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趙光祖)의 묘...그리고 심곡서원..
최인호의 소설 "유림"은 조광조의 일대기이다. 젊은 나이에 개혁을 추구하다 마침내는 실패하고 유배를 당한다. 그는 死後 영의정으로 추증되지만, 개혁과 反 개혁의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집 근처 용인에 있어 들러 본다.
연산군이 페위되고 왕위에 오른 中宗은 개혁정치를 시도하며 젊은 조광조를 등용한다. 그에 부응하여 조광조는 강력한 王道政治를 펼치는데...그를 위하여는 부패와 비리를 청산하는 작업이 필수이었다.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士林派).. 보수세력인 훈구파와의 대립은 불가피하였다. 위기에 몰린 훈구파는 나무에 꿀을 발라, 벌레로 하여금 갉아 먹게 한 후, "주초위왕 (走肖委王)" 의 글씨만 남기게 하고...중종에게 趙씨 姓을 가진 사람이 王이 된다고 모함한다.
사림파의 득세가 마음에 걸린 中宗은 조광조를 화순으로 유배를 보내고 한달 만에 사약을 내린다. 이율곡도 극찬한 최고의 성리학자... 후일 宣祖에 의하여 영의정으로 추서된다.
燕山君을 내?고 왕위에 오른 中宗은 혼란을 수습하고 ,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면서 성균관을 重修하는 등 官學을 중심으로 한 진흥책을 추진하였지만 기대만큼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세력들은 의리명분을 바탕으로 한 민심 수습과 내적 인격도야를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 풍토를 추구하면서 도학(道學)정치에 기초한, 교학 진흥책을 제시하였다. 그 진흥책 중 하나가 바로 문묘종사(文廟從祠)운동이었다.
이는 사림파의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 입장을 강화해 주는 한편 향촌민의 교화라는 명분을 가지는 것으로서 書院 발생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후 宣祖때에 이르러 士林派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書院은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의 짧은생애...37년 (1482 ~ 1392)..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끝내 실패로 돌아 간 것처럼 묘 앞의 소나무도 꺾여 있다. 조광조가 失敗한 이유는.... 첫째 너무 급진적이었고, 반대파의 저항을 극복하기에는 세력이 너무 약하였다. 그리고 개혁을 위하여 중용한 임금 中宗이 그의 세력이 커짐에 오히려 위기를 느껴, 조광조를 멀리하고 사약을 내린다. 中宗의 그릇이 작다.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매우 어렵다. 기득권 세력때문에.....
유배 당한 조광조는 사약을 받기 전,,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애군여애부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우국여우가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으니 백일임하토 (白日臨下土) 하늘이 이 땅을 굽어 보시니 소소조단충 (昭昭照丹衷) 내 일편단심 충성을 밝게 밝게 비추리.
멀리 길 가 , 내 車가 보인다.
심곡서원 ...... 개보수 공사 중... 조광조의 사당이다.
그가 죽은 후, 임금 宣祖에 의하여 영의정으로 추서되고 그의 묘 인근에 사당을 지어 그의 영혼을 달래어 준다.
가을 어느 날... 다시 찾은 조광조의 묘...
잔디의 푸르름은 사라졌지만, 단풍이 너무 고와, 길 건너 아파트 엘리베이터 게단에서 최대한 당겨 촬영한다.
중종(中宗)과 조광조의 위험한 동거(同居)............
연산군을 왕위에서 내?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하여 왕에 오른 中宗은, 자신을 王에 오르게 한 공신(功臣)들에 의하여 견제를 받으며, 끊임없이 시달리게 된다. 그 공신들은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 사건 이후, 세습적으로 권력을 향유하던 소위 훈구파(勳舊派)들 이었다. 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격적으로 신진 사림파 조광조를 등용한다. 중종은 조광조를 이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반면, 성리학적 이념으로 이상국가(理想國家)를 꿈꾸어 왔던 조광조는 이를 계기로 자신의 개혁정치를 추진한다. 서로를 필요로 하였지만, 각자가 지향하는 목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中宗과 조광조는 우선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견제하고 갈등하는 위치에 놓일 수 밖에 없는 관계이었다. 일단 王權이 불안정하였던 中宗은 조광조를 기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함으로써, 정치적 이익을 얻는다. 性理學의 원칙에 충실한 조광조의 등장에 훈구파는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이상론(理想論)은 왕권의 견제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었다. 조광조의 입장에서 中宗도 연산군이나 세조같은 극단의 길을 걷는 王이 될수도 있다는 염려가 있어서, 조광조는 끊임없이 王의 도덕정치를 강조하는데... 군주 독재의 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고 개혁세력이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믿음을 굳혀가게 된다. 여기서 두 사람은 갈등의 불씨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중종에게 훈구파가 위축되는 대신, 그 자리에 조광조를 필두로 하는 사림파가 자리를 잡는다. 이로 인하여 中宗은 사림파에게 위협을 느끼게 된다.
조선 건국 초기..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도전과 이방원이 피를 부르는 권력싸움을 전개한 것이나, 세조의 왕위 찬탈사건과 사육신 사건은 모두 王權과 신권(臣權) 간의 권력투쟁이었다.
조광조는 王에게 충성하여 마땅하지만, 그 王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조선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성리학 이념이라고 판단했다. 이른바 성리학의 確信犯이었던 셈이다. 수양대군이나 연산군은 모두 성리학 이념...그 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조광조는 中宗도 얼마든지 그 전철을 따를 수 있다고 보았고, 中宗이 자신만의 정치적 역량을 갖춰 독재 군주가 되기 전에 성리학 이념이라는 견제장치로 중종을 압박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서 그는 서두른다. 그의 개혁은 그래서 급진적으로 추진되고 만다.
결국 中宗은 세력이 너무 커져버린 사림파를 제거하려 마음먹고, 여기에 훈구파가 도와 준다. 조광조는 드디어 전남 화순으로 귀양가서 , 사약을 받고 죽는다. 기묘사화이다.
이 비극은 왕권에 대한 견제장치로 성리학의 이념을 무기로 하여 등장한 신권(臣權)의 도전에서 조광조가 패배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조광조는 "개혁의 화신(化神)"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화태 (禍胎)"로 불리었다. 즉, 말썽만 일으키는 불씨라는...그가 움직이면 재앙만 일어 난다는... 의미이다. 역사의 평가는 그 입장에 따라 이렇게 판이하다.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한다.
금년 단풍은 유난히 곱고, 짙다.
|
출처: 김규봉(金圭鳳)의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해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