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학의 초석을 다지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현대수필,여류들
글/ 장윤우 (한국문인협회부이사장, 월간문학발행인) 1. 들어가며 중국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적벽부>로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대가이다. 그는 일찍이 시중화 화중시(詩中畵 畵中詩) 라하여 시,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그야말로 문학과 서예와 미술의 일체성을 내세웠던 것이다. 詩書畵 일체사상은 우리나라에서도 이어져 내려와서 조선시대 이율곡,강희안,김시습,이항복,박지원,허균,박제가,남구만,정다산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시문,서화객이 많았다.
<노트르담의 꼽추> <레미제라불>의 작가 빅톨 유우고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대문호라기보다는 오히려 대화가였다.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지 못한 것은 그의 문학작품들이 워낙 유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여러해전에 우리나라 서울에서도 그의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였었다. 상징파 시인 보드렐르도 그가 대시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들 유명한 화가로 되였을 것이라는 호평을 받을만큼 회화에도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의 작가 볼프강 괴에테도 <시와 진실>에서 밝힌 것처럼 회화에 능한 그림예찬자였다. 유화,판화,벽화에서 수채화,소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남들의 공연한 잡담과 口舌을 혐오하며 그런 시간에 차라리 그림을 그려왔던 것이다. 본인도 독일 푸랑크 푸르트에 소재한 그의 생가를 방문하였을 무렵, 그가 그려놓은 숱한 작품들을 확인하며 혀를 내둘렀었다. 레오 톨스토이도 그림의 대가였고, 죠르 상드, 알프렛 뮤세, 메리메, 헤르만 헷세, 장 곸토오, R.L 스티븐슨, M.G 웰스, A.푸쉬킨, P.로티, R.키플링, A.랭보,마크 트웨인, 에드가 알란 포오, 고골, D.H.로오렌스, 토마스 하디, V.마야고프스키, E.T.A. 호프만 외에 많은 작가들이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며 餘恨없는 인생을 살고 갔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돌아가신 조병화시인과 시조시인 김상옥,이상범, 서양화가 이종학, 조각가 홍성문, 유종민, 평론가 김우종, 소설가 이제하, 시인 성춘복, 김영태, 조여주 그 외에 본인도 문학과 미술인으로서 한 몫을 거들어 왔다고 본다.
2. 그림과 글(문학)은 원래 하나
원시시대에는 글이 없었다. 생존의 수단으로 들소를 잡아먹고 주술적인 목적에서 들소의 암각화를 새겨놓았는데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이나 프랑스의 돌도뉴 벽에 線刻의 단순한 도형이 발견되었다. 미술에 대한 인간의 본능은 인류역사 이전(Pri-historic Age)에서 비롯된다. 시대의 변천과 흐름속에 언어와 문자가 생겨났으며 그때까지의 예술은 문자가 배제된 시각 언어이며 조형언어와 시공간예술행위였을 뿐이다. 조선시대 성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함으로서 우리민족도 문자가 있는 국가로서 영원 불멸하게 되었다. 문자가 없는 나라는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허나 문자라는 문명의 利器가 그렇게 완벽하지마는 않다는게 역사적 현상이었다. 스페인어권, 영어권, 漢字語圈域, 아랍어권, 한글권,등 자신들끼는 상통하여도 다른 언어권에는 불통이다. 시각언어인 미술은 경우가 다르다. 어찌보면 바디 페인팅,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가 더 직접적이고 피부에 와닿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나는 1963년도 서울신문사 신춘문예에서 시 <겨울동양화>가 당선되고부터 어엿한 <시인>으로서 매년 자작 시화전을 개최하면서 서울,인천,대전,대구,부산,마산,전주,광주,목포,서귀포,제주,춘천,강릉, 전국 각지를 순회한 바가 있다. 자신의 시작품에서 못다한 표현을 그림이나 금속을 얹어 보완하였다. 30회를 기록하면서 당시 광화문 동아일보 3층 데스크에 찾아간 나에게 최일남 문화부장(소설가)께서 준 말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장형은 이렇게 100회만 계속하시오” 주목하겠다는 격려로 받아드리고 열심히 몸으로 뛰었다. .........바다를 건너 일본과 미국으로까지 뻗어 나갔다. 젊은 客氣였는지도 모른다. 역마살이 끼였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시인이 무슨 그림이냐”고 핀잔주는 문인들이 있는가하면 “미술대를 나온 금속작가가 무슨 詩와, 그림이냐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한 마리도 못잡는 법“이라고 빗대고 흉을 보는 미술인도 오랫동안 계셨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
허나 개의치 않고 나의 길(道程)만을 줄곳 걸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60년대 상명대 미술과에 출강하면서 윤재천교수와 친분을 쌓아왔다. 헌칠하고 미남인 윤교수에겐 많은 여대생들이 뫃여들었다. 우리는 미술과 수필이라는 장르를 초월하며 <칠보회>라는 모임도 만들었다. 구인환(전서울대교수) 故안옥희(탤런트) 김철규(이대 치과대 교수)등이 <실내악>싸롱 등을 돌며 정기적인 행사를 치른 기억이 새롭다.
