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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名君과 名宰相(下)용렬한 군주 아래는 간신이 득세한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당나라를 크게 중흥시켜 ‘貞觀의 治’를 연 태종이 하루는 좌우 신하들에게 “창업과 수성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라고 물었다. 재상 房玄齡은 창업이 어렵다고 답했으나 또 다른 재상 魏徵은 생각이 달랐다. “예로부터 제왕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천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일한 생활에 빠져 천하를 잃는 예가 많습니다. 따라서 수성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태종은 두 사람 말이 모두 일리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옳다. 방현령은 나와 함께 1백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천하를 취했으므로 창업의 어려움을 잘 안다. 위징은 나와 함께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데 항상 교만과 사치는 부귀에서 나오고, 禍亂은 소홀한 곳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나는 수성의 어려움을 알지만 창업의 어려움은 이미 갔다. 수성의 어려움은 앞으로 그대들과 함께 신중히 해 나갈 것이다.” 당나라의 吳兢이 당 태종의 치적을 저술한 “貞觀政要”에는 이 말을 들은 위징이 “지금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이 국가를 위해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업과 수성에 대한 1천4백여년 전의 이 일화는 50년만의 정권교체의 의의를 강조하는 현 정권의 역사관을 생각나게 한다. 정권 담당자에게는 정권교체 그 자체, 창업의 의의가 중대할지 모르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정권교체의 내용, 즉 수성이 더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지난호의 ‘역사 속의 명군과 명재상’에 이어 ‘역사 속의 용렬한 군주와 나쁜 재상’을 살펴보는 것은 태종의 말처럼 ‘창업’의 어려움은 이미 갔으니 중요한 것은 수성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용렬한 군주와 나쁜 재상의 비극은 비단 당사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에 미친다. 백제 의자왕의 귀를 막은 신하들 흔히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라를 망친 임금이라고 비판받지만 그가 처음부터 그런 용렬한 군주는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국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의 북망산에서 발견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의 ‘묘지명’은 의자왕을 ‘과단성 있고 침착하고 사리 깊어서 그 명성이 홀로 높았다’고 기술할 정도로 한때 의자왕의 명성은 높았다. 그는 즉위 초 국내를 순무(巡撫)하고 사죄(死罪) 이하의 죄수는 모두 방면하여 민심수습에 나섰으며,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키기도 하는 등 명군의 자질을 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초기의 이런 성과에 자만하면서부터이다. 의자왕 16년(656) 3월의 “삼국사기” 기사는 ‘왕이 궁인(宮人)과 더불어 음황(淫荒)·탐락(耽樂)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적고 있다. 즉위 초기의 치적이 향락이란 말폐로 나타난 것이었다. 의자왕의 정치에 이상이 생겼다는 가장 큰 조짐은 이 무렵부터 의자왕의 비정을 간쟁하던 충신들이 하나 둘 배제된다는 점이다. 그 중 한명이 좌평 성충(成忠)이다. 자신의 황음을 극력 간쟁하자 의자왕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급기야 그는 옥중에서 말라죽게 되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올리며 죽고자 합니다’라며 마지막 상서(上書)를 올렸다. 만약 외국군이 쳐들어오면 육로에서는 침현(沈峴·충남 대덕의 마도령)을, 해로에서는 기벌포(伎伐浦·금강 하구) 연안을 막으라는 것이 상서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미 ‘예스맨’들로 둘러싸인 의자왕의 귀에 죽음에 임해 올린 충신의 마지막 간언이 들릴 리 없었다. 불과 4년 후 성충의 예언대로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의자왕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스맨들은 원래 위난에 대비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자왕이 황급히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을 때 중구난방일 뿐 쓸 만한 의견 하나 내놓지 못했다. 신라군과 당군이 동서에서 각각 백제의 국토를 유린하는 상황에서 좌평 의직(義直)은 당나라 군사가 육지에 상륙했을 때를 기다려 당군부터 치자고 주장하고 달솔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하는 등 의견이 갈라졌다. 당황한 의자왕은 좌평 흥수(興首)에게 사람을 보내 그 의견을 구했다.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물어야 했던 이유는 그 또한 귀양가 있던 몸이었기 때문이다. 