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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의 실현과 한국적 정체성의 탐구
-사진작가 오상조 論
강 경 호
1.
사진작가 오상조는 전통적인 소재에 관심이 많은 작가이다. 그동안 그가 가진 사진전을 살펴보면 쉽게 파악이 된다. 이를테면 <향토유물유적 사진전>(1983. 1984), <청학동 사진전>(1990), <한국의 석상전>(1994), <운주사, 청학동 사람들 사진전>(1998), <동구밖 당산나무 사진전>(2000), 그동안 가진 9번의 사진전 주제를 보면 그가 특히 전통적인 것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의 작품은 사진의 본질인 기록성이라는 데 생각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가 다룬 수많은 소재들-운주사 석탑, 석불, 초가, 옛풍속, 토템이나 애니미즘, 장승, 당산나무, 성황당, 비포장된 들길이나 산길…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삶의 중심에서 멀어져있거나 하나씩 사라져가고 있는 것들로 시간이 지날수록 귀해지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그가 단지 기록적인 측면에서 카메라와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그의 생각이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끊임없이 낳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예술은 작가의 내면의 모습을 시각화시킨 결과물로 작가의 정신적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사진작가 오상조의 작품의 특성은 다양하게 말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오상조의 사진세계는 우선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뿐만아니라 과거의 우리의 역사와 삶을 통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신으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 퇴색해가는 전통적 가치를 사진을 통해 말하고 있다.
오상조는 1952년 전라북도 장수 출생이다. 중앙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한 이래 1984년부터 광주대학교에서 근 20년 가까이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3권의 사진집을 출간하였다. 운주사(1998), 청학동 사람들(1998), 동구밖 당산나무(2000) 등이 그것인데 모두 흑백사진이다. 처음부터 흑백사진으로 작품을 생산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앞에서 말한 3권의 사진집 출간 순서대로 그의 작품세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러나 작품집 출간 순서가 작품생산의 순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출판을 위해 주제별로 정리했을 뿐 아마 혼재의 양상으로 작품을 생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편의상 주제별로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오상조의 사진집 운주사는 쇠락한 폐허의 모습을 보여준다. 운주사는 고려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절로, 여러 가지 분분한 창건설화처럼 여전히 베일에 싸여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운주사가 여타의 사찰과는 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것은 독특한 석탑과 와불, 그리고 석불상의 모습들이다. 특히 석불상의 모습은 다른 사찰에서 보는 그 흔한 부처의 모습이 아니라 갑수을수의 모습을 한 민초들의 모습이라는 데 있다. 서투른 뎃상 작품을 보듯 어색한 균형미가 불상을 더욱 민초들의 모습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다. 또한 오랜 세월과 풍화 속에 마모된 얼굴과 사지가 아무렇게 방치되어 온 까닭에 귀족적이기보다는 촌티가 흐른다. 어쩌면 보는 이에게 좀더 친근감을 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운주사는 정화되어 절의 격식을 갖추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폐사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사찰을 오상조는 그토록 오랫동안 쫓아다니며 무엇을 찾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비단 운주사뿐만 아니라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에도 적용된다. 오래된 시간과 공간과 그 흔적들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사물과의 내밀한 만남으로, 그 만남은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한국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제3공화국에 접어들면서 경제개발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왔다. ‘한강의 기적’으로 일컫는 경제적 성장에 우리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것을 상실하였다. 즉 빵을 얻은 대신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우리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당했다. 특히 새마을운동을 통해 전통의례가 단절되고, 전통적인 가치규범을 간직한 농촌이 붕괴되어 우리가 지녀왔던 미덕을 시나브로 버리거나 잃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 오상조는 우리 것에 대한 강한 애착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우리가 다시금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더 빠른 속도로 전통적인 한국의 문화를 해체시키고 있는 미국이나 서구 그리고 일본의 문화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이었음은 당연한 말이다. 그래서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이 우리와 함께 오랫동안 함께 해 우리의 일부가 된 불교문화에 대한 예술적 접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그의 종교적인(불교적인) 특별한 취향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문화유산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삶의 숨결이 배어있는 것임에 오상조는 시간이 갈수록 유실되고 사라져 가는 폐사지를 찾아다니며 선조들의 체취가 묻은 석탑이며 석불상을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촬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칼라사진보다 흑백사진을 주로 선호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결과 그의 사진은 오래된 시간과 공간의 정서를 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화려하고 시끄러운 느낌보다는 담백하고 화석화 된 정지된 시간을 연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지적은 운주사에 수록된 모든 작품들도 해당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5층석탑 쪽에서 바라다본 운주사는 전경에 소나무를 배치해 사진 구조의 단조로움을 피하면서 5층석탑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때 5층석탑은 마치 화석처럼 고려시대의 정지된 시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9층 석탑 하단과 석불들 역시 풍화된 바위 아래로 각기 모양과 크기가 다른 불상들을 배치한 것은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을 포착한 느낌을 전달해 준다. 