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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중국 선종사
3. 보리달마菩提達磨
1) 보리달마菩提達磨의 내조來朝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이자 서천西天 28조祖인 보리달마菩提達磨는, 남북조 시대 서역西域으로부터 중국 북부 화북華北을 거쳐 들어와, 북위北魏의 수도인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 “유행승遊行僧”이다. 달마의 내조來朝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불일계숭(佛日契崇, 1007∼1072)이 지은『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1061)』에는, 달마가 머물렀다는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건립 연도, 낙양 영녕사永寧寺 9층탑을 보았다는『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547)』의 기록, 그리고 달마의 생존 기간 등을 종합해서 520년 9월 21일이라고 하였다. 학계는 이를 정설로 본다.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 염화미소나 보리달마를 다룬 여러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진 전설로 신빙성이 전혀 없다. 염화미소 전설과 서역 28조의 전법설(傳法說)은 인도의 어떤 문헌에도 기록이 없고 중국 대륙 선종 초기 문헌에도 기록이 없다. 보리달마도 남북조시대에 서역에서 온 보리달마라는 이름의 중을 다룬 기록이 있지만, 그 사람은 낙양의 아름다운 불탑을 보고 경탄해마지 않는 매우 경건한 중이거나 불경인『능가경(楞伽經)』중에서 무척 까다로운 경전에 통달하고 논리에 맞고 체계 있는 수련법이라고 주장하는 이입사행(二入四行)을 강조한 승려로서 선종 조사인 보리달마와는 그 성격이나 행적이 판이하다.
그의 전기 또한 명확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바닷길로 통해 도래했다는 설도 있는데, 지금의 페르시아인 파사국波斯國 출신의 호인胡人(중동 아랍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고, 6세기 초 중국으로 들어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교화하였는데, 낙양의 숭산 소림사에 머물면서 도육道育과 혜가慧可라는 두 제자에게 법을 전한 후, 천성사天聖寺에서 입적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비교적 늦은 시기에 쓰인『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에는 보다 풍부한 이야기로 꾸며져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달마는 스승인 서천 제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40년 동안 수학하였고, 스승이 죽자 그의 법을 잇는다. 그는 당시 성행하던 유상종有相宗, 무상종無相宗, 정혜종定慧宗, 계행종戒行宗, 무득종無得宗, 적정종寂靜宗 등 여섯 개의 소승육종선관小乘六種禪觀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조카 이견왕異見王까지 교화한 후, 포교를 위해 중국으로 향한다.
배를 타고 3년을 항해한 끝에 중국 광주廣州 남해南海에 도착하는데, 이때가 양梁 보통普通 8년으로 520년 9월 21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1일에는 금릉金陵에서 양무제梁武帝를 만나 문답하였고, 19일에는 양梁나라를 떠나, 11월 23일에는 낙양에 이르러 숭산 소림사에 머무는데, 그해 겨울인 12월 9일에는 이락伊落에 살던 신광神光이라는 중이 찾아와 눈 속에 팔을 자르며 법을 구했다[斷臂求法]. 이때가 후위後魏의 효명제孝明帝 태화太和 10년이었다. 이후 달마는 소림사에 주住하며 9년을 면벽面壁하는데, 양梁 대통 2년인 528년에 입적하여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동위東魏의 사신 송운宋雲이 귀국 길에 짚신 한 짝을 들고 서쪽으로 가는 달마를 총령葱嶺에서 만났는데, 귀국 후 들으니 달마는 3년 전에 이미 입적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이상히 여겨 관을 열어보니 짚신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고 한다.
『보림전寶林傳(801)』에는 달마가 536년(후위後魏 효명제孝明帝) 12월에 천화遷化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양梁 무제武帝는 친히 비명을 짓고 당唐 대종代宗은 ‘원각대사圓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린다. 어쨌든 종래 그의 전기는『전등록』등을 근거로 삼았으나, 근년에는 일본인 학자를 중심으로 돈황 발굴 문헌 등 그 이전의 자료를 가지고 재구성되고 있는 추세다.
보리달마하면 떠오르는 것이 1135년경에 만들어진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벽암록碧巖錄』「1칙 달마불식達磨不識」과 『종용록從容錄』「2칙 달마확연達磨廓然」의 달마와 양 무제의 만남이다. 양 무제와의 만남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은, 양 무제가 ‘수많은 절을 짓고, 경전을 베끼고, 스님들 공양한 것이 수없이 많은데, 어떤 공덕이 있느냐[朕即位以來 造寺寫經度僧 不可勝記 有何功德]?’는 물음에 ‘공덕이 없다[無功德]!’라고 하였다는 것, ‘무엇이 불법의 근본이 되는 성스러운 진리냐[如何是聖諦第一義]?’는 질문에는 ‘텅 비어 성스럽다 할 것이 없다[廓然無聖]!’라고 하였다는 것, ‘나와 마주하고 있는 그대는 누구냐[對朕者誰]?’는 물음에는 ‘나도 모른다[不識]!’고 답했다는 내용 등이다.
그러나 양 무제와 달마의 만남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었는데, 만남을 주관한 조연급 인사 지공(誌公, 417~514)이 514년 이미 입적하여, 520년에 중국에 들어온 달마와는 일면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 무제가「달마전達摩傳」에 등장한 것은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의『남종정시비론南宗定是非論(732년)』이 처음이고, ‘무공덕’에 대한 문답도『조당집祖堂集(952년)』에 처음 나타난다. 이런 저간의 사정들을 고려해 보면 그들의 만남은 사실이 아니고 하택신회가 만든 창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달마가 양 무제와 문답하고, 아직 불법을 펼 때가 아니라고 숭산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하였다는 이야기 역시 설화說話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양 무제와 달마의 만남의 미장센은 장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한 도시 불교, 공덕에 사로잡혀 있던 귀족 불교를 비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인 것이다. 선종 격동기 명성이 자자한 양 무제를 등장시키고, 핫한 선문답의 형식을 빌려, 라이벌인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가 주도하던 당시 불교계를 질타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누가 선어록을 작성하여 이렇게 양나라(502~557)의 무제(재위기간 502~549)와 달마(?~528 혹은 536)대사를 서로 만나게 했는가? 야심에 찬 불여우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보리달마와 양무제와의 대화를 최초로 기록한 문헌은 하택신회(668-760)선사의 『보리달마정시비론』이다. … (중략) … 당시 장안과 낙양 두 수도의 법주이며, 세 명의 황제를 지도한 스승이며, 귀족불교를 대표하는 대통신수(606?~706)와 그 문하에 대한 비난인 셈이다. 즉, 당왕조 제 4대인 측천무후(624~705)와 중종과 예종의 비호아래 공덕주의의 불교 신앙에 결합되어 있던 북종선(The Northern Chan Sect)에 대한 비난인 것이다. (석해탈 지음,『禪 문밖에 나서다』 p. 160.)
