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삼척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서성옥
흑요석
국보 제94호 참외모양청자병
국보 제259호 분청사기상감용문호(粉靑沙器象嵌雲龍文壺)
미수 허목 인장
미르못
반가사유상
영조어진
허목선생백운계기 원본
국보 86호 경천사지10석탑
국립중앙박물관 관람기
올해 5월 첫 주말은 일요일을 지나 월요일부터 어린이날과 석탄일로 이어져 말 그대로 황금연휴였다.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 모두 보름 이상 숙연한 분위기에 나들이를 자제하여 왔지만 그래도 모처럼 찾아 온 연휴를 집안에서만 보낼 수 없었던지 동해안으로 몰려 온 관광객들이 한 여름 휴가철 못지않았다. 금요일부터 토요일, 속초행 7번 국도는 낙산에서부터 극심한 지정체로 병목 현상이 빚어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남들을 탓하지 않았고 소리 높여 떠들거나 웃는 사람도 없었다. 주점에서도 건배를 외치는 사람들이 없었다. 불행한 국가적 재난이 ‘용감무쌍’한 우리 국민성을 ‘배려’와 ‘타인에 대한 존중’으로 바꿔놓았나 할 정도이다. 그래, 누군가 ‘슬픔도 힘이 된다’ 하지 않았던가. 이제 정말 우리 사회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길을 걸어 갈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월요일 어린이날, 동서울 행 고속버스 첫차를 탔다. 역귀성하는 사람들이 느꼈을 것처럼 서울행 길은 전혀 막히지 않았고 좌석도 만석이 아니라서 옆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잠을 청할 수도 있고 책을 읽고 과자 조각을 부스럭 거려도 괜찮았다. 4월 첫 주 봄꽃들이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일제히 만개한 것처럼, 5월 중순에나 필 이팝나무 가로수가 벌써 흰 꽃등을 매달기 시작하였다. 계절도 유난스러운 2014년 봄날이다.
목적지를 국립중앙박물관과 길상사로 정하였다. 이유는 이 절망의 시대에 그래도 수천 년 도도하게 흘러온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역사를 일관(一貫)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서 내리면 국립중앙박물관 출구 표시가 보인다. 미리 정보를 검색하고 갔지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하는 지하보도는 GDP 기준 세계 10위권으로 진입한 대한민국의 위상을 당당하게 보여 주었다. 300 여 미터 이어지는 평면 에스컬레이터는 세계 최고 시설을 자랑하는 태국 방콕국제공항 보다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양쪽 벽면에는 디지털 화면으로 모던하게 시각디자인화 한 우리나라 대표 국보와 보물이 영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천정의 은은한 채광은 태극의 건. 곤. 감. 리를 형상화 하였고, 전통과 현대를 관통한 포스트모더니스트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선율이 잔잔히 실내를 감싸 묘한 감동을 자아냈다.
출구를 나서자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이 눈앞에 우뚝 서 있다. 2005년 이 곳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제 때는 창경원 내 이왕직박물관, 정부 수립 후 문화재관리국 산하 덕수궁미술관, 1972년 다시 경복궁 내 박물관을 건립하여 이전했다가 1986년부터는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이 국립중앙박물관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들어 선 문민정부는 이 건물 돔(첨탑은 분리하여 독립기념관에 전시)만 남겨두고 모조리 돌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오욕의 건물이지만 정부수립을 선포한 건물이고, 서울 수복 때 제일 먼저 태극기를 걸은 건물이고, 40년 동안 중앙청으로 국정을 수행한 건물이었다. 무엇보다 건축 당시 동양 최대의 르네상스식 현대 건물로 건축미가 뛰어난 석조 건물이었다. 일제가 경복궁의 지맥을 끊어 세운 건물이기에 그대로 나둘 수는 없었지만 이전하여 보존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가 많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처럼 보이지 않는 매우 모던한 미술관과 같은 현대식 건물로서 멋을 부리지 않고 차분한 형식이 더 마음을 끌어 당겼다. 건축가는 과유불급의 우를 범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국제설계경기를 통하여 공모를 하였는데 다수의 외국 심사위원이 포진하였지만 당선작은 정림건축의 박승홍에게 돌아갔다. 그는 박물관 앞터에 넓은 못을 만들어 ‘거울못’이라 했고, 못 동편에 정자를 세우고 소나무를 심었다.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어울리며 국립중앙박물관의 품격을 더 하였다.
상설전시장인 동관으로 들어서면 로비와 중앙 전시실 천정이 4층 꼭대기에 닿아있고 고딕식 유리 천정으로 자연 채광이 쏟아져 웅장하고 신비로움 느낌이 들게 하였다.
중앙 전시실에 국보 86호 경천사지10석탑이 세워져 있었다. 고려 전기의 탑으로 일제 때 무단반출 된 문화재인데 1960년대 초 겨우 되돌려 받아 경복궁에 세워놓았다가 이곳 국립중앙박물관 신축되면서 복원 작업을 거쳐 동관 1층 중앙에 세워 놓은 것이다. 3층 기단과 탑신에는 화려한 연꽃, 불상, 보살상, 나한상 등 불교 조각이 풍부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4단부터는 각층마다 팔작지붕형태로 기와골을 새기고 여러 불교 문양이 목조건축물 보다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다보탑이나 월정사9층석탑보다 훨씬 화려하게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인데 이 탑은 조각하기 쉬운 무른 대리석을 쓴 것이고, 고려시대 가 우리나라 불교문화가 가장 번성한 시기라 이해가 되었다. 더욱이 이 탑은 원(元)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원(元)은 티벳 불교를 받아 들였다고 하니 그 신비롭고 화려한 포탈라 궁이 떠올라서 이해하기 쉬웠다.
