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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이 뭘까? 하고 묻는다면 순간 어리벙벙해지며 머리 속이 복잡해 질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입에선 금방 답이 나온다. '하늘 대왕구'라고.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옛날엔 제일 큰 것을 표현할 때는 하늘 대왕구만 하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너나 없이 그렇게 표현했다. 미루어 생각건대 하늘이라는 광대무변에다 대왕구(大王球) 즉 구형의 으뜸이라는 뜻일게다. 둥근 입체의 으뜸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주일 것이다.
내가 어릴적에 읽었던 책에 미국과 소련이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에 가서도 달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운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옥토끼와 계수나무를 믿고 달을 향해 치성을 드리던, 우주여행은 말 그대로 공상 속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인간이 달에 착륙하는 일이 현실로 되어 버렸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태양계에 속해 있고 태양계는 은하계 속의 한 점에 불과하며 이 우주 속엔 1천억개 정도의 은하계가 존재한다고 한다. 밤하늘에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수많은 별들. 육안으로 보이는 별들은 우리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의 극히 일부이다. 그 일부분에 속하는 별들간의 거리도 너무 멀어 광년으로 표시한다. 1광년은 빛이 일년간 달린 거리이며 약 10조 km이다. 과학자들은 이 우주의 크기는 몇백억 광년의 크기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주의 나이나 크기 등을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미미해 진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것은 마이크로의 세계이다. 마이크로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육체는 우주보다도 더 크고 위대하다. 인류는 망원경의 발달로 더 멀고 더 넓은 우주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현미경의 발달로 더욱 더 작은 극소의 세계를 규명하게 되었다. 극소의 세계에서 본다면 우리 몸은 인간의 숫자 개념으로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세포와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거대한 조직이다.
오래 전에 보았던 SF영화 중에 '마이크로 결사대'라는 것이 있었다. 인류에 크나 큰 영향을 미칠 중요한 사람이 뇌에 혈전이 생겨 죽게 되었는데 사람이 잠수정을 타고 축소기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축소되어 혈관 속을 항해하여 뇌에까지 가서 막힌 혈관을 뚫어 사망직전의 사람을 살려낸다는 내용이었다. 영화를 볼 당시에는 허무맹랑한 공상과학영화에 지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마이크로 카메라를 장기나 혈관 속에 넣어 우리 몸의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세상이 되었다. 인간은 상상력과 호기심의 동물이고 그 호기심은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져 끝내는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만들고 만다.
피가 붉게 보이는 것은 피 속에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는 적혈구 때문이다. 한 방울의 피 속엔 수억개의 적혈구가 들어 있고 각각의 적혈구 속엔 또 수억개의 헤모그로빈 분자가 들어있으며 그 분자 속엔 다시 수만개의 원자가 들어있다. 옛날엔 원자가 최소 단위의 미립자로 생각했으나 근자엔 그 원자 속에 핵이 있고 그 핵 속에 중성자와 양성자가 있음을 알게되었다.
병리학적으로 가장 미소한 감염성 세균인자는 리케차이다. 리케차는 중성자나 양성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리케차보다 더 작은 것이 바이러스이다. 인간이 규명한 제일 작은 존재가 바이러스인 샘이다. 그런데 이렇게 작은 바이러스가 인체에 치명적 병들을 발병케 하는 무서운 존재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바이러스성 질병들은 대증요법과 합병증 예방의 치료가 행해지고 있을 뿐 아직은 특별한 치료제가 없다. 치료제가 없다는 것은 언젠가는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옛날에는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다. 현미경의 발달로 지금은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많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자 분자 중성자 양성자 세균 박테리아 리케차 바이러스 등.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의 모든 물질을 지배하고 있는 극소의 존재를 규명하기란 우주를 규명하는 것 보다 더 어렵다. 점점 더 작은 세계로 인간의 능력이 미치자 옛날에는 없던 단위도 생겼다. 백만분의 1을 나타내는 마이크로란 단위가 있지만 지금은 10억분의1을 나타내는 '나노'란 단위가 생겼다. 극소의 세계로 향하는 인간의 관심과 연구는 우주를 향한 그것보다 훨씬 깊고 집요하다. 그것은 그것이 그만큼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 뿐만 아니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이러스는 라탄어로 '독'이라는 뜻이다. 독이란 해를 끼치는 독한 물질을 말함이다. 아직은 인간이 대항할 수 없는 독소인 바이러스가 앞으로 얼마만큼 인류를 위협할지 알 수가 없다. 해를 끼치는 독소가 바이러스라면 우리사회엔 너무나 많은 바이러스가 만연되어 있다.
컴퓨터 세대가 골머리를 앓는 컴퓨터 바이러스란 게 있다. '트로이의 목마' '미켈란젤로' '13일의 금요일' '백 도어' '웜' 등. 수도 없이 많은 컴퓨터 바이러스가 소중한 자료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사회의 정보 시스템을 마비시켜버린다. 그러나 컴퓨터 바이러스보다도 더 무서운 건 컴퓨터 중독증이다. 컴퓨터 바이러스는 재화의 손실에 그치지만 컴퓨터 중독증은 인간성의 황폐화와 함께 건강마저 피폐하게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사오십대 여성들에게 치명적 바이러스도 있다. 그것은 우울 또는 조울증이라는 바이러스이다. 내 주위에서만 사오십대 주부가 자살하거나 정신병원에 간 경우를 심심찮게 본다.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주부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지 않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것은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개인의 가치관, 사회의 구조, 가족의 구성조건 등. 여러 가지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으나 제일 큰 이유는 소외감과 존재의미의 상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알게 모르게 만연되어 가고 있는 도박과 마약도 바이러스 못지 않은 독소이다. 화투, 카드, 빠찡고, 투계, 투견 등과 같이 불법적 도박도 있지만 카지노 경륜 경마처럼 합법적 도박도 있다. 불법이든 합법이든 사행심을 사주하여 건전한 경제활동을 파괴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박과 더불어 사회를 병들게 하는 또 한가지는 마약이다. 옛날엔 주로 유흥가 주변에서만 맴돌던 이것은 요즘은 연예인 택시기사 심지어 학생 주부에까지 감염되고있다고 한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돈이 되는 것은 물불 가리지 않는 조폭들이 도박 마약 매춘 등, 이 사회의 독소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취약한 사회의 하부조직을 바이러스처럼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인간의 정신세계를 병들게 하는 범 인류적 바이러스는 물신적 배금주의다. 삶의 방편이 되어야 할 돈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전도된 가치관은 인간을 물신의 노예로 만들어 돈을 위해 영혼을 팔아먹는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물신적 이기주의는 인간 자신들뿐만 아니고 자연마저도 눈앞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파괴해 버린다. 어쩌면 자연에게 있어서 인간은 바이러스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 차제에 우리가 간과해서도 망각해서도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류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것은 병리학적 바이러스가 아니고 정신적 바이러스라는 사실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바이러스로 인한 것이 아니다. 탐욕과 타락과 퇴폐가 만들어 낸 종말인 것이다.
여지껏 그래왔던 것처럼 인간의 지혜가 언젠가 바이러스를 퇴치할 물질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함에도 먼 훗날 인류가 멸망하는 날이 온다면 그 원인은 혜성과의 충돌도, 핵전쟁의 발발도, 바이러스의 창궐도 아닌 인간성의 황폐화로 인간 자멸일 것이다. 탐욕과 타락과 이기와 같은 정신적 바이러스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화를 치유하고 자멸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는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