글이나 그림이나 모두 같은 예술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비록 “문자“라는 메체를 이용하거나 ”Colour"즉 色感을 통하여 표현하는 방식만이 다를 뿐이다. 예술(Art)을 시간예술. 시공간예술. 공간예술로 분류하여 그것이 음률,언어, 물질(Stuff)등을 援用하는 것일 따름이다.
나의 경우를 더 들자면 餘技 즉 아마츄어가 아닌 엄연한 데뷔작가이다.
서울신문 신춘문예응모 당선(서정주 심사위원) 한 이래 현재 12권의 개인 시집이 상재되었다.
國展에서도 입상한 뒤에 수십회의 초대개인전을 갖었고 심사위원장도 여러 회에 걸쳐 맡았으며 서울시 문화상 등 작가 수상횟수도 적지 않았다. 65년도부터 미술대학에서 강의를 담당하여 숱한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런 연유로 정부에서 수여하는 국민훈장 황조근정훈장도 받은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말을 듣기가 일쑤였다면 그런 여건을 갖추지 못한 작가들은 오죽 속상할까 싶었다.
3. 현대 수필회의 앞장서기와 파급효과 조선시대 선조들은 “崇文賤技”하여 四色黨爭을 일삼았고 풍류에 절어, 예술을 士大夫의 餘技정도로 멸시하였었다. 작가를 <匠人>이 아닌“쟁이(丈人)”로 비천하게 대함으로서 藝人을 존중한 일본과 달리 문화의 퇴보를 가져 왔던 것이다. 그러한 패거리의 殘在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말인가. 한편의 글이 寸鐵殺人한다.
한줄의 글과 한 획의 그림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문화가 국력이고 문화야말로 세계에 알릴 최대의 홍보효과이며 수입증대에도 기여한 사실을 외면하지 말자. 자동차나 반도체 수출 못지 않게 <심청전>이나 <춘향전> <홍길동전>등은 뮤지칼로, 영화로, 에니메이션으로 세계속에 당당히 맞서가고 있지 않는가. 날로 황폐해가는 우리사회를 글과 미술로 구원하자. 메마른“삶”에 물기와 여유를 주어야한다. 뒤늦게나마 정부에서도 “문화콘텐츠”의 위력을 깨닫고 산하기관을 설립하여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지원에 적극 나서려 하고 있다.
이제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음미해보자 비록 짤막한 한줄의 글속이지만 깊히 잠들고 있는 자작나무 숲속이 아련히 눈을 떠오지 않는가.(例文) ........................前略 ............................
멀리 자작나무 숲이 허연 다리를 드러내고 손짓한다.
서늘한 세르메체보 공항,무거운 표정의 사람들이 기대감으로 들 뜬
나를 일시에 불청객으로 만든다.
문화는 넘치고 풍요로 잃어버린 제국, 유예된 영광,.........
-노재은 <슬픈 러시아>중에서-
유예된 帝國의 영광이 넘쳐 흐른다. 얼마나 絶唱인가. 한편의 敍事詩이다.
조재은의 <물길 바꾸기> 장정자의 <꽃과 어머니> 박유수의 <가을소묘> 김소현의 <가을 풍경> 박하영의 <보라카이해변에 노을은 지고> 김명자의 <만남뒤엔 이별이> 이종은의 <다시 살아난 것들> 한종은의 <다시 살아난 것들> 강금희의 <찬란한 황혼> 임이송의 <하늘지기>등도 기억되여야할 내용이며 훌륭한 전시작품들이 된다. 윤재천 회장의 치밀하고도 어버이처럼 자상한 연출지도아래 뭉쳐진 회원들- 조재은. 노정수, 승삼선, 김희수,조은숙,차영현,조은정,최명희,김미애,최인학,정금주......별빛같은 모든 회원들이 소중하다. 이땅의 수필문학과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만남과 접목에 큰 몫을 해낼 분들이다. 이 모임에서 갖게 되는 “수필과 그림의 만남” 전시행사는 종래에 보기 힘든 기획인 것이다.
