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수 제2회 한국문학예술상 시부문 수상작
"지리산"
1
침묵할 수밖에 없다
지리산을 마주하면
웅휘로운 산자락을
자욱하게 감고있는
구름도 구름이지만
바람이 다가서고
산 그림자가 다가서고
소리 죽여 흐르는 물 소리가
다가서기 때문이다
2
大智異-
함양 산청에 東智異
남원 구례에 西智異
하동에 南智異
경상도 전라도에 덩시렇게 걸터앉아
이렇듯 다섯 개 郡의
크나큰 지붕이 되어
골골마다 생명의 젖줄이 흘러내리는
우리 국토 우리의 大智異山이여
3
초목도 엎드리는 첩첩능선
언제쯤이면
우리와 이야기할 수 있는가
격동의 바람
꼭 그래야만 했을까
지리산을 물들인 이야기는
이미 질곡의 역사 속으로 묻혀 버렸지만
恨은 삭이고
응어리는 풀어야지 않는가
4
동학 농민군이 들었던 깃발
누가 피리를 불지 않아도
흙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한자리에 있지 않았던가
짓이겨진 몸을 이끌고
짐승마냥 지리산에 몸을 숨겨
살고 있었지만
손바닥만한 밭뙈기 하나 일구는데
등골이 휘어지고
조롱박만한 논뙈기 하나 부치는데
주름살이 패이겠지
火田民은
5
<새야 새야 파랑새…>는
전사한 낭군의 영혼 달래기 위한
농사꾼 아낙네 진혼곡이 아니던가
지리산 고로쇠 약수 나무는
눈발이 서걱여도 피가 잘 돌아
나무의 피 고로쇠 한사발 떠서
제삿상에 올려 놓고
망혼을 달래던 지리산 아낙들
6
선비가 아니라도 작설차 향기는
산 내음이 나고
또 구름 내음이 일어
우리를 나무로
때로는
鶴으로 쉬게 하지만
그 잎을 딸 땐
마음이 정갈해야지
빛나는 풍광과 토양 속에서 자라는
지리산 작설나무
7
우리 맥을 끊기 위해
핏발을 세웠던 일본 제국주의
본디 있던
아름다운 지명을 바꾼 것은
물론
산맥도 온전히 누워 있지 못하게
백두대간에
쇠말뚝까지 박았던 일본 제국주의
혈구 곳곳이 찢겨 나가면서
산은 신음 소리를 내고
알을 품던 봉황새는 날아가고 말았던가
휘청대던 山과 江
그리고 바다
땅도 비틀대며 안녕하지 못했지
대륙을 넘보고
바다를 통째로 마시려다가
결국은 목에 걸려
한반도를 토해버린 일본 제국주의
8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일제는
패전 위기에 발악하기 위해
제 정신이 아니었지
조선사람은 모두 전쟁물자였을까
조선사람 사냥에
혈안이 돼 있었던 일본 제국주의
9
놋그릇도 뺏아가고
은수저도 뺏고
나중에는 쇠붙이가
남지 않았던 우리 살림
징병이다, 징용이다, 또 보국대다
그리고 처녀는 정신대로 보내
日本軍 위안부로 삼았지
10
학병을 피해 우리 장정들
일본관헌 몰래 지리산으로 숨기도 했지
그 때, 동경 유학생이던
내 막내 숙부님
팽나무며 감나무며 대밭이
지천에 널려 있던
돌담 투성이 마을
소오산(금오산) 아래 星坪異를
떠나게 되었지
복사꽃이 눈부시게
마을을 덮고 있었지만
또 봄날의 아지랭이 속에
河東浦口에선
뱃고동이 울고 있었지만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던
스물 두살 淳軾이 숙부님
11
내 나이 일곱살 때
젊은 숙부님은
어쩔 수 없이 학병으로 끌려 가야만 했지
돌담길을 뒤돌아 보며
다시는 못 올 길처럼, 징검다리 건너
트럭에 실려 먼지 속으로 멀어지던
그 유학생 모습
12
그가 성평리를 떠났던 날에도
물레방아는 돌았지
물을 안고, 세월을 안고,
또 안타까운 기다림을 안고…
13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할아버지
할아버지 얼굴은
갑자기 검버섯이 피면서
초췌해지고
더 늙어 보이셨지
할아버지는 사립문을 부여안고
아들만 기다렸지
<하마 오나, 하마 오나>하지면서.
