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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 선교 전략 수립을 위한 미얀마 연구
-미얀마 테라바다(상좌) 불교를 중심으로-
신성호 선교사(D.Miss)
목 차
Ⅰ. 연구설계
Ⅱ. 들어가는 말
Ⅲ. 미얀마의 현황
1. 일반개요
2. 정치
3. 역사
4. 경제
5. 미얀마의 현재 이슈들
Ⅳ. 미얀마 테라바다(상좌)불교 이해
Ⅴ. 효과적인 선교 전략
1. 기존 선교 현황
2. 미얀마 선교의 방해요소
3. 미얀마 선교 전략
Ⅵ. 나가는 말
Ⅰ. 연구설계
1. 연구의 필요성
대한민국에 가는 곳마다 교회가 많이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미얀마는 마을마다 ‘제디’라는 불탑과 ‘폰지짜웅’이라는 불교사원이 있다. 미얀마인들의 불심은 다른 어느나라보다 강하여 불교와 그들의 삶을 불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교 뿐 아니라 집집마다 자기 집을 지킨다는 정령인 ‘낫’을 모시고 있다.
이들과 대화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려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믿는 불교와 ‘낫’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들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한다.
2. 연구의 목적
1) 본 논문은 철저한 불교 세계관을 가진 미얀마인들이 회심할 수 있기 위해 어떤 선교적 접근과 전략 및 방법을 추구해야 할지 연구하는 것이다. 국민의 88%가 불교와 낫(정령숭배)을 믿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믿고 있는 불교와 ‘낫’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근이 어렵다. 이 연구는 현재 미얀마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미얀마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뿐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불교와 낫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도와 더욱 효과적으로 사역을 하도록 선교 전략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2) 앞으로 미얀마 사역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선교사 후보생들이나 미얀마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선교단체들에게 미얀마를 이해하고 선교전략을 수립하고 사역을 준비하도록 도움을 주려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3. 연구방법
1)인터넷 조사
2)문헌조사
3)24년간의 미얀마 선교 경험과 미얀마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자료
문헌조사
연구 논문
책자
위키백과 등
필자가 미얀마 사역을 하면서 수집해 둔 자료와 미얀마에서 오랫동안 사역한 선교사들에게 연락하여 그들이 수집해 둔 자료들을 받았다.
4. 연구 성과와 한계점
필자는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있기에 미얀마 내에 소장된 자료들에 접금이 어려워 현지에서 오래 사역한 선교사들이 미리 조사해 둔 내용과 인터넷에 나오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연구했기 때문에 일정부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미얀인들을 대상으로 24년간 사역을 한 필자의 직접 경험은 어떤 자료보다도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
Ⅱ. 들어가는 말
인도차이나 반도 서쪽에 위치한 미얀마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아직 낙후되어 있지만 선교적 잠재력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단연 앞서가는 나라이다. 일본이나 태국 국민과는 달리 미얀마인들은 한번 예수를 믿으면 그 열심이 한국인들 못지 않다. 따라서 미얀마에 기독교의 부흥과 함께 경제적 부흥이 한번 일어난다면 중국과 함께 세게 선교에 크게 기여할 나라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는 선교사들이 얀곤과 만달레이를 중심으로 사역하고 있어서 이 두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여러 도시로 흩어져서 사역을 한다면 미얀마 교회의 부흥에 더 많은 기여를 할 것이고, 미얀마는 머지 않아 선교 대상국에서 선교국으로 바뀔 것이다.
사역을 시작하려는 선교사들이나 현재 미얀마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선교 대상자인 미얀마인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서 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얀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그들이 믿는 불교와 ‘낫’에 대한 철처한 연구가 요구 된다. 이런 이해는 결국 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 결정이나 그들에게 접근하는 방식 같은 선교전략 수립에 도움이 될 것이다.
Ⅲ. 미얀마의 개관
1. 일반
1)국명: 미얀마연방공화국(The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
“아웅산 테러 사건” 등으로 알려진 미얀마의 옛 이름은 버마이다. 버마의 군사 정부는 1989년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 개칭했다. ‘버마’라는 명칭은 버마족과 그들의 국가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므로, 버마족 이외의 모든 소수종족을 포함하고 모든 종족의 나라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개칭하였다고 한다. 2010년에는 미얀마 연방 공화국(The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로 선포하였다.
2)수도: 네피도(May Pyi Taw), 2006년 얀곤에서 네피드로 수도 이전
3)건국일:1948년 1월 4일(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일)
4)위치: 인도차이나 반도 서북부로 방글라데시와 인도, 북동쪽으로는 중국, 동쪽으로는 라오스와 태국 등 5개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5)면적: 676.577㎢(한반도의 약3배)
6)시차: 한국보다 2시간 30분 늦음
7)인구: 약 5,283만 명(IMF)
8) 민족: 버마(68%), 샨(9%), 까인(7%), 라카인(4%), 몬(2%), 그 외 까친, 친, 까야등의 소수 부족들 5%.
9) 언어: 미얀마어(공용어), 기타 소수어
10) 종교: 불교 88%, 기독교 6%, (천주교, 성공회, 이단 포함), 이슬람 4% 힌두교 2%
11) 기후: 기후가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차이가 많다. 대부분의 지역이 열대와 아열대에 속하여 고온다습한 열대몬순 기후이다. 그리고 북쪽의 산악 지대는 겨울에 서리도 내린다. 몬순의 영향으로 5월부터 우기이다. 11월에서 4월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기가 된다. 연평균 기온은 섭씨 27.4도이고 연평균 강우량은 2,513mm이다.
2. 정치
1962년 쿠데타 이후, 1987년까지 네윈의 사회주의 정부가 다스렸다. 1988년 8월8일 항쟁, 아웅산 사건과 맞물려 1988년 새로운 군부가 집권했다. 1988년부터 2011년가지 군사 정권이 통치했으며, 미얀마 최고통치자인 딴쉐와 국가평화발전평의회가 국정을 주도했다.
2008년 민주화를 기초로 한 헌법이 국민투표에서 통과하였으며, 2010년 총선 후 이듬해 민정 이양하여 군사정권이 종식 되었다. 하지만 의석의 25%를 군부에게 할당하도록 하여 군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정부형태는 대통령 중심제(임기 5년)이며, 행정구역으로는 7개 구역과 구역(Region), 7개 주(State)로 되었있으며, 구역은 버마족이 주는 소수 민족이 주로 거주한다.