이런 예는 좌측상단에 석탑 몇 기와 오른쪽에 바위 위에 아무렇게 버려진 석탑의 어느 한 부분일 것으로 생각되는 석조물의 구도를 하고 있는 운주사 경내와 그리고 돌부처가 자연스럽게 석벽에 기대있는 여러 작품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부서진 석조물들을 통해 오상조는 단순히 버려진 문화유산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과거의 어느 순간을 포착해 영원성 추구는 물론 오래 전의 우리의 모습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 속의 풍경을 살펴보면 거의 숲 속이나 구릉 등 자연과 함께 석탑이나 석불상이 어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가 그것을 의식하였든 안했든 자연의 모습을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음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상조는 ‘운주사’에 관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결코 운주사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대웅전이 작품의 주제가 된 사진을 단 한 작품도 없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는데, 본래 운주사는 오래 전에 대웅전이 유실되었다가 새로 지어진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건물이다. 대웅전의 모습이 과거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언정 현대에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선조들의 숨결이 배어있지 않은 까닭으로 대웅전을 외면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운주사 작품집에서 주목되는 것은 ‘길’에 대한 그의 관심이다. 아스팔트로 상징되는 현대의 길이 아니라 황토와 자갈이 구르는 산길로, 때로 숲 속으로 사라지고 때로 구불구불하게 풀섶으로 기어들고 있는 것이 그의 사진 속에서 만나는 길이다. 7층 석탑이라고 제목이 붙은 작품은 오른쪽에 7층 석탑이 배치되어 있지만 실은 오른쪽 하단에서 왼쪽 중반부로 사라지는 길을 크로즈업 시키고 있다. 오히려 7층 석탑보다 길이 주제로 강화되어 있어 보인다. 이외에 원반형 다층 석탑과 석조불감, 원구형 석탑, 7층 석탑과 5층 석탑, 운주사 경내, 파불, 돌부처 등의 많은 작품에서 길이 석탑과 석불상의 곁을 지나가고 있다. 특히 만산계곡에서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경법으로 운주사 경내를 포착하고 있다. 길은 산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절 입구를 돌아 절 밖으로 완만하게 사라지고 있다. 오상조는 이러한 길의 모습을 통해 강물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사의 순리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즉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운주사의 역사는 한때 버려졌지만 그 역사의 길은 끝난 것이 아니라 결국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상조는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 선조들의 체취를 느끼며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상조의 운주사 시리즈는 설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불상과 탑을 둘러싼 수 많은 이야기와 더불어 운주사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불상들의 정체가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신비가 더하다. 그러나 더욱 설화적이게 하는 것은 흑백사진이라는 데 있다. 그것도 때로는 잘려진 불두만 포착하거나 숲 속에 엉성하게 서 있는 석탑들의 모습을 나뭇가지 사이로 포착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의 사진 작품이 설화적 정서를 내포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운주사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오상조의 사진세계는 그의 깊고 오랜 사색과 노력의 결과물로 결국 그가 탐구하는 세계는 그것이 비록 폐허의 모습일진대 오래된 우리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 살았던 이름없는 범부들의 숨결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핏속에 흐르는 우리의 잠든 정체성을 일깨우는 작품세계인 것이다.
3
청학동 사람들은 운주사와 같은 시기에 출간된 작품집이다. 제작연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집 역시 운주사와 같이 끊임없이 탐구해 왔다. 이 작품집의 주제 역시 전통을 통한 한국의 정체성을 살펴보고 있다.
그러므로 청학동 사람들 또한 우리들의 오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그러나 ‘청학동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이었음이 분명하다. 산업화과정에서 상실되고 단절된, 그래서 왜곡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보다 참된 인간의 삶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흑백 사진으로 마치 오래된 앨범을 보듯 지나간 시간과 공간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주지하다시피 청학동은 지리산 계곡에 있는 오지마을로 전통을 고집해 온 마을이다. 댕기를 길게 늘어뜨리고, 상투를 틀고, 무속 신앙과 유교적 풍속에 의해 자신들의 안녕과 조상에 대한 숭배의식을 실천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마을의 질서를 지키는 일은 실천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전통을 간직해 온 청학동 마을에 대해 그는 큰 매력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선 오상조는, 각박해지고 인간의 존엄성이 휴지처럼 가벼워진 인간성 상실시대에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만나 잃어버린 동일성을 회복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좀더 정서적으로 여유와 풍요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해도 작가는 이상의 실현을 꿈꿀 수 있는 자유를 가져볼 수 있기도 하다.
