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아르케는 아페이론이다!” - 아낙시만드로스
헬라어 <아페이론>(apeiron)은 ‘규정할 수 없는 것’, 혹은 ‘한계 지을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아낙시만드로스(고대 그리스어: Ἀναξίμανδρος, 기원전 610년 ~ 546년)는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이다. 그는 탈레스의 제자였다.
ἀρχή(arkhḗ) 아르케는 "원리' "원인"을 나타내는 고대 그리스어이다.
탈레스의 아르케는 물(水)이고 피타고라스의 아르케는 수학적 수이다. 인간이 사물에서 철학을 깨닫게 되는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모든 이유를 신에게만 의지하던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제3의 눈이 벚꽃 봉오리처럼 터지는 순간이었다.
구체적인 황홀감을 깨닫는 거친 현자이고 싶다. 일생을 그냥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되는 거라 믿었다. 영리했어야 했다. 착하게 살기만 하면 어찌어찌 되겠지!라는 망상이 액취증처럼 겨드랑이 밑에 붙어있었다. 이제는 잃어버린 날개처럼 원죄가 되어 따라다닌다.
제발 시간이 가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아니었다. 이 지겨운 인생에 나를 위한 광대 한 명쯤은 만들었어야 했다. 따분한 일상에 테이블 러너, 로프, 금기둥 그리고 혼자 걸어갈 붉은 양탄자, 페르시아 왕국의 뷔페 같은 식사를 하고 싶은 날이다. 오로지 나를 위해 하루쯤은 웃게 해 줄 그런 사람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20세기말에 그림 그리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던 순간, 죽음을 택했다. 어떻게든 인생은 끝나야 한다. 검정 비닐봉지를 쓰고 죽은 화가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이 보고 싶어 진다. 전쟁을 겪었고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의 학대를 당했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일찍 잃었다. 주변에 굶어서 죽어가는 이들이 넘쳤다.
뷔페는 삶도 광대도 우울함도 다 가진 그만의 성에서 살았다. 젊어서 성공했다. 롤스로이스와 개인 기사도 있었다. 당시 화가로서 모든 것을 누렸다. 그의 그로테스크한 그림을 바라본다. 양성애자였던 그에겐 돈도 명예도 뮤즈인 여자도 남자도 다 있었다. 부러운 인간! 치매기가 나타나자 제정신이 돌아오는 순간, 자살을 선택했다. 스스로를 존엄하게 지키고 싶은 마지막 자존감을 끝까지 갖고 싶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바닥까지 내려가 짐승처럼 살아짐을 당하고 싶진 않다.
그는 광대처럼 기억되길 원했다. 모자를 쓴 광대, 서있는 광대, 서커스 광대, 광대와 자화상을 콜라보한 듯하다. 광대의 표정이 주는 가장 큰 느낌은 억울함이다. 난 아마도 광인으로 기억될 것 같다. 예술가의 인생이 슬프고 힘들수록 위대한 명작이 탄생한다. 절대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거창한 삶보다는 불운한 삶이 위대한 예술을 낳고 간다.
삶이 행복한 꿈이길 바랐는데 아니었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사라졌다. 영원히 사라졌다. 이제부터 나는 어쩔 수 없이 전사가 된다.
난 유독 이 그림이 좋다. 그의 첫사랑은 스무 살이던 해 센강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피에르 베르제였다. 8년을 둘은 붙어 다녔다. 헤어지자마자 1958년 다재다능한 아나벨에게 첫눈에 반했다. 나도 그러했다. 그의 그림을 보자마자 반했다. 웃는 듯 우는 듯 뒤 들어진 얼굴의 광대 공포증이 그의 그림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낯선 골목길에서 광대를 만난다면 비명을 지를 것 같다. 뷔페가 살았던 우울한 시대상은 언제나 존재했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메르스 때,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전용기를 타고 가는 느낌이었다. 전 인류의 멸종이 느껴졌다. 비행기 안에 우리 가족 외의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다시는 그런 호사를 누리진 못할 것이다. 가족들만의 비행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행복감보다는 사실 공포가 밀려왔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그때의 공포는 코로나 때의 나 자신의 멸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헬게이트는 이제 시작일 지도 모른다. 전인류의 멸망보다 나 자신의 멸망이 더 안타까운 법이다. 아픔과 공포가 공존했다. 정말 가혹한 진실은 죽을 때까지 고해성사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증언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준 핵폭탄 선물이었다. 포스트 코로나의 우울증은 정신과에 점점 늘어나는 고객님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정신병자 아닌 사람이 찾기가 더 어려워지는 시간이 오고 있다. 알코올중독자 치료 담당인 정신과 원장님조차 알코올중독자라는 사실이 진심 아이러니이다. 다들 잘 사는 것처럼 쇼하고 있다. 모든 게 쇼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뷔페에서 홀로 읽으면서 무엇을 먼저 먹을지 고민해 보는 식사를 하고 싶다.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 꿈이라도 꿔보는 새로운 하루가 가고 있다. 정녕 과거와의 화해는 그의 미스터리한 그림만큼이나 해석이 불가능하다. 베르나르씨들을 한자리에 부르고 싶다.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시대가 버린 광인이고 싶습니다. 멈출 줄 모르는 광기의 시원이고 싶습니다.