3. 역사
미얀마에 사람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약5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오랜 세월동안 여러 민족들이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대립과 갈등을 반복한다. 2천년 북부에서 퓨족이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고 몬족이 도시를 건설하여 미얀마 불교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유적에서 버마족의 존재가 확실시되는 것은 바간 왕조(11세기~13세기) 이후이다. 버마족은 10세기 이전까지는 아직 에야와디(이라와디강) 유역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8-9세기경 티벳으로부터 이주해 온 미얀마종족은 849년에 최초의 통일국가 바간왕조를 이루며 황금기를 맞이한다. 북부에서는 7세기에 퓨족이 퓨국을 건국했지만, 몬족과 퓨족의 성채는 9세기에 남조에게 멸망했고 남조 지배하에 있던 티베트버마어계의 버마족이 무인지대가 된 이라와디 평원(미얀마)에 침입해 바간 왕조를 수립했다. 바간은 아나우라타 왕(재위1044~1077) 때에 왕도가 되었다.
에라와디강 중류 유역에 버마족의 바간 왕조는 남쪽의 몽족 지역, 샨 고원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왕조는 1287년 몽골군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후 미얀마는 타이계의 여러 종족(샨족, 타이족)의 침입 등으로 어지러웠으나, 16세기가 되어 싯따웅강 중류의 따웅우에 버마족의 2차 통일왕조인 따웅우 왕조가 일어났다. 이 왕조는 1560년경 현재의 미얀마령을 넘어 타이 북부와 라오스까지도 판도에 넣고 1569년에는 태국 아유타야 왕조까지도 공략하였다. 그러나 이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정과 내전으로 피폐하였으며, 17세기에는 삼각주지대의 바란으로 따웅우를 버리고 에라와디강 중류 유역의 잉와로 천도하였으나, 1752년 이곳까지 북상해온 몽족에게 멸망하였다.
얼마 후 버마족은 알라웅퍼야로 재집결되어 꽁바웅 왕조로 재탄생 하였다. 이 왕조는 몽족을 물리치고, 1755년 에라와디 강 삼각주로 진출하여 몽족을 정벌했다. 이 때의 승리를 기념하여 더공이라 불리던 도시가 ‘랑군’으로 개명되었다. 몽족의 최후 거점인 바고는 1757년 꽁바웅에 점령되고, 그후 몽족은년 태국 아유타야 왕조를 왕전 점령하는 등 강력한 국권을 보여주었으나, 19세기 들어 아시로 진출한 영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3번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1824-26, 1852, 1885)으로 결국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인도의 한 주로 편입되었다.
영국은 미얀마를 식민지화 하자 미얀마를 인도의 한 주로 편인시켰다. 영국령 시대의 미얀마는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 경영의 거점이 되었다. 영국은 특히 인도방면에 대한 식량공급지로서 에라와디 싯따웅강의 삼각주 지대에 주목하여 이곳에 인도인을 이주 시키고, 또 버마족, 카렌족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개발하였다. 그 결과 에라와디 삼각주는 1930년대에 세계 최대의 수출용 벼농사지대로 발전하여, 미얀마는 세계 제1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미얀마의 반란에 대비하여 3만명의 정규군과 또 다른 3만명의 군경을 미얀마 전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영국은 분할통치정책(divide and rule)을 펴 중심부와 산간지역을 구분해서 각각을 직접관리 하였ㄷ. 이렇게 하여 다수족이자 주 족인 머마족을 견제하고자 했다. 또한 여국은 친, 까친, 꺼인족 등의 소수종족들에게는 군 입대의 기회를 제공한 반면 주 족인 버마족은 군 입대 대상에서 죄외함으로써 버마족의 세력화를 최대한 억제하고자 했다.
특히 분할통치 정책은 유럽인 기독교 선교사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사실 이들은 1826년 이래 미얀마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펴고 있었지만 불교신앙이 뿌리 박혀 있는 지여과 불교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는 기독교 개종이 힘들었던 터였다. 따라서 이 정책으로 불교권 지역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그 틈을 타 선교사들은 애미니즘 등의 토속종교를 믿는 문맹 산악지대로 들어가 선교 활동을 폈고, 큰 효과를 거두었다.
미얀마 근대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단연 아웅산 장군이다. 아웅산은 혁명자이자 군인으로, 영국 식미지로부터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근대 버마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1915년 2월 버마 중부의 마궤(Magwe)에서 태어난 아웅산은 1933년 랑군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대학시절 랑군대학 학생회장을 거쳐 1938년 버마 전국 대학생회(All-Burma Students Union)회장이 된다. 이후 학생운동을 넘어 정치인이 된 후 영국식민통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민족운동가로 1939년 버마공산당(Communist Party of Burma)창립을 주도하며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다.
1940년 인도 방문 중 영국이 아웅산에 대한 수배령을 내림에 따라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동료 버마인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 태국에서 무장독립군(Burmese Independence Army)을 창설한다.
아웅산은 그 시절 부인인 킨지(Khin Kyi)를 만나 결혼하고 훗날 아웅산 수지 등 세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1943년 일본은 자신들이 점령한 버마의 독립을 선언하고 아웅산은 국방장관의 자리에 올랐지만 일본은 약속을 어기고 버마를 지배한다. 1945년 육군 소장이었던 아웅산은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규합해 전쟁에서 몰락중인 일본군을 떠나 연합군 세력에 합류하고 일본의 패망으로 다시 영국이 미얀마에 들어오고 아웅산은 사실장 국가의 총리 역할을 하면서 버마의 독립을 두고 영국과 협상을 해나갔다. 1947년 1월 런던에서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총리와의 협상을 통해 향후 1년 안에 버마의 독립을 선언하는 협정서를 발표했으며 그해 4월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아웅산이 이끄는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r)은 총 210석 가운데 176석을 얻는다.
이러한 압도적인 승리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는 준비를 하기 위해 내각회의를 진행하던 1947년 7월 19일 버마의 전 총리였던 우쏘(U Saw)의 사주를 받은 무장 민병대들의 습격으로 아웅산이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피살당했다.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1948년 1월 4일)하기 6개월 전이었다.
1988년 8월 8일에 민주화를 바라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됨으로써 독재자 네윈은 정치무대에서 퇴장하였지만 그를 따르는 소장파 군부 세력에 의해 시위는 진압되었고, 쏘마웅(Saw Maung)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군사정부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이라는 과도 정권이 출범하였다.
1988년 7월 NLD(Nation League for Democracy) 당원들과의 자유로운 접촉을 요구하며 침묵시위를 벌이던 아웅산수지가 강제로 자택으로 호송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 UN, 영국, 호주, 일본, 한국 등의 나라들이 인권침해라는 논평을 발표하여 미얀마 군사정부를 비난하며 아웅산수지와의 공개적 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헌법초안의 완성 후 의회를 소집할 것이라고 하면서 수지와의 대화 및 의회소집 요구를 거절하였다.
