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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연극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한 알 파치노는 1969년 처음 영화배우로
데뷔한 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물급 연기파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감독 겸 작가. [대부] 3부작에 출연한 뒤 영화배우로서
확고히 자리를 굳힌 그는 최근작 [에니 기븐 선데이]까지 영화와
연극을 오가며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40년 4월 25일 뉴욕시의 이스트 할렘에서 보험외판원인 이탈리아
출신 아버지 살바토레와 어머니 로즈 사이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두 살 되던 때 이혼하여 알 파치노는 어머니와 함께 빈민가에
있던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게된다.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시절의
알 파치노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과잉보호로 7살이 될 때까지
거의 집밖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초등학교때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의 배려로 연극에 출연한 것을
빼고는 평범한 시절을 보냈던 그는 후에 연기예술학교로 옮겨간다.
하지만 오로지 영어에만 흥미를 느꼈던 알 파치노는 17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그후 몇 년간 빌딩 수위나 사무실 우편배달부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하지만 그는 다시 연기수업을 받기 시작하고
조그만 무대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돈을 모은 알 파치노는
허버트 배르그호프 스튜디오에 등록하고 드라마 선생 찰리 라우톤
아래서 본격적인 연기수업을 받게된다.
본격적인 연기수업으로 연기자의 길을 걷게된 알 파치노는 연극무대에
참여, 드디어 [호랑이는 넥타이를 매는가? ]라는 연극으로 브로드
웨이에 데뷔하여 호평 받는다.
연극무대에서 연기경험을 쌓은 그는 대부분의 연극배우들처럼 영화에
출현하게 된다. 1969년 영화 [나, 나탈리 Me, Natalie]의 조그만
역으로 출발한 알 파치노는 연극연출도 하는 한편, 1971년 두번째
영화 [백색공포]에서 일약 주인공을 맡게된다. 그는 이 영화에서
마약중독에 빠지는 뉴욕의 풋내기 예술가 역을 잘 소화해 낸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해에 출연한 영화가 바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 [대부]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말론 브란도),
최우수 작품상, 각색상을 수상하였고 이 영화에서 알 파치노는 돈
꼴레오네(말론 브란도)의 막내 아들 마이클 꼴레오네 역을 맡아
대선배 배우 말론 브란도 못지 않은 연기를 보여주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다. 알 파치노는 이후 [대부] 2편과 3편에서
모두 주연을 맡아 [대부 2]의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다.
[대부]의 성공 이후 [뜨거운 오후], [스카 페이스], [광란자] 등에
출연하며 시드니 루멧, 윌리엄 프레드킨, 브라이언 드 팔머와 같은
쟁쟁한 감독들과 일을 하게된다. 하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들은 흥행적
으로는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대신 비평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나 나중에 명작으로 인정받은 [스카 페이스]와 [혁명]
두 편이 잇달아 흥행에 참패하여 89년까지 영화계를 한동안 떠난다.
그러나 89년 스릴러물 [사랑의 파도]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그
다음 영화 [딕 트레이시]로 다시금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된다. 그리고 1992년은 알 파치노에게 최고의 해가 된다. 그는
[글렌게리 글렌 로스]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여인의 향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동시 노미네이트되고 드디어 남우주연상을
거머쥔다. 그에게 이것은 유난히 상복이 없던 그에게 8번의 노미
네이트만에 수상한 오스카가 되었다.
1993년에는 [스카 페이스]로 인연을 맺은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의
영화 [칼리토]에 전직 마약상으로 출연하는 하고 1995년, [히트]에서는
또 한명의 거물급 연기파 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뜨거운 연기대결을
펼치며 호연을 보여준다. [씨티 홀]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알
파치노는 세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를 영화화한 [뉴욕광시곡]을 직접
감독, 연출, 연기하고 이 영화는 미국감독협회상을 수상한다.