이제 본격적으로 1층 상설 전시관 중 선사.고대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젊은 엄마가 어린 초등학교 형제에게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를 가리키며 차이점을 말해 보라고 하였다. 엄마의 모습이 아니라 초등학교 교사가 찬찬히 공부를 가르치는 모습이다. “요즘 젊은 엄마들 너무 똑똑해, 그냥 보고 느끼게 하면 될 걸, 눈으로 새기면 그게 공부 아닌가, 어차피 저 애들은 중학교에 들어가면 모두 달달 외워야 하니까...”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검은 흑요석 조각 무더기에 내 눈이 머물렀다.
흑요석(黑曜石), 우리가 문학작품에서 메타포로 자주 접하는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바로 그 흑요석으로, 필자는 말로만 듣다가 처음 실물을 보았다. 사금파리보다 더 날카로워 보이는 검게 빛나는 암석 파편들, 이 암석은 세석기(細石器)로 구석기 말 첨단의 하이테크였다. 구석기 원시인들이 만능의 ‘맥가이버 칼’을 갖게 된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누군가 말하였다. 검은 유리돌의 등장은 구석기인들의 의식주 전반에 걸쳐 변화를 가져왔다. 날카로운 화살촉과 정교한 창날은 수렵 능력을 향상시켰고, 무엇보다 살상력이 높아져 경쟁 관계에 있는 부족들을 제압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신비의 돌은 화산지대에서만 발견되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한반도에서는 백두산 일대가 유일하고 일본에선 규슈가 주산지라고 한다. 이 흑요석 세석기는 강원도 홍천, 철원, 양양에서 무더기로 발견되었고, 2006년 대구 월성동 유적에서 흑요석이 다량 출토되는 등 서해안을 제외한 남한 일대에 두루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선사시대 때 이미 한반도 내에 물적, 인적 교류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는 가설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부산, 통영, 여수등 남해안 지방에서 출토된 흑요석은 규슈의 화산석과 성분이 동일하다고 하니 한반도는 물론 일본열도까지 망라하는 선사시대 교역 망이 존재했다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흑요석(黑曜石)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선사시대 교역과 이동로를 알 수 있는 키를 쥐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몽골리안 루트를 다시 풀어야 하듯.
다음으로 울산 반구대 암각화 탁본에 눈이 갔다. 국보 285호인 이 선사의 유적을 정교하게 탁본하여 걸어 놓았다. 1999년 1월 23일에 방송된 KBS역사스페셜 <3000년 전의 고래사냥, 울주 암각화의 비밀>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 암각화의 비밀이 많이 풀렸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대형의 단일 암반 화면에 호랑이, 멧돼지, 사슴 등 육지동물과 바다동물,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특히 이 암각화에는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대형고래 46마리가 그려져 있으며, 선사인류가 작살과 낚시줄 등 도구를 이용하여 집단으로 고래를 잡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 BBC 방송이 특집 방송으로 취재하여 “한국에는 8,000년 전 이미 목축과 고래잡이가 있었다.” 보도하였다고 한다. 학계는 반구대 암각화는 어느 한 시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고 BC 5,000년에서 BC 1,500년 사이에 걸쳐서 누적된 한 문명일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한반도에 퍼져 있는 청동기 거석문명과 함께 한반도에 우수한 신석기 문명이 있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 주는 자랑스러운 한반도의 문화유산이다.
필자가 몽골리안 루트를 다시 풀어야 한다고 한 것은,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나는 울산 앞 바다에서 고래를 잡았던 신석기인들은 한반도 남동해안에 미리 정착해 살았던 남방계 혈통일 것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이칼 호수에 시원을 둔 북방계 몽골리안 또는 페르시아 다리우스 황제도 물리칠 만큼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진 스키타이 북방 기마민족에게 제압을 당하고 이후 피지배자로 고유한 문명을 잃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신라 금관은 모두 북방민족을 상징하는 사슴뿔 장식의 형상을 하고 있다. 북방민족은 설원의 반사되는 빛 때문에, 멀리 있는 짐승을 사냥하기 위하여 외커플의 갸름한 눈을 가지고 있고 하관이 빠르다. 3층 전시실에서 본 고려의 이색 초상화부터 영조 임금과 정조의 외조부 홍봉한, 흥선대원군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화상의 인물에서 쌍커플 눈을 볼 수는 없었다. 개화 전까지만 해도 쌍커플 짙은 현대형 미인은 천한 상이었다. 일본의 마츠모토 히데오는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연구하면서 동아시아 각 민족별 유전자 분포를 확인해 보았는데, 한국인은 ab3st(북방형) afb1b3(남방형) 유전자가 거의 절반 씩 나타났다. 지금도 울산, 부산, 목포 등지에 가면 짙은 눈썹에 눈이 부리부리한 사람들이 많다.(이제 고희에 접어들었지만 70년대를 양분 한 부산 가수 나훈아와 목포 가수 남진, 뿐만 아니라 80년대 생 배우들에게 그 특징은 그대로 나타난다. 울산 출신의 김태희는 북방계와 남방계가 조화롭게 어울린 얼굴이지만, 더 화려한 남방계 외모의 이태임이라는 탤런트가 있고, 부산 출신의 박시연, 순천 출신의 김옥빈, 광주 출신의 박신혜 등은 완벽한 남방계 형 미인들이다.) 필자와 친교가 있는 울산 친구 두 사람도 눈썹이 짙고 쌍커플 눈, 두툼한 입술을 가졌다. 진정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
원삼국관에서는 가야 토기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긴목항아리, 굽다리접시(고배高杯), 굽다리바리 등 토기들은 신라나 백제의 토지보다 더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신라토기가 가야토기와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은 목항아리나 굽다리접시의 굽에 나 있는 구멍인데 가야토기는 네모난 구멍을 일렬로 배치하는 데에 비해 신라토기는 네모난 구멍을 서로 엇갈리게 배치한다는 것이다.
가야의 철제 갑옷과 철제 마구들이 천오백년이 지난 상태로 내 눈 앞 유리 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 갑옷은 통 철갑으로 되어 있어 쇠미늘 찰갑으로 된 갑옷에 비하여 활동성은 떨어지겠지만 1500년 전 녹슬지 않은 이 갑옷을 어떤 화살도 뚫지 못했을 것이다.
