체가 없어졌다고 한다. 하나님으로 산 사람은 다 시체가 없다. 엘리야가 그러하고 에녹이 그러하다. 다 땅에 없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고 에녹은 삼백 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더 이상 땅에 있지 않았다고 했다.
하나님과 똑같이 산 사람은 땅에 없다. 땅에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여한이 없는 것이다.
내가 제시한 복음은 우리 인류의 운명이다. 내가 뭔가를 새로 만들어서, 교리를 만들어서 세운 것이 아니다. 누구나 보면 자기인 줄 알 수 있다. 남이 아니다.
이것을 모른 체하고 반대하는 사람도 이 사람을 보면 그것이 자기라고 알게 된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예수를 만남과 동시에 나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나도 몰랐던 나, 잃어버렸던 나, 진짜 나를 여기서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그러니까 만나고 보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내가 예수와 하나라니 놀라운 일이다.
요즘 MZ세대가 좋다고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을 만났다고 저렇게 좋아하는 것이다. MZ세대는 밀레니얼 제로라고 역사도, 세대도 없다. 성경도 잘 모른다. 교회생활도 잘 못했다. 우리 교회같이 자유로운 교회에서도 끼일 자리가 없어서 말 한 마디도 못하고 살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교회생활이 편하고 자유롭고 좋다고 하는데 그들은 설 자리가 없으니까 불편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전혀 다른 것을 만났다. 살판을 만난 것이다. 살판이 난 것이다.
이것이 양자역학쪽으로 확산될 날이 곧 올 것이다. 기택이가 말하는데 희망이 보였다. 순간이동이라고 하고 즉시복음이라고 한다. “즉시복음, 순간 이동”, 이것은 구자길 형제가 한 말이다. 나는 이런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구자길 형제가 이것을 말했다. 즉시복음이라고 한다. 들으면 즉시 되는 것을 구자길 형제가 본 것이다. 그래서 청출어람이라 했다.
쪽빛이라는 것이 아주 묘한 파란색이다. 쪽풀은 그렇게 파랗지 않은데 쪽풀을 짜서 즙을 내서 염색을 하면 쪽빛이 된다.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이다. 빙생위수 이한어수(氷水爲之 而寒於水)라는 말도 있다. 얼음이 물에서 나왔는데 물보다 차다는 뜻이다. 스승보다 제자가 나으면 청출어람이라고 하고 아버지보다 아들이 나으면 빙생위수라고 한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것이 바로 그 말이다.
갈수록 더 밝아지고 갈수록 더 쉽다. 요즘 젊은이들은 한두 마디에 팽팽 돌아버린다. 너무나 쉬워져 버렸다. 아는 것도 없는 젊은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렇게 되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신기하다. 누가 이것을 막겠는가.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막으려고 해도 안된다. 왜냐하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지식은 백번 가지고 와도 소용없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답이 있어야 한다. 바르트는 놀라운 신학자다. 얼마나 놀라운 사람이면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 이성으로 잘라냈겠는가. 그만큼 지식이 풍부하니까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답이 안된다.
그래도 가봐야 된다고 한다. 유일하다고 하면 “유일한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가봐야 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갈 것인지 모른다. 바르트 이후 벌써 얼마가 지났는가. 20세기에 나타났으니까 지금 21세기가 가고 있다.
답이 있는 세계가 있다. 답이 있는 세계로 여러분을 초청한다.
답이 없는 세계를 가지고 잘하니 못하니 할 일이 아니다. 답이 없는 세계에서 “내가 낫다. 네가 낫다.”고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유명한 신학자나 유명하지 않은 나나 답이 없으면 똑같지 않은가.
수학을 하는 사람들이 쉽게 나섰다. 나는 제일 어려운 것이 수학인데 수학을 한 사람들이 신기하게 빨리 알아들었다. 지금 아틀란타에는 서현배 자매가 가 있다. 어떻게 전쟁을 하고 있는 모르지만 서현배 자매는 수학 천재다. 사대만 나왔는데도 논문이 동경대에서 통과되었다고 한다. 거기는 일본에서 석학들만 모인 곳이다. 그만큼 수학에 천재다. 그래서인지 수학으로 알아들으니 쉬운 것 같다. 굉장히 조심성도 많고 소심한 자매다. 그래서 서울 교회가 초창기에는 조심조심하다가 좀 늦었다. 그런데 수학으로 알게 되니까 금방 달라졌다. 자기가 옮겨져서 지금은 전사가 되었다.
하나님의 승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확보되었다. 알고 보면 이것은 나와 관계없는 것이다. 나는 문을 열었을뿐이지 내가 없어도 상관없다.
내가 40년 동안 대구교회에서 한 말은 아무도 나와 똑같이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먹고 소화한 것이니까 내가 없으면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이다. 엄마들이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그 사람의 체질에 따라서 젖은 다 다르다고 한다. 남의 젖과 똑같은 젖을 내 몸에서 만들어 낼 수 없다.
내가 40여 년간 대구교회에 내놓은 음식은 내 젖인 셈이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못한다. 같은 내용을 말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다르게 말하게 된다. 그러니 시간이 흐르면 뭐가 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이 하는 말이 “이 목사는 시간이 흐른 다음에 대구교회에 신화적인 존재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는데 생각해 보니 예리하게 잘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옛날에 “내가 죽은 후에 박물관에 살기를 원치 않는다. 형제들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막막한 말이었다. 이제 보니 나는 대구교회 박물관 소장품이 될뻔했다. 영 다른 입장과 다른 교회가 되어 있는데 나는 거기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화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을 것 아닌가.