99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애니 기븐 선데이]와 비록 한 부문도 수상하지
못했지만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인사이더]까지 60세의
나이가 무색 할만큼 정력적인 배우활동을 하고 있다. 』
미국영화연구소(AFI) 는 20일(현지시간)으로 매년 선정하는 평생공로상
2007년 제35회 평생공로상을 알 파치노에게 수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하워드 스트린저이사장은 이날 선정발표문에서
“알 파치노는 미국영화의 아이콘이다. 그는 마이클 콜리오네, 토니
몬태나, 로이 콘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영화 인물들을 창조했다”며
“배우로서 그는 관객들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가 보여주는
새로운 연기들은 후배 배우들이 보고 따라야할 수업이다. AFI는
알 파치노에게 제35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고 말했다.
『 늘 어머니를 생각한다.
언젠가 성공을 거두기 전에 어머니를 잃은 사람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나도 그랬다.
내가 좀 더 일찍 성공했더라면 어머니의 목숨을 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녀를 데려간 건 가난이었으니까.
어머니는 너무 일찍 죽었다.
내 나이 스물 한 살이었다.
-알 파치노- 』
한번은 그가 무대에서 연기하다 우연히 어떤 두 눈동자와 마주쳤는데,
섬광처럼 빛나는 그 눈이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공연 내내 그 눈동자는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윽고 막이 내리자 그는 빛나는 눈동자가 있던 곳으로 급히 가 보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맹인을 인도하는 개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
아! 그렇게 강렬한 빛과 연민의 정과 이해가 서려 있던 눈동자였는데,
그게 개의 눈이었다니...'
그는 배우란 끝까지 극중 인물로 남아 있어야 한다며 실제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져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앞을 못 보는 주인 옆에서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던
개의 경이로운 눈동자, 그 눈동자 때문이었을까.
그는 '로버트 드 니로'와 더불어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배우로
일컬어 진다..
헌데 두 사람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아주 대별 된다...
'로버트 드 니로'는 음성적인 연기를 한다...
뭔가 약간 음침하면서 내면에서 베어 나오는 연기를 한다...
허나 '알 파치노'의 연기는 양성적이다..
온 몸으로 뿜어 토해내는 연기를 한다..
그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눈에서는 불을 토하고 온몸의
신경세포와 근육들이 모두 살아서 뿔끈 불끈 튀어 나올듯한
강렬한 느낌으로 스크린 전체를 뒤흔드는 느낌을 받는다..
'드 니로'가 마치 연기 자체에 완벽하게 몰입해 냉정하게
연기를 조율한다고 하면..
'알 파치노'는 마치 그것이 그의 마지막 영화인 듯이 온몸을
다 던져 내며 관객들에게 송두리채 드러낸다...
허나.. 관객의 노파심은 기우에 그치고 만다.. 그는 영화마다
죽었다 부활하듯이 새 생명을 가지고 다시 탄생하니까..
연기학자 리 스트라스버그가 창안한 “배우는 맡은 배역에
자신을 올인해서 완벽한 프로 연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의 완벽한 실천자 '알 파치노'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그에게
‘One of the greatest actors in all of film history’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하나)
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었다....
아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예술가는 그런 삶도 좋으리라......
다만 십대의 딸과 몇 살 안된 어린 쌍둥이들이 있다..
1940년 4월 25일 뉴욕 브룩크스 출생. 이태리 시실리섬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나 2세 때 양친이 이혼하고 고독한 소년시절을 보낸다. 이때의 감상을 알 파치노는 9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때 브롱스에 사는 소녀 팬에게 자신도 브롱스의 슬럼가 출신이라며 용기를 갖으라고 말하며 밝힌 적이 있다. 브롱스의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낼 때 부터 그의 위안은 오로지 영화 뿐이어서 자연스럽게 배우가 될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10대시절부터 급사와 영화관의 안내원을 하면서 배우를 꿈꾸다가 66년에 저명한 연기학교인 액터스 스튜디오에 들어간다. 67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첫 무대에 서고 다음해에 오비상, 69년에 연극계 최고 권위인 토니상을 수상했다.