가야가 철의 왕국으로 뛰어난 제철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두어해 전 한 방송국 드라마에서 김수로왕은, 북방 유목민족인 제천금인 족장 김융 의 아들로 나온다. 김융 세력이 패망하자 그의 처 정견비가 만삭의 몸으로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와 구간이 다스리는 변한 소국의 철사장의 아내가 되고, 김수로는 그의 아들로 자라면서 최고의 제철기술자가 되어 결국 변한 12소국을 통합한 금관가야의 왕이 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로 나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구지봉 난생설화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지만 필자는 드라마 내용이 오히려 “9간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터를 닦고 거주한 토착 부족 세력들을 뜻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김수로왕은 외부로부터 이주해 온 이주민 세력이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즉, 가야국은 토착 부족 세력과 이주민 세력이 힘을 합쳐 세운 나라였던 것이다.”라고 정의한 위키백과사전의 설명에 더 공감이 갔다. 김해 대성동 고분 91호분에서 출토된 부속품들은 주로 말(馬)과 관련이 있고, 순장 풍습이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이는 모두 북방 유목민족의 고유문화로, 중국 선비족의 무덤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다만 2~3세기 경 중국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인 중국 평원의 대부분을 차지한 예맥족(우리 민족의 시원으로 보는 압록강 상류 대수맥 근처에서 농경화한 퉁그스계 계열 북방민족) 부여 세력이 선비족 문화와 융합을 하였고 그 일부 부여인들이 한반도 남단으로 내려와 지금의 김해에 정착해 가야의 지배층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결국 아유타 허황옥 왕후는 이미 정착한 남방계 해양문화 토착세력의 대표하는 것은 아닐까 ? 그런데, 파사석탑(婆娑石塔)의 돌은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때 싣고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이 탑의 돌이 김해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 암석이라는 또 다른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이는 남방 불교 형식의 탑이고, 그렇다면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비로소 중국 전진을 통하여 불교가 들어왔다는 정설 수립 전인 기원전후 시기(허황옥 입국 서기48년)에 이미 남방 불교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도 있고 이 시기에도 남방 문화와 그 세력이 꾸준히 한반도 남쪽에 들어서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
우리 한국어가 몽골어, 퉁구스어, 터키어 등과 함께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아직까지의 다수설이지만 한국어의 기원에 남방어족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학설도 만만치 않다. 한국 고대어 분석에 매진 해 온 강길운 교수는 <고대사의 언어비교학적 연구>를 통하여 고대 가야어와 드라비다어와의 비교하면서 지금 쓰고 있는 한국어조차도 드라비다어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데가 있다고 분석하였다.
드라마에서는 김수로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석탈해는 제철기술을 익혀 그의 고향 사로국으로 돌아가 신라 제4대왕이 된다.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신화에 의하면 수로왕과 같이 난생설화로 태어난 탈해는 왕이 되기 전 바다를 따라 가락국으로 와 수로왕에게 왕권을 내어 놓으라고 했고, 서로 신기(神氣)를 다투어 패한 후 사로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탈해가 패퇴할 때 이를 쫓은 가락국 배가 500척이라고 하니 석탈해 세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석탈해는 3대 유리이사금과 잇금내기를 하여 치아가 더 많은 유리에게 먼저 왕위를 양보한 후 4대 이사금이 되었다고 하지만, 사가들은 탈해가 호공의 집(호공의 집터가 길지임을 알고 꾀를 써서 그 집을 차지함, 이곳이 후에 월성이 된다)을 빼앗을 때 자신이 본래 야장(冶匠)이었다고 한 점을 근거로 하여 석씨부족이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기반한 군사력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2층 전시관 중 도자기 전시실에 먼저 들어섰다.
도자기는 고려 비색청자에서 시작하여 상감청자, 분청사기, 조선백자에 이르기까지 수백점의 보물과 국보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솔직히 짧은 시간에 그 많은 대단한 자기들을 모두 일별하기가 벅찼고 나중에는 어지럽기까지 하였다. 도자기(陶瓷器)에 대한 심미안도 없었지만 일정상 찬찬히 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가장 눈에 들어 왔던 청자, 분청사기, 백자를 꼽아본다.
국보 제94호 참외모양청자병은, 선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러/ 보살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4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라고 한 박종화의 청자부 시(詩) 모양 그대로이다. 고려 인종 장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송대 양식을 빼 온 것이지만 훨씬 부드럽고 단정한 곡선미로 고려청자 최성기의 작품 수준을 보여 주는 것으로 안내문에 적혀 있다.
국보 제95호 칠보무늬향로는, 투각을 한 상감청자로 우리가 국사교사서 등을 통하여 가장 많이 접한 화려한 상감청자기이다. 이 향로는 투각(透刻)된 둥근 뚜껑과 연꽃형 몸체, 그리고 세 마리의 토끼가 받치고 있는 판형 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로 다른 형태의 상형물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완성도 높은 조형물로 승화되었다. 칠보(七寶) 무늬 투각문양 뿐만 아니라 연화무늬 몸통은 틀로 찍어낸 꽃잎들을 하나하나 붙여 활짝 핀 연꽃으로 만들고, 꽃잎에는 가늘게 잎맥을 표현하여 섬세함을 부여하여 고려자기 절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색다른 청자 한 점이 눈에 들어 왔다. 붉은 색이 감도는 긴 통모양의 병 앞뒤에 한 그루씩의 버드나무를 그려 넣은 소박한 병인데, 국보였다. 국보 제113호 버드나무무늬 통모양 병 - 순우리말로 이름을 부여하기 전에는 ‘화청자양류문통형병’이라고 하였고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일본인 수집가로부터 사들인 것이라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인에게 사 박물관으로 들여 온 것이라면 당시 정말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반출되었을까, 하고 묻는 것이 우문일 것이다. 청자라고 모두 비취색이 아니고 이러한 형태를 철회청자라고 하고, 이 청자는 ‘형태상의 적절한 비례와 어깨의 모깎기 형태, 몸체에 그린 자연스러운 선의 흐름, 대담하게 단순화시킨 버드나무의 간결한 표현들이 돋보이는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보물 제342호 모란무늬 매병과 보물 제346호 모란무늬 매병 쌍둥이처럼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어깨가 풍만하고 허리의 곡선이 매끄러우며, 작은 아가리가 매우 기품있게 마무리 된 청회색 청자로, 연꽃 테두리 안에 국화와 덩굴을 흑백으로 상감한 이 고려 후기 청자에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이제 분청사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눈에 확 들어 온 것이 국보178호 ‘물고기무늬편병’으로 앞서 본 청자에 비하여 대단한 세련미는 없어도 두 마리 물고기를 음각한 유백색의 이 도자기가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누군가 “청자나 백자가 섬세하고 고결하고 우아하다면 분청사기는 조금 투박하지만 정감이 간다.”고 했다. 분청사기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걸쳐 만들어 진 도기 양식으로 엄밀히 말하면 청자에 회백을 입힌 것이다. 이 국보178호는 조선 전기 분청사기 편병인 것이다.
