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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춘석 자서전
화가 몽원, 그 삶의 궤적들
1. 들어가는 말
화가에게 최고의 스펙은 학벌이나 실력이 아니라 불행이다.그리고 그 불행을 얼마나 지혜롭게 잘 딛고 일어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무기력하게 함몰되어 갔느냐다.평생을 형극의 길을 걷다가 벼랑끝에서 한 발을 내딛어 버린 고호,고호는 죽어서 부활했다.그는 죽어야 사는 남자였던 것이다.
모딜리아니나 프리다 칼로, 이중섭이나 손상기 등의 삶은 불행 그 자체였다.그럴수록 그들은 미술대중의 뇌리에 각인이 되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 속에 선명해져 가고 있다.
사람에게는 잔인한 속성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남의 불행이 깊을수록 거기서 얻는 위안이나 쾌감이 더 커진다는 사실이다.그래서 옛날의 문학은 대부분 비극이었다.로마의 콜롯세움에서 벌어졌던 검투사들의 살인경기나 한강 새남터의 북소리와 함께 진행되었던 망나니의 참수형에는 사람들이 발디딜 틈이 없이 모여들었다.
현대의 복싱경기장이나 격투기경기장에도 비싼 입장료를 물고 경기를 관전하는 인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판정승보다는 캔버스에 반죽음 상태로 눕혀버리는 KO승에 더 열광한다
사람들은 화가가 유명해지거나 부유해지거나 하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그 화가의 작품을 다시 한 번 더 돌아보게 하는 것은 작품의 아름다움이나 예술성이라기 보다는 처절하게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행했던 삶의 히스토리다.화가는 어찌보면 천형을 받고 태어난 인생인지도 모른다.
미술계에 등단한 지 대략30년이 흐른 지금,돌아보니
나 역시도 각고의 수련기간이나 질풍노도의 시절, 오딧세우스의 항해와 같은 표류의 사선을 넘어
온 삶이었다.다행히 모진풍파에도 침몰하지는 않고
살아남아 붓을 들고는 있으나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도 별로 유명해지지도 부유해지지도 못하고 질곡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을 보니 되려 화가로서의 스펙은
제대로 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좌충우돌하면서도 외길의 방향성은 잃지 않았으나 해는 벌써 중천을 지나서 서쪽하늘에 걸리매 헤치고 온 길에 대한 기억이 자꾸 희미해져 간다.때 마침 오랜 지인의 강력한 권유가 있었지만 미루고 미루다가 간결한 자서전을 하나 작성해보기로 어렵사리 결정을 했다.
어차피 세상에 그림이 남을 것이니 흔적없이 사라지기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부끄럽지만 세인과 피붙이들의 이해와 용서를 비는 마음에서 삶의 궤적들을 몇자 졸필로 남기기로 한 것이다
2.나의 삶과 예술
1) 그림의 시작
사람들이 종종 그림을 언제부터 시작했느냐고 물어 온다
대답하기가 참 애매하다.나 혼자서 그리기 시작한 것과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한 것과 전문입시미술학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것이 있기 때문에 어느것을 묻는 것인지 잘 몰라서 그렇다.나 혼자서 낙서나 만화를 따라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주 어린시절 부터라 정확히 언제부턴지 잘 모르겠고, 학교에서 미술부활동을 하며 과외로 전담선생님으로 부터 배우기 시작한 것은 함안의 가야초등학교 4학년 때 부터이고 입시미술학원을 다니면서 정식으로 그림에 입문한 것은 마산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마산의 계림미술학원에 입소하면서 부터이다.
가야초등학교 다니면서 미술부에 뽑히게 된 계기는 좀 말하기가 민망스럽다. 겨울방학숙제로 둘째형이 나뭇가지 위에 소담스럽게 눈이 얹혀있는 겨울나무그림을 그려주었는데 그것을 보신 담임선생님이 방과후에 남으라고 하시며 전문가용 큰 붓과 파레트를 빌려주시면서 부터이다.
이후 3년간 두 동기와 교내미술대표선수가 되어 군 학예대회에 출전하였으나 큰 상은 동기 H양이 주로 받았던 것 같다. 나는 경남매일신문사주최 학생미술실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금도금이 되어있는 번쩍번쩍하는 소형 트로피를 조례시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받은 것이 기억에 남는다. 금배지도 추가로 받았던것 같다.
