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관동(石串洞)은 석관 제1동, 제2동으로서 중랑천(中浪川)과 화랑로를 끼고 있는 석관동은 마을 남서쪽의 천장산 이 지맥(支脈)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즉,, 수수팥떡이나 경단을 꽂이에 꿰어 놓은 것 같아 돌 곶이 마을이 되었다는 설과 이곳 지형이 곶이로 되었으므로 돌 곶이라 하였다는 설(說)이 있는데 돌 곶이 이름을 한자로 표기해서 석관동(石串洞)이라 붙인 것이다,
석관동은 앞의 장위동과 같이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으며 영조(英祖) 27년 (1751년)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장위리로 칭하다가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부 인창방(성외) 동소문외계 석관리로 되었다, 그 후 한일합방에 따라 일제가 1911년 4월 1일(경기도령 제3호) 경성부 인창면 석관리로 칭하다, 1914년 4월 1일(경기도령 제1호)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석관리로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대통령령 제159호)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성북의 신설로 이에 속하고 숭인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했다, 이듬해 1950년 3월 15일(시조례 제10호) 석관리는 석관동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1975년 10월 1일(대통령령 제7816호)에 구 동의 관할구역 재편성이 있을 때 이문동(里門洞) 북쪽의 석관동 일부 지역 주민 수 2,253명이 동대문구 이문동에 편입되므로 축소되었다,
※ 석관동 지역 인구집적추이(人口集積推移)
석관동의 인구통계가 발견된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1930년의 것이 있는데 당시의 인구는 551명으로 역시 한적한 농촌지역이었다, 광복이후에는 장위동 지역과 통합되어 1961년의 통계에도 장석동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양 지역의 인구가 1949년에는 5,880명, 1953년에는 2,682명, 1961년에는 8,215명이었다, 1970년의 통계는 분동된 대로 나와 있는데 31,492명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이 추세는 198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어 1980년에는 45,250명으로 증가하더니 1981년의 45,349명을 고비로 감소하기 시작, 1990년에는 44,570명까지 감소하였는데 역시 월곡, 장위동지역과 마찬가지로 주거환경의 열악성을 기피하려는 경향과 임대 아파트의 대량 공급이 원인인 것 같다,
※ 경종 의릉(懿陵)과, 추존(追尊) 문조의 연경묘(延慶墓)
석관동 산 1~5번지에는 사적(史蹟) 제204호로 지정(指定)된 의릉(懿陵)이 있다, 왕릉은 조선 20대 왕인 경종(景宗)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魚)씨의 릉으로 쌍릉이다, (의릉의 특진은 좌우로 되지 않고 상하로 되었다, 이 같은 것은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생기(生氣)가 왕성한 정혈(正穴)에서 벗어날 것을 우려하여 왕과 왕비 릉을 좌우로 쓰지 않고 앞뒤로 놓아 양자 모두 정혈에 있게 한 것이다,) 경종은 숙종의 장자로 (張禧嬪)의 아들) 숙종 14년 당시 3세로 세자가 되었고 숙종 43년에 세자로 대리청정을 하기도 하였다, 숙종이 승하한 뒤 즉위하였으나 병약(病弱)하야 원년 8월에 이복동생 숙종의 4자 연잉군(延仍君)(후에 영조대왕)을 세제(世弟)로 봉하였으며 재위 4년만에 37세를 일기로 승하 하였다,
계비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숙종 44년 15세로 세자빈 이 되었고 경종 즉위와 함께 왕비로 진봉 되었으며 영조 6년에 26세로 소생 없이 타계하였다,
추존(追尊)된 순조(純祖)의 아들 익종(翼宗)의 능도 순조 31년 1831년 8월 4일에 이곳 의릉 좌강(左岡)에 모시고 연경묘(延慶墓)라 하다가 익종의 아들이 헌종(憲宗)으로 즉위(卽位)하자 원년에 추존하여 익종(翼宗)이라 하였으나 그 후 문조로 추숭(追崇)하고 수릉(綏陵)으로 높인 뒤 철종(哲宗) 6년 1855년에 양주군 구리면 인창리 동구릉(東九陵)으로 천봉(遷奉)하였다, 22살에 요절한 문조의 비(妃)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풍양조씨(豊壤趙氏)가 고종 27년1890년에 승하하자 문조의 능에 합장 하였다,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면 후기의 정국을 주무르던 여장부다,
경주김씨 정순왕후(貞純王后)(영조의 계비) 안동김씨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순조의 비) 풍양조씨 신정익황후(추숭 문조의 비) 영흥민씨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고종의 비)까지 조선 후기 역사는 이 네 명의 여인이 정국을 주도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현재 동구릉 가운데 길을 따라 건원릉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문조와 신정익황후의 수릉이다