혜가가 눈 속에서 서서 스스로 팔을 잘랐다는 ‘설중단비雪中斷臂’도『전법보기傳法寶紀(712경)』『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713-716년경)』등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보다 이른 시기에 쓰인『續고승전(645)』에는 혜가가 팔을 잃게 된 연유에 대한 다른 기록이 있다. 혜가가 다니던 산에 사람들의 팔을 자르는 도적이 있어, 어느 날 이 곳을 지나다 팔을 잘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혜가는 고통을 참으며 상처를 불로 지져 스스로 치료한 다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행을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는 팔이 잘리는 일이 드문 일이 아니어서 혜가와는 사형지간인 법림法林(담림曇林)이라는 스님도 도적을 만나 팔을 잘려 혜가가 치료해준 것으로 되어 있다.
『전법보기』는 달마가 ‘능히 몸과 목숨으로써 법을 위하여 아까워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하고, 혜가는 그의 왼팔을 잘리고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후에 소림사에 거주하였다는 등등을 덧붙인다. 그리고『능가사자기』는 여기에 또 눈 속에서 가르침을 애걸하며 3경에 이르렀다는 부분이 추가되는데, 눈 속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데서도 발견된다.『속고승전』에 나오는 보리달마-혜가-승나僧那-혜만慧滿으로 이어지는 계보에 등장하는 혜만에 대한 일화다.
《속고승전》중에 유사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다르다. 실제로 팔 잘라 법을 구하고자 했던 스님은 혜만이라 불리는 대장부였다. 사실을 살펴보자면 정관 16년인 642년에 옷 한 벌과 하루 한 끼의 식사를 하며, 한 곳에 머무르지 않던 혜만은 어느 날 낙양의 남회선사 옆에서 밤을 보내게 된다. 그날 밤 묘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눈이 3척이나 쌓였다. 아침에 절에 들어가 담광법사를 보니 어디서 왔는가를 궁금해 했다. 머물렀었다는 곳을 찾아가 보니 사방이 5척의 눈으로 뒤덮여 어떻게 그곳에서 밤을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혜가의 단비구법은 혜만의 이야기를 적당하게 각색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 [차차석 박사의 선불교 백문백답] 혜가의 단비(斷臂) 구법과 그 상징성, 만불신문 2004-03-20.)
이후 단비구법의 이야기는 당唐 정사正史인『구당서舊唐書』에 실리게 되면서 점차 사실처럼 굳어졌고, 선가의 구법 모델로 채택되었다. 요즘도 새로 들어온 신입 스님을 하루 종일 마당에 세워 놓는다든지, 일본 임제종에서 행해지는 일련의 선방입문에 대한 통과의례 전통이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당시 널리 유행하던 승조僧稠의 소승선小乘禪인 사념처법四念處法과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기획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의견이다. 이야기를 통해 굳은 신심과 극단적인 인내를 강조하고, 좌선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직관이 요구되는 달마 선법의 우수성을 내세우기 위한 무대장치인 것이다.
당시 인도는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하던 때로, 다수의 불교학의 엘리트들이 돌파구를 찾아 중국으로 들어온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양나라는 사찰이 2,846개나 되었고 승려가 82,700명이나 될 정도로 불교가 융성하였으므로, 모든 불교계 인재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불교유입 초기에는 여러 가지 인도 선법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다양한 선법을 소개하고 가르쳤는데, 달마의 선법禪法도 그중 하나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송대宋代에 들어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 혜홍각범(慧洪覺範, 1071∼1128) 선사는『임간록林間錄』에 저간這間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19. 참선과 깨침의 관계/달마(達磨)스님
보리 달마스님이 과거 양(梁)나라에서 위(魏)나라로 가는 도중에 숭산(嵩山) 아래를 지나다가 소림사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주장자를 기대어 놓고 벽을 향하여 앉아 있었을 뿐이지 참선을 익힌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사람들은 그 까닭을 까마득히 모르고서 이 일을 가지고 달마스님이 참선을 하였다고 말들 한다. 선(禪)이란 여러 수행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어떻게 참선으로 성인의 도를 다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였고, 역사를 쓰는 자도 덩달아 선승의 전기를 쓸 때면 마른 나무나 꺼진 재와 같은 무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고 성인의 도가 선(禪)에 그치는 것도 아니지만 한편 선을 어기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역(易)이 음양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한 음양을 떠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예이다. (선림고경총서 7, 백련선서간행회 편,『林間錄 上』 pp. 45~46.)
아무튼 달마의 선법과 사상은 혜가에게 전해졌고, 혜가에게 전해진 선의 가르침은 당대 특히 7세기경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면서 화려하게 꽃피운다. 선의 황금시대를 맞았던 중국 선종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동양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수많은 거장들 중에 달마가 선종의 초조가 되었는가?
달마에 대한 기록은『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547)』『약변대승입도사행略辯大乘入道四行(600)』『續고승전(645)』『전법보기傳法寶紀(712경)』『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713-716년경)』『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경)』『보림전寶林傳(801)』『조당집祖堂集(952)』『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선적禪籍들을 비교해보면 보리달마의 달마는 <達摩>와 <達磨>의 두 가지로 나타난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대략 <達摩>는『속고승전』과『전법보기』『능가사자기』등 초기 자료에, <達磨>는『송고승전宋高僧傳(988)』과『경덕전등록』등 비교적 후기 자료에 나타난다.
앞장에서 논의 하였지만 초기 달마는『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의 저자인 인도 출신의 학승 달마다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 초기부터 당나라 무렵까지의 역사적 달마는 <達摩>로 표기되다가, 송대 이후 선종이 정착하고 나서 초조로서의 달마는 <達磨>로 표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조 달마의 모습은 선종 초기 격동기를 겪으면서 달마다라와 보리달마가 오버랩 되어 점차 하나의 얼굴로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달마다라와 보리달마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으나, 뒤에 오면 서서히 같은 사람으로 간주되다가 지금의 달마로 완성된 것이다. 중국 초기 선종이 티베트로 전해질 때 초조 역시 달마다라여서, 지금도 티베트에서는 달마다라를 18나한의 하나로 모시고 있다.
중국 선종에 있어서 보리달마의 얼굴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선종각파禪宗各派의 요청에 응하여 여러 가지로 그의 모습이 변해, 다음에서 또 그 다음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만들어졌으나, 원래 초기 선종의 초조初祖로서의 보리달마菩提達摩의 모습은 두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하나는『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나『약변대승입도사행略辯大乘入道四行 제자담림서弟子曇林序』혹은『續高僧傳(645)』에 전傳하고 있는 것처럼 6 세기경 북위北魏의 수도 낙양洛陽에 내조來朝한 외국 유행승遊行僧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중국선종中國禪宗의 발전과 더불어 차제次第로 성립된 초조初祖로서의 모습인 것이다.
