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가연대 62인의 수필 모음 <존재와의 약속>(2008)에 실은 글입니다.
영웅호색 좋아하네
심양섭
영웅호색(英雄好色)이란 말이 있다. 영웅은 여색(女色)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영웅이 아닌 남자들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다. 백 여자 마다할 남자 없다고 했다. 무릇 수컷(雄)이면 예외 없이 암컷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영웅’호색이라고 한 것은 왜일까.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이 통하던 시절에는 남의 아내이든 딸이든 미인들은 다 영웅호걸의 차지였다. 성경에도 보면 전쟁 나간 장군의 아내를 취하는 이스라엘 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힘이 더 센 수컷이 암컷을 차지하는 동물의 세계와도 흡사하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힘이 있다고 아무 여자나 차지할 수 없다. 권력 감시기구가 발달하고 여권이 크게 신장된 게 요즘 세상이다. 구미 선진국에서는 권력자나 유명인의 사생활을 폭로하여 먹고 사는 황색저널들이 판을 친다. 사생활 폭로는 인터넷의 등장으로 훨씬 더 수월해졌다. 공인들은 사생활이 아예 없어졌다고도 말한다. ‘영웅’호색은 옛말인 것이다. 오히려 영웅 아닌 보통남자들이 성 개방 풍조 속에서 여색을 은근히 더 즐기는 것 같다. 언필칭 여성시대를 맞아 여성들의 남성편력이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영웅호색이란 말이 완전히 죽은말이 된 것은 아니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이 말이 마치 술안주마냥 곧잘 거론된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은 흔히 남자들의 여성편력을 정당화하곤 한다. 남자들 사이에서 화려한 여성편력은 부도덕한 것이 아니라 자랑거리가 되고, 여성편력이 없거나 부족한 남자는 팔불출로 여겨지기도 한다. 남자들의 ‘허리 아래 문제’에 관대한 경향도 있다.
과연 호색은 영웅의 당연한 특징인가. 역사를 살펴보면 진짜 영웅은 여색에 탐닉하지 않았다. 성군(聖君)은 한순간의 미색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중심을 잡으며 백성을 먼저 생각하였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은 영웅 중의 영웅이다. 두 사람이 여자를 일부러 멀리한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세종은 왕후 외에 후궁이 여덟 명이었고 총 스물세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여색이나 사냥놀이에 빠지지 않았고 가뭄이 심할 때 하늘에 기도하며 자신을 절제했다고 한다.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를 매우 사랑하여 부부지간에 의가 좋았으며, 소헌왕후도 후궁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그에게도 ‘여자’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항복이 지은 통제사 이순신 일대기에 의하면 “공은 7년 동안 군중에 있으면서 심신을 곤고(困苦)히 하여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최장수왕인 영조는 당시 조선인 평균수명의 두 배를 살았는데 그것은 술을 멀리하고 여자를 지나치게 탐하지 않은 그의 바른 생활 습관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에 여색에 빠진 지도자치고 망하지 않거나 폭군으로 악명을 드높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중국 하(夏)나라의 걸왕(傑王)은 매희(梅姬)라는 미색에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에 취해 살다가 은(殷) 나라의 탕왕(湯王)에게 망했는데 탕왕은 걸왕을 무찌른 뒤 “하늘의 이치는 선한 데 복을 주고 음란한 데는 화를 준다”고 말했다. 영웅호색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천벌을 면치 못하는 죄였던 것이다.
중국 하나라가 주색에 빠진 걸왕으로 인해 막을 내렸듯이, 그에 이은 은나라 역시 달기(妲己)라고 하는 미색과 더불어 주지육림을 즐기던 주왕(紂王)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매희와 달기는 그야말로 나라를 기울게 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던 것이다. 주지육림이란 술이 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 것을 말한다. 음탕한 음악에 맞추어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젊은 남녀들이 주지(酒池)를 돌면서 서로 쫓고 쫓기며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미치광이 연회를 장장 120일간이나 계속했다고 한다. 그런 나라가 안 망했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철종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한 좌절감 때문에 여색에 탐닉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왕후 외에 후궁이 일곱 명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아니라 그가 여색을 탐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나중에는 요통에 걸려 누웠다가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북한의 김정일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을 뿐 아니라, ‘기쁨조’ 여성들을 동원하여 1주일에 두세 번씩 측근들과 밤새도록 질펀한 술판을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오쩌둥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지만 그도 권좌에 있는 동안 젊은 무희들과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의 성 행각을 벌였다. 그의 음란행태는 그의 주치의가 쓴 『모택동의 사생활』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수천만 명을 학살한 폭군이기도 하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만큼 여자문제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백악관 인턴여성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에서는 두 사람의 오럴섹스 장면이 마치 연극대본처럼 공개되어 자신뿐 아니라 미국 자체를 망신시켰다. 이를 지나치게 정치쟁점화한 공화당이 오히려 선거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린턴의 음란행위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클린턴의 섹스스캔들은 그 사건 외에도 수십 건이 더 있었다. 그의 한 여성참모가 한 때 그에게 출마포기 의향을 물을 정도였다.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정치인들이 여자문제로 패가망신했다. 어느 386세대 출신 국회의원은 해외공관 국정감사를 갔다가 식당 여종업원과 관계를 가졌는데 나중에 그 여성은 자살했고, 그 국회의원은 지구당 경선에서 떨어져 2선에 도전하지 못했다. 어느 정권의 한 실세는 자신의 후원회 사무실에서 여인과 밀회를 즐겨온 사실이 주간지에 보도된 데 이어, 거액의 비자금을 다른 여성에게 맡겨놓은 사실이 드러났다. 어느 국회의원은 동료 의원의 여비서를 임신시켰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여성편력으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으며 계속 요통에 시달렸다.
남자가 여색 앞에서 약해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여성을 정말로 아름답게 지으셨다. 여자는 하나님의 걸작 중에서도 최고 걸작이다. 더욱이 요즘은 여자를 꾸미는 각종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안 예쁜 여자가 없다. 그러니 여자를 보고도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는 남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상한 남자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유혹받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의 나이에도 하루에 몇 번씩 마음의 간음죄를 범하고는 곧 회개하곤 한다.
예나 제나 참 영웅은 분별없이 호색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유익하지는 않다. 진정한 용기는 할 수 있는데도 참는 것이며, 힘이 있으나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삼가는 것이다. 정명훈은 세계적 지휘자이지만 한 번도 추문을 일으킨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처자를 위해 요리를 도맡아 한다고 한다. 진정한 영웅은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