청학동 사람들을 통해 오상조는 단순히 ‘청학동문화’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청학동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그 옛날 우리들의 모습과 하등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오상조는 청학동의 문화, 즉 짚으로 엮은 이엉을 얹은 초가와 구들, 짚이나 나무・칡・대를 이용해서 만들어 쓰는 생활용기, 사람이 직접 밭을 갈아 짓는 농사, 서당과 훈장, 전통예식에 의한 관혼상제 등은 다름아닌 100여 년 전 우리의 모습이기에 그는 청학동을 여러 포즈에서 끊임없이 포착해 온 것이다.
그 예로 김덕준씨에서는 탕건을 쓴 채 한문으로 된 글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는 노인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청학서당에서는 글을 읽는 학동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제당과 대제준비에서는 마을의 큰 행사에 공동체적인 삶을 재현하고 있으며, 마을 청년들과 남매들에서는 댓님을 묶고 댕기를 튼 청년의 모습,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처녀 총각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또한 결혼식에서는 전통혼례의복을 입고 혼례를 치루는 신랑신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는 회갑년 가족 사진, 초가, 모내기, 모심기, 써래질 등 사라진 전통문화와 예절 및 풍속을 작품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 청학동 사람들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작가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살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작가의 집념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당연히 불편하지만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문화가 후세에 면면히 이어져야 한다는 소망이 담겨있기도 하다.
오상조가 청학동 사람들에서 단순히 기록성만을 염두에 두고 예술성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앨범을 보는 듯한 상투성도 엿보이지만 새벽에서는 안개가 내린 산중 마을의 고요를 빼어나게 연출하고 있다. 울타리 너머 들여다보이는 흙마당과 토벽에 기대어 놓거나 걸어놓은 생활용기들과 초가지붕 뒤로 희뿌옇게 드러낸 나무들의 형체가 평화로움과 신선함을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우연히 포착된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밖에도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작품 중에 지게를 지고 우산을 쓴 남자와 양동이에 물을 인 아낙이 등진 채 서로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에서 기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작품과 대제당 입구에서 나무막대를 가지고 놀이하거나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들을 담은 작품 등은 주변의 기묘한 구조물과 서로 어울려 엄숙하고 신비스럽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오상조의 전통에의 탐구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오늘날, 인간의 이성은 더 신뢰할 것이 못되어 가고, 모든 것이 파편화 되어버린 인간의 생활방식을 통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를 반성하고 치유하는 처방을 전통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은 오랫동안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었으며 우리를 지탱하게 한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4.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동구밖 당산나무이다.
여기에서는 선조들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즉 마을 주변에 있는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올리거나, 당산나무에 금줄과 황토를 아 액땜을 하는 토속신앙의 모습과 함께 장승・솟대・돌무더기・선돌・들돌 등은 땅의 기가 허하거나 넘칠 때 비보책으로 쓴 선조들의 구체적인 생활과 삶의 방식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선조들은 당산나무에 대해 매우 각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신령한 나무’로 인식해 영물 취급을 하였다. 간혹 산업화 과정에 당산나무를 베어내며 잦은 마찰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이처럼 당산나무가 오랫동안 선조들의 섬김의 대상이 된 이유는 땅과 하늘을 이어준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거대한 힘을 가진 하늘의 절대자와 쉽게 맞닿을 수 있는 것은 큰 나무를 통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하늘숭배사상’과도 통한다. 우리 조상들에게 뿐만아니라 모든 민족에게도 ‘하늘’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성성의 극치였다. 이와 더불어 마을에서 제일 큰 나무에게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 하여 단순한 식물로 보지 않은 것도 당산나무를 신성하게 여긴 이유이다. 선조들은 당산나무에 대한 이러한 의식 때문에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곤 했는데, 이것은 민간신앙으로써 하나의 종교의식이었던 셈이다. 특히 당산제가 새해맞이 세시의례였던 것을 생각하면 새해를 맞아 마을의 수호신과 풍요다산신에게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며 새해의 시작과 더불어 마을에 하나로 결집될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의 발로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승・솟대・돌무더기・선돌 그리고 당산나무 등을 통해 선조들은 마을의 안녕과 풍요다산을 소망해 왔다. 이는 하나의 종교적 의미를 띠는 것으로 좀더 나은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선조들의 민간신앙은 어떤 형태로든 기존의 불교나 유교의 어떤 부분이 변형되기도 하여 때로 서로 상관관계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에 의해 부정되고 파괴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말살된 것이다. 그것들을 하나의 문화로 이해하고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배타적인 기독교의 속성상 우리의 토착문화, 특히 무속문화가 거의 절멸한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우리를 부정하고 파괴한 결과이다. 오상조가 사망한 민간신앙의 주검들이나마 기록해 남기고자 한 뜻은 오랫동안 우리의 한 부분이었던 모습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오늘날 심하게 왜곡되어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의미이고, 그를 당산나무와 솟대・장승・돌탑 등을 오랫동안 찾게 한 이유인 것이다.