국보 제259호 분청사기상감용문호(粉靑沙器象嵌雲龍文壺) - 구름 용무늬 항아리로 순우리말로 적혀 있는 이 항아리는 15세기 전반 분청사기를 대표하는 것이다. 높이 49.7㎝의 우람한 자태가 먼저 눈길을 끌었다. 크기 면에서 진열된 다른 자기들을 압도한다. 몸통 가운데에는 네발 달린 용과 구름을 활달하게 표현해 놓았고, 아래쪽 기단 부분은 연꽃무늬를 두르고 있다. 마치 용이 여의주를 쫓아 구름 속을 뚫고 나아가는 기세를 놓치지 않고 힘차게 살렸다.
먼저 본 모란무늬 매병과 닮은 매병 1점이 눈에 들어 왔다. 보물 제347호 청자상감유어문매병 - 물고기 두 마리를 새긴 이 매병은 회청자 매병보다 훨씬 매끄럽게 보였다. 설명문에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매병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기형은 고려 말 상감청자에 가깝지만 인화 인화기법의 비중이 높아졌고 탁했던 유약이 향상되어 비교적 밝은 회청색으로 바뀐 점이 두드러진다.”라고 쓰여 있어 조선 초기 분청사기 절정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필자는 관람후기를 쓰기 위하여 스마트폰에다 위 보물들을 담아 왔는데, 조선백자관에 와서는 그만 지쳤는지 몇 점찍지도 못하였다. 도화지를 가지고 와 그 형상을 진지하게 스케치면서 메모를 하는 전문가들도 눈에 띄었다. 거듭 말하지만 심미안이 낮은 사람에게는 어쩌면 국보급 도자기를 본다는 신비감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개 발에 편자, 그러나 이 촌뜨기 같은 사람도 언젠가는 눈이 밝아 질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도자기관을 나왔다.
‘흙으로 빚은 인간 정신의 고갱이’
이 글을 쓰면서 조선백자관에서 마지막으로 담아 온 유백색의 달항아리 한 점을 찬찬히 보면서 2014년 5월 5일 점심 무렵을 반추해 본다.
조선의 초상화들을 본다. 방금 북방민족 기원을 꺼내면서 던진 화두의 그 초상화들. 먼저 영조의 어진(보물 제932호)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영조 초상화 진본이다. 유홍준 교수의 말에 의하면 영조는 선왕인 숙종의 초상화를 그려 바칠 때 “머리카락 하나 다르게 그려도 내 조상이 아니라 남의 조상이 된다”며 극도의 사실성을 강조했다고 하니 지금 필자가 보고 있는 영조의 어진은 아마 영조 임금 얼굴 모습 그대로 일 것이다. 이 초상화는 영조 20년(51세)에 장경주, 김두량이 그린 그림을 1900년에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 채용신이 이모(移模)한 것이라고 한다. 영조의 왕세제 책봉 전 21세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 한 점도 전해져 오는데, 우뚝한 콧날과 갸름하면서도 강직해 보이는 눈매는 30년 세월에 변함이 없었다.
흥선대원군 초상화도 한 점 전시되어 있었다. 금관조복을 입고 화려한 치장이 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당대 최고 권력자의 모습. 전해 오는 대원군 이하응 초상화 6점이 2006년 12월 29일에 보물 제1499호로 일괄 지정되었다는 것을, 필자는 2012년 3월 19일 한 일간지에서 흥선대원군 집정 10년기 때의 초상화 한 점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 초상화가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당시 필자는 ‘석파(石坡)의 초상’이라는 시제로, ‘20여년 아슬한 바위 끝에다 홑잎 蘭을 치며/ 세상을 기다려 온 그 사람, 석파/ 붓으로 돌을 쪼개어/ 그림과 칼, 모두를 얻은 그 사람/石坡’라고 초상화를 본 느낌을 형상화 해 보았다. 그리고 “집권 초기 초상 2점에서 석파(石坡)가 금관조복 차림의 전형적 권력자의 모습을 보였다면, 본 시제의 초상은 권력자와 예술가의 경계가 모호하다.”라고 썼다. 필자는 비로소 그 초상화 중 한 점 원본을 보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초상화 기법은 극 사실주의 화법이다. 당대의 최고 초상화가 이명기는 정조의 명을 받고 채제공의 초상을 그리는데 얼굴의 얽은 마마 자국과 사시斜視 눈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채제공은 영의정으로 남인 정권의 영수였다. 조선의 초상화가에게는 곡필은 없다. 그러나 석파(石坡)의 금관조복은 사실화이겠지만 얼굴은 너무 깨끗하다. 화풍도 시대에 따라 변화는 것이겠지만 서세동점(西勢東漸) 풍전등화의 조선 말, 춘추필법의 정신이 저물어 가는 탁류의 시대에 붓을 든 사람도 흥선대원군의 하늘을 찌르는 권력 앞에서 극사실주의 초상화법을 그대로 구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조의 외조부 홍봉한과 동시대의 인물 구윤명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구윤명은 처음 듣는 이름인데도 생몰년 외 아무런 설명이 없다. 누구인지 알아보니 한성판윤의 아들로 태어나 22세에 급제하여 영조의 신임으로 육조 판서를 두루 연임하고 고종명한 인물이었다. 초상에 보이는 얼굴은 매우 강직하고 장대한 골격의 인물로 보이나 왕실의 훈척으로 자주 탄핵을 받았음에도 높은 문장과 능란한 처신으로 명신으로 이름을 남겼다고 한다. 홍봉한의 동생 홍인환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적극 개입하고 이후 정조의 세손 시절부터 정조와 끝끝내 대척점에 서 정조 즉위년에 사사된다. 그런데 홍봉한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다르다고 사위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방관자적 입장이었고 외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도 정순왕후와 같은 노선(2014년 개봉 영화 ‘역린’의 정유역변)을 견지하였다. 정파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위와 외손까지 죽음으로 내 몰려고 한 것이 과연 노론 벽파의 영수다운 모습이었을까? 초상화에 그려진 그의 얼굴은 위 구윤명보다 유순하게 보인다. 노회한 책략가, 권력을 유지하고 당파의 이익을 위하여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던 권신의 숨은 얼굴이리라. 정조 즉위 후 혜경궁 홍씨의 구명으로 그는 겨우 죽음을 면하고 고종명을 할 수 있었다.
