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7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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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스페라투스(Speratus) 성 나르잘레(Narzales)
성 키티누스(Cythinus), 성 베투리우스(Veturius),
성 펠릭스(Felix), 성 아킬리누스(Acyllinus),
성 레탄티우스(Laetantius) 성녀 야누아리아(Januaria),
성녀 제네로사(Generosa), 성녀 베스티나(Vestina),
성녀 도나타(Donata), 성녀 세쿤다(Secunda)
축일 7월 17일
성 스페라투스(Speratus)와 그 동료 순교자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었으나, 실제로는 그의 아들 코모두스 황제의
명에 따라 순교하였다.
이 순교자들은 쉴리움, 곧 오늘날 북 아프리카의
튀니지 출신으로 스페라투스와 성 나르잘레,
키티누스(Cythinus), 베투리우스(Veturius),
펠릭스(Felix), 아킬리누스(Acyllinus),
레탄티우스(Laetantius) 등 남자가 7명이고,
성녀 야누아리아(Januaria), 제네로사(Generosa),
베스티나(Vestina), 도나타(Donata), 세쿤다(Secunda) 등
여자가 5명이었다.
그들은 카르타고(Carthago)의 감옥으로 끌려가서
집정관 사투르니누스의 이교 신상에 대한 희생 제의를
끝내 거부하고 순교하였다.
이때 함께 순교한 스페라투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느님, 감사합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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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네르세스 람프로낫츠(Nerses Lampronats)
축일 7월 17일
실리시아(Cilicia)의 람프론에서 람프론의 왕자
아들로 태어난 성 네르세스는 스케이라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재능이 뛰어나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그는 신학과 성서 주석은 물론 그리스어, 라틴어,
시리아어 그리고 콥트어까지 알고 있었다.
그의 부친이 운명함으로써 그는 사제가 되었고(1169년),
얼마 동안 은수자로 지냈으나 1176년에는
타르수스의 대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는 1179년의 흐롬클라 회의에서
아르메니아(Armenia)와 로마(Rome) 교회 간의 일치를
강력히 역설하고 황제 마누엘 콤네누스의 지원을
받았으나, 왕이 급서하는 바람에 별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는 그 후에도 로마와의 일치를 위해
계속하여 일하던 중 마침내 1198년에 이의 성공을
목격하게 되었다.
네르세스는 전례, 성서주석, 찬미가 그리고 사막
성인들의 전기 등을 저술하였고,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회칙과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의 “대화집”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였다.
나르세스(Narses)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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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레오 4세(Leo IV)
축일 7월 17일
로마(Rome) 출신인 성 레오 4세는
성 마르티누스(Martinus)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라테라노(Laterano) 대성당의 부제를
거쳐 추기경 사제가 되었다.
847년 교황 세르기우스 2세(Sergius II) 서거 이후
그는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첫 임무는 사라센인들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이었으므로 성채를 보수하고 강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매우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람인 반면에 인내심도
있고 또 겸손하였다.
만일 그의 이러한 면모가 없었더라면 정치적으로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에 그의 영적 위대성은 잊혀져
버렸을 것이다. 또한 그는 뛰어난 설교가였고,
로마 교회 안에 성가를 적극 장려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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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르첼리나(Marcellina)
축일 7월 17일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동생인 성녀 마르첼리나는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 후 가족과 함께 로마(Rome)로 가서 두 동생을
돌보아야 할 입장이 되었을 때 지극히 덕스런 말과
표양으로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녀는 매사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처리하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녀는 완전히 세속을
멀리하였다.
353년 주님 공현 축일 날,
그녀는 성 베드로(Petrus) 대성전에서 교황 리베리우스
(Liberius)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이때 교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길은
꾸준한 보속과 고행 그리고 교회에 대한 봉사와
사랑이라고 권고하니, 그녀는 그대로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성 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의 주교로 있을 때
그녀는 수차례나 방문하여 영적담화를 나누었고,
주교의 사업들을 도왔다.
그녀는 매일 저녁은 먹지 않았고, 온 밤을 기도와
영적 독서 그리고 묵상으로 지샜다.
성 암브로시우스조차 그녀의 과도한 고행을 완화시키려고
애썼다. 그녀는 암브로시우스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
정확한 연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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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렉시오(Alexis)
축일 7월 17일
성 알렉시우스(Alexius, 또는 알렉시오)를
‘하느님의 사람’으로만 언급한 작자 미상인 한 전기에서
그는 어느 부유한 로마 원로원의 아들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애덕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과 어느 부유한 로마 여인과 결혼하여 부모를
기쁘게 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결혼식 날에 서로 동의하여 헤어져
그는 시리아로 가서 17년을 살았다.
알렉시우스는 에데사(Edessa)의 어느 성당에
기거하면서 놀라운 청빈의 덕을 실천하면서 성덕을
닦았다고 한다. 자신이 기거하는 성당의 마리아상이
자신을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에데사의 주민들에게
알렸을 때 그는 로마(Rome)로 돌아 왔다.
그러나 그의 부친이 구걸하는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자기 자식인 줄 모르고
그에게 일거리를 주고 자기 집 계단 밑에 기거하게 했다.
만인들로부터 잊혀진 인물로서 그는 로마에서
17년을 살았다.