필자는 오상조의 동구밖 당산나무를 통해 한가지 느낀 것은 그가 의식했든 안했든간에 그가 찍어낸 당산나무의 모습에서 끈질긴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늙은 나무 등걸에서 모진 풍파를 견뎌낸 옛사람들의 거친 손과 검게 그을린 얼굴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런 나무들이 수백 년 동안 마을 어귀에 서서 자자손손 이어져 오는 마을의 관찰자, 또는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즉 당산나무는 죽지 않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설사 당산나무에 상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마을의 상처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곧 당산나무는 마을과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해 온 우리 선조들의 초상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은 아스팔트 길가에 버려져 있거나,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러나 당산나무는 한때 우리의 생활 중심부에 놓였던 것으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외면하고 버릴 수는 없다.
구체적으로 오상조의 작품을 살펴보면, 충남 공주시 유구면 탑석리의 당산나무와 석장승 2기는 당산나무와 당산나무 사이에 금줄이 처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금줄을 통해 그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고 있다. 또한 우측 전면에 부각된 당산나무의 몸체를 통해 이곳 마을의 역사와 나무의 연륜을 짐작하게 해준다. 전남 화순군 이서면에 있는 우람한 당산나무 아랫부분의 굴곡은 오랫동안 쌓인 세월의 더깨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것은 나무의 몸체만을 크로즈업 시킨 것이 크게 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당산나무와 함께 등장하는 장승들의 모습은 당산나무와 함께 마을의 수호신의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충남 옥천군 안남면 석성리의 당산나무와 목장승, 충남 공주시 탄천면 대학리 상당산의 당산나무와 목장승 2기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 당산나무와 석장승의 모습도 자주 보여준다.
오상조의 동구밖 당산나무의 표제작은 단순히 그가 해왔던 일련의 작업 즉 기록성이라는 사진 본질의 의미를 넘어 보는 이에게 어떤 영감을 불러 일으켜주는 명작이다. 한때 마을이었을 들판에서 마치 하늘을 떠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장엄하게 서 있는 두 그루의 당산나무는 대지를 압도한다. 대기의 움직임을 잘 포착하고 있는 이 작품은 흑백사진의 강점을 잘 살리고 있다.
5.
여태까지 오상조의 사진세계를 3권의 작품집을 통해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세계는 사라져 가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거나 회복하는 뜻이 담겨있다. 오상조의 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은 현대문명에 자꾸만 쫓겨가며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게으름과 느림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디지털 방식으로 빠르고 복잡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보내는 하나의 경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가 재빠르게 질주하는 문명을 거부하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을 잘 살피며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자는 것이 그의 발언이다. 이는 인간중심적 사고가 아니다. 자연무위의 삶, 즉 에코토피아적인 발상으로 그의 작품 배경에 그것들이 깔려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껏 오상조는 오늘의 시점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우리의 뿌리를 찾는 작업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것은 단순한 복고적 취향도 아니고, 과거를 재생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휴머니즘의 실현과 한국인의 정체성 탐구라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낯익은 사진’이라는 데에서는 일정부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그것은 한정된 소재선택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좀더 참신한 실험정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어찌하든지간에 우리는 지금 소중한 무엇을 상실해가는 시대를 살며, 그 소중한 것들을 일깨워준 오상조의 노력에 경의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가 지금껏 해온 작업은 아직껏 근대를 이룩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반성과 각성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강경호 미술평론집, <영혼과 형식> 에서
강경호 미술평론집
영혼과 형식
2009년 11월 10일 인쇄
2009년 11월 14일 발행
지은이 | 강 경 호
펴낸이 | 강 경 호
인쇄・기획 | 도서출판 시와사람
등 록 | 1994년 6월 10일 제 05-01-0155호
주 소 | 광주시 동구 금동 8-1번지
전 화 | (062)224-5319, 227-5319
팩 스 | (062)225-5319
E-mail | jcapoet@hanmail.net
ISBN 978-89-5665-262-7 03810
값 10,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