미얀마 현대 정치는 네윈(Ne Win)에 의해 주창되고 26년 동안이나 실시된 ‘버마식사회주의(Burmese Way to Sociallism)’와 이를 전복시키고자 발생한 1988년의 개규모 민주화요구 시위와 그 와중에 어머니 간병을 목적으로 고국에 돌아돈 아웅산수지가 무고한 국민들이 군인들의 총과 칼 앞에서 무참히 쓰러져 가는 것을 목격한 후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정치에 참여한 것과 민주와 요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집권했던 신군부로 요약된다.
아웅산수지가 이끄는 NLD 당이 1990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웠으나 SLORC는 의회를 구성하지 않았다. 1992년 딴쉐(Than Shwe)가 국가 권력을 승계하였고, 1993년 헌법 초안울 구성하기 위해 소수종족과 야당으로 구성되는 국민회의(National Convention)를 설치하는 한편, 대중 동원 단체인 연방단결발전연합(USDA)을 결성하였다. 1997년 11월 국가평화발전평의회(SPDC)로 개칭하기 몇 달 전 미얀마는 서방세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회원국의 도움으로 아세안(ASEAN)의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2002년 5월 아웅산수치가 가택연금에서 해제되고, 대규모의 정치범들이 석방되는 등 체제변동의 긍정적 요소가 목격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는 아웅산수지가 북부지역을 여행하면서 국민들로부터 혼란과 폭력을 유도하는 등 대중을 선동한다는 명목으로 정규군과 정규군의 후원을 받는 USDA를 동원하여 디베인(Depeyin)에서 아웅산줓치와 NLD 당원들을 체포하였다. 미국 부시 대통령과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 등 전 세계 유력 지도자들의 비난이 이어지자 군부는 아웅산수지를 인세인(Insein) 감옥에서 가택연금 형태로 전환했다.
같은 해 8월 30일 킨늉(Khin Nyunt) 총리는 ‘발전과 진보적 변화’라는 7단계 민주화 이행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2004년 10월 킨늉은 부패와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고 강경노선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7단계 민주화 로드맵의 4단계에 해당되는 헌법 초안마련이 국민회의에서 2007년 9월 완성되었다. 7단계 민주화 로드맵의 4단계에 해당되는 헌법 초안 마련이 국민회의에서 2007년 9월 완성되었다. 한편 군부는 국가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2005년 11월 6일 수도를 얀곤에서 중부 산악지방인 ‘삔미나’로 천도하고 ‘네피도’로 개칭하였다.
2010년 11월 7일 미얀마 군사 정권은 총선을 통해 민간에 정권을 이양했다. 2011년 4월 신정부 출범시 국내외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의 테인 세인 대통력은 수지여사 감금 해제(2010년 11월 13일) 및 해외 활동 허용, 반체제인사 블랙리드트 해제 언론 검열 철폐, 시장환율 도입, 수출입 인허가 제도 폐지 등 개혁 개방조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신정부는 전력난 해소, 로로망 개선, 국민주택 확대, 신규투자 확대를 통한 일자리 확대, 공무원 월급 인상 등 국민들의 체감에 직접적인 정책들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4. 경제
미얀마의 경제는 국제적인 고립과 미얀마식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 장기적인 군사 독재 등의 정치적 문제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매우 침체되어 있다. 미얀마는 동남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의 하나로, 수 십년간의 침체와 정책의 실수, 고립으로 고통받고 있다. 미얀마의 연평균 GDP 성장률은 2.9%로 메콩강 유역의 국가들 중 가장 낮다. 2019년 IMF에 따르면 미얀마의 GDP는 686억불이고, 1인당 GDP는 1,299불이다.
5. 미얀마의 문화
1) 미얀마의 대표 의상 로웅지
미얀마는 옛날부터 직물 공예가 발달했던 나라이다. 이러한 직물 공예 가운데, 특히 로웅지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항상 몸에 걸치고 있음으로써 의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미얀마 로웅지는 이웃나라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미얀마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남자는 ‘뻐소’라는 불리는 남성용 로웅지를, 여성은 ‘터메이’라고 불리는 여성용 로웅지를 허리에 감는 형태로서 하의용으로 몸에 걸치고 있다. 심지어 학생들의 교복도 로웅지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시대의 변천과 함께 사람들의 복장은 다소라도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에서는 옛날부터 쭉 사람들이 로웅지를 몸에 걸쳐왔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로웅지가 미얀마의 기후에 아주 적합한 의복이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무덥고 습한 날씨에 땀을 흘렸을 때 로웅지를 풀어 활활 부채질함으로써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돗자리 위에서 생활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로웅지 차림이 이에 아주 쾌적한 것이다. 또한, 우기에는 비에 젖어도 단시간에 옷을 바꿔 입을 수 있어 편리하다. 더욱이 전통을 중요시하는 미얀마인들은 로웅지를 즐겨 몸에 걸쳐 왔다. 로웅지는 몸체에 꼭 달라붙어 단정한 인상을 줄뿐 아니라, 신체의 아름다움을 두드러지게 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 미적, 시각적으로도 전문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로웅지를 입는 방법도 길게 입든지 짧게 입든지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다. 여성의 경우, 의식 등에 참가할 때에는 터메이가 복사뼈까지 닿도록 길게 입는 것이 보통이다. 일 나가는 사람이나 물건을 파는 사람은 활동하기 쉽도록 로웅지를 복사뼈 위에서 정강이 부근 정도의 길이로 입고, 힘을 써서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은 무릎 정도의 길이로 짧게 입는다. 또한, 남성의 경우, 힘을 쓰는 육체 노동이나 농사일을 할 때에는 빠소의 옷자락을 걷어올려 허릴춤에 끼우는 경우도 있다. 축구를 하는 청년들은 롱지를 아주 짧게 운동복처럼 만들어 입는다. 이렇듯 로웅지는 모양을 자유 자제로 바꿀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 미얀마의 식생활
미얀마 사람들의 주식은 밥과 국수이다. 밥은 주로 찰기가 없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고, 반찬은 적게 먹으면서 밥은 아주 많이 먹는 편이다.
미얀마 음식은 미얀마 전통적인 것도 있지만 주위의 인도,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인도식 카레와 기름에 튀기는 음식이 많이 발달해 있다. 미얀마 음식중 기름에 튀기고 볶는 것이 많은 이유는 이웃 중국의 영향도 있지만 미얀마의 날씨가 덥기 때문에 위생상의 이유도 있는 듯 하다. 볶는 음식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터밍조’(볶음밥)일 것이다. 터민조를 만들 때 자기의 취향에 따라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등의 다양한 고기류와 야채, 콩 그리고 계란을 넣어서 볶는다.
