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 만의 외도 1 / 이종영
모처럼 휴가를 낼 수 있었다. 답답함이 고여 있는 도시에 남기보다는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 오로지 수고한 자를 위한 칩거에 들고 싶었다. 무계획의 일주일, 어디로 떠나볼까 고민하던 차에 친구가 여행을 권유해 왔고, 그 제안 속에 '부산'이라는 지명이 들어 있었다. 온전히 자연을 보고 듣고 산책하며 명상의 여유를 가지려던 계획에 은밀한 변화가 찾아왔다. 모처럼의 휴가를 단순한 휴식으로만 잠재울 일이 아니었다. 깊숙이 밀쳐 두었던 지도를 꺼내 점검하고, 그곳으로의 대장정을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부산에 가본 지가 언제였던가. 십여 년 전 막내동생의 결혼식이 부산 근처 구포에서 있었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어 다녀온 기억일 뿐 막상 그곳이 부산에 속해 있다는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했었다. 더듬어 본 기억 속에서 부산은 38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게 까마득한 이방인의 도시에 불과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는 시간이 남았다고 주저했던 것일까. 같이 호흡을 나누는 친구들이 도시에 있고 삶의 터전에만 안주하다 보니, 여행이라는 낯선 설렘은 바쁜 일상과 일터의 구석진 곳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의 권유를 받고 인터넷을 뒤적거리자 도시의 야경과 광안대교, 밤바다의 풍경이 매우 이국적으로 다가오며 마음을 잡아끌었다. 얼마 전 영화로 보았던 해운대 백사장도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부산 여행을 권했던 친구는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동행을 취소했지만, 혼자만의 여행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계획을 수정하지 않았다. 길은 강으로 흐르고, 강물은 너와 나의 이름표를 달고 바다로 달려간다. 무리 지어 날아가는 갈매기처럼 바람을 안고 바다로 가리라.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앞둔 아이처럼 설렘으로 잠 못 들고 밤을 새운 여행 전날이었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흥분과 낯선 곳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올랐다. 이제 사람들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배웅하지 않는다. 서울역 대합실은 일탈과 삶의 순환을 꿈꾸는 여행자들로 가득할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하루 반나절이면 전국이 통하는 고속열차 덕분에, 신속한 업무와 약속을 위해 기차에 오르는 이들이 더 많아 보였다. 그들의 표정에서 애틋한 이별의 장면은 읽히지 않았다. 미리 예매한 기차표를 확인하고 커피를 한 잔 샀다. 여유롭게 기차를 기다리며 마음속에 미지의 섬 하나를 그려보았다. 도시의 하늘이 잿빛인 것처럼 그곳도 흐린 하늘이 바다를 떠돌고 있을까. 그 모든 것이 버무려진 부산을 떠올리자니 가슴 가득 벌써 바다가 차오르는 기분이다. 생각보다 날씨는 춥지 않았다. 이른 아침의 기차는 아득한 기억의 레일을 밟으며, 바벨탑처럼 둘러싸인 도도한 도시를 철컥철컥 떠나기 시작한다.
기차를 타본 지가 언제였던가. 출퇴근과 집을 반복하며 일상의 쳇바퀴를 돌려온 나날들, 그 일상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은 기차가 아닌 성냥갑만 한 승용차였다. 기차와 승용차, 여행과 삶의 언저리에서 이 둘이 전하는 느낌이 이토록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 새삼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고속열차는 빠르기는 했지만 좌석 간격이 좁아 몸을 움직이기가 다소 불편했다. 자칫 여행의 흥겨운 기분을 망칠 수도 있었으나, 창밖으로 멀어졌다 다가오기를 반복하는 자연풍경이 그 불편함을 이내 지워주었다. 한강을 지나 올림픽대로 위에 길게 늘어선 차량 사이로 은회색 태양이 꿈틀거리며 허물을 벗기 시작한다. 허기진 그리움이 마침내 발목을 놓아준 것일까, 해묵은 시간은 달리는 열차 뒤로 멀리 떨어져 나간다.
동대구를 지나며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부산이 멀지 않았다는 예감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 하나가 자욱한 기적 소리를 걷어내며 철벅철벅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의 이상을 부담 없이 담아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빌며, 마침내 도시와 해후했다. 열차는 정확히 오전 11시 41분에 나를 부산역에 내려주었다. 아, 38년이란 세월 속에서도 너는 떠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구나. 마치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딛는 우주비행사처럼 천천히 역사 계단을 내려왔다. 문득 바라본 부산역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거대한 우주선처럼 웅장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우리의 이상은 지구의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지표가 있는 둥근 우주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삶의 창살 너머에 좀 더 말랑거리는 삶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찾아 나선 여행자의 꿈처럼 말이다.
* 계속해서 2편 연재 예정
첫댓글 旅行은 삶의 活力素가 되지요.
십이삼년 전에 써올리신 글이군요.
벌써 江山이 한번 변하고도 넘는 歲月, 젊은 時節을 나름대로 떠올려보게 되는군요.
追憶이 고스란히 담긴 情感이 가는 글 感謝합니다.
언제나 健筆하시고, 建安하십시오.^^*!
아직도 그때의 여행이 제 인생에 한바탕 돌풍을 일으켰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