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전거리/ 2015년 3월 12일 목요일/
서연정
동명동 도시재생센터에서 나와 동계로를 따라 걷는다. 떡방앗간을 지나고 카오디오 가게를 지난다. 드디어 목재상 밀집 지역이 나타나는데 드물게 공인중개사, 노래교실, 도자기, 치킨 집이 있고 요즘은 보기 어려운 공중전화 부스가 길손을 반기고 여기 저기 점집도 박혀 있다. 즐비한 목재 가게들은 채송화처럼 키가 낮다. 간판과는 별도로 간판의 이마쯤 되는 곳에 일률적으로 연번을 붙여 둔 것이 눈에 띈다. 동그란 판에 ‘A 나무전거리 15 계림목공소’ ‘B 나무전거리 40 드라이비트’ ‘C 나무전거리 65 광주문집’ 하는 식이다. 몇 번까지 있는가를 상인들 몇 분에게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편도 1차선 도로 양편에 늘어선 목재상과 문집들……. 한 가게에 들어가서 이 거리에서 가장 오래 된 가게를 물으니 ‘C 나무전거리 48 대림목공소’를 알려준다. 동그란 판은 대림목공소인데 간판은 ‘대림문집’이다. 문집이라는 말에서 나무의 질감이 느껴지고 향이 번지는 듯하다. 동그란 판에도 ‘문집’이라고 썼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살짝 든다. 각종 톱날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고 연장들도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에서 주인장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동안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온 작업대는 성한 곳이 없다. 깊고도 촘촘하게 톱날이며 망치를 받은 흔적이 고스란하다. 어지간히 세월을 견딘 모양이다. 작업대를 사이에 두고 사장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장섭 사장님은 올해 칠순이라는데 나무를 고르고 다듬으며 살아서인지 그 나이가 짐작되지 않는다. 그는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상인회장을 맡아 지자체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하니 이 거리의 산증인의 한 사람을 찾은 듯하다.
이장섭 사장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 거리는 철로가 있을 때부터 나무를 팔아왔다. 처음에는 땔감이었는데 연료가 바뀐 후로는 문짝을 짤 수 있는 목재 등이 팔렸고 점차 건축자재로서의 나무를 사고파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건축자재거리의 판세가 중흥동 쪽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 지금 200여 군데의 목재상들이 성업 중이라고 말하는 사장님의 표정에 어둠이 서린다. 지금껏 ‘맞춤 전문 특수 문짝, 목문 왁구’를 간판에 적고 나무와 함께 해온 이장섭 사장님께 이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를 물어보았다. 그는 경주KBS에서도 작업을 한 적이 있지만, 용인MBC드라마세트장 작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지어진 옛날 집에 완성된 문이나 달고 인건비를 받는 정도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가구도 엄청나서 목재를 다듬어 직접 문살을 짜고 틀을 제작하여 설치하는 것은 옛말이 되었다.
‘나무전거리’ 조형물은 2007년 5월에 세워졌다. “1900년부터 광주사람들은 물론 화순 일대의 가난한 나무꾼들이 무등산에서 땔감을 마련해 잣고개를 넘어와 이곳 나무전거리에서 팔았다 한다. 시내 중심과 가까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나무의 종류는 소나무 가지를 비롯하여 불쏘시개용으로 긁어 온 나무까지 각양각색이었다. 1960년 이후 가정용 주연료가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면서 본래의 시장기능을 상실하고 헌 나무와 문짝시장이 형성되면서 문짝거리로 통했던 곳이다. 현재는 시대 변천에 의해 다양한 건축자재로 탈바꿈됐다. 나무와의 질긴 인연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라고 ‘나무전거리’라는 이름의 유래를 적고 있다. 이장섭 사장님께 들은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무전거리’를 나타내는 조형물 있는 부근에 86번 명패가 보인다. 이 번호가 끝일까? 새끼골목 속으로 들어가면 있을지 모르겠으나 가로변에는 더 이상의 숫자가 보이지는 않는다.
‘나무전거리’ 조형물 옆에 광주광역시에서 2002년 12월에 세운 옛철도분기점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 옛 광주선(송정리-담양) 철도와 경전선 철도의 분기점이다. 계림오거리길은 광주선 터이고 경양로는 경전선 터였다. 광주선은 1944년 폐선되었고, 경전선은 1969년 이설되었다.”라는 설명을 읽으니 세월의 저편 기슭에서 아스라하게 기적이 들려오는 듯하다.
‘나무전거리’ 조형물과 옛철도분기점 표지석을 살피고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계림목공소 사장님은 낯선 객이건만 들여다보는 일에 개의치 않으며 득의에 찬 얼굴로 연장을 들고 나가신다. 여유롭고 자신만만하시다. 작은 나무 서랍이 층층인데 그것이 대여섯 줄이 있고 그 옆으로 손때 묻은 연장들도 그득하다. 그 위에는 ‘금연’이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한 금지판을 걸어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가게 안에는 사장님이 자랑할 만하게 목재가 가득 쌓여 있다. 매꼬롬하게 묶여 팔리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라기보다 금방이라도 의자든 사다리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되기 위하여 톱과 망치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요즘 보기 힘든 나무대문 한 짝이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옹이자국이 문양처럼 여기저기 나타나 있고 그 위에 연필로 그린 선이 아직 역력하게 남아 있다. 사장님은 하회탈 웃음을 지으며 “우리집에만 있소.”라며 그 나무대문을 자랑하신다.
문짝 수리, 방화문 수리, 샷슈 제작, 집수리 철거 및 시공, 인테리어, 시골대문 제작 및 시공, 합판, 목재, MDF, ABS도어 주문 및 제작, 연동식, 현관문, 나무간판 전문기업, 씽크, 철물, 맞춤전문 특수문짝, 목문 왁구, 실내장식, PVC창호, 건축자재 일체, 실내외 장식, 리모델링, 감리, 미장스톤, 드라이비트, 방부목, 천연테크재, 오일스테인 시공 판매 등 간판을 구경하며 계림로터리에서 양희마트까지 천천히 걷다 보니 출발점이다. 어느 기록에는 오늘 걸은 거리를 350m구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희마트 위층 유리창에 ‘산수청장년회’ 표지가 있다. 이 길에 대한 산수동 청장년의 의견이 궁금하였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늙수구레한 노인들 서넛이 한집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한산한 이 거리가 생동감 넘치는 날이 언제쯤일까. 오늘은 어쩐지 ‘싸전’에 가서 가마니에 든 쌀을 사고 이 곳 ‘나무전’에서 나무토막 몇 개 얻어다가 불을 지펴 흰 쌀밥을 지어 먹고 싶어진다. 나무를 이고 가는 나무꾼도 같고 나무가 필요한 아낙도 같은 하루였다. 어쨌거나 ‘나무전’이라는 고색창연한 이름은 마치 엄마의 흰 옥양목 앞치마처럼 온화하게 마음을 감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