그의 신원이 밝혀진 때는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자서전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이이야기는 서방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학자들은 알렉시우스가 확실히 생존했으며 에데사에
묻혔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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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뉴스 펠릭스 엔노디우스
(Magnus Felix Ennodius, 또는 엔노디오)
축일 7월 17일
성 마뉴스 펠릭스 엔노디우스(Magnus Felix Ennodius,
또는 엔노디오)는 프랑스 지방에 정착한 이름 있는
가문 태생이다.
그의 출생지는 프랑스 아를(Arles)인 듯하나 유아기를
이탈리아에서 보냈고 밀라노(Milano)에서 교육받았다.
그리고 자신을 교육시킨 삼촌이 운명한 후에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젊은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아내 역시
수녀가 되겠다고 순순히 승낙하였다.
엔노디우스는 이미 뛰어난 수사학자였다.
그는 파비아의 주교인 성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뒤에 성서를 공부하였고
또 같은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그는 라우렌티우스(Laurentius)를 주축으로 하는
이단을 물리치기 위한 시노드(Synod)와 교황
성 심마쿠스(Symmachus)를 위하여 호교론을 저술하여
교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496년에 서거한 파비아의 성 에피파니우스 전기,
레랭의 성 안토니우스 (Antonius) 전기를 썼다.
엔노디우스는 고대 수사학파의 마지막 대표자였다.
성인은 514년경에 파비아의 주교로 승품되었는데,
성 에피파니우스를 능가하는 신심과 권위로 교구를
다스렸고, 교황 성 호르미스다(Hormisdas)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어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는
이들과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 임무는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지는 못하였다.
그 후 그는 순회 설교를 하면서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고,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였으며, 교회를 짓거나
교회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성모 마리아,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성 에우페미아(Euphemia)
등을 주제로 하는 아름다운 시를 발표하는 재질을 보였다.
그의 시는 대체적으로 신비적인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그는 파스카 초 축성 때 부르는 새로운 찬미가를
두 편이나 썼다. 그는 불과 48세에 운명하였으나
교회에 남긴 업적은 지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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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제네로소(Generosus)
축일 7월 17일
성 게네로수스(또는 제네로소)는 이탈리아의
티볼리에서 존경을 받는데, 그곳의 주교좌 성당
제대에는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그 외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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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케넬름(Kenelm)
축일 7월 17일
중세의 일반적인 전설에 의하면 성 케넬름은
부왕인 영국 머시아의 왕 체눌프가 죽었을 때
불과 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런데 그의 누이인 퀜드레다(Quendreda)가
자기 스승 아숴버트를 사주하여 그를 살해하고
왕위찬탈을 음모하였다.
아숴버트가 각본에 따라 일을 꾸미고 감쪽같이
시체를 감추었으나 케넬름의 시신은 발견되어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의 윈치콤브
(Winchcombe)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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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클레멘스(Clement)
축일 7월 17일
오크리다의 클레멘스 슬로벤스키(Clemens Slovensky)로
대표되는 불가리아의 일곱 사도들은 불가리아(Bulgaria)
에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865년경에 불가리아의 왕 보리스 1세는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콘스탄티노플에
받아들였고, 그의 신하와 백성들에게 전한 듯 여겨진다.
이리하여 869년에 교황 하드리아누스 2세(Hadrianus II)는
성 메토디우스(Methodius)를 모라비아(Moravia)와
판노니아(Pannonia)의 주교로 임명하였으나
로마(Rome)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갈라지게 되어
파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 메토디우스와 키릴루스(Cyrillus) 형제는
불가리아의 일곱 사도들 가운데 2명으로 공경을 받는다.
그런데 메토디우스의 사망 후에는 로마와 관계를
끊고 박해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라비아에서 축출되었다.
그들 가운데는 후계자로 정했던 고라즈드(Gorazd)를
비롯하여 클레멘스, 나훔(Nahum), 사바(Sabas) 그리고
안겔라리우스(Angelarius)가 포함된다.
클레멘스는 남부 마케도니아(Macedonia)에서 온
슬라브 원주민으로 교육을 많이 받았고 또 사도적
정열이 뛰어났던 인물이다.
그는 벨리트사의 주교가 되었으며 많은 수도원을
세웠고, 슬라브계 종족들이 주교직을 받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클레멘스는 916년경에 오크리다에서 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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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오도시오(Theodosius)
축일 7월 17일
성 테오도시우스(또는 테오도시오)는 약 50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오세르의 주교로서 사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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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테오도타(Theodota)
축일 7월 17일
성녀 테오도타는 콘스탄티노플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이사우리아(Isauria) 왕조의 레오 황제 때에
성화상을 파괴하려는 황제의 관리로부터 세 개의
성화상을 숨긴 죄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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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헤드비지스(Hedwig)
축일 7월 17일
헝가리의 국왕 루도비쿠스 1세(Ludovicus I)의 딸이며,
폴란드의 국왕 카시미르 3세(Casimir III)의 조카인
성녀 헤드비지스(Hedwigis)는 1382년에 루도비쿠스
부왕이 운명함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였고,
13세 때에 리투아니아(Lithuania)의 공작과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평화를 거의 400년 동안이나 지속시켰다.
그리고 성녀 헤드비지스의 신심이 뛰어났기 때문에
크게 감동한 남편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온 나라의 이교도 신전을 파괴하고는 국민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강요하였다.
그녀는 리투아니아의 그리스도교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는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7년 6월 8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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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히야친토(Hyacinth)
축일 7월 17일
성 히야킨투스(Hyacinthus, 또는 히야친토)는
우상으로 축성된 나무를 베어버린 죄로
파플라고니아 지방의 아마스트리스(Amastris)에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