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의 등장으로 산업의 기술적 기초가 바뀌어 작은 수공업적 작업장이 기계설비에 의한 자본주의적 성격의 큰 공장으로 전환된 일대 변혁.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농업 문명사회로부터 공업문명사회로의 이행을 뜻하므로 보통 이를 <공업화>라 부르고 있다. 공업화는 그 뒤 유럽 각국, 그리고 미국·일본·러시아 등으로 확대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중국·한국·동남아시아·중근동·남아메리카·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로 확산되어 갔다. 공업화를 간단히 정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물질적 재화 생산에 무생물적 자원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조직적 경제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농업사회에서는 그 에너지를 인간이나 동물 근육의 힘이라든지 풍력·수력과 같은 자연의 힘에 의존하였다. 생활에 필요한 취사나 난방, 생산을 위한 열에너지는 주로 땔나무와 숯에 의존하였다. 이에 대하여 공업화는 그러한 에너지의 생물자원 의존으로부터 석탄이나 가스·석유와 같이 한번 소비해 버리면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 의존으로 바뀌었으며, 그때 새로운 에너지체계로의 이행과 그 경제과정에 대한 적용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과학기술의 진보였다. 이리하여 영국의 산업혁명은 일찍이 경제학자였던 A. 토인비가 주장한 바와 같은 격변적인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적어도 16세기 중엽부터 공업화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에 와서는 지배적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생산에서의 기술혁신과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전의 농업사회의 구조를 기초부터 허물어지게 하였다. 생산과 소비가 하나였던 농업사회가 바뀌어 생산직장과 가정은 분리되고, 사람들의 생활은 노동을 팔아 얻어지는 임금수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농촌공동체 붕괴에 따라서 교육·후생복지·오락 등의 사회적 여러 기능이 공동체로부터 떨어져나가 독립하는 등 사회조직의 대변혁이 일어났다. 이러한 산업혁명을 맨 처음 경험한 나라가 영국이다.
1 기원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봉건제도가 해체되고 농촌에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농민층이 많이 생겨났다. 또한 농민을 모체로 한 농촌 모직물공업이 발달하고, 농민층 분해의 진전과 함께 선대도매제(先貸都賣制)와 공장제수공업(工場制手工業) 형태를 취한 초기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다른 유럽의 여러 나라보다도 순조로이 나타났다. 더욱이 17세기 중엽 무렵의 절대권력을 무너뜨린 시민혁명, 해외시장·식민지 획득, 해외상업 경쟁에 대한 유효한 중상주의적 여러 정책과 어우러져서 K. 마르크스가 말한 본원적 축적이 현저하게 이루어졌다.
(1) 에너지위기
산업혁명이 태동하게 된 계기는 16세기 중엽 이후 유럽을 덮친 삼림자원의 고갈·결핍, 땔나무와 숯의 부족에 따른 심각한 에너지위기였다. 그 가운데서도 에너지위기가 가장 심각한 양상을 보인 것은 영국이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이 취한 위기극복대책은 대체에너지로서의 석탄을 가정용·공업용 연료로서 조직적으로 이용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침체되어 있던 영국의 공업생산은 석탄연료의 이용으로 활기를 되찾아, 1540∼1640년의 <초기산업혁명>과 같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영국의 석탄생산량은 1540년 무렵의 연간 20만t에서 1650년 무렵에는 약 150만t, 1700년 무렵에는 약 300만t이라는 비약적 증가를 보였다. 그리하여 17세기 후반 영국 한 나라의 석탄생산량은 전세계 석탄생산량의 약 85%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석탄에 대한 수요와 생산이 증대함에 따라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3가지 있었다. 탄갱의 배수문제, 생산지로부터 소비지로의 수송문제, 철광석 용해에 있어서 석탄 이용상의 기술개발이 그것이다. 이들 과제가 사회적·기술적으로 해결되어 가는 동안 산업혁명으로 가는 조건이 정비되어 갔다. 즉 탄갱 배수처리의 기술적 과제는, T. 세이버리가 고안한 <갱부의 벗(1698)>이라고 하는 펌프, 이어서 T. 뉴커먼의 <기압기관(氣壓機關, 1712)> 등 초기증기기관의 발명을 촉진시켜, 결국 J. 와트의 복동식 증기기관(複動式蒸氣機關;動力機械, 1781)의 발명으로 이끌었다. 