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2015.12.21 아침향기"에서
서양인들이 환생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의 역할이 컸다. 그는 '티베트 사자의 서'에 대한 해설에서 "환생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잠시 접어두고 과학적 지식과 이성이 닿지 않은 세계에 닫혀 있는 마음의 문을 연다면 '티베트 사자의 서'로부터 적지 않은 보상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티베트 사자의 서'는 불교의 환생사상에 바탕을 둔 신비 서적이다. 그 책에 따르면 우리는 이번 생에 태어나기 전에 무수한 생을 겪었으며,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전생의 기억들이 보관되어 있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삶과 환생의 중간상태이다. 이 중간상태에 있는 존재에게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책이 '티베트 사자의 서'라는 것이다.
'티베트 사자의 서'의 환생사상
카를 융, 서양인들에게 깊이 소개
바르도, 삶과 환생의 중간상태
이를 받아들인 융, 새 지평 넘봐
'티베트 사자의 서'의 원제목은 '바르도 되톨'이다. 바르도(Bardo)는 둘(do) 사이(bar)라는 뜻이다. 그것은 낮과 밤의 사이인 황혼녘이며, 이 세계와 저 세계의 틈새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물게 되는 중간상태를 '바르도'라고 부른다. 그 상태에 머무는 기간은 49일로 알려져 있다. '되톨'은 들음을 통해 영원한 자유에 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바르도 되톨'은 죽음 이후와 환생 사이에 있는 존재를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의 책이다. 이 책은 서기 8세기 티베트인들에게 구루 린포체(소중한 스승)로 불리는 파드마삼바바가 오래전부터 비밀스럽게 구전되어 내려오던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잃어버린 티베트 경전들 가운데 하나였다.
'바르도 되톨'의 영역 초판본이 나온 것은 1927년이었다. 책의 제목을 '티베트 사자의 서'로 바꾼 이는 옥스퍼드대학 종교학 교수였던 에반스 웬츠였다. 번역은 산스크리트어와 영어에 능통한 티베트 승려 라마 카지 다와삼둡이 했고, 웬츠는 번역자로부터 주석과 해설을 받아 적었다. 웬츠가 그렇게 한 것은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구전되어 내려왔던 비밀의 지혜를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전의 신비한 부분들과 상징적인 부분들에 대한 자세한 해설이 필요하다는 번역자의 생각 때문이었다.
'티베트 사자의 서'에 대한 융의 해설은 1938년에 출판된 스위스 초판본에 실렸다. 해설에서 융은 "영혼이 태어나면서부터 잃어버린 신성을 되찾게 해 주는 입문 과정이 '티베트 사자의 서'"라고 했다. 여기에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의식 분석을 받는 사람은 유아기에 가졌던 성적 환상의 세계에서부터 자궁 속의 시절까지 거꾸로 여행한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가장 큰 외상을 출생 경험 그 자체라고 말한다. 나아가 정신분석학자들은 인간이 자궁 속에 있을 때의 기억까지 추적해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서양 심리학은 불행히도 한계에 부닥치고 만다. 그들은 인간이 자궁 속에 들어오기 전의 상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추적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추적을 계속했더라면, 그리하여 자궁 너머의 세계에도 의식체가 존재한다는 어떤 흔적을 찾아낼 수만 있었더라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이 자궁에 들어오기 이전의 존재상태, 다시 말해 사후세계의 중간 기간인 '바르도'에서의 경험까지도 틀림없이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생물학적 개념만으로는 이런 모험에 성공할 수 없다. 현재의 과학적 가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 완전히 다른 종류의 철학적 준비가 요구되는 것이다."
위의 글은 '바르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쓰기 힘든 내용이다. '바르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환생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융이 '티베트 사자의 서'에 대해 "가장 차원 높은 심리학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하면서 "그 책으로부터 새로운 생각과 발견을 위한 영감은 물론 수많은 근본적 통찰력을 얻었다"고 고백한 것은 환생사상에 마음의 문을 열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