또한 미얀마에는 종족이 많아 국수의 종류도 다양하다. 미얀마인들이 아침식사로 즐겨먹는 국수는 모힝가이다. 모힝가는 메기나 붕어 같은 물고기를 바나나 줄기와 함께 푹 고아 만든 육수에 쌀면을 말아 먹는다. 미얀마 사람들이 좋아하는 향초와 생선 젓갈(응아삐)로 간을 하고 튀긴 콩, 마늘, 삶은 달걀 등을 넣어 먹는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한국 사람들 중 모힝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물고기로 육수를 낸 모힝가 보다는 육고기로 육수를 낸 샨카욱쉐(국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샨카욱쉐는 찹쌀로 만든 국수와 일반쌀로 국수가 있고, 국수에 넣는 고기도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 본인의 취향대로 선택한다. 따듯한 국물과 함께 먹는 물국수와 국물 없이 먹는 비빕 국수도 있다. 그 외에 코코넛 밀크를 넣어서 만드는 옹노카욱쉐도 있는데, 맛이 약간 달달하며, 쌀면이 아닌 밀가루 면을 사용한다.
6. 미얀마의 정치 이슈들
1) 미얀마 평화 프로세스 추진 동향
a. 개요
미얀마 평화 프로세스란 1948년 독립 이후 약 70년간 지속되고 있는 민족 간 교전을 종식하고 국가 화해 및 “민주적 연방제”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대화 과정을 의미한다.
수찌 국가 고문이 이끄는 NLD(National Leage for Democracy) 정부는 최우선 국정과제 중 하나로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 중이다.
b. 배경
미얀마는 버마족을 비롯해 카렌족, 카친족, 몬족, 샨족, 친족, 라카인족 등 135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로서 민족 간 평화와 화합이 필수다.
미얀마를 점령한 영국은 버마족과 非버마족을 분리하여 통치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시 非버마족들에게 연합군 동참 대가로 독립을 약속했다.
1947년 2월 삥롱회의에서 소수민족들의 자치가 원칙적으로 약속 되었으나, 이를 주도한 아웅산 장군이 암살되고 네윈 정부가 등장하면서 무산되었다.
그 후 정부와 소수민족 간의 갈등이 표출되어 오랜 기간 정부군과 각 소수민족 무장 단체들 간의 교전과 휴전이 반복되고 있다.
c. 추진 현황
떼인 세인 정부는 포괄적 교전 종식을 위한 노력 끝에 카렌민족연합(KNU) 등 8개 소수민족 무장단체(EAOs)와 2015년 10월 전국적휴전협정(Nationwide Ceasefire Agreement,NCA)에 서명했다. 하지만 와족 연합군과 카친독립군 등 일부 단체는 서명에 불참했다.
d. 주요 성과
가장 최근 개최된 21세기 삥롱회의(2018.7.)에서 민조적 연방제 원칙 수립 및 정치, 경제, 사회, 토지 분야에서의 연방 합의를 달성했다. 2018년 2월 몬족과 라후족 단체 등 2개 단체가 추가로 휴전 협정에 서명하였다.
2) 라카인 무슬림 소수민족(로힝야) 문제
a. 개요
라카인 문제는 미얀마 북서부 라카인주 내 라카인 무슬림 소수민족(로힝야족)에 대한 처우 문제이자, 종교갈등(불교와 이슬람교), 난민 유입으로 인한 인접국가(방글라데시)와의 갈등 등도 연관된 복잡한 문제이다.
유엔 등 국제사회는 라카인 무슬림 문제를 인권 및 인도주의 현안으로 인식하는 반면, 미얀마의 입장에서는 역사, 종교, 민족 등 다층적 갈등 구도가 내재된 복잡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b. 역사적 배경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세기 말부터 로힝야족의 라카인주 이주가 급증 되었다. 영국은 로힝야족을 영국의 식민통치의 조력자 및 불교도의 차별 수단으로 활용한바, 버마족 및 라카인 지역 내 불교도와 갈등이 누적되었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을 ‘벵갈 지방에서 온 불법이주민’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여 ‘벵갈리’라고 칭하며, 미얀마의 135개 공식 민족에서도 제외시켰다.
떼인 세인 정부는 로힝야를 포함한 무국적자들에게 일종의 임시 신분증인 백색카드를 발급하고 2010년 총선 투표를 허용하였으나, 이후 백색카드를 폐지하고 2015년 총선에서 참여를 배제하였다.
c. 라카인 사태의 인권 이슈화
2010년 6월 및 10월 라카인주 불교도와 무슬림(로힝야) 간 폭력 사태로 약 200명 사망 및 10만 명 이상의 난민 발생으로 국제적 인권 이슈화가 되었다.
2016년 10월 무슬림 무장단체가 라카이주 북부의 미얀마 경찰초소를 습격하여 사상자가 발생한데 대한 미얀마 군부가 치안작적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약 2개월간 수만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피난했다.
2017년 8월 코피아난 전 유엔사무총장이 이끈 라카인 문제 자문위원회가 문제 해결 권고 사항 등을 담은 최종보고서를 제출하였으나, 보고서 제출 직후인 8월 25일 새벽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 Arakan Rohingya Salvation Army)으로 알려진 무장단체가 라카인 북부 지역 30개 경찰초소를 습격하였다. 미얀마 정부는 이를 테러로 규정하고, 군부가 소탕작적을 감행하여 약 70만 명(유엔 추산)의 무슬림이 방글라데시로 피난하였다.
미국, 유엔 등 주요국 및 국제사회가 상기 사태에 대한 책임 규명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라카인 문제는 국제사회의 최대 인권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d. 국제사회 및 주요국 논의 동향
유엔은 미얀마 측에 군사작전 중단, 제한 없는 인도적 접근 허용, 난민들의 안전하고 자발적이면서도 위엄 있는 귀환 보장 촉구(2017.9.사무총장 브리핑 및 2018.3. UNHCR 로힝야 난민 위기 관련 공동대응계획 발표)했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는 특별회기 개최 및 결의안 채택(2017.12), 제39차 인권이사회 개최 및 결의안 채택(2018.9) 인권이사회 국제사실조사단은 제39차 인권이사회 앞 최종보고서에서 미얀마 군부의 반인도적 범죄 관련 책임규명을 위한 국제형사재판소 회부 또는 임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권고했다.