한편 석탄 수송과 관련하여 나타난 것이 동력에너지위기였다. 16세기 이후 유럽은 증대하는 동력에너지수요를 주로 가축의 힘, 특히 말의 힘에 의한 공급에 의존하였는데, 가축의 증가는 사료 증산의 필요성을 높였다. 특히 석탄을 신속하게 수송하는 등 육상수송의 급속한 성장을 이룬 영국에서는 곡물과 사료 증산을 가능하게 한 새로운 토지이용형태, 예컨대 근채류·클로버 등 사료작물을 도입한 노퍽식 4종윤작법(四種輪作法)과 같은 기술혁신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축과 인간이 식량과 토지를 둘러싸고 서로 다투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가축의 증가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18세기 영국은 그러한 축력 증가의 사회적 한계가 위기상황이 되어 나타난 시대였다. 인간의 식량과 생존을 위하여 어떻게 축력을 절약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축력을 대신할 보다 효율적인 동력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18세기 영국의 최대 사회문제로 나타났다. 축력 절약을 위하여 차바퀴의 개량, 도로 개수, 운하 건설과 같은 사회 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촉진되기는 하였으나, 동력에너지위기는 최종적으로는 축력을 대신할 새로운 동력 출현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그것을 해결한 것이 와트의 동력기계(動力機械)이다. 그것은 수력·풍력·축력·인력 등 농업사회의 기본적 동력에 비하여 훨씬 뛰어나 동력혁명을 가져왔으며, 산업혁명을 <제 2 의 물결>이라고 할 만한 획기적인 기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2) 생활혁명
산업혁명은 면직물공업에서부터 일어났다. 그 역사적 배경으로서 17세기 후반 영국의 아시아와의 접촉과 그 접촉이 가져온 생활혁명을 들 수 있다. 당시의 아시아는 풍요로웠고 뛰어난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차(茶)·도자기·명주·무명 등은 유럽인들이 몹시 갖고 싶어하는 품목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영국 동인도회사가 들여온, 아름답게 염색된 인도캘리코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인들 사이에 신기한 패션으로 인기를 끌었고, 일종의 의류혁명을 일으켰다. 무명은 드레스 외에 침대시트와 커튼으로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면제품에 대한 수요가 서민들 사이에 급속히 퍼졌다. 그 수요에 부응하여 인도무명에 맞설 면제품 제조가 18세기 초 영국의 국민적 과제가 되었다. 원료인 목화는 서인도제도에서 아프리카노예를 노동력으로 하는 재식농업으로 재배되었으나, 면직물공업 그 자체는 영국 본토와 서아프리카 및 서인도제도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으로 번영하고 있던 리버풀로 원면이 수입된 배경도 있어서 리버풀후배지(後背地) 맨체스터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면직물공업을 추진한 계층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계급이었던 지주나 전통적 직물업자가 아니라 주로 상인 및 농민이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종교적으로는 비국교도로 나라로부터의 원조 없이 자립정신으로 기업가가 된 사람들이었다.
2 경과
(1) 면직물공업이 주도(主導)
이리하여 면직물공업에서의 기계 발명은 J. 케이의 비저의 발명(1733)에서 비롯되어, 방적부문에서는 J. 하그리브스의 제니방적기(1764∼67), R. 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1769), S. 크럼프턴의 뮬(1779), R. 로버츠의 자동뮬, 방직부문에서는 E. 카트라이트의 역직기(1785∼87) 발명에 의하여 증기력을 동력으로 하는 기계직기에 의한 공장생산이 확립되었고, 그 중심은 맨체스터 및 글래스고 주변이었다. 면직물공업의 발전은 철강공업·석탄화학공업·기계공업과 같은 관련 산업 발전을 촉진하여 석탄과 철의 시대를 도래하게 하였다. 철강공업 기술혁신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선철 생산 과정에서의 A. 다비 1세에 의한 코크스로(爐) 제철법(1709년 무렵)과 연철 생산과정에서의 H. 코트의 패들법(1783)이다. 특히 패들법의 발명에 의해 철 생산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중심은 웨일스남부, 버밍엄 주변의 중부지방 및 스코틀랜드였다. 또한 기계공업에서는 종래의 시계공업과 수차·마차 제조업에서의 전통적 기술을 이어받아 H. 모즐리와 그의 제자들인 R. 로버츠·J. 네이스미스·J. 휘트워스에 의하여 정밀도가 높고 자동화된 선반과 공작기계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1830년 이후에는 기계에 의한 기계의 대량생산체제가 확립되었다.