이제 필자는 가장 극적인 두 인물을 동시에 보게 되었다.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이다. 서인 노론과 남인을 대표하는 두 거봉의 초상을 보게 된 것이다. 예학을 놓고 가장 치열하게 논쟁을 한 두 사람을 같은 장소에 배치한 것은, 조금 뜨악한 것 같지만 조선 중기 붕당정치를 설명하는데 이처럼 상징적인 것은 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박물관 측은 두 사람의 초상화 사이 알림판에 붕당정치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각 생몰연대 등만 적시하고, 그 아래 두 사람이 남긴 저서 복제본을 전시해 놓고 특별한 코멘트는 하지 않았다.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평은 사가(史家)의 몫이지 박물관이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1차 예송논쟁은 1659년 기해년,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후 자의대비가 3년 복상을 입어야 하는가, 1년 복상을 입어야 하는가, 문제를 놓고 집권당 서인과 야당인 남인이 치열하게 예학 다툼을 한 사건이다. 집권당 서인은 효종이 차자(次子)라는 이유로 자의대비 조씨에 대한 복상을 1년으로 정하였고, 19세의 세자 연(棩), 현종이 즉위하였다. 이렇게 결정 난 것이지만 남인들은 비록 효종이 차남이나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비추어 자의대비가 3년 복상을 입어야 한다고 강하게 맞선다. 그러나 1차 예송논쟁에서 현종은 자신의 왕위를 지탱해주고 있는 서인들에게 맞설 수는 없었다. 기해예송에서 패한 남인의 영수 허목은 삼척부사로 좌천된다. 허목은 삼척부사로 와 그가 조선 최고의 전서체의 대가임을 입증하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남겼다. 그의 고향 연천은 지금도 미수 허목 선생의 선양사업을 선생의 생거지(生居地)와 묘역에서 매해 거르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무덤의 비문 역시 전서체 새겨져 있는데 선생이 생전에 써 둔 전서를 집자하여 새긴 것이라고 한다. 연천이 6. 25 전쟁 당시 격전지여서인지 비석에 여러 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박혀 있어 안타까웠다. 묘역의 문인석은 삼척에서 가지고 온 돌을 다듬은 것이라고 하는데, 선생의 삼척 사랑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삼척에서는 가락김씨허씨종친회 주관으로 미수허목선생춘향대제를 매년 열고 있다. 선생의 호가 미수(眉叟)인 것은 초상화에서 보듯 유난히 희고 잘 다듬어진 수염을 뜻하기도 하지만, 공교롭게도 선생은 88세 미수(米壽)를 일기로 고종명한다.
1674년 갑인년의 2차 예송논쟁을 사가들은 ‘갑인예송’이라고 부르는데 1차 기해예송 보다 드라마틱하다. 15년 후 효종의 왕후이자 현종의 모후인 인선왕후가 사망했다. 이때에도 대왕대비인 자의대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가 큰 문제였다. 효종 상 때는 경국대전이 장남과 차남을 같게 취급해 1년복을 입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문제는 며느리의 경우 경국대전이 맏며느리는 1년, 다른 며느리는 9개월을 입도록 규정했다는 것이다. 서인세력은 처음 1년 상복을 내세웠다가 그들의 영수 송시열의 뜻에 따라 9개월을 당론으로 세웠다. 그러나 장년이 된 현종은 이미 노련한 정치가로 성장하여 있었고, 그들이 선왕의 정통성에 도전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현종은 영의정 김수홍을 귀양 보내고 서인들을 모조로 요직에서 축출하고 남인 정권을 세운다. 그러나 현종도 급서를 하고 어린 숙종이 등극한다. 송시열은 덕원으로 유배 갔다가 경신년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 설 때 중추부영사로 복권되지만, 장희빈 측 남인이 재집권하는 기사환국 때 83세의나이로 사사된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였던 숙종에게 조선의 주자(朱子)라고 받들어 지며 왕권과 신권을 나란히 하려고 한, 율곡의 학맥 이기일원론에 따라 ‘왕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는 나라’가 조선임을 견지하는 이 늙은 신하는 여간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역모죄도 아닌 것으로 유배지 제주에서 올라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는다. 그의 유허비가 정읍에 잘 보존되어 있다. 송시열은 조선의 사림(士林)들로부터 유일하게 송자(宋子)로 받들어진 유자이다.