마산의 계림미술학원에 다니게 된 계기는 J라는 화우 때문이다.마고 1학년 재학당시 함안에서 마산까지 통학하면서 건강을 잃어 첫시험성적이 형편없이 나와서 기가 팍 죽어있던 내게 어느날 J가 내손을 끌고 계림미술학원에 견학을 가게 된다.거기서 처음 본 입시 석고뎃생이나 수채화, 정물데생 등은 함안촌놈에겐 실로 문화적 충격이었다.여기서 지금은 원로 수채화 화가이신 조현계 선생님과 만난 이후로 내 인생은 파란의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인간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계림미술학원의 서재에는 각종 도록이나 화집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전축에서는 클라식 명곡이나 가곡,팝송, 샹송등이 날마다 들려나왔으며 선생님이 애지중지하며 키우시는 화초가 창가에서 사철 꽃을 피웠고 수족관에는 금붕어 등 열대어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내 인생의 희비의 쌍곡선은 여기에서 출발하게 된 것 같다
미술의 향기,스승의 만남,자유에의 갈망,사랑의 열병,가난의 고통,실패와 좌절,승부근성 등 인생의 단맛,쓴맛을 배우며 일생을 관통하는 가치관이 형성된 시기는 바로 이 계림미술학원 시절이었다
2)계림미술학원 시절과 입시지옥
학원에 다니면서 기초뎃상을 배우는 일은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즐거운 고통이었다.학교수업을 마치고 학원에 오면 서너시간 동안 말한마디 않고 친구J와 그림 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다.내성적인 성격탓도 있지만 쑥맥이었던 초년생이라 화장실 가는 일과 물마시는 일 이외에는 자리를 이탈할만한 일도 없었다.나중에 선배들이 웃으며 하는 말이 처음엔 우리가 벙어린줄 알았다고 했다.마여고에 다니던 1년 선배중의 한명인 활달한 성격의 M이 가끔 말을 붙이곤 했는데 나중에 내가슴에 멍이 시퍼렇게 들도록 열병과 더불어 상흔을 남기게 된다
당시 학원 교습비가 2만5천원이었던 것 같은데 두달을 다니고 나니 레슨비를 낼 수가 없어서 며칠 결석을 했다 돈이 생겨 다시 학원엘 가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돈이없어 못나온 사정을 모르시는 선생님이 그새 게으름을 피우냐고 나무라셨다.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수업을 다 마치고 나올 때 돈봉투를 내밀어 드렸다.
다음날 선생님의 면담이 있었다. 아버지는
뭐하시냐는 등 가정형편을 물으시더니 다음 달 부터는 교습비를 내지 말고 다니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은혜로운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화인의 길에 더욱 묶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만 것 같다
당시 나는 통학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학교근처에서 같은반 급우와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머지 않아 학원으로 불려들어와 선생님의 작업실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1979년,고1의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 가난과 궁핍을 체감하며 화가가 되기 위한 가혹한 수련기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어떤사람들은내프로필이나현재의내삶의모습을보고상당히순탄한화가의삶을살아온것으로인지하여그렇지못한현재자신의모습과비교해위화감을느끼거나심지어부러워하는것같기도해서미안한생각이들기도한다그래서간단히내화가수업의연보를하나작성해서희미해져가는기억을저장함과동시에예술가의삶에환상을품고있는지도모르는후학들에게실상을알려주려한다.지난한인생사에약간이라도용기를주고위안이되었으면하는바램으로공개하는바이니오해는없기바란다
3.화가수업간략연보
1979년고1때
가을추석연휴끝나고친구의손에이끌려
마산의계림미술학원(조현계)
에입소정물소묘,석고데상,크로키,정물수채화
등의입시그림을학습
1981년-홍대미대서양화과에지원---1차낙방
1982년-홍대미대서양화과(전기)에지원---2차낙방
1983년-한성대미술학과(후기)에입학하여
한학기수료후재수(반포,평면화실
현성신여대김용식교수)하여
1983년 서울대미대회화과지원--- 3차낙방
1984년 군연기목적으로 창원전문대를
지원입학하여약1달간등교후영장수령
1984.4.16부로군입대강원도인제원통12사단에서소총수
-1종계-60사수로 근무
1986.10.18일30개월만기제대하여2주간공부하여
홍대지원----4차낙방하여당시후기대추계예대에
입학
1987년 추계예술대를87학번으로1학기수료후
미등록자퇴-
다시재수한다-홍대미대서양화과에합격
1988년 88학번으로홍대미대회화과에(6년만에)입학
1989년 중앙미술대전입선으로데뷰(4학년때는우수상
수상)
1991년까지4년간수학하고이듬해
1992년홍대대학원서양화과에합격2년간수학
1994년 석사학위취득후졸업한다
홍대미대졸업-동대학원졸업2줄로 줄이기엔 너무나길고힘든화가수업의여정이었다
이후결혼은3번했고두명의딸을생산했다
지금은여주에서살며전업작가로주로서울에서활동함
나는세인들이불러주는속칭'천재'도아니고'신의손'도아니다다만,승부근성이강하여패배를인정못하고될때까지하는스타일일뿐이다
내프로필학력2줄만보고미대안나와서그림못그리겠다며절필선언하고방황하는젊은작가가있어서마음이아프다
이제는나같이안살아도화가가될수있는시대란걸말해주고싶다
나는좋지않은선례를남긴대한민국입시제도의희생양일뿐이다주위의적지않은내동료들이그렇다
운명을거역하지말라했다
달게받을뿐이다
4.군대생활요약기
한성대 83학번으로 한학기를 다니면서 교련과목을 수강이수한 나는 84년 신체검사에서 갑종1급을 받고는 4월 군번으로 입대해서 86년 10월,가을에 만 30개월을 근무하고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다.