※ 문화재 제92호는 분단 이래 남북 당국자간의 첫 대화로 역사에 기록된 7, 4 남북공동선언 발표가 있었던 장소(석관동 1 - 5 의릉내) 이 당시 서울 이문동 중앙정보부 종합청사 강당으로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의 상징으로 군림했던 중앙정보부 가운데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다, 1962년 의릉 내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서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다가 43년만이 2005년 5월 1일 산책로와 함께 일반에 개방되었다, 원래 이 강당은 철거될 예정이었지만 1972년 이후 중앙정보부장이 7, 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 위해서 문화재 제92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 민간 신앙(信仰) 석관동 340번지에는 도당(都堂)이 있다, 원래 천장산에 있었으나 의릉이 들어오자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함게 받들고 와서 현재 위치에 둔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약 5~6평의 당내에 화상(畵像) 또는 신주대신 항아리에 벼를 가득 넣고 짚으로 땋은 주저리로 덮었다, 즉 항아리를 주신으로 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신이 여신임을 알 수 있다,(남신인 경우에는 항아리 대신 목경(木莖)을 숭배한다) 또 벼를 넣은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마을의 주업은 농업으로써 풍농의 기원에 목적을 두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모르나 이 마을이 형성될 당시 수호신으로 숭배되어 왔고 또 숭배되어 오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도당신 양조분이 있는데 현재 중화동 봉화산신은 도당 할아버지이며, 천장산신은 도당 할머니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석관동에서는 도당 할머니신을 위한다고 한다, 왕릉이 들어오기 전에는 천장산 아래 있으면서 산신으로 받들다가 이주하면서 동신(洞神)으로 받든 것이라고 한다, 주신이 호칭은 도당 할머니라 부르며 축문의 표기는 토지지신으로 되어 있다, 특히 제수 중 쇠고기는 전부 꼬지에 꾄다, 즉 내장은 내장대로 껍질은 껍질대로 꾀어 짚으로 엮은 다음 제관 5명이 (집집마다,동신(洞神)을 신봉하는 집) 돌린다, 제비(祭費)는 도가에서 준비한 다음 제사가 끝나면 동민이 모여 경비 일체를 공동 부담한다, 현재 석관동의 행정은 석관 제1동 제2동에서 담당하고 있다,
(29) 석관 제1동은 이문로 동쪽 일대의 석관동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관할구역 명칭이다, 이 동은 장위동제1동과 같이 1949년 8월 13일 서울시에 편입되었을 때 동회가 설치되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1953년 초에 장석동회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서울시에 편입될 때도 동일했으리라고 본다, 이 당시의 장위동회는 장위동과 석관동 일대를 관할하고 있었으며 그 후 1955년 4월 18일(시조례 제66호) 동제 실시 때 장석동사무소로 바뀌었다, 이어서 1963년 1월 1일(시조례 제274호)석관동 중 상월곡동과 접하는 장석로를 따라 남진 월곡로를 건너 이문로를 따라 남진하여 이문동과 접하는 도로 이동지역을 석관 제1동으로 하고 그 이외의 지역을 석관 제2동으로 정했다,
이 동의 북쪽으로는 화랑로 남북으로는 이문로(시조사 - 외대앞 석관초등학교) 한천로가 지나고 있는데다가 남쪽과 북쪽 경계선 부근에 경원선 전철 신리문역과 석계역이 자리 잡고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신이문역 석계역 사이의 철로 동쪽에는 동원연탄, 삼표연탄, 삼천리연탄 정원연탄, 칠표연탄 등의 연탄 생상공장이 1962년부터 들어서 있었다, 이 공장에서는 하루 150만개를 생산해서 서울시내의 연타공급량의 2분의 1을 공급했으나 주택 난방 연료가 유류로 바뀌는데다가 이 공장에서 나오는 분진(粉塵)이 인근 주택가의 공해를 자아내어 민원이 일어나무로 점차 시외로 이전해 가고 16개소에서 7개소로 줄어들고 나머지도 1993년 모두 폐쇄되어 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이 동의 서쪽을 흐르는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에서 발원하여 의정부시를 거쳐 화랑로에 놓인 월릉교 부근까지는 한내(한천(漢川)라고 칭하다가, 월릉교에서 우이천에서 흘러 청계천과 합류해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중랑천은 전에 송계천(松溪川) 또는 속계(涑溪)로 불리었는데 이는 송계원(松溪院)이 있었기 때문이며 중랑천이란 이름은 하류에 중량포(中梁浦)가 있었으므로 연유되었다,
석관1동 10번지 석관두산아파트 앞 중랑천을 따라 동부간선도로와 나란히 뻗은 중랑천 자전거도로는 마치 자동차와 경주하는 느낌이 든다, 한강 북변의 자전거도로 중에서 가장 길면서도 탄천처럼 험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이 없어 안전한 것도 장점이다, 정평교~월릉교 사이 5km구간에는 유채꽃을 비롯해 여러 군데에 화단이 조성돼있어 꽃이 만발한 도로를 질주하는 낭만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월릉교에서 석관동 19번지까지 성북구 자전거도로 구간에서는 자전거 외에도 인라인 스케이트 조깅을 항상 즐길 수 있다,
※공공기관으로는 성북보건소 석관분소(석관동 167-7호)가 있고, 석관고등학교(석관동 77-1호)는 공립 일반계 남녀공학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성북구 관내 고등학교 중에서는 신설학교로 1982년 11월에 학교설립인가를 얻어 1983년 3월에 개교하였다, 같은 곳 1982년 12월 9일에 설립한 석관중학교(석관동 88-2호)가 있고 1971년 12월 3일에 설립한 석관초등학교(석관동 205번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