16세에 인조의 후비가 되어 36세에 자신 보다 나이 많은 적실의 아들 죽음에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문제로 예송논쟁의 당사자가 된 자의대비(장렬왕후)는 실제 이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여인으로서는 한 많은 삶을 산 사람이다. 그녀는 숙종 14년, 64세를 일기로 혼자 살아 온 신산한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경기도 구리의 동구릉 잠들어 계시는데 능호는 휘릉이다.
남인과 서인 양당이 가장 격렬하게 대립한 이 논쟁은 결국 정치적 다툼과 학문적 견해 대립이 예송이라는 예학 논쟁으로 표출된 것이다. 무엇보다 예송논쟁을 통해 정립된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은 소위 붕당이라는 서인과 남인의 정책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며, 이것이 현실 정치에 반영되어 나간다. 대동법에 대한 논의, 노비제에 대한 논쟁, 호패법 문제, 예학의 보급 등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가 현종조에서 숙종조 때로 이렇게 예송논쟁을 통해 정립된 당론이 어떻게 당시 정치에 반영되었는지를 학자들은 살피고 있다. 다시 말해 예송논쟁 등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붕당정치가 조선을 병들게 만들고 결국 몰락한 왕조로 내몰았다고 폄훼하는 것은 지극히 식민주의 사관에 따라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조 사후 확실히 정권의 기반을 다진 서인의 벽파 노론 세력은 민본주의 송시열의 정신을 잇지 못하고 세도정치로 변질하여 왕실을 겁박하고 백성들의 민생을 챙기지 못하였다. 노론 집권 세력은 정승부터 하급관리까지 탐관오리가 되어 온갖 방법으로 백성들을 수탈하고 파당과 계급의 이익만 챙겨 수많은 민란, 민중봉기가 일어남으로써 그들 스스로 조선의 몰락을 재촉한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해동건곤 존주대의 海東乾坤 尊周大義
웅혼한 필체의 송시열 글씨 족자 한 점을 보았다. 일반적인 해서체이지만 활달하고 거침없는 서체에서 우암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한학에 거의 문외한인 필자가 그 뜻을 적확히 짚을 수는 없었지만, 비록 백가쟁명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원을 통일하였을지라도 진시황이 저지른 분서갱유를 용서할 수 없었던 그는 상(商), 은(殷), 주(周)로 이어졌던 요순(堯,舜)시대를 유가의 이상으로 보고 해동海東, 즉 조선이 자주적인 유교 이상국을 추구하는 나라임을 표명한 것으로 짐작해 본다. 물론 존주대의를 철저한 모화주의, 사대주의 표상으로 보고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다수일 것이다. 조선의 주류 유학자들이 스스로 소중화임을 자처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만주족 청(靑)이 중원을 통일하자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였음에도 이제 조선이 동아시아의 유일한 중화국임을 은연 중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靑)은 무력으로 중원을 다스리지 않고 한족의 유학을 숭상하며 제국의 영토를 통치하였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요동, 만주, 고구려의 역사를 그들 역사 내에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고 있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하여 국수주의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것을 오히려 경계하였다. 로마가 이탈리아의 역사인가 ? 로마는 유럽의 역사이고 북아프리카 물론 터키, 시리아 등 일부 소아시아의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이다. 그렇지만 고구려를 한민족 단일 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예(濊)족인 주축인 부여, 옥저, 동예를 아우른 맥(貊)족이 고구려 연합 국가를 건국하고, 요동과 만주 그리고 한반도 북부에 대제국을 세운 것이다. 당시 만주 벌판과 연해주 땅에는 만주족인 말갈, 읍루 등 숙신족이 살지 않았는가? 발해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피지배 계층으로 그 땅의 백성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최근 아주 공감이 가는 글을 읽었다. 서강대 김한규 교수의 ‘동아시아 역사상의 한국’이라는 주제의 인문학 강의였는데,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국은 청(靑) 이전의 중국과 그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북방의 동호족 계열의 선비, 거란, 몽골은 끊임없이 중원을 넘보았다. 결국 거란은 중원을 찬탈하고 요제국을 세웠고, 몽골은 원제국을 세웠다. 만주족으로 통칭하는 숙신족 계열인 말갈, 읍루, 여진족들은 요동과 만주 벌판에 엎드려 살다가 부족끼리 연합하고 힘이 커지면 중원을 넘보았다. 그들도 결국 중원에 금제국과 청제국을 세웠다. 그런데 그 강성한 민족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몽고 자치구를 중국에 내어주고 북방 사막. 초원지대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몽골외 거란, 만주족들은 그들의 나라도, 그들의 글도, 말도 잃었다. 현재 중국 내 만주족은 1,000만명 넘게 살고 있지만 만주어를 말하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이제 100여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건륭제가 칙어를 반포하던 청의 공식 언어 만어(滿語)는 이제 사멸한 언어가 되었다. 한자문화권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외하고 민족공동체로 말과 글을 유지하며 중국과 동등한 국가로 남아 있는 나라는 당시 중국에 사대와 조공을 한 월남(베트남)과 우리나라 밖에 없다. 조공은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는 굴욕의 역사가 아니고 하나의 권리였다는 것이 김한규 교수의 말이다. 명과 청은 3년 1사, 즉 3년에 한 번만 조공을 와도 된다고 하였지만, 조선은 스스로 1년 3사를 끝까지 고집하였다고 한다. 조선은 조공을 통하여 중원의 선진 문물과 학문을 끊임없이 수혈 받고, 오히려 이를 발전시켜 나갔다고 봄이 옳은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백성들이 전화를 입고 국토를 유린당한 것은 중원의 한족이 촉발 한 것이 아니고 언제나 중원을 침탈 하였던 거란, 몽고, 여진족들이었다. 고구려 패망을 어찌 연개소문 아들들 탓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수. 당에 대항한 고구려의 기상은 드높았고 우리 민족의 융성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 북부와 만주, 요동벌을 아우르는 팍스 고구려를 넘어 중원까지 넘본 것은 무리였다. 결국 고구려는 패망하였고, 우리는 요동과 만주를 잃었다. 1,300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 김한규 교수의 말대로 요동과 만주는 거란, 고구려, 발해, 몽고, 여진 등의 역사공동체 무대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우암 송시열 족자와, 초상 옆에서 미수 허목이 포천 일대 백운 계곡을 다녀 와 쓴 백운계기(白雲溪記) 원본을 볼 수 있었다. 이글은 기행문이기에 당연히 전서로 쓰지 않았지만 미수의 글씨는 서예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도 고졸한 미학적 느낌을 받고도 남음이 있었다. 행서와 해서를 섞어 쓴 듯 보이기도 하고 중간 중간 흘림체로 초서 쓴 것 같기도 한데 전반적으로 단아하고 고졸한 멋이 글을 보는 사람의 마음조차 가라앉게 한다. 확실히 기상이 활달한 우암의 글씨와는 비교가 되었다.