(鄭性本 著,『中國禪宗의 成立史 硏究』 p. 30)
이와 같이 달마는 6세기 초 남인도에서 건너온 ‘역사적 인물’과 선종의 ‘상징적 인물’이 모여, 하나의 인물로 새롭게 편집되었다고 하겠다. 우리가 보는 달마상 또한 『보림전寶林傳(801)』이 출현하면서 부터이다. 당나라 이전 문헌에는 역사적 인물로 표현한 데 반해, 송나라 이후 달마상은 여러 가지 기이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등장한다. 이와 같이 달마는 오랜 시간을 두고 이미지 조각들이 조합되면서 실재 달마하고는 거리가 있는 가공의 인물로 재창조된 것이다. 그렇게 가공의 인물 달마는 마침내 중국 선종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2) 달마의「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많은 선적禪籍들이 달마의 저작이거나 달마의 가르침이라고 전해지지만, 대부분 당나라 이후 성립된 문헌들로 신뢰성은 다소 떨어진다. 내용에 있어서도 대부분 당·송대의 선적禪的 사유思惟체계를 따르고 있어 달마의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거기다 기록들 사이에는 서로 불일치하는 부분까지 발견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호한 측면도 존재한다.
다행스럽게도 금세기 초 중국 돈황敦煌에서『전법보기』『능가사자기』이른바 ‘달마의 설’이라고 하는『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등 초기 문헌들이 발견되면서 달마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달마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과 어록들로 구성되어 있는『이입사행론』은 종래에는 별로 주목 받지 못한 문헌이었지만, 근래 들어 달마의 친설親說임이 밝혀지면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달마의 유일한 저작으로 그의 선사상을 말해주는 확실한 자료이면서, 현존하는 선문헌 가운데『속고승전』이전에 성립된 유일한 자료이기도 하다.
『속고승전』을 쓴 도선(道宣, 596~667)은 담림의 서문과『이입사행론』을 참고하여, 승조僧稠와 달마의 선법을 ‘소승선小乘禪’과 ‘대승선大乘禪’으로 구별하였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의식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승조의 선법을 소승선이라 하고, 좌선 중심의 달마선법을 대승선이라고 칭하였다. 그는 달마의 대승선은 반야사상에 기초를 둔 ‘허종虛宗’이며,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벽관이라는 실천으로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평하였다. 소승선에서 반야공관般若空觀을 중심으로 한 대승선으로 가는 전환점轉換點에 달마선법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도선은『속고승전』「습선총론」에서 달마의 선법을 ‘허종(虛宗)’이라고 말하고 ‘대승벽관(大乘壁觀)의 공업(功業; 禪法)은 최고였다’라고 극찬하고 있는 것에서 허종의 실천이 대승벽관이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도선은 사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달마의 유일한 친설인『이입사행론』과 담림의 서문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즉 담림의 서문에 ‘달마의 입지(立志)는 마하연도(摩訶衍道)에 있었다’라는 말인데, 이러한 달마의 대승선에 최초로 주목한 사람이 다름 아닌 도선이다. 그는 불타선사(佛陀禪師)의 제자 승주(僧椆)가『열반경(涅槃經)』의 사념처법(四念處法)에 의거하여 수행한 선사라는 사실에 대하여 달마를 대승벽관의 실천자로 간주한 것이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 157.)
당시는 대형사찰이나 대형 불상, 대형 탑 등을 모시고 신앙하는 가람불교伽藍佛敎가 성행하였고, 경전풀이를 주로 하는 강설불교講說佛敎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수행법 또한 승조의 소승선법인 사념처법四念處法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달마는 좌선을 통한 ‘대승벽관大乘壁觀’을 제창提唱하였다. 당시 유행과는 대치對峙되는 달마 대승선의 실체는?『약변대승입도사행略辨大乘入道四行』「제자 담림 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약변대승입도사행 제자 담림 서
달마는 서방 남인도 사람으로서 대바라문국 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신지(神智)가 투철하고 들은 바는 모두 깨달아 알았다. 뜻은 대승불교에 두었다. 때문에 출가하여 불도를 받아 일으키고 마음을 무위적정(無爲寂靜)에 감추며 세간을 관찰하여, 내외에 모두 통달하고 덕이 높아 세간의 사람들을 뛰어 넘었다. 변방지역의 불교가 점차 쇠퇴해 가는 것을 슬퍼하여 마침내 멀리 산과 바다를 건너 중국의 위나라 땅에 포교하러 왔다. 소박하고 정직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귀의하였지만 이견을 가진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였다.
그 때에 도육과 혜가 두 승려는 젊어서부터 훌륭하고 고매한 뜻을 품어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여 수년 동안 정성껏 섬기면서 겸허하게 가르침을 받아 스승의 정신을 잘 마음으로부터 체득하였다. 달마는 그들의 정성에 감동하여 불도의 참 진리를 가르쳐, “여법하게 마음을 안정시키고, 여법하게 행동을 일으키며, 여법하게 중생을 대하고, 여법하게 공부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대승안심의 가르침이니, 사람들을 잘못되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여법하게 마음을 안정시키라는 것은 벽처럼 마음을 안정하라는 것이다. 여법하게 행동을 일으키라는 것은 네 가지의 실천이다. 여법하게 중생을 대하라는 것은 계율을 지켜 세간의 비난을 방지하는 것이다. 여법하게 공부해 나아가라는 것은 그러한 방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 간단하게 가르침의 유래를 서술했지만 자세한 것은 뒤의 본문에서 서술하겠다. (현각, 동국대 선학과 교수, 한국 선학회 회장,「보리달마(菩提達磨)의 선사상」.)
여기서 담림은 ‘여법하게 마음을 안정시키고[如是安心], 여법하게 행동을 일으키며[如是發行], 여법하게 중생을 대하고[如是順物], 여법하게 공부해 나아가야 한다[如是方便]’는 ‘4여시四如是’가 대승안심의 가르침[此是大乘安心之法]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안심은 벽관[如是安心者 壁觀]이고, 실천은 사행[如是發行者 四行]’이라고 하였다. 구체적인 실천 법으로서 벽관이라는 새로운 대승선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사념처법이나 천태의 지관止觀과는 다른 새로운 선법이다.
소승불교의 선관(禪觀)은 사념처(四念處)에 대한 수행이다. 그 소승 선관의 대표적 인물이 승조(僧稠:480-560)이다. 그는 파미르 고원 동쪽 땅〔중국〕에서 최고의 선학자라 칭해진다. 불타선다, 보리류지 등도 그러한 관법에 대가였다. 사념처란 우리의 몸, 감각, 마음, 대상이 무상하며 공이고 무아라고 관해가는 것이다. 죽은 이의 몸이 썩어문드러져 하얀 뼈로, 먼지로 변화는 과정을 살피는 백골관(白骨觀)이나 그와 유사한 맥락의 부정관(不淨觀)도 사념처 수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관법에는 숨을 고르게 쉬는 수식관(數息觀)이 동반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그들은 번뇌를 끊고, 그 부산물로서 신통력을 얻어 신비한 행위와 기적을 부리며 건강과 장수를 얻었다. 이것은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중국인의 기질과 딱 맞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선은 번뇌를 끊기 위한 선, 익히는 선(習禪)일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벽관이란 장벽처럼 굳게 된다는 의미다. 그 결과 마음에 안과 밖의 분별이 사라져, 객진 위망(客塵僞妄)에 휩쓸리지 않은 마음의 본래 청정한 상태를 확인하게 된다.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라, 본래 번뇌가 없는 청정한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익히는 선이 아닌 깨닫는 선이다. 그래서 안심(安心)을 얻게 된다. 그 상태를 일러,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의 허덕임이 없으며 마음이 장벽과 같을 때 비로소 도에 들어간다.(종밀, 『선원제전집도서』)”고 했다. (출처 : 조계사 : http://www.ijogyesa.net/)
달마의 가르침은 “이입사행二入四行”으로 총괄된다. 달마가 지은『이입사행론』에 의하면 이입二入은 이치로 들어가는 ‘이입理入’과 수행으로 들어가는 ‘행입行入’을 말한다. 사행四行은 행입을 위한 네 가지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지칭한다. 달마는 도道에 들어가는 길로 원리적인 방법인 ‘이입’과 실천적인 방법인 ‘사행’으로 요약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입사행설은 도道에 들어가는 요문으로서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으로 구성되었는데, ‘이理’는 진리가 진리인 원리이며, ‘행行’이란 그러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말한다. 달마는 그 실천행을 넷으로 나누어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입사행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입入’은 불교 용어로서 ‘깨달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 ‘입열반(入涅槃)’. ‘입능가(入楞伽)’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뜻이며,『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 ‘사상증회 명지위입(捨想證匯 名之爲入)’이라고 주석하고 있는 것처럼 ‘입’은 불교용어로서 공사상의 실천성을 가진 말이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 158.)