14
이 무렵 학생 동원령. 소학교 저학년이던
우리는
학교 수업 시간에도 산에 올라가서
일본 전투기 연료가 되는
송진을 땄고……
15
피를 말리는 그런 기다림 속에
해방이 되고
학병으로 끌려갔던 장정들이
더러는 돌아 왔지만
한 번 간 淳軾님은 끝내 올 줄 몰랐지
<전쟁도 끝나다 카는데, 갸는 왜 못오는
고?>
16
기다림에 지쳐버린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어느 날
그때
아홉살이 된 나를 이끌고
또 머슴을 데리고
지리산이 잘 보이는 소오산으로 오르셨지
멍석을 깔고
마련해 온 음식을 그 위에 놓아
자식의 무사귀향을
산신령께 빌었다
17
난 그때 만큼 슬픈 얼굴을 한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지
끝내 눈물을 훔치고 만 할아버지……
지리산은 그날 가까이서 또 멀리서
손짓을 보냈고
마을에 등불이 하나 둘 켜질 무렵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18
내가 열 살 되던
바로
그 해 늦은 봄
감꽃이 비바람에 무더기로 떨어지던 날
淳軾이 내 막내 숙부님은
하얀 천이 휘감긴 상자가 돼 돌아왔지
학병으로 간 그는
이렇게 젊은 날을 마감한 것이다
남의 전쟁터에서
죽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물레방아 도는 공향산천을
떠 올렸을 것이다
조국의 하늘과 산천과
그리고 부모형제를……
19
방학 때면
물레방아 돌아가는
주교천 징검다리
그 징검다리 건너
돌담 마을에 나타나던
그 환한 얼굴
사각모가 아니라도
그는 참 멋있었지
초한지의 역발산 항우장사 이야기며
삼국지의 영웅 호걸들
그리고 우리 역사를 들려주는 밤엔
지리산의 눈이 내려 쌓이고 있었지
20
지리산 雲峰
웅휘로운 산자락이 있는데도
전쟁터에 끌려간 건
집안의 우환을 막기 위해서겠지
긴 칼을 찬
일본 순사의 모자만 보아도
사납다던 삽살개조차
꼬리를 말며 숨던 그 시대
21
죽어 돌아온
그의 손톱 몇 개와 머리카락 한 줌
그 꽃상여가
지리산을 보면서 떠나던 날
나는 불현 듯 그 숙부님이 그리워
목이 터져라 불러댔지
<순식이 삼촌! 순식이 삼촌!>
무정한 메아리만 내 귓전을 맴돌 뿐
한 번 간 숙부님이 부활할 리는 만무했지
아들을 보낸 할아버지
시름시름 앓으시다 오래지않아
그만 세상을 등지셨고……
22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에게 무엇이던가
사슬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더냐
노예의 사슬에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지만
우리 서로 부축하며, 손잡고 일어서서
저 죽어가던 산하를 살려
참된 주인의식으로
주인 행세를 제대로 하면서
조국을 지키는게 아니더냐
23
우리가 기다리던 봄은
그런 게 아닌데
해방은
꽃도 피기 전에
절뚝거리며 저만치 가 버렸고
패싸움 하다가
우리는 갈라섰다
24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먼
붉은 무리
복종만을 강요하며
인민의 피로
神이 되고 싶어하던 무자비한 독재자여
25
절대 권력을 손에 쥔 탐욕자
철의 장막 안에는
인민의 피가 넘쳤지
自由의 江을 막아
인민의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한 붉은 별
인민은 이념의 노예
사람 목숨이 문제이겠는가
바로 神의 권위 앞에……
26
빛 바랜 공산주의 선동 속에
또
낯선 민주주의 혼돈 속에서
밭 갈던 곡괭이 창칼 되어
누가 누구에게 겨누어야 하고
피흘려야 하는가
27
제주 한라산
쪽빛 남풍이 부는 3월이면
