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무슨 뜻?>
방금 교열을 보다가 너무 좋아서, 소개합니다.
앞에 실은 글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글은
본격 성경해설 번역문이어서 좀 어렵습니다. 찬찬히 묵상해 보십시오.
마태 5,3("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해설(1)
하느님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불의한 사회가 배척하는 가치들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과 더불어서만 그 가치들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해야 새로운 사회를 솟아나게 할 수 있음을 철저하게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 모든 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더 부유해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판에,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니,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린다. 가난은 악이며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가 지배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와야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과 노예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행복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몸 바치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루카와 달리, 마태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부유한 사람답게 소유하고 소비하면서 자기는 마음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이고, 인간의 소유란 아무것도 없음을 명심하고서, 하느님이 주신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의 선익을 위해서 쓰는 사람이라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가난을 실천하게 되어 있다.
마태 5,3 해설(2)
‘첫째 행복선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5,3)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러 오셨다(참조. 11,5).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고, 그들에게 ‘하늘 나라’를 약속하신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루카와 달리(참조. 6,20), 마태오는 ‘프토요이 프네우마티’(‘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첫째 행복선언은 기본적으로 각 사람 마음속(사람의 깊은 내부)에 뿌리내린 가난에 대하여 말한다. 이 가난은 순전히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다. 윤리적 자질과 종교적 태도를 내포한 가난이다. 한 마디로, 영적 자세를 가리킨다.
그와 비슷한 모양으로, 여섯째 행복선언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한다. 이때는 ‘깨끗한’(‘맑은’, ‘흠결이 없는’)이라는 형용사에 마음의 태도가 덧붙여진다. 그것은 깨끗함의 마지막 뿌리가 사람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참조. 마태 23,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그와 비슷한 표현, 즉 스스로를 높이 보는 마음(‘교만’), 스스로를 낮게 보는 마음(‘겸손’), 넓은 마음(‘인내’), 좁은 마음(‘성급함’) 등의 표현이 성경에, 특히 지혜문학적 기록물에 자주 나온다.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는 데 필요한 기본 태도를 표현하는 첫째 행복선언은 나머지 모든 행복선언의 기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 교만하지 않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공적을 결코 내세우지 않는다. 자만하기는커녕, 자기가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한다. 구원이, 자기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앞서, 겸손하게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선물,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임을 잘 알고 있다.
70인 역 그리스어 성경번역본에서, 그리스어 ‘프토호스’라는 낱말은 세 히브리어 낱말, 즉 ‘아니’(‘가난한 사람’, ‘억눌리는 사람’, ‘기가 꺾인 사람’), ‘달’(‘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 ‘에비욘’(‘부족한 사람’, ‘궁핍한 사람’)이라는 낱말을 번역한 것이다. 그 모든 개념은 우선 경제적인 의미의 가난을 가리킨다. 그러나 점차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띤다. 그 영신화 과정이 시편 안에 나와 있다. 예를 들어서, 시편 69(70인 역에서는 68편)에서 가난한 사람들, 억눌리는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33절)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37절) 사람들과 동일시되고 있다. 시편작가는 자기 자신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긴다(“저는 가련하고 고통 중에 있습니다.”, 30절). 즉 억압자들의 불의함과 잔인함에 희생된 사람으로 여긴다. 땅 위에서는 아무 것도 집착할 것이 없는 그는 모든 것을 주님께 바란다.
그 영신화 과정에서 스바니야 예언자가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기록물 안에서 가난이라는 개념이 영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스바니야 앞에도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고질적인 가난은 예언자들로 하여금 정의를 부르짖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열렬히 감싸게 했다(참조. 아모 26-16; 이사 5,8-10). 스바니야는 가난이라는 낱말을 다시 취하면서 그 낱말을 변형시킨다. 그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앞에서 본질적으로 믿음에 뿌리를 둔 영적 태도, 겸손하게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께 절대 의탁하는 태도, 즉 영적 가난을 추구하라고 초대한다(스바 2,3; 참조. 3,12-13).
그런 행복선언의 의미는 꿈란 공동체의 문헌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지극히 경건하지만 매우 법률주의적인 신심을 가진 그들은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이라 부르고, 자기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어김없이 지키기 때문에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와 똑같은 노선에서, 마태 5,3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들, 궁핍한 사람들, 억눌리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물려받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겸손하고 양순하고 인내로운 영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필요 때문만이 아니라 인격적 결단을 통하여 가난해진 사람들이다.