이입理入의 ‘이理’는 ‘진리’이고 ‘입入’이란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이입은 진리를 깨닫는 것 혹은 문자 그대로 진리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마는『이입사행론』에서 ‘이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사람이 도에 이르는 길은 많다. 그러나 간추려 말하면 다음 두 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는 이입理入이고 다른 하나는 행입行入이다. 그중 이입이란 경전의 가르침[教]에 의지해 근본[宗]을 깨닫는 것으로, (먼저) 살아있는 것들과 함께 범부나 성인[含生凡聖]이 모두 동일한 진성眞性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깊게 믿는[深信] 것이다. 다만 (범부는) 번뇌[客塵]와 망상妄想에 덮여 있어서 드러나지 않는데, 만약 망상[妄]을 버리고 진리[眞]로 돌아가 벽관壁觀에 머물면[凝住], 거기는 나와 남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굳건히 앉아 흔들리지 않고[堅住不移], 문교文教를 좇지 않으면, 이는 곧 진리[理]에 부합附合[冥符]하는 것이니, 분별分別없고, 고요하고, 무위無為한 경지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이입理入이라 한다.
夫入道多途,要而言之,不出二種:一是理入、二是行入。理入者:謂藉教悟宗;深信含生同一真性,但為客塵妄想所覆,不能顯了。若也捨妄歸真,凝住壁觀,無自無他,凡聖等一,堅住不移,更不隨文教,此即與理冥符。無有分別,寂然無為,名之理入。
이입을 위해서는 경전을 통해 불교의 대의大義를 깨달아야 하는데, 우선 범인과 성인(중생과 부처)이 모두 똑같은 진성眞性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깊게 믿고[深信], 이를 기반으로 한 벽관을 실천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 벽관이란 무엇인가? 벽관의 벽壁이란 밖으로부터 객진客塵과 망념妄念이 침입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가옥의 외벽과 같이 외부로부터 불어 닥치는 풍진風塵을 방지한다는 의미이다.
벽관이란 또 이러한 벽을 마주보고 자세히 들여다본다, 관찰한다는 의미다. 혹은 벽이 된다, 벽이 되어 관찰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를 따르자면 벽이 곧 마음[心]의 비유이고 관은 그 마음을 본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본문의 벽관에 응주한다는 ‘응주벽관凝住壁觀’의 ‘응주’는 무엇인가? 이는 金剛經의 ‘운하응주云何應住’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壁觀이라는 것은 달마선법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특히 安心을 벽관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안심에 대한 달마의 견해가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安心에서 心은 金剛經에서 수보리가 세존에 대하여 질문한 세 가지 곧, 云何應住 ․ 云何修行 ․ 云何降伏其心가운데 첫째의 云何應住의 구체적인 내용인 自性淸淨心에 어떻게 住해야 하는가의 心 바로 그것이다. 그 자성청정심에 住하되 집착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방법이 曇琳의 如是方便의 내용이기도 하다. (김호귀,「二入四行의 構造와 그 傳承」.)
벽관에 머물면 자타自他와 범성凡聖의 분별이 없어지고, 글이나 말에 끌려 다니는 일이 없는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른다. 따라서 벽관은 모든 번뇌와 거짓된 망상이 들어갈 수 없는 무념의 상태이며 내면적인 정신통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통일하여 벽과 같이 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본래의 상태,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상태로 머물게 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일체중생이 청정한 본성을 심신深信하라는 것은,『열반경』에서 말하는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불성佛性 설을 깊게 믿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벽관을 실천하라고 하였다. 이는 교敎를 넘어 선禪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좌선수행을 의미한다. 마음을 안정하여 벽관 수행을 하면, 마음에 안과 밖의 분별이 사라지고, 객진위망客塵僞妄에 휩쓸리지 않는 청정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라, 본래 번뇌가 없는 청정한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입이란 간단히 말해 불성을 믿고 좌선을 행하면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기존의 익히는 선이 아닌 깨닫는 선으로, 이 사상은 이후 홍인의 ‘금강불성金剛佛性’으로, 혹은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견성頓悟見性’으로 이어진다.
藉敎悟宗이라는 말은 그대로 敎에 의지하여 宗旨를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 敎라는 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一大示敎를 말한다. 그 가르침을 深信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이 深信은 곧 一切衆生悉有佛性을 自覺하는 것이다. 그 자각의 한 가운데는 중생과 부처의 자타가 없고 성인과 범부의 구분이 없다. 그 활용태가 곧 壁觀이다. 그러기에 壁觀은 文敎의 형태이고 文敎는 壁觀의 내용이다. 文敎와 壁觀이 다른 것이 아니다. 객진번뇌는 단지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일 뿐이지 달리 번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번뇌는 보리의 중생적인 형태이고, 보리는 번뇌의 부처적인 내용일 뿐이다. 이와 같은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입장이 곧 달마 理入의 성격이다. (김호귀,「二入四行의 構造와 그 傳承」.)
다음 ‘행입行入’은 이입二入의 하나로,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네 가지 실천, 즉 ‘사행四行’이 요구된다. 사행은 억울함을 참는 ‘보원행報寃行’, 인연因緣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연행隨緣行’,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무소구행無所求行’, 그리고 불법佛法에 맞게 사는 ‘칭법행稱法行’이다. 달마는 '행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붙이고 있다.
행입行入은 네 가지 실천[四行]이니, 일체의 모든 행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럼 네 가지는 무엇인가? 보원행報寃行, 수연행隨緣行, 무소구행無所求行, 그리고 칭법행稱法行이 그것이다.
