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풍 곽씨(玄風 郭氏)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1138년(고려 인종 16년)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곽경(郭鏡)이다.[1]
시조 곽경(郭鏡)은 1138년(고려 인종 16년)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랐으며, 포산군(苞山君:현풍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이후 곽경의 후손들이 본관을 포산(苞山)으로 하여 세거(世居)하였다.
1930년 곽경의 묘지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에 의하면, 곽경은 중국 관서(關西)의 홍농인(弘農人)으로서 고려에 귀화하였다고 한다. 시조 곽경과 함께 들어온 성씨들의 세보에 따르면 이름은 당나라 황제가 모두에게 모범이 되라는 의미에서 지어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곽경(郭鏡)이 당현종, 또는 후당 때 들어왔다는 문헌도 전해져서 연대가 달라, 출신을 명확히 고증할 수 없다.
현풍곽씨는 고려 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특히 곽원진(郭元振)의 후대에서 가장 번성하였다고 한다. 현풍 곽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4명을 배출하였다.
조선 전기에 곽기정(郭基正)의 후손들은 경기도(京畿道), 전라도(全羅道), 평안도(平安道) 지역으로 세거지(世居地)를 확대해 나갔으며 곽한정(郭漢正)의 후손들은 관향지(貫鄕地)인 현풍(玄風)을 중심으로 영남일대에 세거지를 넓혀감으로써, 현풍곽씨는 기호계(畿湖系)와 영남계(嶺南系)로 나뉘게 되었다. 《현풍곽씨세보(玄風郭氏世譜)》에 의하면 현풍곽씨는 선산(善山), 해미(海美), 강릉(江陵), 봉산(鳳山) 등의 별관을 사용하였으나 그들 족보의 첫 머리에 모두 시조를 곽경으로 하는 현풍곽씨의 후손이라고 했으므로 1976년 병진대동보(丙辰大同譜) 편찬 때 대종회 의결로 현풍으로 명칭을 통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선산곽씨는 분관조 곽우현(郭佑賢)을 곽경의 6대손으로 연계하면 연대가 맞지 않는다 하여 1979년에 별도로 족보를 편간하였다.
항렬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