4. 끝내기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도 다른 분야에 대한 “排他心”이랄까 違和感이 조성되고 심지어는 같은 문학의 장르라 할지라도 시와 소설, 아동문학과 희곡등이 서로 잘 어울려지지 않고 생소하게 지내고 왔다. 나아가서는 같은 장르라 할지라도 물,기름처럼 섞여지지 않아서 **시인협회, ##아동문학가협회, 무슨 수필가협회, 어느 대학교출신 동문작가회, 어느 고장출신이냐는 등 계속되는 離合集散으로 三分五列되어오고 있다. 오늘의 다양한 매체, 급속한 디지털과 인터넷 시대에 걸맞지 않는 소위 “패거리”문화 양상이다. 선진 외국에서는 볼 수 없는 뒤떨어진 전근대적 모순이며 문화발전에 逆行하는 殘在 행위이다. 특히 우리는 민족과 국토분단의 아픔과 相殘의 受難史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선행되어도 모자라는 시간인데 딱한 일이다. 소위 문화강국끼리 나눠 먹는 독점관행을 깨버려야 하는데........“시작이 半이다” 이젠 나 아니면 싫다는 “패거리문화”의 破局은 막고 보자.
그래서 서로 만나야 한다. 먼저 손을 내밀어서 만나고 함께 예술행위에 동참해야 산다. 일찍이 문학지 <문학사상>을 발행하던 이어령 주간이 앞장을 서서 경기도 광주땅에 구름같이 뫃인 문인들중에는 怪力소설家 이병주 등 문인,화가들이 뫃여 시도화전을 위한 글과 그림을 白磁위에 그려서 잘 빠진 놈(?)만을 구워내서 전시한 기억도 새로웁다. 시인 이근배씨가 주간으로 근무한 월간<한국문학> 주최로 역시 문인과 도예인들의 시도화전시를 가젔었으며, 성기조 현 PEN회장도 문인과 미술인들의 좋은 만남을 成事시키였다. 미술인들의 입장에서도 평소 敬遠視하던 시인들과의 접목을 내게 부탁하여 당시 국제미술협회 최광선 회장(서양화가)이 운현궁미술관에서 문인을 동참시켜 회원과 함께 파티를 열며 시낭송행사까지 가져 장안의 화제를 모우기도 하였다. 돌이켜보면 모두에게 보람을 안겨주는 행사이었는데....그런 脈絡은 어데로 가버렸나. 흐지부지 열기가 식어버리고, 일부는 번잡한 인사동 거리에,지하철 역사벽면에 三流작가의 낡은 商魂으로 轉落되기도 하였다.
계간 <현대수필>을 한호의 결간없이 펴내오면서 각종 세미나와 행사등을 열며 수필문학의 礎石을 다지고 새로운 地坪을 제시하는 우리 <현대수필회>의 여류작가들이 이제 당당하게 앞장 서는걸 보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새로운 도시- 성남 분당에서부터 새바람을 넣는다.
무관심하고 不毛地적인 지역사회에 우선 각성시키고자 신생문화도시부터 문학과 미술의 만남과 交感을 주선하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서로 마음을 열고, 웃음으로 맞이한다. “수필과 그림의 만남”이 바로 以心傳心으로 전류처럼 통한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는 정기적인 모임과 합동전시,세미나. 문화유적 생가답사와 원로작가 탐방과 교류가 서서히 일어나고 각 지역으로 물밀 듯이 퍼져나가기 바라고 또한 믿는다.
옛말에도 “시작이 반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작을 현대수필 회원들이 열었다는 사실이 의미가 있다. 문단에서 畵壇에서 주목하고 있다. 손을 잡고 나아가는 여성들의 자상하고, 마치 어머님같이 多情多感한 면모를 널리 소개하고 싶다
| |
첫댓글 <현대수필>회의 전시행사와 출판물에 계재되는 내용들이로군요. 분당에서의 전시가 기다려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