흥수의 의견 또한 앞의 성충과 같아서 침현과 기벌포를 막으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어느 군을 먼저 공격할 것인가에는 의견이 갈라졌던 신하들이 흥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데는 한 목소리였다. “오랫동안 유배중에 있었으니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이처럼 초유의 국난을 앞두고 백제의 군신(君臣)들이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잡는 사이 신라군과 당군은 모두 침현과 기벌포를 돌파했으며, 계백마저 패배함으로써 백제는 드디어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의자왕의 성공과 실패는 지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과 자기반성을 늦추면 안된다는 교훈을 준다. 그리고 면전에서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일수록 나라와 그 지도자를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자겸·묘청의 난… 고려 인종의 우유부단 고려 16대 임금 예종(睿宗·1105∼1122)이 죽었을 때 태자 해(楷)의 나이는 불과 열네살에 지나지 않았다. 장성한 숙부들이 어린 조카의 자리를 노릴 때 태자를 도와 인종으로 즉위시킨 인물이 예종의 비 문경왕후의 아버지이자 태자의 외조부인 이자겸(李資謙)이었다. 더구나 이자겸은 인종이 타성의 왕비를 얻지 못하게 자신의 셋째·넷째 딸을 왕비로 보냈다. 인종은 어머니와 동기인 친이모 둘을 부인으로 데리고 살았으므로 안팎으로 이자겸에게 포위된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종은 이자겸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인종은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고 불렀으며, 심지어 조서에도 이름을 쓰지 않고, 경(卿)이라고도 부르지 않을 정도로 그를 높였다. 그러자 국왕의 위에 있다고 자만한 이자겸은 스스로 송나라에 표(表)를 올리고 자신을 왕이나 쓸 수 있는 칭호인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일컫으며 조책(詔策)을 내려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인종은 그동안 우왕좌왕하며 이자겸의 눈치만 보다가 급기야 그가 왕위에 욕심이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오히려 이자겸이 사돈 척준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인종에게 대항했기 때문이다. 이자겸의 반발에 놀란 인종이 반란군인 척준경의 군사에게 왕의 개인 돈인 내탕(內帑)의 은폐(銀幣)를 풀어주며 달래기까지 했으니 정작 이자겸은 제거하지 못한 채 사회만 혼란스러워졌던 것이다. 인종이 이자겸에게 선위(禪位)하겠다고 나설 정도였으니 괜히 인종의 이자겸 제거계획을 믿고 군사를 일으켰던 애꿎은 장군·군사들의 목숨만 허망하게 되었다. 이자겸은 인종을 자신의 집 서원에 유폐시켜 놓고 사실상 국왕 행세를 하면서 당시 유행했던 ‘십팔자도참’(十八字圖讖), 즉 이씨가 왕이 된다는 참설을 현실로 만들려 했다. 이런 식으로 권력을 잡은 자가 권력을 위해 꺼리는 일이 있을 리 없었다. 그동안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군신관계를 수립하자고 나온 것이 이 무렵인 인종 3년(1125)이었다. 부모의 나라를 신하로 삼겠다는 무리한 요구에 온 나라가 모두 분개했으나, 금나라와 대립하다가는 자칫 권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이자겸은 금나라에 상표(上表)를 올리고 칭신(稱臣)하기로 결정했다. 나라를 팔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인종은 뒤늦게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가 벌어진 틈을 이용해 그들을 제거할 수 있었으나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개경의 왕성은 불타버린 뒤였다. 왕으로서의 권위와 자존심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인종은 서경(西京·평양)을 순행하면서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해 왕권강화를 꾀했다. 인종은 신하에게 눌린 왕권과 금나라에 눌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서경 천도를 결심했다. 개경은 지덕이 쇠하고 서경이 지덕이 성하다는 묘청 등의 풍수지리설에 마음이 기울었던 것이다. 인종은 서경의 명당인 임원역(林原驛·평남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에 대화궁(大花宮)을 지어 천도의 의지를 드높였으나 서경 거동 도중 갑작스런 폭풍우로 인마가 살상되는 등 재변이 잇따르자 돌연 서경 천도를 취소해 버렸다. 단재 신채호가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사건’이라고 칭했던 묘청의 난은 바로 인종 13년(1135)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난은 평서원수(平西元帥) 김부식(金富軾)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이 와중에 백성들이 받은 피해도 적지 않은 것이었다. 이처럼 최고지도자가 우유부단할 때 그 폐해는 단순히 그 자신이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권력의 폐해를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것은 다수의 죄없는 백성들인 것이다. 