68년 < Me, Natalie>로 영화에 데뷔하고 71년에야 첫 주연을 맡는다. 88년에는 <쥴리아스 시저>의 무대에 선다. 90년 <딕 트레이시>에서는 갱의 보스역을 재미있게 연기하고 있고 <대부 3>에서는 리어왕과 같은 고독을 리얼하게 연기하고 있다. 미셀 파이퍼와 공연한 신작
전부 6번의 아카데미 후보에 올라, 7번째에 수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부>에서 조연상 후보, <형사 서피코(Serpico)>에서 주연상 후보, <대부 2>에서 남우주연상 후보, <하오의 절규>에서 주연상 후보, <저스티스>에서 주연상 후보, <딕 트레이시>에서 조연상 후보,
헐리우드 최고의 배우 알파치노에서 '내㉮쥔장2ⓞᅣᅮ,.-'님 글. (puredew114@naver.com)
알 파치노는 외로움의 화신이다. 그 외로움은, 강하지만 늘 혼자인 자의 숙명이다. 음침한 마피아 사무실 백열등 아래서, 싸늘한 해풍이 스치는 시실리 바닷가에서 생각에 잠기는 '대부'에겐 끝모를 고독이 있다. 남성적 강인함과 광기도 사실은 외로움을 짓누르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그의 연기에는 허무가 있다.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될 것처럼 강렬한 눈빛, 감정 변화를 감추듯 미동도 하지않는 얼굴,압도하듯 음산하게 내뱉는 대사. 그는 삶이란 궁극적으로 쓸쓸한 행로라고 말한다.
알 파치노는 갱스터 느와르를 발판으로 성장했지만, 이제 할리우드 느와르는 알 파치노에 의지한다. 로버트 드 니로가 그랬듯 알 파치노도 이탈리아계 이민으로 태어나 불우하게 자라며 뒷골목 정서를 연기의 자양분으로 축적했다. 환경은 더 가혹했다. 1940년 뉴욕 빈민가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소년 알 파 치노는 윤락녀를 소개하는 뚜쟁이 노릇까지 했다. 본명이 알베르토 제임스 파치노인 이 이탈리아 계 소년은 바둑알 같은 까만 눈에 까만 머리, 작은 몸집의 전형적인 라틴 계 남자의 혈통을 타고 났다. 그의 얼굴이 전형적인 라틴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그가 미국의 일부분이 된지 오래인 탓이거나 아니면 그의 얼굴이 너무나 친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자세히 뜯어본 그의 얼굴은 알만드 아산테나 조 만테냐 같은 전형적인 이태리 계의 핸섬한 남자 배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부모의 사랑보다는 조모의 사랑을 더많이 받으며 자랐다. 손자 사랑에 할머니를 이길 사람이 있으랴마는 그의 부모는 그를 돌보아줄 형편이 못되었다. 아버지는 그가 2살이 되던 해에 아내와 이혼하여 아무런 미련없이 자식을 떠났고, 어머니는 항상 병으로 시름시름했다. 그의 할머니는 '여자는 약하지만 할머니는 강하다'의 표본이었다. 나이든 시실리아 여성 특유의 완고함과 엄격함이 있었던 그녀는 혼자 된다시피한 손자를 절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린 알베르토는 숙제를 하지 않고는, 할머니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친구들이 소리지르며 뛰어다니는 사우스 브롱크스의 리틀 이탤리 골목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는 할머니의 뜻대로 집에서 책을 읽거나 아니면 선천적 재주인 연기로 할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는 착한 아이였다.