미국, 유럽연합, 이슬람국가는 미얀마 정부의 행동을 규탄하면서 난민 귀환 보장을 위한 실질적 행동을 촉구하고 있으며, 중국, 러시아는 라카인 문제의 복잡성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해를 요구하며 제재에 소극적 입장이다.
e. 미얀마 정부 입장 및 조치 동향
미얀마 정부는 코피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주도의 라카인 문제 자문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안보, 개발, 인권 측면에서 라카인 문제 해결을 위한 차체 노력 및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전개중이다. 단, 로힝야에 대한 국적 부여와 관련해서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완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미얀마 정부는 난민의 ‘안전하고 자발적이며 위엄있는’ 귀환에 우호적인 여건 조성을 위해 유엔, 아세안 등 국제, 지역기구와 협력중이나, 난민 귀환과 관련해서는 방글라데시와의 양자 협의를 가장 중시하고 있다.
미얀마 정부는 유엔 국제사실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거부하면서 사실 관계 조사 및 책임성 규명을 위한 자체 기구를 설립했다.
2017년 10월 수찌 국가고문 주도로 라카인 재건 및 지속가능개발을 위한 연방기업 창설, 현재 라카인 개발을 위한 다양한 민관사업을 추진중이다.
f. 평가 및 전망
미얀마의 민주화를 가져올 것으로 국제사회의 기대를 한껏 받았던 NLD 정부는 라카인 사태로 국제적 평판에 큰 손상을 입고, 평화 프로세스, 경제개혁 등 국가 우선과제 추진도 상당히 지연되고 있다.
Ⅳ. 미얀마의 불교 이해
1. 테라와다(상좌부) 불교의 역사
1) 기원
석가모니의 입멸 후에도 하나의 상가로 유지되던 불교는 서방 교단과 동방 교단간의 계율 문제로 인해 제2차 결집이 일어났다. 초기 상가의 계율대로 생활하던 서방 교단측에서 느슨하게 변해버린 동방 교단을 문제 삼았고 서방과 동방 교단의 장로들이 모인 결과 서방 교단의 방식이 옳다고 결론을 낸다. 그러나 이후에도 동방 교단에선 이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 비구들이 존재했고 결국 이들은 별도로 갈라져 나갔다. 이렇게 갈라져 나간 동방 교단이 대중부로 불리게 되고 기종의 서방 교단은 상좌부로 불리게 된다. 이때가 석가모니가 사후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후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의 주도로 기원전 250년경에 제3차 집결이 일어나고 이 때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대한 소승들의 일종의 해설서인 논장이 추가 되며 경,율,론 삼장이 완성된다. 아소카 왕은 이 결집 이후 불교 포교사들을 사방으로 파견하는데, 그 중 아소카 왕의 아들인 마히다 장로가 이 제3차 결집의 결과물을 가지고 스리랑카로 갔다. 이후 이슬람의 인도 침략으로 인도 대륙에선 1200년대부터는 어느 부파 할 것 없이 불교가 아예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스리랑카만이 상좌부의 명맥을 잇게 되었다. 현대에는 주로 동남아시아에 분포하기 때문에 동북아에 주로 분포하는 대승불교를 북방 불교라고도 부르는 것처럼 테라와다 불교는 남방 불교라고 불린다.
2) 전파와 분포
불교의 원류는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인도 북구 지역이지만, 아소카 대왕 시절 인도 전역과 간다라 지역, 스리랑카 지역으로 퍼졌고 안정적으로 불교의 원형을 지키고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11세기 쯤 인도에서는 이슬람의 침입으로 불교가 쇠퇴해갔고, 육상 무역로가 막히면서 스리랑카를 통한 해상 무역로가 발달함에 따라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동남아시아로 활발히 확산될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는 원래부터 상좌부 불교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11세기 이전에는 대승불교가 강세였다. 당시 미얀마와 태국 등지에서 살았던 몬족, 피우족 등은 다른데보다 먼저 스리랑카와 교류를 해 일찍이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미얀마와 태국 이 두 나라에 상좌부 불교가 확고히 자리를 잡은 각은 각각 바간 왕조, 수코타이 왕조 때 일이다. 크메르제국은 이전에는 힌두교와 대승 불굑 주류였지만, 자야와르만 7세 시절부터 아들 타말린다(Tamalinda) 황자를 출가시켜 스리랑카로 파견하여 상좌부 전통을 학습하게하고 팔리어 경전을 수입하여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상좌부 불교가 국가 종교로 정착하였다. 스리랑카와 인도차이나에서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는 상좌부 불교를 믿지만 한자 문화권인 베트남은 중국을 통해 전래된 대승 불교가 주류이다.
2. 미얀마 불교의 약사
미얀마를 “황금의 나라”로 부른다. 미얀마에 금이 많이 나기도 하지만 전국에 어디를 가든 황금색 불탑(파고다)을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11세기 바간 왕조의 아나와라타(Anawarata)왕이 국토를 통일하고 계율을 중시하는 테라바다(Teravada, Tera는‘장로’, Vada는 ‘가르침’이라는 뜻)-상좌부 불교를 남방(스리랑카)으로부터 수입하여 보호하였다. 이후에 왕은 적극적으로 스리랑카에 몬족 출신의 불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불교 경전과 주석서 등을 구해 오게 하여 연구하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빨리어 공부와 경전 연구 등의 교학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스리랑카계의 상좌부 불교가 세력을 떨쳐서 파간 왕조 시대의 전성기에는 버마 불교의 특색인 불탑(파고다)과 승원이 많아지게 되었고, 왕조가 바뀌어도 역대왕들은 모두 불교에 열심히 귀의하였으므로 더욱 발달하게 되어 영국 통치하에서도 이러한 전통은 그대로 지속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버마의 불교는 일반적으로 계율이 엄격하며 특히 이를 강조하는 술라간디(Sulagandi)파와 이와는 견해를 달리하는 마하간디(Mahagandi)파로 갈라졌다.
현재 미얀마불교의 특징은 같은 상좌불교권에서도 아비달마 교학과 경전어인 빨리어 문법학 연구의 비중이 비교적 높다.