유채꽃 피고
망아지 한가로이
푸른 풀 뜯는 봄인데
바다 속 굴 따던 해녀까지
못난 이념 때문에 죽어야만 했는가
그 엄청난 4·3사건
피보라 해일 되어 본토에서
바다 건너로 밀어 닥쳤을까
28
여수와 순천에서
총을 든 우리 군인
더러는 남로당 계책에 휘말려
적을 쏘아야 할 銃口가
우리 가슴으로 돌려졌고
29
지리산으로 달아나 버린 반란군
그들은
먹이엔 멧돼지처럼 저돌적이었지
피아골, 뱀사골, 싸릿골, 칠성골
달궁골, 화갯골, 악양골, 청암골……
거림골, 중림골, 청학골, 연동골……
지리산 아흔아홉 계곡을
먹이 사냥으로 날뛰었지
30
처음
공비 출몰은
사람들이 깊은 잠에 취한
으슥한 밤이었지만
그 세가 한창일 땐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기도 하고……
우리 기는 낮에만 걸고
어두운 밤이면 인공기를 걸었던
지리산 마을이여
31
지리산 첫마을에 살던 길례는
이미 山사람이 되고만 남편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갓을 테지만
징용에 끌려가서 고생한 만복이나
세상 물정 밝다는 기동 애비는
무엇땜시 이 날리에 끼어들었을고?
점백이 녀석이사 우쭐대서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하늘을 저리 고운데
밤 하늘 별은 저리 푸른데
그 때, 깃발도 없이 산에 오른 사람들
무엇에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갔을까
32
섬진강 봄은 길지 않지만
지리산 봄은 늦게 찾아온다
솜이불 같은 흰 눈을
덮어쓰고 잇기 때문이다
개나리 진달래는
이미 봄을 알리고 있지만
지리산 철쭉
세석평전에 무더기로 핀 그 꽃은
결코 새 울음소리로 핀 것이 아니다
만복이 눈물로 필 수도 있고
기동 애비 恨일 수도 있지 않은가
또 점백이 혼일 수도 있고
그리고 토벌군 피(血)일 수 있기에
지리산 철쭉은
해마다 붉게 붉게
골짜기를 덮는다
33
슬픈 영혼의 흩날림인가
지리산에 내리는 눈
손바닥을 펴서 눈을 받아보면
어느 새 한 방울 눈물이 되어
손아귀에 머물고
눈은 다시 가슴에 불씨를 지피며
아스라한 먼 옛날에 앞서고 있다
34
온통 새하얀 색을 이루고 있는
눈송이
눈이 아름다운 건
세상을 하얗게 하나로 이루는
까닭도 있겟지만
눈을 보면
지금도 온몸으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35
아흔아홉 골짜기에 흐르는 물
덕천강이 되고, 남강이 되고, 섬진강이 되어
남해 바다로 가게 되겠지만
네가 흘린 눈물도
내가 흘린 눈물도
빗물에 섞여 젖어 흐를 것이다
36
지리산을 마주하면
침묵할 수밖에 없다
웅휘로운 산자락을
자욱하게 감고 있는
구름도 구름이지만
바람이 다가서고
산 그림자 다가서고
소리 죽여 흐르는 물소리가
다가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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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수 작사가 방
정두수 제2회 한국문학예술상 시부문 수상작
윤안 김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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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0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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