그가 소년기를 보낸 50년대의 리틀 이탤리 지구는 현재의 뉴욕 할렘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부자 동네인 뉴욕 이스트 사이드의 아이들이 승용차를 타고 등교하는 동안 웨스트 사이드의 가난한 이탈리아계, 혹은 쿠바계, 푸에르토리코계 아이들은 부두나 공장 근처에서 뛰어놀았다. 그들이 뛰노는 후미진 골목 어딘가에는 친구의 형이, 혹은 아버지가 총을 맞아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변사체로 버려져 있을 때도 있었다. 어렵풋이 사모하던 친구의 누나가 어느날 밤거리의 꽃으로 나서는 것을 보아야 할 때도 있었다. 할머니는 그를 걱정했고, 그는 별탈없이 자랐다. 이것은 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이민 지구에서 자란 모든 성년들의 공통적인 경험이다.
영화 감독인 마틴 스콜세지의 꿈은 신부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에 이태리계로 존경받는 길은 갱스터가 되거나 신부가 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알베르토를 자신의 몸처럼 걱정하던 할머니 덕분에 그는 갱스터도 신부도 아닌 배우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도버 씨어터라는 극장에 자주 놀러 갔다. 그때 부터 그는 배우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는다. 그곳에서 본 위대한 갱스터 영화배우 제임스 캐그니의 연기는 그의 커다란 눈과 손을 떨게 했다. 훗날, 그는 살인자로 유명해지지만 그것은 브롱크스의 거리에서가 아니라 필름이 상영되는 극장안에서였다. 그는 아메리카 드림을 실현한 이태리인이 된것이다.
십대의 파치노는 예술가의 꿈을품고 맨하탄 예술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은 영화와 드라마 [페임]으로 제작되어 유명해진 자유분방한 학교다. 그러나 알 파치노는 이곳에서마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중퇴를 최종 학력으로 남기고 만다. 그는 곧바로 백수 생활에 뛰어들었다. 백수생활동안 그가 가장 즐겨했던 것은 시인이자 배우였던 그의 연기 선생 찰스 로튼과 뉴욕을 어슬렁거리는 일이었다. 수중에 단 일 달러도 없는 때가 태반이었던 그들은 브룩클린에서 맨하탄으로, 맨하탄에서 집이 있는 브롱크스로 걸어다녔다.
그후 파치노는 액터스 스튜디오 중의 하나인 허버트 베르호프의 연기학교에 등록한다. 그에게는 몇개의 단역이 주어진다. 2년간 액터스 스튜디오의 메소드 연기를 체험한 그는 브로드웨이연극상의 주연상을 탄다.
[인디언은 브롱크스를 원한다]라는 작품의 사이코 연기덕이었다. 그 직후에는 [호랑이도 넥타이를 매는가]라는 작품으로 연극인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토니상을 수상했다. 연극배우로서 입지를 굳히던 시절, 아직 일정한 직업이 없을 때 알 파치노는 질 클레 이버그라는 여배우에게 말 그대로 얹혀 살았다. 알 파치노와 똑같이 7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질 클레이버그 역시 당시에는 TV 멜로 드라마에 이따금 출연하는 것 외에는 고정 수입이 없어서 집에서 한달에 몇백달러씩 부쳐주는 돈으로 살아가던 때였다.
질 클레이버그는 부드러운 미모에 70년대를 휩쓴 패미니즘 운동에도 앞장선 꽤 괜찮은 성격의 여배우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70년대 스타중의 한사람이다. 이런 여성과도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한 알파치노의 여성편력은 할리우드 스타로서는많지도 적지도 않다. [대부]에 함께 출연한 다이언 키튼, 여배우 마사 캘러, 캐슬린 퀸란, 그리고 [칼리토]에 함께 출연한 페넬로프 앤 밀러, 워랜 비티같은 이와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 꽤 준수한 스코어다.
그는 결혼한 적이 없는 듯이 보인다. 딸인 줄리 마리는 잰 타란트라는 여성과의 별로 오래가지 못했던 로맨스의 결실이었다. 현재 그의 가족은 올 해 얻은 쌍동이를 포함해 다섯 명이다. 현재 동거중인 여인은 비벌리 드 안젤로 역시 영화배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