영장수령후 부산 동래역에서 입영열차를 탔으며 춘천102보를 통해 주특기 100(소총수)을 부여받고 12사단 신병교육대로 입대해서 8주간의 지옥교육훈련을 마치고 신원조회 문제로 51연대 본부에서 약간의 대기생활을 거친 후, 37연대 2중대 2소대로 자대배치를 받게된다.12사단은 전방 사단이었는데 내가 이등병일 때는 주둔지 생활을 했고 사격등 각종 교육훈련과 유격훈련,진지보수공사,하계훈련,동계훈련등을 받았으며 여러가지 작업및 전방투입 훈련 등을 받았었다.일병시절에는 대대1종계 부사수로 선발되어 잠시 취사반에서 취사병으로 근무한 적도 있었고 겨울에는 취사장 환경벽화 보수작업에 나홀로 동원된 적도 있었다
DMZ 철책선 GOP의 우리 소대 근무지는 11소초였는데 비교적 저지대였다.대대본부는 해발 1031고지로써 태백산맥의 준령중의 하나인 북한지역의 고봉 무산을 마주하고 있었다. 소초근무시절 대학생병영집체교육생들이 들어와 합동근무를 한 적도 있고 석사장교후보생들도 거쳐간 적이 있었다.짠밥장 시절에는 분대장(마상훈하사)에게 구타 당해서 앞니1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말년에는 다시 주둔지로 철수하여 FEBA생활을 하다가 유격훈련도 한 번 더 받고 가을 진지보수공사중에 작업지에서 제대를 맞게 된다.집에 오니 형제들은 다 어디론가 떠나고 늙은 부모님만 집을 지키고 계셨다.쉬고 놀틈도 없이 문제집 몇권 사서 다시 입시준비를 해야 했다.
5.출생부터 군입대까지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490번지다
1963년 4월19일(음:3월21일,자시)에 광주노씨 월촌공파 31세손으로서, 부친 노재성과 청주한씨인 모친 한선이의 5남1녀중 4남으로 태어났다.초등학교 1학년 까지는 군북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가야읍으로 이사한 2학년 때 부터는 가야초등학교로 전학을 해서 51회 졸업생이 된다
함안중학교는 28회,마산고등학교는 41회 졸업생이 되었고 6년 뒤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서울에 첫발을 디딘 것은 고2 때였다.홍익대학교 미대에서 개최한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함안에서 태어나 고1이후부터 재수할 때 까지는 마산에서 머물렀고 홍대미대를 떨어지고 83년에 한성대에 다니면서 부터는 성남시 태평동의 누님 댁에서 통학을 하게 된다.36번 버스를 타고 강남고속터미널에서 710번 버스를 갈아타고 한성대까지 가면 대략 2시간 정도 소요되었던 것 같다
첫 수도권 생활이 시작되면서 불편함은 이루말할 수 없었지만 가장 바꾸기 힘든 것은 사투리였지 않나 싶다
어색하게 서울말을 흉내도 내어 보았지만 점점 말수를 줄이고 있었다.한성대를 다니면서 반포의 김용식선생님 화실에 다니게 되는데 한 해 위 이창근과 늘 단짝을 이루고 다녀야 했었다.