그럼 무엇을 보원행報怨行이라 하는가? 도행道行을 닦는 수행인이 괴로움을 당한다면 마땅히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나는 오랜 옛날부터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근본[本]을 버리고 말초적인 것[末]을 따랐으며, 생사의 물결 속에[諸有] 유랑하며 수많은 원한과 증오를 일으켰다. 남을 거스르고 피해를 입힌[違害] 일도 끝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잘못하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은 과거의 잘못에 기인한 것으로, 다만 악업의 열매가 익어 과보果報를 받은 것일 뿐이다. 하늘이 벌을 내린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준 것이 아니니, 참고 달게 받을 일이며[甘心忍受], 원망하고 하소연 할 일이 아니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괴로움을 만나게 되더라도 근심하지 말라. 어째서 그러한가? 의식[識]은 이러한 도리[本]를 완전히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 마음은 진리[理]에 상응하고, 몸은 원한을 견디며, 도를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이를 보원행이라 한다.
다음 둘째는 수연행隨緣行이다. 중생은 본래 무아無我로 자아自我란 것이 없으며, 인연因緣과 업業에 따를 뿐이다. 고통을 당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역시 인연因緣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만약 우리가 훌륭한 성과[勝報]나 영광스러운 명예[榮譽]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뿌린 씨앗의 결과일 뿐이다. 인연因緣이 다하면 그것은 또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그러니 기뻐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얻는 것과 잃는 것[得失]이 모두 인연을 따른다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들뜨거나 낙심落心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기쁜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그윽하게 도道를 따른다. 이를 일러 수연행이라 한다.
셋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이다. 세상 사람은 오래도록 미혹하여 가는 곳마다 탐욕貪慾을 부리니, 이것을 불러 구함[求]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있어[悟], 진리[理]를 알아 세속에 빠지지 않는다[反]. 마음을 편히 하여 무위無為를 실천하고 몸[形]을 자연의 흐름[運]에 맡긴다. 만유萬有는 실로 공空함을 깨달아 즐겁기를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공덕녀와 흑암녀는 항상 서로 동반하여 따르니, 삼계三界에 사는 것은 마치 불타는 집에 사는 것과 같고, 몸은 항상 고통스러울 뿐이다.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요달了達하면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생각을 쉬며 구하는 바가 없게 된다. 경전에서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요, 구하는 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즐겁다. 구하는 바 없는 것이 진실로 도道의 길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무소구행하라.
넷째, 칭법행稱法行이란 본성은 본래 청정하다는 도리[理], 그것을 법法으로 삼는 것이다. 이 도리[理]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공空하여, 더러움이나 집착함이 없고 이쪽과 저쪽[彼此]의 구별도 없다. 경전(『유마경維摩經』)에 이르기를, ‘불법[法]에는 중생이라는 것이 없으니, 중생이라는 오염[垢]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중생은 본래 부처). 법에는 나[我]라는 것이 없으니, 나라는 때[垢]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자성은 본래 무아)’라고 하였다. 지혜로운 자는 이 도리[理]를 능히 믿고 이해[信解]하여 응당 법에 따라 행동한다. 이러한 법은 아까워하는 일이 없으므로 몸과 생명 그리고 재물[身命財]을 보시布施하여도[捨施] 아까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몸, 생명, 재물이 본래 공함을 잘 이해하고, 의지하거나 얽매이지 않으며, 오직 오염을 씻기 위해 중생을 구제하면서도 그러한 내색[相]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자리自利(혹은 行)로써 능히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利他의 길이요, 또한 장엄한 보리菩提의 길인 것이다. 보시가 이러한 것이니 다른 다섯 가지도 또한 그러하다.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6바라밀[六度]을 수행하면서도 “행하는 바가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을 칭법행稱法行이라 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보원행은 빚을 갚는 행으로, 원망하는 마음과 그에 따른 정신적 고뇌를 극복하는 실천이다. 한 마디로 억울함을 참고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빚을 갚는 심정으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수연행은 인연을 받아들이는 행으로, 고와 낙이 모두 인연에 의한 것임을 알고 묵묵히 따르는 것이다. 제법이 본래 공한 실상을 체득하여,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음을 자각하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다.
무소구행이란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으로, 세속적인 것에 대한 허망한 욕심을 버리는 행이다. 무위법에 마음을 두고 몸은 자연의 운행에 맡겨 자족하여 원하는 바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칭법행이란 불법을 따라 사는 것이다. 사람들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므로 이를 따라 살면 얽히거나 물듦이 없게 된다. 법을 따라 살면 보시의 덕을 실천하되, 집착도 대립도 없어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동시에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이입二入과 사행四行 다시보기
달마의 이입사행을 다시 간단히 정리해보자. 사람이 도에 들어가는 길은 많지만, 요약하면 벽관에 의한 이입의 방법과 사행에 의한 행입의 방법 두 가지다. 이입이란 경전을 통해서 이치(이론)를 알고 벽관에 충실하면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행입은 네 가지의 생활방식인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그리고 칭법행을 실천하므로 써 깨달음이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입은 책이나 말, 좌선 혹은 명상 등을 통해서 접근하는 방식이고, 행입은 실천을 통해 접근하는 방식이다. 하나는 정신으로, 또 하나는 육체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한편 달마의 이입사행의 특징은, 이입二入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두 가지 길이라는 뜻이다. 이입이든 행입이든 둘 중 하나만 행하면 도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발작 더 들어가 생각해보면, 행입은 이입의 구체적인 실천이기 때문에 이입과 행입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이입은 행입의 원리가 되고 행입은 이입에 대한 실천이기 때문에, 이입만 하고 행입은 안한다든지, 행입만 하고 이입은 안한다든지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달마의 이입(二入)을 따로따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치로부터 들어가는 것과 실천으로부터 들어가는 것[二入與行入]이란 동일한 사상(事象)을 이치와 실천[行]면에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는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본체와 작용[體用]의 개념으로 판단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이치 없는 실천, 실천 없는 이치는 절름발이의 걸음걸이다. 그리고 또 수선자(修禪者)는 이를 개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 그것도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 이른바 사상(事上)에서 이해를 하고 사중(事中)에서 법을 보는 것이다. (스즈끼 다이세쯔/東峰 옮김, 다르마 총서 9 『禪의 진수 - 선사상·선행위·선문답』 p. 21.)
이입 없는 행입은 존재할 수 없고, 행입 없는 이입 또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마치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두 바퀴가 필요하고,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두 날개가 필요한 것과 같다. 다만 행입은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천 또한 뇌를 통한 정신의 표출이기 때문에, 행입도 일종의 이입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든다. 결국 이입이나 행입은 붙여진 이름만 다를 뿐 크게 보면 하나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달마의『이입사행론』은 이입을 하면 행입이 되고 행입을 하면 이입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그 원리와 실천이 어떻게 다른지를 두 가지로 분리해 설명한 것에 불과해 보인다. 이론과 실천을 따로따로 제시하였지만 관습에 의한 행동양식은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입과 행입은, 마치 본체本體와 작용作用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이 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달마의 가르침은 단순히 理入과 行入이라는 각자의 입장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형이상학적인 이법으로서의 理入은 곧 철저하게 행위로 드러나는 行入과 혼동되지 않고, 그 자체가 뚜렷한 영역을 지니면서 그것이 동시에 깨달음의 원리로서 확대되어 행입의 하나하나에 理入의 실상이 자리하고 있다. 곧 理入 없는 行入은 무모한 행위이기 십상이고, 行入 없는 理入은 空理空論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의미에서 달마는 行入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성을 理入이라는 원리성으로 재정립한 것이다. 왜냐하면 달마의 行入은 이전에 벌써 소승불교의 실천인 五亭心觀에서 드러나 있었으며, 華嚴經 속에서도 그 상세한 실천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김호귀,「二入四行의 構造와 그 傳承」.)