(2) 철도의 출현
산업혁명의 기술과 생산력의 성과에 있어서 최종적인 완성은 철도의 출현으로 이룩되었다. 철도의 초기 역사는 석탄 수송으로 시작되었는데, G. 스티븐슨이 발명한 증기기관차는 그 속도와 능률면에서 획기적인 성공을 하여 철도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1825년 석탄을 탄갱에서 뱃길까지 운반하는 스톡턴∼달링턴철도가 개통되었고, 이어 30년에는 맨체스터∼리버풀철도가 개통되어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 성공에 자극받아 철도망은 영국 전역으로 급속히 확대되어, 산업자본 순환의 대동맥을 형성함과 동시에 국내시장이 빠르게 확장되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철도 건설은 곧바로 서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급속히 추진되었고,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인도,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 등 후진지역에도 철도가 보급되어 철도는 그야말로 산업문명의 상징이 되었다. 이리하여 세계 철도의 총길이는 1847년에는 2만 5100㎞였던 것이 57년에는 8만 2800㎞, 67년에는 15만 5700㎞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철도를 건설하는 데에는 많은 자금, 건설자재, 기술자, 노무자를 필요로 하는데, 그런 모든 것을 자급할 수 있었던 나라는 영국뿐이었으며, 대륙 여러 나라, 미국, 미개발 여러 나라에서는 초기의 철도 건설에 있어시 자금·레일·기관차·건설기술자 등 어떠한 형태로든 영국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 철도 건설붐은 W. 로스토가 말하는 도약단계를 위한 주도부문을 형성하여 철도 주도형 산업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자립적 국민경제 형성에 뚜렷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여러 후진 농업국가에서 철도 도입은 도약의 계기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영국자본에 대한 종속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정치의 변화와 세계경제의 지배
(1) 자유주의경제체제로
산업혁명은 단순히 경제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정치적 사회구조도 크게 바꾸었다. 정치적 변화로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산업부르주아지 발흥의 결과, 그때까지의 귀족·지주지배의 정치체제에 동요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신흥 산업부르주아지는 1832년의 선거법 개정을 쟁취함으로써 피선거권을 부여받았고, 한편으로 노동자계급도 성년 남자에 대한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면서 차티스트운동(1838∼48)을 통하여 하나로 뭉쳤다. 이러한 정치투쟁은 자본주의체제가 내부에 안고 있는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모순 대립과 뒤얽혀서 영국사회를 크게 뒤흔들었다. 또한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산업부르주아지는 예로부터 내려온 중상주의적 각종 규제와 통제가 그들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위축시킨다고 보고 그것들의 철폐를 위한 강력한 캠페인을 벌였다. 그 추진력이 된 이데올로기는 A. 스미스로부터 T.R. 맬서스·D. 리카도로 발전한 고전경제학파의 자유방임주의였다. 이리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지주적(地主的)·중상주의적 각종 규제가 차례차례 폐지되어 갔다. 그중 중요한 것은 엘리자베스 도제법(徒弟法) 폐지(1813∼14), 동인도회사의 무역특권 폐지(1833), 빈민구제법 개정(1834), 곡물법 폐지(1846), 항해조례폐지(1849) 등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무역의 실현은 수입관세 인하의 형태로써 추진되었다. 그것은 1824∼25년의 허스키슨 개혁에 의하여 서서히 진행되어, 40년대의 필 개혁에서는 원료에 대한 최고관세 한도를 5%, 반가공제품은 12%, 가공제품은 20%로 하였으나, 45년에 원면 수입관세는 폐지되었다. 이어서 50년대의 글래드스턴 관세인하를 거쳐 60년에는 보호관세와 차별관세 등은 거의 전면적으로 폐지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은 자유무역국이 되었고, 영국의 자유화에 대응하여 60년대에는 영국∼프랑스통상조약(1860)을 비롯 유럽 여러 나라도 자유화정책을 채용함으로써 자유주의경제체제가 국제적으로도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2) 세계자본주의의 형성