“백로주를 바라보고 저녁에 백운계에 이르렀다. 물은 더욱 느리고 모래는 평평하며 암벽을 가팔랐다. 깊은 못과 긴 여울이 위 아래로 아득하고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과 눈이 녹아 있었다. 물새 수십 마리가 울면서 날아갔다.” 박물관에서는 한문으로 되어 있는 기행문을 이렇게 번역하여 그 설명문을 백운계기(白雲溪記) 원본 첩 아래에 비치하고 탐방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었다. 내용을 더 보면, 백운계곡 반석에는 봉래 양사언과 석봉 한호의 서체가 각인되어 있다고 했는데, 양사언의 글씨는 동해의 최고 절경 무릉계곡 반석에도 ‘武陵仙源 頭陀洞天’ 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양사언은 금강산 만폭동 계곡에도 ‘逢萊楓岳 元化洞天’이라고 자신의 글씨를 새기고 은거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보면 허목 선생이 다녀와 그 감상을 기행문으로 남긴 포천의 백운동 계곡의 운치는 선생의 서체와 글의 내용만큼이나 가경일 것이다. 지금은 계곡입구에 포천 이동갈비와 이동막걸리를 파는 노점들만 즐비하다고 한다.
바로 옆에 허목 선생이 직접 쓴 인장 7점이 전시 되어 있었다.
모두 낙관을 썼던 인장으로 보이는데, 호인 미수(眉叟), 성명인 허목(許穆), 시문집에 썼다고 하는 기언(記言) 등이 새겨져 있었다. 일신(日新) 이라고 찍힌 낙관은 둥근 네 입 꽃 모양이어서 신기해하며 인장을 보았더니 사각 인장에 돋음 각인을 한 것이 참으로 이채로웠다.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어받은 엄격한 성리학자인 미수 허목이 학자를 뛰어 넘어 문장가이자, 서체 예술가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들이었다. 증조모가 양녕대군의 손녀이고, 부인이 오리 이원익의 손녀로 우의정 벼슬까지 지냈지만 그는 평생 청남(靑南)의 영수답게 청빈한 삶을 살았다. 이 인장들은 그가 누린 몇몇 안 되는 소박한 호사 중 하나일 것이다. 조선의 선비정신, 고졸한 미학을 추구한 서체 예술가의 정수가 그대로 새겨져 있는 미수(眉叟)의 인장이 330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지금 내 눈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온 몸에 소름이 돋듯 정신이 아득해 진다.
이제 박물관을 나오면서 불교 유물전시관에서 본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본 소회를 정리하여 본다. “반가 사유상은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의 보살이다. 이 모습은 출가 전에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라는 설명문이 곁들여져 있는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제95호 칠보무늬향로와 더불어 우리가 중. 고 교과서에서 가장 많이 접한 국보. 보물 중 하나로, 70년대 중고등학교에서 국정교과서로 국사 공부를 한 사람들이라면 이 반가사유상만큼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은 특별히 별실을 만들어 전시 중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함께 번갈아 특별 전시실을 두고 두 보물을 교차 전시를 한다고 한다. 배낭을 멘 청년 두 명이 DSLR 카메라로 진지하게 보물을 촬영하고 있었다. 저 젊은 청년들에게서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본다. 청춘이라고 모두 홍대 까페만 찾는 것도 아니고, 청년 실업 시대라고 공무원 시험에만 매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청춘이라고 모두 아픈 것은 아니다. 필자도 반가사유상을 찬찬히 살피며 네 방향으로 스마트폰에 담아 본다.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다시 보니 몇 년 새 달라진 기술의 발전으로 한 손으로 모든 것을 꺼내 볼 수 있는 세상에 새삼 감탄을 하기는 하지만, 도자기를 도화지에 세밀하게 그리던 그 분들의 진지함에는 결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필자가 보고 있는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국보 24호 석국암의 석가여래좌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조각 가운데 3대 걸작이라고 한다. 국보에 번호를 매기지 않는 일본도 상징적인 국보 1호가 있는데, 고류우지(광륭사)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꼽는다. 그런데 그 양식과 얼굴 모습은 우리의 국보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일본은 이 유물의 흠을 복원하려고 나무의 재질을 알아보았다고 하는데, 당시 확인한 바로는 이 나무 불상의 재질이 우리나라 봉화의 춘양목 적송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튼 일월식 보관 장식은 원래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관에서 유래하여 비단길을 통해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보살상의 보관으로 차용되었고, 이는 인도 간다라의 보살상이나 중국 돈황석굴, 용문석굴 등지에서도 다양한 예가 나타나며 비단길의 끝자락 한반도와 바다 건너 일본까지 그 영향이 미친 것이다. 아 !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의 전이 현상, 그리고 그 당대 문명의 정수(精髓),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 ! 높이가 80㎝에 이르는 비교적 큰 금동불상임에도 몸체 부분의 두께가 3∼8㎜ 얇다. 그럼에도 그 만만치 않는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제작된 것은 삼국시대 당시 우리 민족의 뛰어난 주조기술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연화무늬 대에 앉아 화려하지만 번잡하지 않은 천의무봉의 옷을 두르고 깊은 생각에 빠진 싯다르타 태자, 그는 출가 전 속세의 부처님이 아니고, 그 시대의 현자의 모습일 것이다.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이 반가사유상을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뼈저린 거룩함"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필자가 중앙국립박물관을 찾기 전날인 2014년 5월 4일, 강릉 출신 최명길 시인이 타계하였다.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고 만해문학상, 제5회 한국예술상을 수상한 시인은 평생 교직에 몸담고 후학을 양성하면서도 시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의 시세계를 재조명하는 관동문학 제2차 작고문인 재조명 세미나에서 필자는 시인의 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만났다.