달마의『이입사행론』은 행입이라는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을 이입이라는 원리로 재정립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더구나 행입의 원천이 되는 실천 사항들은 소승불교의 선정법인 오정심관五停心觀이나『화엄경華嚴經』에 이미 나와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전체적인 그림은 보살의 현실생활은 이입을 떠나지 않는 행입의 실천이요, 행입의 실천은 곧 이입의 완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 네 가지 실천수행은 모두 그 바탕에 大乘의 空觀思想이 깔려 있다. 이것은 달마의 理法에서 안심수행으로 완성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형태이지 안심의 이법에서 터득하지 못한 것을 네 가지 실천으로 완성해 나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법의 원리는 이미 이법 그대로 완성되어 있다. 다만 이법의 원리가 네 가지 실천수행으로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드러나고 있는 것이 四行이라는 형태의 전개이다. 곧 보살의 현실생활은 理入을 떠나지 않는 行入의 실천이고, 行入의 실천은 곧 理入의 자기완성이기도 하다. 곧 달마에게 있어서 안심의 理法은 벽관의 四行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理入은 철저하게 행위와 혼동됨이 없이 그 자체의 뚜렷한 영역을 지니면서 더불어 깨달음의 원리로서 항상 行入으로 확대되어 낱낱의 행위에 理入의 실상을 부여하고 있다. (김호귀,「二入四行의 構造와 그 傳承」.)
달마의『이입사행론』과 유사한 내용이 들어 있는 책으로『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 있다. 5세기 중엽에 번역된 역자 미상의『금강삼매경』은 당시 유행하던 모든 교리들을 모아 놓은 종합참고서 같은 책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로부터 당唐 대에까지 중국으로 들어와 유행한 여러 설과 교리들을 한데 모아 놓았는데, 신라의 원효(元曉, 617~686)는 이 책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인『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남겼다. 해설서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이 책에는 이입과 행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을 붙이고 있다. ([經]은『금강삼매경』의 내용이고, [論]은 원효의 주석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2입(入)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마음이 본래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들어감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2입(入)이란 첫째는 이입(理入)이고,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이입(理入)이란 무엇인가?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고 (같고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객진(客塵)으로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각관(覺觀)에 집중하여 머물고,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자세히 살피고,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범부와 성자가 둘이 아님을 알고, 금강심(金剛心)의 경지에 굳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적정무위(寂靜無爲)하여 분별이 없으면 이를 이입(理入)이라고 한다.”
[論] 여기서부터는 문답을 통해 두 가지 들어감[二入:理入·行入]을 개별적으로 밝힌 부분이다. 물음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묻고 나중에 논란한다. 답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답하고 나중에 정리[通]한다. 답에도 세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수를 표시하고, 둘째는 이름을 열거하고, 셋째는 그 특성을 차례로 설명한다.
여기서 ‘이입(理入)’이란 이치[理]에 순응하여 믿고 이해하나 아직 증행(證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입’이라 하며, 지전(地前)의 지위에 해당한다. ‘행입(行入)’이란 이치를 증득하고 수행하여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하며 지상(地上)의 지위에 해당한다.
이입(理入)에 관한 글은 네 구절로 나뉜다.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고 (같고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객진(客塵)으로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까지는 10신(信)의 들어감을 말한다.
이 중에 ‘같지 않다[不一]’함은 중생의 모습이 참된 성품과 다르지 않으나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고,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不共]’함은 (중생과 진성이) 하나인 동시에 다르기도 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둘째 구절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각관에 집중하여 머물고[不去不來凝住覺觀]’는 10주(住)의 들어감을 말한다. (10주의 수행자는) 중생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거나 가지 않는다. 인공(人空)을 관찰하는 문에서 그 마음이 고요히 머물러 불성(佛性)이 가거나 오지 않음을 관찰하여 깨닫기 때문이다.
셋째 구절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자세히 살피고’는 10행(行)의 들어감을 말한다. 그들은 이미 법공(法空)을 얻고, 법공문(法空門)에 의하여 불성(佛性)에는 법상(法相)이 있지도 않고 공성(空性)이 없지도 않음을 자세히 관찰하기 때문이다.
넷째 구절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범부와 성자가 둘이 아님을 알고’는 10회향위(廻向位)의 이입(理入)을 말한다. 이미 자타(自他)에 평등한 공(空)을 얻었으므로 마음이 금강과 같아져서 물러서지 않고 굳게 머문다.『범망경(梵網經)』에서는 10금강(金剛)이라 하고,『인왕경(仁王經)』에서는 10견심(堅心)이라 하는데 이것이 10회향의 다른 이름이다. (신라국(新羅國) 사문(沙門) 원효(元曉) 지음, 이인혜 번역,『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4-2-4 입실제품(入實際品).)
원효는 이입의 내용을 보살의 수행계위인 52위를 참고하여 네 구절로 나누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행입에 대한 [經]과 [論]이 이어진다.
[經] “행입(行入)이란 마음이 어디로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고, 영상이 흘러가거나 바뀜이 없으며, 있는 곳에서 고요히 염(念)하되 구함이 없으며, 바람이 북치듯 하더라도 대지같이 움직이지 않고, 마음[心]과 나[我]를 버리고 떠나서 중생을 제도하되 생함도 모양도 없으며, 취하거나 버리지 않음을 말한다.”
[論] ‘행입(行入)’이란 지상(地上)의 수행자가 깨달아 들어가는[證入] 행을 말한다.
‘마음이 어디에도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는다[心不傾倚]’함은 여리지(如理智)에서 나오는 마음은 반연하는 일이 없는데, 반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영상이 흘러가거나 바뀜이 없다’함은 여리(如理) 한 경계는 3제(際)를 떠나 있으므로 유전 변화하는 경계의 상(像)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세간의 모든 복락(福樂)에서부터 심지어 보리대열반(菩提大涅槃)의 과(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도 원하고 바라는 것이 없고, 평등함을 통달하여 이것저것을 가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의 바람이 북처럼 두들겨 와도 움직임이 없으니 이것이 자리행(自利行)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음[心]과 나[我]를 버리고 떠나서’이하는 다른 사람을 들어가게 하는 행을 말한다. 2공(空)을 증득함으로써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떠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구할 능력을 갖는다. 마음에 생하는 바가 없고 경계의 모습도 없지만 그렇다고 적멸(寂滅)의 성품을 취하지도 않아서 항상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행[自利·利他]을 행입(行入)이라 한다. (신라국(新羅國) 사문(沙門) 원효(元曉) 지음, 이인혜 번역,『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4-2-4 입실제품(入實際品).)