진실을 함구하는 자?를 향해 활을 당기고 싶습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싸우기 전 몸부터 만들어 오시지요! 고통과 절망은 동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상태론 싸움은 절대로 안 됩니다. 걷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세요. 무조건 태양이 있는 곳으로 나와서 걸어보세요. 나무와 풀과 봄바람과 대화를 하세요. 억울하고 속상하겠지만 자신이 강해져야 소송이 가능합니다. 제일 좋은 건 그냥 잊어버리세요. 숨도 헉헉거리면서 싸움을 걸기엔 무리입니다. 혼자 공중을 향해 주먹이라도 날려 보세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냥 걸었다. 걷고 또 걸었고 울고 또 울었다. 창피해서 눈물이 나왔다. 두 번째 눈물을 그에게 보였다. 집에 오면서 창피함에 더 화가 났다. 조금만 참을걸, 왜 자꾸 눈물을 보이는지? 나 자신이 미워진다. 나의 지인 민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그에게 밥이라고 사야 하는 게 예의란 걸 알고 있다. 치매가 오더라도 기억하자! 아빠가 받은 건 반드시 갚으라고 했다.
명확한 진실은 존재할까? 안 할까?
정말로 있는 것은 무엇이고 정말로 없는 것은 무엇일까?
영원히 없는 것 ἀρχή(arkhḗ) ἀρχή(arkhḗ)과 영원히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영원한 존재와 영원한 부재는 무엇인가?
그냥 내가 죄인이라 믿어야 하는 것인지?
정말 있었을까? 내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을까?
그때의 코로나가 정말로 우리를 피폐하게 만든 것일까?
최초의 철학자들이 남긴 과제는 무엇일까?
실용적 과학, 종교적 지식이 삶을 행복하게 해 줄까?
원리를 찾아라가 빠른지? 월리를 찾아라! 가 합리적인지?
무엇이든 시작하고 싶은 밤이다. 위대한 작가들의 성실성은 기본기였다. 다작은 일상이었다. 그들은 성실의 상징이었다. 오늘 처음 알았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삶에 격정적인 자들이었는지를!! 내 게으름이 부끄러워지는 밤, 광적으로 싸지르는 글들!
영원히 존재하는 것과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것들을 쫓아가는 자가 나이다. 조로아스터 교를 신봉하는 자처럼 오늘도 난로를 곁에 두고 산다.
이 세상에 철학이고 종교고 다 필요 없고 도덕률이나 제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 털리고 몸 버리고 긴 시간 폭삭 망했다. 망자 되어 떠돌았다. 누구든 진실을 말해주시길! 인간이 바뀌길 바라는 나는 몽상가 아니 망상가 일지도 모른다.
독기 건 도끼 건 품어야 하는 게 맞다. 바보같이 수년간 눈물로만 호소했다. 정치인들은 주는 대로 다 받아먹는 현실과 다르게 학교 스승님께는 아무것도 못 받는다. 주고 싶어도 갚을 길이 없다. 세상의 어떤 문화가 이렇게 어이없는 사태를 만들었을까? 그들만은 여전히 잘 받고 있다. 재수 좋아서 안 걸리기만 하면 된다. 신의 눈을 피해 달아나야 하는 인생은 피구인지도 모르겠다. 하얀 공만 피하면 된다.
나의 사랑 아나벨, 나의 아내 아나벨, 자신의 아내를 그렸다. 일상의 권태로운 옷을 벗어던지고 다시 출발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 꼭 필요하다. 양달에 엎드려 나만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태양을 갈망하는 깊은 밤이다.
가난하고 외로운 천재 화가의 아내이고 싶다. 모델 구할 돈이 없어서 오로지 나만 바라보는 남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남자, 밥을 굶어도 행복할 것 같다. Only ON!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는 남자를 기대하는 난 K 관종이다. ( 좋은 글이란 환상과 망상이 어느 정도 존재해야 한다고 방통대 국문과 수업에서 배웠다.) 제발 남편이 내 글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편한 진실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