개혁주체세력의 도중하차… 공민왕과 신돈 제31대 임금 공민왕이 즉위했을 무렵 고려 사회의 화두는 현재의 우리 사회처럼 개혁이었다. 게다가 거듭된 개혁 실패의 역사도 현재 우리 사회와 유사했다. 당시 고려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소수의 특권층인 권문세족들이었다. 이들은 원나라를 등에 업고 고려를 우습게 보면서 모든 요직과 막대한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 자신의 외사촌 홍언박(洪彦博)과 자신의 연경(燕京) 시절 함께 있던 시종 세력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개혁정책은 기황후의 오빠인 부원배(附元輩)의 우두머리 기철(奇轍) 일당을 전격적으로 주살하고, 원나라가 설립한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곧 한계에 부닥쳤다. 그 이유는 현 정부처럼 조정 안에 개혁대상과 개혁세력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元)의 연호를 정지시킨다거나, 원의 압력으로 변경했던 관제(官制)를 문종 때의 옛 제도로 환원시키는 등의 상징적인 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으나, 지배층 내부의 구조를 바꾸거나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등의 실질적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개혁 추진 세력 내부에 반개혁 세력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혁 대상에게 개혁을 주문했기 때문에 발생한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공민왕이 등용한 인물이 승려 신돈(辛旽)이었다. 신돈은 그 어미가 옥천사(玉川寺)의 비구니로서 미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승려들 사이에서도 한 축에 들지 못했던 인물이었으므로 당연히 개혁의 의지가 드높았다. 그는 그 자신이 억압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권문세족으로부터 당하는 고통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권문세족과 이해가 상충되지 않아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 수 있었다. 그는 공민왕의 출사 요청을 받고 이런 조건을 내건다. “소승은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습니다. 비록 권문세족들의 참언이나 방해가 있더라도 저를 믿어 주셔야 합니다.” 이때 공민왕은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겠소”라는 유명한 답변을 남기기도 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판사가 되어 백성들이 억울하게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민을 원래대로 환원시켰다. 그는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 이내에 스스로 돌려주라’는 강력한 포고를 발표해 백성들의 환호를 샀다. 신돈을 시종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고려사”도 ‘이 영(令)이 발표되니 권문세족들이 강점했던 전민(田民)을 그 주인에게 반환하였으므로 일국이 모두 기뻐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신돈의 개혁정책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억울한 백성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세계관을 지닌 신돈의 개혁이 성과를 거둔 것은 당연하다. 3공 때부터 권력만 쫓아다녔던 인물들이 옷만 갈아입고 개혁을 외치는 현정부의 개혁과 신돈의 개혁이 질이 다른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신돈의 개혁정책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백성들이 “성인(聖人)이 나왔다”며 신돈을 치켜세우자 개혁 대상인 권문세족들이 공민왕에게 계속 참소했던 것이다. 그러자 공민왕은 “스승은 나를 구하고 나는 스승을 구하겠소”라던 약속을 파기하면서 재위 20년(1371)에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로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했다가 사형에 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신돈은 지상에서 사라졌고 그의 개혁정책도 실패로 끝났으나 이는 신돈만의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이는 공민왕 자체의 실패이기도 했고 나아가 고려의 불행이기도 했다. 신돈이 죽은 3년 후 부원배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보이는 자제위(子弟衛) 소속 최만생(崔萬生)·홍륜(洪倫) 등에 의해 공민왕이 시해됐을 뿐만 아니라 이후 고려는 끝내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고 나라가 망하는 길로 가버리고 만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동지’라는 낱말의 비극… 세조와 공신들 현재 우리나라 정치가 지닌 비극 중의 하나는 권력을 잡고 나면 신세를 갚아야 할 이른바 동지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신세는 결국 돈이나 자리로 갚을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데, 결국 망사(亡事)로 결말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인사정책도 신세갚기라는 저차원에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실패한 인사였음이 드러난 김태정 전 법무장관이나 손숙 전 환경부 장관의 경우도 현 대통령의 신세갚기 차원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음은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비극이 계속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면서 조선이란 나라의 성격은 크게 바뀐다. 