- 깊은 적멸에 들어 이승을 뛰어 넘고 저승도 뛰어 넘고 깜깜한 벼랑 가, 오래오래 묵은 소나무 밑둥치처럼 되어서 마르고 말라 / - 중략 - 그대는 홀로 가는 자의 외로움, 그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요 / 백 천만 겁을 잠시 당겨 半開眼 눈빛 속에 펼쳐 놓아 황홀히 허공에 펼쳐 놓아, 이 몸의 괴로움 조금 씻어 낼 수 있겠지요 / 때로는 自在天 波旬이도 데불어 서 함께 지낼 듯 하거니, 아 저 무서운 절대 공간을 좀 깨뜨려 주어요 / 그대 신비의 마음 빛으로 - 최명길 시 반가사유상 일부 인용
발제를 한 박호명 시인(한성대교수)은 이를 ‘극미묘의 세계에 대한 불가적 사유’라고 하였다. 속초에서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회 중 하나인 ‘물소리시낭송회’를 창립하고, 설악산악연맹 고문을 지낸 시인은 눈과 바위의 산, 설악을 정신의 고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칠순의 나이에 백두대간을 40일 종주하고,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등정 한 영혼의 시인은 고향 강릉이 아닌 속초 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 설악에서 창망한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인간 구원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에 한 평생 천착한 영동지방 선배 문인께 삼가 추모의 경배를 올린다.
점심도 거른 채 3시간 넘게 수천가지 보물과 유적을 둘러보았더니 마치 타임머신으로 전생을 다녀 온 듯 하여 필자는‘넋이 반쯤 나갔다’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방전되었다. 1층 휴게실에서 냉커피(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표현 보다는 박물관에서는 냉커피라고 함이 적절할 것이다.)를 한 잔 가득 들이키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동관을 빠져 나오자 5월의 하오 눈부신 햇빛이 정수리에 쏟아진다. 지금 서관에서는 프랑스 국립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한 세잔느, 고흐, 고갱, 루소, 모네 등 후기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으로‘오르세미술관展 근대도시 파리의 삶과 예술, 인상주의 - 그 빛을 넘어서’라는 주제의 전람회를 하고 있었다. 앙리 루소의 작품 ‘뱀을 부르는 여인’을 ‘신비한 낙원으로 초대’라는 문구 넣어 팸플릿을 만들었는데, 열대수풀을 배경으로 검은 나신의 여인이 뱀을 목에 걸고 피리를 부는 이 그림은 푸르고 검은 색채가 주조를 이루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실 필자는 동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시간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 기회에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원본을 꼭 보겠다는 생각으로 티켓을 예매해 두었다. 그러나 마침 어린이날이라 점심 식사를 하고 온 수많은 어린 갤러리들이 줄을 지어 예매를 하고 있었고, 표를 산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잡고 줄을 지어 입장하고 있었다. 만만치 않는 오르세미술관 관람료인데 동관의 무료 관람인 우리 문화 유물관 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는 오로지 고흐 작품 한 점을 보기 위하여 표를 끊었는데, 저 어린이들은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그림들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이 땡볕에 줄을 서고 있을까 ? 분별없는 젊은 부모들의 문화적 사대주의를 탓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오르세미술관은 밀레의 ‘만종’등 유명 소장품을 내세우고 나머지는 그저 그런 그림으로 채우면서 전시회를 열 때마다 수십만 명의 관람객을 모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걸게 그림으로 스캔 본을 내 건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을 일별하면서 나는 입장권을 환불하였다. 하루를 예정한 상경이기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내일이 사월 초파일이라 특별히 마음먹고 애초 예정한 길상사 행도 내년을 기약해야 할 형편이다.
박물관 본관을 내려 와 넓고 잔잔한 연못가를 돌아 후원 쪽으로 향하였다. 못가에 노란 붓꽃, 자주색 붓꽃과 비비추 군락이 한창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용산가족공원(주한미군 사령부 골프장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으로 향하는 미르(龍) 길로 나가는 길 가에 새로 지은 정자각이 나타나고 그 중앙에 대형 범종이 안치되어 있었다. 보물 제2호 보신각종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5년에 운종가(雲從街)에 종각을 세우고 커다란 종을 매달았는데, 이 종소리에 따라 500년 조선의 성문이 열리고 닫혔다. '파루(罷漏)'를 치는 바로 그 제야의 종(除夜의 鐘)이다. 현재 보신각에 있는 종은 국민의 성금으로 새로 주조한 것이고, 600여년 성상을 지나 더 이상 종(鐘)으로서 그 기능을 상실한 본 종은 중앙국립박물관에서 새 정자각을 짓고 보신각에서 옮겨와 여기에 보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붓한 오솔길이 미르못으로 이어졌다. 길섶에 막 피기 시작한 하얀 찔레꽃, 흰 꽃을 매단 함박나무, 흰 미늘의 자작나무 군락과 제법 밑둥치가 튼실한 소나무 숲이 탐사객을 반겼다. 눈앞을 막아서는 작은 폭포와 연못... 북촌 마을 뒤 삼청공원 계곡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기가 정녕 서울 한복판일까 싶게 자연의 숲 그대로였다.
마음을 추스르고 길을 건너 지하철 4호선 이촌역 출입구로 다시 들어섰다. 2014년 5월, 용산(龍山)의 하오가 저물고 있었다.
- 끝 -
서 성 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