첫째 행복선언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안도의 숨을 내쉬게 하는 느낌, 강하게 뿌리내린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행복선언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단순한 사람들, 메시아 시대가 와서 거의 언제나 고통스럽고 짐스럽기만 한 자기네 삶의 조건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주리라 기대하고 있던 그 사람들에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심어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사전에 그 어떤 설명이나 주의도 없이, 예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물론, 복음서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나타내면, 그것은 매우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삶의 형태로 본 가난을 선택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마태오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한 구절을 보고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진다. 비참한 지경에 사는 사람들,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몰락한 사람들 앞에서 부자라도 마음만 가난하면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모욕이 아닐 것인가? 첫째 행복선언에 대한 그런 오해는 불의한 기존질서를 인정하고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참상을 정당화하는 외에, 가난에서 빠져나오려는 가난한 사람들의 열망을 잠재우고 제거한다. 부자들과 억압자들에게 뜻밖의 변명거리를 제공해주고, 불의에 희생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네 불행을 체념한 상태에서 저항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이의제기는 첫째 행복선언을 읽고 들을 때, 거의 피할 수 없게 제기되곤 한다. 그렇지만 그런 이의제기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 나오는 첫째 행복선언의 의미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우선, 마태오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또는 ‘가난한 사람들의 혼을 지닌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암시한 개념에 따라서 마태오는 가난을 하느님께 열려 있는 영적 태도와 동일시한다. 그 영적 태도는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재물뿐 아니라, 소질과 능력까지 하느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쓰라고 맡기신 당신 소유이지 우리 소유가 아니라는 철저한 깨달음과 마음자세, 그리고 그 인식에 따른 실천을 가리킨다. 물질적 가난은 ‘마음으로 가난함’에 도달하기 위한 특권적인 길이지만, 어떤 모양으로든 유일한 길은 아니다. 마태오가 보기에, 물질적으로 가난하다 해서 그 자체가 결코 행복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라 해서 자동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만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솟아나는 겸손하고 신뢰에 찬 자세로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열어드림으로써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구원은 사회적 또는 경제적 상황과 처지에 매여 있지 않다.
마태오와 달리,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들과 더 가깝게, 루카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루카는 실제 생활조건을 말하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들, 우는 사람들,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루카 6,20-22). 루카는 아주 참담한 상황에서 부자의 문간에 앉아 있는 거지 나자로의 지독한 가난을 좋은 예로 든다(루카 16,19-31). 그러면서도, 루카는 극빈 상태, 사회적 내지 경제적 참상을 좋은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한 것은 가난 자체에 무슨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왕으로서 당신 통치권을 수립하고 행사하는 데 가난한 사람들을 앞장세우시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높으신 하느님께 기대하는 것은 -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네 하느님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던 것은 - 각 사람이 사람으로서 온전한 권리를 되찾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72에서는 이상적인 왕을 가난한 사람들과 힘이 없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합니다.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시편 72,12-14)
이상적인 왕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사람들, 특히 고아, 과부, 짓눌리는 사람, 떠돌이를 보호하고 감싸는 왕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사회의 보호를 가장 받지 못하고 있고, 인간으로서의 자기네 권리를 빼앗길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념의 기초 위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기네 왕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 통치권을 행사하실 때, 당신 정의를 손상시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강자들의 탐욕과 인색함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주님이 몸소 새로운 질서를 세우실 것이다. “우리는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2베드 3,13)
하느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도, 루카는 자기가 이해하는 가난(말하자면, 물질적 가난) 자체는 싸워서 이겨내고 없애야 할 악임을 잘 알고 있다. 가난 자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장해야 할 이상이 되기는커녕, 하느님께 대한 모욕이고, 당신의 영예에 대한 먹칠이다. 그리스도교가 이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가난을 사랑하는 데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구체적인 표현은 궁핍한 사람들과 맺는 연대요 그들에 대한 형제애다(참조. 루카 12,33-34; 19,7-10).
예수께서는 경제구조의 개혁이나 사회질서의 변혁을 당장 완성시키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부자들에게 퍼부은 그분의 경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기울인 그분의 애정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으려는 당신 의지를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점에서, 마태오 복음서의 전언은 루카의 전언과 완전히 합치한다. 마태 25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라고 장엄하게 선언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