대영 박물관에는 삼천 년 된 미라가 지금도 그대로 미라로 있다. 박물관에 가서 보니 사막에서 모래속에 묻혀서 죽은 미라가 그대로 쭈그리고 있었다. 몇천 년이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죽은 후에 미라가 되면 되겠는가.
나나 여러분이나 죽은 후에도 다른 형제들 속에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여러분이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다 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예수의 죽으심이 100%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그가 만유의 주가 될 때 그의 죽으심은 100% 효과를 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죽으심은 너무 값없이 끝나게 된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일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제일 좋아하실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살려낸 사람들이다. 자기 죽음의 가치를 우리가 100% 살려내는 것 아닌가!
누가 여러분의 가치를 100% 올려준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나는 이런 사람인데 남들이 왜 안알아주나.’ 하던 사람들이 예수 앞에 오면 150% 가치가 높아진다. 누구든지 이런 생각이 있거든 예수 앞에 오면 된다. ‘사람들이 나를 왜 몰라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세상 앞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 앞에 오면 150%, 200% 인정받게 된다. 예수와 함께 인정받게 된다.
베드로가 전한 부활은 지금 우리가 모른다. 앞으로 어느 날 모든 사람이 일어날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르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예,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나는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아, 이 마지막 끝난 예수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 아니겠는가!
그분이 다시 사는 것은 우리가 사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 예수가 새로 산 것이 아닌가. 우리가 “나도 사람이고 너도 사람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된 것이 예수가 다시 살아난 것 아닌가. 예수가 살아날 때 나도 같이 살아난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사람이 나고 내가 그 사람이면, 그 사람 속에 내가 있고 내가 그 사람 속에 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신 것처럼 너무나 신기한 세계가 아닌가. 나는 자다가도 깨서 이 생각을 하면 너무나 신기하다.
바벨론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부름받았다. 무엇 때문에 부름받았을까? 마지막 답이 이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안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뭐하려고 부르셨는지 어찌 알겠는가. 한철이를 왜 부르셨겠는가. 예수 안에 오니까 한철이가 있을 자리가 있지 않은가. 한철이가 있을 자리는 예수 안에 있다. 딴 데는 있을 자리가 없다. 예수 안에만 한철이가 있을 자리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다. 나는 죽었지만 예수는 살았다. 나는 그 안에 있다. 그러므로 나도 부활이요 생명이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면 한철이도 부활이요 생명이다. 오늘, 지금, 여기 살아있다.
MZ세대는 오늘 지금뿐이라고 한다. 내일은 어찌될지 모른다. 그런데도 만나면 떠날 줄 모르고 새벽까지 잠잘 줄 모른다. 무슨 할말이 그렇게 많겠는가. 놀랍다.
우리 은혜는 생전 딴말을 안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도 빈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신기하다. ‘야, 사람이 저렇게 바뀔 수 있는가!’ 너무나 신기하다. 완전히 딴 사람이다. 옛날 그 사람이 아니다. 내 딸인데 내 딸이 아닌 것 같다. 내 딸이 아니라 하나님 딸이다. 하나님 딸이고 예수 동생이다. 나와 관계가 없다. 그런데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우리 진실이는 나와 성질이 아주 안맞는다. 나와 반대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하나다. 성질도 상관없다. 말을 하면 끝이 없어서 내가 좀 짧게 하라고 한다.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하도 많이 해서 말이 끝날 줄 모른다. 신기한 세계다.
모든 사람이 안타깝다. 장벽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더 쉽게 할 수 없겠나 해서 실체라는 말까지 한 것이다. “이것이 실체다. 이것이 예수의 실체다.” 이것은 나와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보편적이 되는 것이다.
나는 죽어도 이 예수는 그냥 있지 않은가! 내가 먹고 소화한 예수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계신 예수, 하나님께서 그냥 거기 놔둔 예수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신 자리에 놓아 두셨다.
옛날에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신 질문에 “야, 너는 사람 아니냐. 사람”이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라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다.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시고 심히 좋다 하신 이 사람이다. 우리는 제일 싫어하지만 하나님은 제일 좋다 하신 사람이다.
이 자리에 있으면 그때는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려고 찾아오신다.
아담도 찾아가셨다. 그런데 아담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다. 얼굴은 못내밀고 나무만 내놓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무로, 자기의 지식으로, 자기의 경험으로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불행한 일이다. 그냥 내가 있는 대로 내놓아도 되는데 그것이 안되니까 그렇게 숨고 있는 것이다.
이 안에 오면 너무나 넓고 자유롭고 평등하다. 이것이 구속이다. 구속 안에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구속은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이 구속이다.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구속함이 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하였다. 그 말이 이 말이고 이 말이 그 말이다. 성경 말씀이 얼마나 명백한지 아니라 함이 하나도 없다. 예수 안에 오면 아니라 함이 없다.
사람들에게 가면 다 아니라고 한다. 제일 싫어한다. “아닙니다. 하나님, 그것은 아닙니다.”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 안에는 아니라 함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이 얼마가 되었든 예수 안에서 다 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우리도 아멘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간단하다. 복잡한 것은 필요없다. 아주 간단하다. 이런 세계로 여러분을 될 수 있는 대로 편하게 인도하고 싶은 것이 내 마지막 소망이다.
내가 밤낮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더 쉽게 할 수 없겠는가.’ 이것이 내 평생 소원이다. 내 평생 소원은 이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