바간 왕조의 수도는 바간(Bagan)이다. 미얀마 최초의 통일국가로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4백만 파고다의 도시’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드로 유적과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손꼽히는 바간은 지금도 수많은 파고다가 도시 전체에 산재해 있다. 마치 숲과 같은 바간의 수천 파고다 사이를 둘러보면 미얀마인들의 지극한 불심을 느낄 수 있다. 바간 왕조는 1287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1310년 경, 몽골군이 물러간 히우 미얀마 중북부에는 샨(Shan)족에 의한 인와(Innwa)왕조가 남부에는 바고(Bago) 왕조가 성립되어 두 개의 왕조 시대가 열렸다. 바고 왕조에서는 미얀마불교사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있는데, 담마제디(dham-mazedi,1472-1492 재위) 왕이다. 그는 1476년에 비구와 사미를 해로로 멀리 스리랑카에 보내 스리랑카의 대사파(Ma-hhavihara)로부터 여법한 수계를 받게 하고, 바른 수계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당시에 잘못 행해지고 있던 수계법과 계율 수지를 바로 잡아 승단을 쇄신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 때 스리랑카에서 들여온 수계 전통은 정통으로 간주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잉야 왕조의 샨족은 현재에도 미얀마 인구의 9%를 차지하고 있다. 이 왕조 역시 불교를 수용하고, 모든 왕이 불교 보호와 진흥에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왕들에 따라 불탑을 파괴하고 승려를 학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잉야 왕조의 불교 수용은 상좌불교가 미얀마 북구 산악지대까지 말리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대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미얀마인에 의한 불교 저작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초기불교 전통의 경전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나 논서에 대한 주석서 그리고 초기경전어인 빨리어 문법서 등이 그것이다.
2. 미얀마불교의 현황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얀마는 불교, 국가, 승가, 국민이라는 네 요소의 관계로 설명된다. 이 네요소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여 사회적 통합력을 유지해 왔지만, 영국 식민지배 기간에는 이러한 관계가 단절 되었다. 미얀마는 독립과 함께 국가와 승가 그리고 국민의 긴밀한 전통을 회복하였다.
우 누는 독립한 미얀마의 초대 수상으로서 불교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조화를 시도하는 정책을 폈다. 계속해서 여러 불교 진흥책과 불교 국교화를 추진하려 했다. 그의 정책은 국민적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불교 국교화를 반대하는 종족과 종교의 반발을 야기했다. 결국 그러한 시책은 미얀마 정국 불안의 요인이 되어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1962년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네윈은 불교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정교분리의 입장을 견지했다. 1948년 독립 이후 국제적 차원의 제6차 경전 결집 등을 개최하여 국내외에 미얀마불교의 역량을 과시하였고, 국제적으로도 세계불교회의를 개최하는 등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2012년에는 12월 15일부터 17일간 세계 불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다양한 행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개최하였다.
미얀마에는 5만 8,399개의 사찰이 있으며, 출가자 수는 비구 226,508명, 사미(20세 미만의 예비 승려) 25,834명, 그리고 여성출가자(Thila-shin)는 3만명에서 9만명으로 추산한다. 여성출가와 관련하여 미얀마는 사미니나 비구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미얀마에는 불교 종파는 1990년 승가조직법에 의해 공인된 9개 종파가 있다. 수담마, 셰진, 마하드와라, 물라드와라, 아나우가웅드와라, 웰루완, 켓뜨윈, 가나위묵 그리고 마하인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18세기 후반에 창종한 수담마는 가장 큰 종파로 출가자의 85-90%를 차지한다. 이 종파는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운동과 군부독재에 대한 민주화 운동 등에서처럼 사회와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다음으로 셰진은 수담마와는 반대로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국수주의적 저항에 비참여적인 경향을 보여왔으며, 1960년대에는 군부의 네윈(Ne Win)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종파들 사이에 교학이나 수행상의 큰 차이점은 없다. 하지만 계율을 지키는 수준과 착의법 등의 세부적인 계율 규정이 종파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수담마는 우산의 사용, 흡연과 꼰야(씹는 담배)등을 허용하는 반면 셰진은 엄격하게 금지한다. 수담마는 사찰 안이나 밖에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우견편담의 복식차림인데 반해 셰진과 드와라는 외출 시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는 통견을 하는 차이가 있다.
3. 미얀마 폰지(출가자들)의 삶
미얀마에서 출가자들은 돈이나 금품을 전혀 휴대할 수 없고, 미얀마의 사원은 원칙상 부엌이나 채소를 가꾸는 텃밭이 없는 등, 생산 수단이라고는 일체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물문에 들어간 모든 출가자들에게 수입원은 없다. 이와 같이 미얀마의 상좌불교는 구조적으로 출가자들의 경제 활동이나 노동 등의 생산 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출가자들은 자연히 생활의 기반을 제3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출가자들과 불교신자들 간의 상호 관계가 이루어진다. 마을 안의 사원에 기거하는 출가자들의 음식물은 모두 불교도들인 마을 주민들이 시주하는 보시에 의하여 해결된다. 출가자들은 매일 이른 아침 탁발을 하러 마을을 다니는데 이 때 종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제공 받는다. 이렇게 보시를 받으면서도 그들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이 보시를 하는 불자들에게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4. 미얀마 불자들의 종교 생활
미얀마의 문화 형성을 결정 지은 최대의 사건은 바로 스리랑카계 상좌불교의 수용이었다. 스리랑카 불교는 경전 공부를 중시하는 ‘교학’이고, 태국 불교는 계율을 중시하는 ‘율장’인데 비해 미얀마는 ‘수행’을 가장 중요시하는 특징을 갖고 있어 다른 국가에 비해 폰지짜웅(스님들의 학교)이 발달 되어 있다. 미얀마인들은 집 가까운 파고다에 오다가다 들러 기도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잠시 추가를 하기도 하고, 출가의 수행 경력이 있어야 취업, 결혼 등에 유리한 경우가 많을 정도로 삶 속에 불교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미얀마의 문화는 한마디로 불교문화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미얀마인들의 언어와 사고,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생활과 행동의 근거로 자리하고 있다. 미얀마 불교도들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그들의 종교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 이른 새벽에 마을 폰지짜웅(승려학교)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깨어나고 승려들에게 보시할 밥과 음식을 준비한다. 6시가 되면 폰지들은 길게 줄서서 마을로 들어오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미리 준비한 밥과 반찬을 보시한다. 어린 나이때부터 부모와 함께 이런 경험을 하는 한평생 그렇게 살아간다.
10대 혹은 그 이전에 그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신쀼의식을 거쳐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수련승의 생활을 승원에서 보내게 된다. 그들의 머리를 깍고 가사를 걸치고 불경을 공부할 수 있도록 신쀼의식을 행할 때에 그들의 부모는 재정적인 문재에 별로 개의치 않고 성대한 행사를 거행함으로써 공덕의 기쁨을 누린다. 또한 자녀가 태어날 때나 결혼식 때에도 승려들을 초대해 음식을 공양한다. 사람이 죽으면 승려들에게 많은 보시를 행하고 그들의 가족과 친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불경을 독송하면서 다른 세계에 편안히 들어갈 수 있도록 기원한다.