한성대는 2학기부터는 등록을 하지 않았고,서울대 미대입시는 낙방의 고배를 마시게 되었고 급기야 영양실조까지 걸려 온몸이 노랗게 변해 낙향을 하고
뒤이어 신검을 받고 영장수령후 잠시 다니던 창원전문대를 뒤로하고 군입대를 하게 된다
6.첫사랑
기억의 회랑을 더듬어 내려가다보면 나는 어린시절부터 이성애에 일찌기 눈을 떴던 것 같다.초등2학년 때 이미 담임선생님인 조정옥 선생님을 좋아해서 애틋한 연모의 정을 키웠던 것 같고 예쁜 여자동기애가 있었는데 지금도 어렴풋이 이미지가 기억날 정도로 관심을 깊이 가졌던 적이 있었다.그러나 가슴에 흔적이 남을 정도는 아니었고,
시퍼렇게 멍자국이 남을 정도의 길고도 아픈 첫사랑은 초등학교 4학년 때에야 비로서 운명처럼 다가오게 된다
당시 우리 옆집은 상당한 규모의 기와집이었는데 진종수라는 아버지와 갑장인 분이 상처를 하고는 재혼을 해서 전처소생의 자녀들과 새말댁이라는 새부인과 그 소생의 자녀들이 함께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집을 팔고 동네 귀퉁이의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자녀들이 장성함에 따라 분가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인지 아니면 가세가 기울어서인지 어린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윗동네에 살다가 이집에 이사를 들어온 가족 중에는 내 또래의 여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조※※이었다.나중에는 이름의 ※자 때문에 제로(0)라고 약칭하게 되는데 약간 서구적인 외모의 예쁜 아이였다.
이즈음부터 나의 마음은 온통 이 아이에게 뺏기게 되는데, 내 사춘기의 9할에 해당하는 기간을,그러니까 거의 10여년의 세월을 지속적으로 가슴앓이하면서 첫사랑의 열병을 호되게 치뤄내야 했다.
그녀는 내게 눈부심과 신비 그 자체였다.무지개였으며 신기루였으며 요정이고 천사였다.그녀가 밥을 먹는 것을 목격하거나 뒷간에서 목소리가 들려나올 때는 그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나는 그녀의 존재를 인간계로 부터 분리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우리집엔 5남1녀,남자형제들만 득시글하고 유일했던 누이 하나는 나이차이가 10년이나 났으니 도무지 이성의 존재에 대해 신비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가정환경이었던 것이다.이것을 깨닫게 된 것도 장성한 이후에나 가능했다
어린시절은 아무래도 경험보다는 선험적인 본능에 의한 탐색이 우선하다보니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야 했던 것 같다.드라마나 영화,문학 등을 통한 간접경험이 약간의 길잡이 노릇을 해주긴 하지만 모든 것이 서툴기만한 미생인 상태에서 연애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위태롭고 아픈 일이었던가! 많이 아팠지만 그래도 그것은 맑은 아픔이었고 맑은 기다림이었다.
이렇다할 스토리도 사건도 없이 오직 강렬한 그리움과 열망만이 서녘 하늘에 드리워진 무지개 마냥 늘상 내가슴을 뛰놀게 하고 혼자 미소짓게 하고 자신의 영육을 가다듬고 추스리게 했던 순정의 세월들...
이러한 유소년 시절의 감성경험들이 어쩌면 지독한 고난 속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예술혼의 근저에 진하게 깔려있는 것은 아니었던지!
그러니까 그냥 짝시랑이였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확할 것 같기도 하다.내가 보내는 텔레파시가 몇프로나 전달되는지 알길이 없었고 반향되어 돌아오는 메시지도 거의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기 때문이다.흔히 첫시랑을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보상없는 영육간의 노고에도 불평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그만큼 어리석은 풋내기의 연애감정은 예술혼과 연관지을 수 있을만치 무모하고 강렬했던 것은 사실이다
고입연합고사를 마치고 난 뒤 중학교 졸업을 앞둔 여유로운 방학기간에 있었던 작은 사건으로 나는 가슴에 바람구멍이 연상될 정도의 심한 충격파를 입게되는데 이시절의 지성이나 처세술이 얼마나 미약하고 취약했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함안중학교 재학 당시 내주변에는 절친 4명이 있었는데 패거리를 이루어 그룹 이름까지 '하이틀즈'라고 붙여서는 늘 같이 놀며 몰려 다니고 있었다.함안여중학교에도 우리랑 비슷한 친우집단이 있었는데 간혹 스치듯한 조우가 있었는데 첫사랑 제로(0)도 바로 이 패밀리의 멤버였던 것이다.
연합고사(속칭, 뱅뱅이)발표 후 제로(0)가 시험에 낙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본인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을 지 그때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다.그러던 어느날 그 쪽팀에서 우리팀으로 그룹미팅 제의가 들어왔고 그 멤버중의 한 아이의 문중 제실에서 미팅이 이루어졌다.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잠깐, 제로가 나를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다면서 밖으로 불러냈고 나는 놀랍고 기쁜마음에 잔뜩 기대를 품고 불려나갔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의 입에서 그렇게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