전체적으로 경은 달마의『이입사행론』과 유사하게 이입과 행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다만 행입에 대해서는 사행으로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정리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원효는 이입의 내용을 보살의 수행계위 52위에 비유하였는데, 이입의 경지를 초지初地인 41위 이전 단계라고 보았고[位在地前], 행입은 41위 환희지歡喜地 이상의 단계로 설정하고 있다[位在地上]. 이치에 따라 믿고 이해했어도 아직 증득하여 행동하지 못한 단계가 이입이고, 이치를 증득하고 수행하여 무생행無生行에 이른 단계를 행입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원효는 이입과 행입을 차별적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이입을 행입 이전의 단계, 행입보다 하위의 경지라고 해설하고 있다.
원효가 일시에 몸을 100 곳에 나타냈었다는 설화를 거론하면서, 그가 그렇게 초지보살初地菩薩과 같이 무애자재無碍自在한 것은 초지의 경지에 들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원효의 무애행無碍行은 행입의 경지에서 나온 것이며, 이는 곧 원효가 초지初地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주장이다. 논거를 설화에 두고 있어 다소 황당한 측면도 있지만, 원효의 위계가 성자위聖者位에 해당하는 초지에 해당하고, 그래서 수행은 물론이고 교화에서도 유감없이 무애행이 발휘했다고 본 것이다.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16. 자유인 원효」법보신문 2012.09.18. 金相鉉, 동국대학교 교수,「원효성사의 실천행」참조.)
참고로, 이입과 행입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우리의 기억記憶을 매개로 분석해 보자. 기억은 학습, 사고, 추론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이다. 정보를 저장하고 유지하며, 또 다시 불러내는 회상의 기능을 말하는데, 기억에는 외현적 기억(外現的 記憶, Explicit Memory)과 암묵적 기억(暗默的 記憶, Implicit Memory)이 있다. 외현적 기억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회상할 수 있는 서술적敍述的 기억으로, 약속 시각을 기억한다거나 혹은 특정한 사실, 사건, 일화들을 떠올리는 등의 소환된 기억을 말한다. 암묵적 기억은 무의식적인 기억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기억될 수 있는 비서술적非敍述的 기억을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시간과 공간상에서 체계화할 수 있는 것은 외현기억 때문으로, 책이나 말, 좌선 등을 통해 이치를 깨우쳐 도에 이르는 이입의 과정은 외현기억을 기반으로 한다. 반면에 암묵기억은 몸에 익어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타나는 기억으로, 신발 끈을 묶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 모두 암묵기억 때문이다. 몸으로 실천하는 체질화된 기억으로 행입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정리하자면 원리나 정신에 해당하는 이입은 외현기억 때문이라면, 몸에 해당하는 행입은 암묵기억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이란 이입에서 행입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종국에는 무의식속에서 행해지는 보살행을 목표로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시작은 외현기억에 의한 이입으로 하지만, 마무리는 암묵기억에 의한 행입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적으로 보면 원효가 말하는 이입 후 행입한다고 순차적으로 보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달마의 이입사행에 대한 수행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조계종의 한 학인은 이입은 철저하게 수행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행입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물론 우리는 이미 이입이 행입이고, 행입이 이입이라는 이론을 편바 있다. 그렇지만 이입은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고 행입은 ‘자비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수행자의 입장에 대해 말한다.
부처님이나 역대 조사들 모두가 불교의 종지를 지혜와 자비라는 두 입장에서 설하고 있고, 자비가 요익중행의 구체적인 실천덕목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을 넘어서서 일체중생을 요익되게 하겠다는 발원이 전제되지 않으면 좌선은 제대로 될 수 없다. 사실 지혜와 자비는 하나이기에 둘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를 성취한다는 것은 자비가 발현된다는 것이요, 자비의 발현이 곧 지혜의 성취가 된다고 대승불교에서는 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견성성불이 곧 그대로 요익중생으로 발현되어야 비로소 좌선이 완성되는 것이다. 좌복 위에서의 올곧은 수행으로 이룬 깨달음이 결코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의 아픔과 번뇌, 고뇌와 질곡을 깔고 앉아 고통을 대신 받는 마음으로 괴로움을 해결하고, 그들을 구제하겠다는 광대한 보현행원이 깃들어 있어야 올바른 수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화, 해인승가대학 3학년,「달마達摩의 이입사행二入四行과 그 현대적現代的 관점觀点」月刊 海印 2012년 10월 368호. 요익饒益: 자비로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넉넉하게 이익을 줌.)
지혜를 증득하는 것과 자비를 구현하는 것은 대승불교의 두 축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요익중생饒益衆生’이고, 일상생활 가운데 이입과 사행의 법륜을 동시에 굴릴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수행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결국 수행의 목적은 친절과 자비라는 평범한 진리를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요사이는 보시에 중점을 두는 재가자나 수행자를 가끔 볼 수 있어 다행이다.
4) 안심安心은 벽관壁觀
앞서 살폈지만 달마의 제자 담림은 서에서 ‘여법하게 마음을 안정시키고[如是安心], 여법하게 행동을 일으키며[如是發行], 여법하게 중생을 대하고[如是順物], 여법하게 공부해 나아가야 한다[如是方便]’는 ‘4여시四如是’가 대승안심의 가르침[此是大乘安心之法]이고, ‘안심은 벽관[如是安心者 壁觀]이요, 실천은 사행[如是發行者 四行]’이라고 하였다.
‘대승안심의 법’은 구체적으로 四行을 설한다. 如是安心(그대로 마음이 평화로운 것) 如是發行(그대로 자연스럽게 행하고) 如是順物(그대로 세간의 일에 따르는 것) 如是方便(그대로 유연한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며, ‘四如是’에 대해 부언하여 ‘如是安心은 壁觀, 如是發行은 四行, 如是順物은 防護譏嫌, 如是方便은 遣其不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안심은 벽관(마음을 장벽과 같이 하여 관하는 것)이며 順物은 세간의 인연을 따른다는 것,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미리 막는 것이며 방편은 물질이나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발행이나 순물방편의 실천은 전부 벽관의 행으로 실천에 포함되는 것이며 벽관의 좌선법으로 안심을 領得하는 것이 달마선이다. (혜원 스님 /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중국선사 사상과 견성 탐구 (3)-달마의 안심 사상」, 법보신문 2004.08.10.)
네 가지 여시如是 가운데서 그 첫째에 해당하는 ‘여시안심如是安心’은 달마와 혜가 사이에 있었던 문답으로 특히 강조되었다. 이른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안심문답은 곳곳의 자료에 나타나는데, 이에 관한 일화가『조당집祖堂集』에 자세하다. 안심에 대한 이 문답은 후대 선문답의 원형原型이 되었다. 짤막한『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을 보자.
신광이 말했다.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케 해 주십시오.”
대사가 말했다.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 주리라.”
신광이 답했다.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얻을 수 없습니다.”
대사가 다시 말했다. “네 마음을 벌써 편안케 해 주었느니라.”
光曰。我心未寧。乞師與安。師曰。將心來與汝安。曰覓心了不可得。師曰。我與汝安心竟。(『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3, 『대정장』 51, p. 219.)