미얀마 불교도들의 가정에는 반드시 붓다를 모시기 위해 벽위에 선반을 이용해 커다란 단을 만들어 불상을 둔다. 여기에는 불상 뿐 아니라 붓다와 관련된 그림, 사진, 그리고 고승의 사진도 함께 장식되어 있다. 날마다 물과 약간의 음식을 바친다. 선교사들이 버마 불교인들 소유의 집을 랜트하는 경우에 이 단을 치워달라고 하면 주인이 못마땅해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불교가 민간신앙(정령숭배)와 많이 혼합되어 있듯이 미얀마의 불교 또한 정통불교라기 보다는 정령숭배에 가깝다. 소수의 승려들을 제외하고는 애니미즘의 형태를 띤 기복신앙으로 비불교적인 민속적, 토속적 신앙이 혼합되어 있다.
4. 미얀마의 ‘낫’(nat) 신앙
미얀마의 ‘낫’ 신앙은 바간왕조의 제42대 아노야타 왕이 스리랑카의 테라바다(상좌)불교와 함께 당신에 민간 신앙이었던 ‘낫’신앙을 불교의 수호신으로 취급하여 그 존재를 인정하였다. 미얀마는 불교가 그들의 생활전반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과 집을 지키는 수호신인 ‘낫’을 섬기고 있다. ‘낫’은 미얀마인들이 섬기는 영적, 초자연적 존재로 대표적으로 37개의 낫을 규정해 놓고 있지만 각 지방에는 수없이 많은 ‘낫’들을 섬기고 있다. ‘낫’은 힘이 세고 특출한 사람이 죽어서 된 것도 있고, 나무나 동물 등 자연속 내재되어 있는 ‘낫’도 있으며 여러 종류의 ‘낫’들이 존재하는데 전체적으로 정령의 개념에 가깝다고 하겠다. 미얀마인들은 이 ‘낫’이 나쁜 ‘낫’도 있고, 또 유익을 주는 좋은 ‘낫’도 있다고 믿고 있다.
Ⅴ. 미얀마의 선교전략
1. 선교 역사
미얀마 개신교 역사는 미국의 최초 선교사 아도니람 져드슨이 1813년 미얀마에 도착한 이후 6년만인 1819년에 첫 번째 개신교 기독교인을 보고 하게 된다. 그동안 정령숭배자들인 소수종족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서는 얼마의 열매를 거두어 미얀마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6%에 이른다. 하지만 미얀마의 강력한 소승불교와 거의 40년간 지속된 네윈의 미얀마식 사회주의의 장애물로 인해 미얀마 선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체 인구의68%를 차지하는 미얀마의 주 종족 버마족의 기독교인은0.1%도 되지 않는 세계8대 거대 미전도 종족이다.
인종별 기독교 분포를 보면 미얀마 인구의 10% 미만인 까친족, 카렌족, 친족, 까야족이 미얀마 전체 기독교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인 선교사들의 미얀마 사역은 1995년부터 시작 되었고, 오랫동안 얀곤 중심으로 사역을 하였으나 최근에는 만달레이, 따웅지, 네피도, 삔우린 등에서도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2. 미얀마 선교의 방해요소
미얀마를 이해하려면 3가지 옷을 알아야 한다. 첫째 옷은 “승복”이다. 그것은 미얀마가 철저한 불교의 나라라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군복”이다. 그것은 미얀마가 오랫동안 군부 독재체제 아래 억압받고 폐쇄된 나라중의 하나였으며 아직도 여전히 군부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세 번째 온은 “롱지”라는 것이다. 롱지는 긴 치마와 같은 것으로 통으로 짜여져 있다. 남자든 여자든 같은 형식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마오 같은 옷을 입고 다닌다. 학교 교복도 롱지로 되어 있다. 이것은 미얀마인들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폐쇄성과 가난을 표면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1) 강력한 불교의 영향
미얀마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불교가 강한 나라이다. 얀곤 중심 언덕에 자리 쉐다콘 파고다는 높이가 98미터인데 순금으로 입혔고, 꼭대기에는 76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있다. 이것은 미얀마 불교의 상징으로 미얀마 불교를 대변하는 것이다. 눈에 잘 띄는 것에는 반드시 파고다가 자리를 잡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을 마다 파고다와 폰지짜웅이 있다. 미얀마인들에게 불교는 종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삶 그 자체라고 보아도 무관하다. 미얀마인들이 개종을 하면 가정이나 직장, 사회, 국가에서마저 고립되고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폰지(승려)들은 마을에 교회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방해한다. 강성 불교도들이 사는 지역은 예배당을 불태우고, 예배를 방해하는 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이런 현상은 도시 보다는 시골로 들어갈수록 더 심하다.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일수록 폰지와 마을 이장의 영향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2) 기독교인들이 가진 약점
미얀마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 때 선교사들에 의해 전도를 받은 소수종족들이다. 이들 소수 종족은 버마족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자신들 보다 수준이 낮은 종족들의 종교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실제로 기독교 종족인 친족은 가장 가난한 종족들 중 하나이다.
또한 영국은 미얀마를 지배하면서 주 종족인 버마족을 철저히 배제하기 위해 소수종족들을 앞세워 버마족을 다스리게 했다. 현재 미얀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들 소수 종족들이다. 따라서 버마족의 입장에서 기독교가 제국주의 자들과 그 하수인들의 종교라는 인상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소수 부족 사역자들이 자기들 보다 잘살고, 지위가 높은 버마족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가끔씩 버마족 가운데서도 경제적으로 형편이 아주 어려운 사람들은 그나마 복음을 전하기가 쉬운 편이다.
3) 법적인 제약
불교 문화가 강한 마을에 유치원이나 공부방을 통해 복음을 전하여 신자가 생겨나도 예배당을 건축하려고 할 때 정부에서는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따라서 유치원, 집, 학원, 태권도장 같은 것으로 건축 허가를 받고 그 용도에 맞게 사용하면서 주일날만 예배당으로 예배를 드린다. 그러다가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서 신고를 하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법적으로 선교에 대한 자유가 없고, 예배당 건축에 대한 허가를 내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 개척이 쉽지 않다.