19세기를 통하여 공업화는 영국으로부터 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일본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공업화를 민간의 자생적 노력으로 달성한 나라는 영국뿐이고, 후발 여러 나라의 공업화는 영국 기계에 의하여 생산된 제품의 대량 유입을 막고 국내자본의 보호육성을 꾀하기 위한 보호관세정책을 취하는 등, 국가의 적극적 공업화정책에 힘입은 바가 컸다. 한편, 공업화에 성공하지 못한 여러 농업형 국가는 자유주의경제하에서 여러 선진공업국에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고, 공업국으로부터는 공업제품을 수입한다는 세계적 분업구조 속으로 강제적으로 포섭되었다. 이리하여 세계경제는 영국을 축으로 하는 여러 선진 공업국과 이에 종속적인 식민지적·반식민지적 여러 농업국으로 나뉘어, 이것들이 지배와 피수탈의 유기적인 관계로 결속된 세계자본주의로 재편성되었다. 여기에서 현대의 <제 3 세계> <남북문제>의 원형이 형성된 것이다.
4 도시의 생활환경
(1) 인구증가와 공업도시의 성립
산업혁명이 시작된 1760년 무렵의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추정인구는 660만, 그 뒤 1800년에는 916만, 51년에는 1800만으로 현저한 인구증가를 보였다. 그때까지 정체적이었던 인구가 18세기에 급격히 증가한 원인으로는 도제제도가 느슨해져서 젊은이들의 자립이 앞당겨져 결혼을 일찍 하게 된 결과 출생률이 높아진 것으로 보는 의견과 페스트의 감소와 생활환경 개선으로 사망률이 낮아졌다고 보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그러나 늘어난 인구의 대부분은 도시로 흘러들어가 많은 공업도시의 발생을 가져왔다. 1750년 무렵에는 런던(70만)을 제외하고 인구 10만을 넘는 도시는 하나도 없었는데, 1830년에는 맨체스터·리버풀·버밍엄 등 인구 10만을 넘는 도시가 7개나 나타났으며, 7개 도시 모두가 공업도시였다. 근대공업도시의 특징은 중세도시가 종교와 예술이 중심이 된 아름다운 도시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석탄이 타는 연기로 더럽혀졌고, 비위생적이고 악취가 심하며, 노동자들이 북적대는 불결한 도시였다는 점이다.
(2) 열악한 생활환경
생활의 터전이 농촌에 있던 시대에는 자신이 생산한 물건은 스스로 소비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그때까지 농촌공동체 속에서 하나였던 생산과 소비의 분리를 가져왔다. 노동자는 집을 떠나 공장으로 일하러 가야만 했고, 소음과 비위생적 환경 속에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과 감독자의 엄격한 규율과 복종아래 하루 14∼15시간씩이나 되는 장시간노동을 강요당했다. 또한 노동자의 소비와 휴식의 장소인 주택은 대개 공장주위에 지어진 급조된 변변치 않은 바라크공동주택이었다. 그 안에서는 1개의 침대를 3∼4명이 번갈아가면서 같이 사용하였으며, 화장실도 10여 세대가 공동으로 사용하였고 목욕탕 설비도 없었다. 음료수도 생활터전이 농촌에 있을 때에는 쉽게 얻을 수 있었으나, 공업도시에서는 수도회사의 물을 현금을 주고 사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따라서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물도 마음놓고 쓸 형편이 못되었다. 맨체스터에서는 1809년에 급수회사가 창설되어 급수를 시작하였는데, 부르주아가 사는 지역에서는 1년에 6실링이면 풍속하게 물을 공급받을 수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도시의 대부분은 빗물을 모은 저수통물을 공급받을 뿐이었다. 런던의 빈민가에서는 63년에 이르러서도 하루에 겨우 20분식밖에 급수되지 않는 1개의 수도꼭지에 10여 세대가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와 같이 <물은 맥주처럼 귀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노동자 가정에서는 음료나 요리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고, 그것을 세탁이나 목욕용으로 사용할 여유는 거의 없었다. 그러한 생활환경은 매우 비위생적이어서, 자주 전염병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불결한 의류가 장티푸스의 원인이 되어, 공중위생적인 견지에서 공중세탁장과 공중목욕탕을 설치하는 일을 지방자치단체에 부과하게 된 것은 1848년의 <공중위생법> 이후의 일이었다.