그 이전의 세종이나 문종·단종은 동지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국왕의 자리에서 유능한 인재를 발탁해 중용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던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왕위를 꿈꾸면서 국왕과 신하들 사이에 이른바 ‘동지’ 관계가 맺어지게 되었다. 이미 헌법에 의해 세자가 되었으며, 국왕으로 즉위한 단종을 내쫓고 임금이 되기 위해 수양대군은 수많은 동지들을 끌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신숙주나 권람 같은 조사(朝士)들도 있었지만 한명회 같은 경덕궁지기 출신의 백수들이나 심지어 홍윤성 같은 시중의 무뢰배들까지 있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자 이들 동지들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다가, 수양이 즉위하자 다시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어 임금과 동지관계임을 내외에 과시한다. 시중의 무뢰배에서 공신까지 올라간 이들의 입신양명은 개인적인 자리에서 바라보면 목숨을 걸고 쟁취한 입지전적인 성공이겠지만 국가라는 공적인 자리에서 바라보면 사(邪)가 정(正)을 말살한 실패한 역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던 이유는 오직 하나 권력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권력이 필요했던 이유는 타인을 위한 제세(濟世)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었음은 물론이다. 명분 없이 왕위를 가로챈 세조에게 이들은 반대세력이 봉기할 경우 맞서 싸울 주력군이었으므로 ‘역모가 아닌 한 공신들은 절대 처벌하지 않는다’는 불행한 집권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통제되지 않은 권력이 어떤 부작용을 범할 것인가는 동서고금의 역사가 잘 말해 주는 것처럼 이들 중 홍윤성 같은 인물은 자신이 어려웠던 시절 돌봐주었던 숙부를 때려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에 분개한 홍윤성의 숙모는 세조가 속리산에서 온양온천으로 이동할 때 버드나무에 올라가 커다랗게 곡하면서 이 만행을 알렸으나 세조는 홍윤성의 종들만 치죄한 채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국왕이 동지로 생각하는 특권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백성들의 자리에서는 한없는 불행일 수밖에 없다. 물론 제세의 이념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 조직이라면 소중한 가치가 있지만 권력에만 뜻을 둔 조직은 존재 자체가 국가의 불행인 것이다. 아직도 가신(家臣)이란 전근대적인 용어로 뭉쳐 주군을 ‘어른’이라 높이면서 스스로 아이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동지’라는 좋은 이름을 더럽히는 작금의 현상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말해 주는 지표에 다름아니다. 언제쯤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념으로 뭉쳐진 정치조직을 갖게 될 것인가. 사람을 키우지 않았던 선조 임진왜란을 맞은 조선의 가장 큰 비극은 당시 임금이 선조였다는 점이다. 선조는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와 타인에 대한 의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중종이 창빈 안씨 사이에서 난 9남 덕흥군의 3남으로서 후사 없이 세상을 뜬 명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그는 내내 임금의 적자가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달고 살았다. 이런 콤플렉스는 사림파를 대거 등용하는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인재는 의심하고 보는 나쁜 방향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사림파는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는데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한 정치세력이 둘로 나뉠 만큼 인재가 많다는 뜻도 되는 것이었다. 실로 선조 때는 이 나라 역사상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쟁쟁한 인물들이 즐비했다. 대유(大儒) 이황·이이를 위시하여 유성룡·이발·정인홍 등의 문신들은 물론 이순신·김덕령 등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무공을 세운 무신들도 많았다. 용군(庸君) 밑에 명신들이 즐비한 상황이었다. 선조가 국왕의 자리에서 이런 인물들의 장점을 살려 적재적소에 등용했다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뛰어난 인재를 의심하는 성격의 군주였다. 