3. 미얀마 선교 전략
1) 메시지(설교 내용)
미얀마인들에게 철저히 인식되고 있는 윤회와 업 사상은 미얀마 선교에 있어서 큰 장애물이다. 미얀마인들은 오직 은혜로 값없이 구원 받는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내세가 천국과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31계나 되는 다양한 세계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순환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과 내세에 대한 두려움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철저한 인과응보 사상에 젖어 있는 미얀마인들에게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따라서 미얀마 불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언제나 죄에 대한 공감대를 먼저 형성해 놓고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연약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죄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가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자기들도 연약한 의지로 죄를 거듭하여 짓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교의 세계관에는 창조주가 없다.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관심도 없다. 우주의 우연발생 가설과 제행무상(모든 것은 멈추지 않고 변한다)라는 진화론 같은 것을 믿는다.
불교의 구원관은 자신만이 자신의 죄를 씻어낼 수 있다고 보기에 인간의 공덕을 강조한다. 그래서 메콩지역의 나라들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침마다 스님들에게 시주를 하는 보습이다. 그리고 절에 가서 기도하고, 짐승들을 거두는 공덕을 쌓아 스스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빅뱅’으로나 우연히 생긴 것은 없으며, 우연히 생겨난 사람도 없음을 논리적으로 말하고, 제행무상(멈추지 않고 변하는)하기 위한 처음 물질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또한 부모님이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있는지? 처음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를 질문하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말하지 않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음을 알려주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불교국가에서 생겨나는 인간의 욕심과 문제점들, 주변에 불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 스스로 구원을 이룰 정도로 완벽한 사람을 본적이 있는지? 그리고 전도 대상자에게 본인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정도로 완벽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는지? 미워하는 사람은 없는지? 거짓말을 한 적은 없는지? 육신의 정욕은 없는지? 가족들을 포함해서 주위의 이웃들과는 어떤 문제가 없는지? 이 상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런 질문에 완벽하게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상 누구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의 의인은 없기에 우리의 죄는 은혜로 용서를 받아야 하고,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는 구세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전하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2) 메신저(설교자)
미얀마 불교도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설교할 때 몇 가지를 유의할 점이 있다.
a. 성직자의 권위.
미얀마 불교도들에게 승려는 거의 신의 위치에 있다. 승려들 앞에 앉을 때에도 언제나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나 타종교의 성직자들도 같은 개념으로 존경하는 경향이 있다. 성직자에 대해서 이런 자세를 가진 불교도들에게 너무 경솔하거나 가벼운 모습을 보일 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고자세를 보이는 것은 안되지만 부드러우면서도 경솔하지 않은 적당한 권위있는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
b. 설교할 때 유의할 점
미얀마 승려들은 대체로 설법을 할 때 앉아서 한다. 고함을 치거나 제스쳐를 취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한다. 질문을 많이 던지면서 그냥 조용히 전달한다. 이런 것에 익숙한 그들에게 너무 큰 소리를 내거나 움직임이 많거나 제스쳐가 많으면 경솔핟는 느낌을 줄 수 있고, 오히려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오히려 조용하면서도 대화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 더욱 집중하고 잘 받아들일 수 있다.
3) 선교의 접촉점
a. 축구(스포츠)를 통한 선교
2019년 4월 기준 미얀마 축구는 피파랭킹 138위의 약체이다. 하지만 미얀마인들의 축구 사랑은 대단하다. 동네마다 조금 넓은 공간만 있으면 축구를 하는 아이들, 청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각 도시마다 풋살 경기장이 많이 생겼고, 리그전도 많이 생겨났다. 필자가 사역하는 삔우린에도 각 동네마다 풋살 구장이 있고, 도시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큰 스타디움에는 거의 매달 연령별, 남녀 각종 축구 시합이 열리고, 시합이 열릴 때마다 축구 시합을 보러 온 관중들로 붐빈다.
이런 사실을 잘알기에 필자는 사역을 하면서 먼저 축구장을 만들어 유소년 축구를 시작했다. 실제 축구 사역을 통해서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도 많이 생겨났다. 축구 사역은 여러 연령층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도구다.
b. 교육을 통한 선교
미얀마인들의 교육열은 한국 못지않게 대한하다. 우리나라 학원과 같은 방과후 학교에 다니지 않는 학생이 없을 정도이다. 돈이 좀 있는 집에서는 아예 아이를 기숙학교나 기숙 학원에 보낸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난한 사람들도 자녀들을 학원(방과후 학교)에 보내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저렴한 곳을 찾는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서 현재 미얀마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 중에 많은 수가 방과 후 학교(교실)를 운영하고 있다.
필자가 개척한 교회에도 방과후 학교를 운영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다른 학원에 비해서 절반의 수업료를 받고, 양질의 공부를 시켜 준다. 토요일날은 성경과 찬양을 가르친다. 그리고 주일날 모두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 공부를 가르치는 곳과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예배에 나오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부모가 아주 독실한 불교도인 경우에는 교회에서 하는 방과후 학교에 보내지 않지만, 불교신자이긴 해도 그렇게 독실한 신자가 아니면 자녀의 교육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부모가 많았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학부모를 초청해서 주중에는 학교 공부를 잘 가르치고, 주일에는 부모와 이웃을 사랑하고, 착하고 바른 아이가 되도록 가르치는 전인교육을 시킬 것이라고 설교한다. 평소에 동네에서 가나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는 등 좋은 이미지를 심어 놓아 학부모들의 마음이 많이 열려서 그런지 교회에서 하는 방과후 학교를 좋아했고, 협조적이었다.
c. 구제를 통한 선교
미얀마인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구제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 수 있다. 필자가 정착한 마을에는 가난하여 대나무 집에 사는 사람이 많고,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이불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을 이장을 통해 담요를 선물했다. 그리고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영양 실조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학생들에게 두 차례 급식을 제공했다. 집이 없는 가난한 가족을 위해서 대나무 집도 지어주었다.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무료 방과 후 교실도 열었다. 이 모든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마을 주민으로 인정해 주었고, 그 마을의 모든 중요한 행사에 초대하였고, 아주 정중하게 대해주었다. 그 마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아무도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외국인이 미얀마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구제로 그들의 마음을 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Ⅴ. 나가는 말
참고문헌
<인터넷 싸이트>
동남아 선교 정보센타 www.seamission.net
황금의 나라 미얀마 http://unionofmyanmar.net
리얼미얀마 닷컴 www.realmyanmar.com
미얀마 선교회 www.myan.or.kr
미얀마 연방정부 www.myanmar.com
미얀마 알아가기 m.pck-goodnews.com 예장신문 모바일 사이트
주 미얀마 한국대사관
<도서>
1. 신봉길, “시간이 멈춘 땅 미얀마”, 도서출판 한나래, 1991.
2. 이은구, “버마 불교의 이해”, 서울: 세창출판사, 1996.
3. 최재현, “미얀마 버마족의 생활 리듬과 불교”, 국제지역연구 제7권 제2호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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