(3) 식사, 전염병, 높은 사망률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에게는 빵과 감자가 식사의 거의 전부였으며, 거기에 버터·치즈·베이컨·홍차가 조금 곁들여지는 정도였고, 신선한 육류는 아직 사치품이었다. 빵도 처음에는 스스로 만들어 먹었으나, 주부까지 일터로 나가게 되자 빵집 빵에 의존하게 되었다. 빵이 밤색빵에서 차츰 흰색빵으로 바뀐 것은 이 무렵이었다. 흰색빵을 만드는 경우에는 표백제로 명반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고, 때로는 백악·석분·석고, 또한 놀랍게도 사람의 뼈마저 섞어 넣는 경우가 있었다. 이와 같이 속여 파는 식품은 그 시대의 홍차나 커피에서도 볼 수가 있었다. 또한 19세기 전반의 도시노동자가 먹을 수 있는 생선은 소금에 절인 청어밖에 없었는데, 1860∼70년대가 되자 냉동설비가 갖추어진 트롤선에 의하여 잡힌 신선한 생선이 싼값으로 서민의 식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선한 생선, 특히 대구가 영국에 반입되면서 등장한 것이 피시앤드칩스이며, 그것이 노동자의 식료품으로 정착한 것은 1864∼74년 무렵이다. 그런데 노동자는 직장에서의 장시간노동과 열악한 생활조건 때문에 육체가 쇠진하여 생명이 단축되었다. 1830년대 말 맨체스터·리버풀 등 공업도시의 노동자계급 평균수명은 15∼19세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낮았다. 당시 농촌에 살던 지주계급의 평균수명은 50∼52세로 도시노동자계급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노동자계급의 높은 사망률의 원인은 주로 적리·티푸스·결핵·콜레라·성홍열 등 비위생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전염병 때문이었고, 특히 학령기 이전 아이의 높은 사망률은 평균수명을 끌어내렸다.
(4) 사회개량의 움직임
공장 내의 열악한 근로조건과 빈곤한 생활환경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사회문제에 대한 대응으로는 2가지의 움직임이 있었다. 1가지는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측 저항으로서 노동운동의 전개이고, 또 1가지는 박애주의자에 의한 사회개량 움직임이다. 노동운동은 우선 1811∼12년과 16년에 일어난 러다이트운동, 즉 기계파괴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4년에 <단결금지법>이 철폐된 뒤부터는 동맹파업이 각지에서 자주 일어났으며, 노동조합 결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리하여 노동자는 조직력에 의하여 높은 임금을 획득하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이나 상호부조방식을 이용하여 현존사회를 개량하여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움직임으로 R. 오언의 지도에 의해 결성된 <전국노동조합대연합(1834)>, 협동조합·차티스트운동 등이 있다. 한편 공장 내의 비인도적 노동조건 개선은 박애주의자의 움직임과도 연결되어 <공장법(工場法)> 제정을 촉진시켰다. 1802년의 최초의 공장법은 교구(敎區) 도제의 12시간 이상 노동 및 심야작업을 금지하였고, 19년·33년·44년의 개정을 통하여 점차 청소년 노동시간이 단축되었다. 47년에는 1일 노동시간을 원칙적으로 10시간으로 규정하는 10시간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또한, E. 채드윅 등에 의해 40년대부터 비위생적인 도시생활환경의 개선이 진행되었다. 한편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저하되었다고 주장하는 <비관파>와 오히려 향상되었다고 보는 <낙관파>의 <생활수준논쟁>이 그때까지도 계속 전개되었는데 50년대말 이후는 실질임금이 상승 곡선을 그은 것은 분명하며, 영국은 생산력에 있어서 산업혁명의 성과와 세계경제 지배를 바탕으로 빅토리아왕조의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