아랫사람에 대한 시기심이 잘 드러나는 것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부터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북상하자 선조는 국왕으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보다 백성들과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신하들이 주전론을 펴는 동안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도망하려는 파천(播遷)책과 조선을 버리고 만주의 요동으로 망명하려는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을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파천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그나마 요동내부책은 일본과 결탁해 명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의심한 명나라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니 나라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신하들이 목숨 바쳐 싸울 때 자신만 살기 위해 도망치려 한 선조는 환도(還都) 이후 왕위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의구심에 시달렸다. 그는 당시 백성들로부터 신망이 높던 이순신·김덕령·곽재우 등 전쟁영웅들을 제거하려 했으며 실제로 김덕령을 죽인 것은 이런 의구심에서 나온 심각한 범죄행위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무도 신임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쟁 중에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조차 믿지 못해 배척할 정도로 자신 이외에는 사랑하는 애첩 외에 아무도 믿지 않았던 인물이 선조였던 것이다. 아마 그가 신하들을 신뢰하는 정치를 펼쳤으면 수많은 인재들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밤을 새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재를 키우기는 커녕 끊임없이 사람들을 의심해 정여립의 난 때는 무려 1천여명의 사대부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 점은 선조와 다를 바 없다. 70년대 초반 40대 기수론을 제창했던 인물들이 70세 중반이 되어 70대 기수론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현상이 정계의 수준을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다. 낡은 부패구조에 물들지 않은 신진세력들이 도무지 발붙일 곳이 없는 것이다.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죽어가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지도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의 하나는 인재를 발굴해 등용하는 것이다. 政敵을 죽이고서라도… 유자광 예종 때 겸사복장으로 있던 유자광은 남이가 혜성을 보고 “혜성이 나타난 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이 올 징조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역모라고 고변했다. 이 말이 남이가 예종을 없애고 새 왕을 세우려는 역적 모의의 증거라는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남아 스무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男兒二十未平國)이라는 남이의 시구를 ‘나라를 얻지 못하면’(未得國)으로 고쳐 이 또한 역모의 증거라고 몰아갔고 남이는 결국 죽고 말았다. 그때 남이의 나이 불과 27세였다. 남이가 왕위를 노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으나 남이의 재능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예종은 일부러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유자광은 소원대로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남이를 죽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김종직이 단종을 애도하며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무오사화까지 일으켜 김일손 등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한 사람의 악한 신하가 조선의 발전을 수십년 이상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도 결국 중종반정 후 강릉으로 귀양가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동안 조선이 겪은 피해를 보상받을 길은 없었다. 역사를 모르는 지금의 정치 지도자에게도 그러한 과오는 반복되고 있다. 문민정부의 실정으로 받는 국민들의 고통은 어떻게 보상받을 것인가. 실정당사자들이 오히려 큰소리치며 다닐 수 있게 또다른 실정이 되풀이되는 현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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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속의 名君과 名宰相(下)용렬한 군주 아래는 간신이 득세한다 |작성자 맘착한 토끼아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