달마는 혜가의 고민을 직접 풀어주기 보다는 혜가로 하여금 마음[心]의 근원을 찾으라고 말한다. 번뇌 망념이 일어나는 장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즉, 달마의 안심법문은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데 있지 않다.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문제로 프레임을 바꾸어 줄 뿐이다. 그리고 순간 혜가는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번뇌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
이 선문답은 선종사에 있어 사자전승의 첫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안심의 가르침은 이후 혜가와 한 승려사이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안심법문의 응용이다. 달마어록『이입사행론』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묻는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답한다.
“네 마음을 가져 오너라. 편안하게 해 주리라.”
또 말한다.
“부디 제 마음을 편안하게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답한다.
“비유하자면 재봉사에게 옷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다. 재봉사는 그대의 비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재단을 할 수 있다. 어떻게 비단 천을 보지도 않고 허공을 잘라 옷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그대가 마음을 나에게 가지고 오지 않는 한 어떻게 그대의 마음을 안심시켜 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실로 허공을 편안하게 해줄 수는 없다네.”
(달마어록『이입사행론』)
이어 혜가는 불안한 마음 대신 ‘죄’나 ‘번뇌’를 넣어 똑같이 문답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는 2조 혜가와 3조 승찬 사이에 있었던 죄에 대한 문답, 승찬과 4대 도신 사이에 있었던 부처의 마음과 해탈에 대한 문답 등으로 변주되어 사자전승의 두 번째, 세 번째 사건으로 선종사에 기록된다. 모두 안심법문의 변용變容이다. 그럼 이렇게 중언부언重言復言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 문답의 중요성은 확장성에 있다. 각기 다른 수행자가 각기 다른 문제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전용轉用해서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그 해결 방법이란 것도 매우 단순하다. 문제의 근원이 본래 실체가 없음을 통찰하게 함으로써 번뇌 망상에서 해방되게 하는 간단한 구도構圖이다.
그뿐 아니라 그 형식 또한 오직 대화로 단숨에 이루어진다. 경전을 공부하거나 수행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대화방식은 선문답으로, 또는 공안으로 발전하였으며, 짤막한 간화선 화두로 완성되었다. 송대 선승들의 공안公案 해설집인『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은 안심법문을 다음과 같이 제 41칙「달마안심達磨安心」으로 수록하고 있다.
달마가 면벽面壁을 하고 있는데, 2조 혜가慧可가 눈 속에 서서 팔을 자르면서 말하기를,
“제가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스승께서는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달마가 말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내가 편하게 해 주리다.”
혜가가 다시 말했다.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내가 이미 그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느니라.”
無門慧開,『禪宗無門關』宋 宗紹 編. 四十一 達磨安心 : 達磨面壁。二祖立雪斷臂云。弟子心未安。乞師安心。磨云。將心來。與汝安。祖云。覓心了不可得。磨云。為汝安心竟。
그럼 왜 초기선종은 이렇게 ‘안심’에 집착하였는가? 돈황에서 출토된『능가사자기』에는 달마의 스승인 구나바드라 역시 안심이라고 하는 문제를 자세하게 가르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구나바드라는 그가 한역한『능가경』에서 ‘부처가 되려는 자는 먼저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는 선(착함)조차 선이 안 된다. 하물며 악에 있어 서랴! 마음이 가라앉고 고요할 때, 선도 악도 강요되는 일은 없다.’라고 말한다. 구나바드라는 이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는 이 나라에 온 뒤로, 도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는 본 일이 없다. 하물며 마음이 안정된 사람이라곤 더더구나 보지 못했다. 때로는 어떤 수련을 하는 사람을 보기도 하지마는, 그것은 미처 도에 일치되지 않는다. 어떤 자는 세간의 평판에 좌우되고, 어떤 자는 자신의 이익이나 목적하고 있으니, 그것은 오직 자존심이나 북돋우고, 질투심(열등감)을 드러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I』「능가사자기·전법보기」 pp. 81~83.)
구나바드라는 말한다. 경전을 강의하고 6바라밀을 실천하여 2선 3선의 경지를 얻는다고 한들, 그것은 다만 착한 행위에 그칠 뿐,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이익을 따르거나 자존심을 세우고 열등감을 드러내는 일일뿐, 도리에 맞는 수행이 될 수 없다는 충고다. 지금도 그렇지만 안정된 마음, 편안한 마음[安心]은 종교사에 있어 대중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무문관』「제23칙 불사선악不思善惡」에는 6조 혜능이 명 상좌에게 한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말라! 그럴 때 어떤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냐?’라는 문답이 나온다. 필자는 이 공안을 대하면서 왜 생뚱맞게 선악을 논하고 그것도 모자라 선악과 본래면목을 결부시키고 있을까? 수많은 예 중에 왜 선악일까? 하는 의문이 계속 찜찜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문헌들을 찾다보니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가 찬撰한『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에는 이 설법이 있기 전에 ‘그대가 이미 법을 위해 왔다면 모든 연緣을 다 막아 쉬어버리고 한 생각도 내지 말라[汝旣爲法而來 可屛息諸緣 勿生一念]’는 부분이 더 있었다. 진정 법을 위해 왔다면 온갖 인연들을 쉬고 한 생각도 내지 말라는 뜻이다.『무문관』에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추가된 부분이 바로 마음의 안정[安心]을 요구하는 부분이어서 구나바드라의 설법과 프레임이 일치한다. 선악을 논하기에 앞서 먼저 마음의 안정을 얻으라는 내용이 그대로 화두에 반영된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는 선(착함)조차 선이 안 된다. 하물며 악에 있어 서랴!’라는 설법이 본래면목과 연결되어 “마음의 안정=본래면목”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불사선악不思善惡> 공안에서의 선악에 대한 논거의 출발이 구나바드라의 설법에 있지 않을까 라는 추론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어쨌든 달마 설법의 핵심은 ‘안심은 벽관’이라 하여 벽관을 실천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 달마와 혜가의 문답은 마음의 실체를 밝히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벽관수행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일반 대중이 가지는 안심이라는 열망을 해결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벽관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혜가가 ‘불안한 마음을 찾는 행위’는 바로 ‘벽관의 실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벽관의 실천’이 바로 안심을 얻기 위해 ‘마음을 찾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곧 혜가가 자기의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결국은 찾을 수 없었다[覓心了不可得]고 말하자 달마가 그대는 이미 안심이 되었다[我與汝安心竟]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혜가가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는 행위는 곧 벽관의 행위이다. 그 벽관의 행위를 거쳐 결국은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불안한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다는 포기 내지는 절망의 뜻이 아니다. 혜가가 벽관을 통하여 관찰해 보니 불안한 마음이라는 것은 애당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안한 마음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말한다. 그래서 달마가 굳이 혜가를 향하여 그대의 불안한 마음을 이미 안심시켜 주었다고 인가하기 이전에 혜가는 벌써 자성청정심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벽관이라는 달마의 가르침이 혜가를 통하여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혜가는 또한 자신이 깨달은 안심의 원리를 다른 제자의 질문에 그대로 적용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혜가가 달마로부터 배운 四行의 구체적인 형태인 報怨行․隨緣行․無所求行․稱法行의 전개원리이기도 하다. (김호귀,「二入四行의 構造와 그 傳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