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악산에도 봄이 찾아왔다.
직지사 누각과 전각에 쌓여 있던 잔설은 며칠 전 내린 봄비로 말끔히 녹았다.
가람 내 소나무 등 수목들도 봄기운에다 한껏 물을 머금었기 때문에 한층 산뜻하고 충만해 보인다
학의 몸뚱아리를 더듬으며...
경산역(08:26 出) 중리역(10:03 着)
중리역 앞 신호등 건너면 옹벽위로 들머리가 보인다.
옹벽우측 들머리에 산불감시아주머니가 지키고있다.
입산금지는 아니고 방명록에 기록하고 가라하신다.
계단으로 이루어진 등로는 잘 다듬어져 있으며
잎이 핀 진달래는 하나둘씩 꽃잎을 떨구고 있다.
송전철탑을 지나고 쉼터도 지나 우회로갈림길에서
봉우리위로 올라가 보니 간단한 체육시설도 되어있다.
갈라졌던 우회로가 좌측에서 만나면 안내표지목이 보이고
한차례 떨어진 후 다시 오른 능선에서 또 다른 표지목이 있다.
이번에 제법 깊은 안부로 떨어진다.
다시 치받은 봉우리는 묘지가 있고 이어 나타나는 쌍묘지에서
마재고개로 내려가는 갈림길표지목을 만난다.
길 옆 너럭바위와 잡목봉우리를 지나 살짝 오르내린 안부자리에
또 다른 안내표지목과, 진달래와 소나무가 어루러진 봉우리를 지나면
이번엔 시간이 표시된 표지목까지 잦은 이정표로 안내가 잘 된 등로이다.
시루바위 갈림길을 지나고 우측 우회로로 꺾인 봉우리를 지나면 정상은 가까이 다가오고,
좌측 진달래 군락지에서는 벌겋게 핀 진달래의 향연이 펼쳐진다.
아래에서는 잎이 돋고 꽃이 떨어지더니 이곳은 이제 한창 시작이다.
아마 이번 주중부터 주말까지가 절정을 이룰 것 같다.
정상은 도시 근교산이라 많은 산님들로 넘쳐난다.
헬기장과 바위지대로 이루어진 시원한 조망과 함께
주위에는 지천으로 피어난 꽃들과 더불어 봄을 즐기려는 많은 상춘객까지도...
한쪽으로 비켜 앉아 점심을 해결하고 대곡산 쪽으로 간다.
돌탑이 있는 헬기장 봉우리에 올라서서 정맥줄기를 바라보니
종주에는 별로 마음이 없어 삼거리봉우리에서 학봉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묘지가 있는 봉우리에서 좌로 내림길이 보이고
이정표(4-나)가 있는 곳에서 또 다른 내림길이 좌측으로 나있다.
중봉이라고 표시된 119(4-1)표지판에서 급격하게 떨어져 안부(4-가)로 내려선다.
좌우로 각각 서원곡과 완월농장으로 가는 내림길이 있다.
학봉을 오르는 두개의 봉우리는 표시기가 없어 어느 봉우리가 학봉인지 모르지만
먼저 나타나는 바위봉우리가 조금 낮아도 더 멋있어 보인다.
잠시 조망을 즐기고 다음봉우리도 올라본다.
엇비슷한 조망이지만 그래도 올랐다고 머물렀다간다.
능선을 타고 계속 내려갈 수도 있지만 학봉 아래에서 바로 서원곡으로 내려간다.
약한 등로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인 것 같다.
가파르게 떨어지는 길이라 잠깐만에 서원곡주차장으로 내려선다.
시각을 보니 예매한 열차시각에 비해 너무 이른 하산이 되었다.
시간은 많고 어디 갈 데는 없고 잠시 주위를 배회하다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 얼굴을 적신다.
한숨을 돌린 후 개울 건너 석불사로 들어가 본다.
휘~ 그냥 건성으로 둘러보니 별로 보이는 것도 없다.
이왕지사 여기까지 온 김에 암자 좌측으로 난 등로를 따라 다시 올라간다.
잠시 뒤 산신각쯤 되는 현판도 없는 건물 뒤로 난
등로를 따라 오르니 가파르기가 이를 데 없다.
주능선에 올라서 전망바위에 다가서니 건너 마주보는 학봉과 쌍벽을 이루는 듯하다.
중간바위봉우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부부산님이 커피와 사탕을 준다.
고맙게 받아먹고 얘기를 나누며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무른다.
돌무더기가 있는 봉우리에는 진달래가 만발하여 그야말로
진달래봉우리라 해도 좋을 듯싶을 정도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팔각정전망대가 있는 봉우리에 올라보니 서마지기 넓은 안부위로
전에 없던 정상 오르는 계단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역시 전에 없던 것이라 들어가 보지만 세워놓은 의미를 모르겠다.
전망대가 없어도 자연 그대로의 전망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집이 가르치는 교훈을 한번 지켜볼 일이다.
참으로 웃지 못할 일을 우리는 지난 시절에 보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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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고을에 전해오는 이야기가운데
「원주 원(元)씨는 묘(墓)치레를 잘하고,
여흥 민(閔)씨는 산림(山林)치레를 잘하며
또, 안동 김(金)씨는 집치레를 잘한다」는 말이 있다.
언제 생겨난 속설인지는 몰라도 세월이 흘러
묘치레와 산림치레를 잘한다는 원주 원씨가의 묘와
여흥 민씨가의 산림가꾸기는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건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치레를 잘한다는 안동 김씨가의 99칸 짜리 집은
유령의 집으로 전락했다는 설이 있다.
아마도 이 말을 조선조 여주고을의 벌족 성씨로
세도가문이었던 3성(元, 閔, 金)을 두고 빗대어 하던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속설을 조용히 음미해보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람이 열흘을 살려거든 돈놀이를 하고, 10년을 살려거든 나무를 심고,
100년을 살려거든 인재를 키워라」했던가?
다시 말하면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집[家]에 대한
사치일변도의 투자를 삼가하라는 교훈적인 이야기라 생각된다.
표의문자인 한자에서 집을 여러 가지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를테면「우(宇), 주(宙), 원(院), 가(家), 택(宅), 호(戶), 사(舍), 옥(屋), 당(堂)」등...
그런데 이들 여러 글자가운데 큰집을 보통「옥(屋)」이라 하고,
보통 집을「사(舍)」라 했으며 그냥 비나 바람이 새어들지 않을 정도의 집을「가(家)」라고 했다.
지금도 우리는 가끔 가택(家宅)이나 가가호호(家家戶戶)라는 말을 곧잘 쓰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아가는 집이라는 것은「집가(家)」의 '가(家)'가 무난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 '집가(家)'자를 자세히 뜯어보면
돼지[豕]위에 하늘을 가리는 지붕[ ]이 덮여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집이란 "돼지가 사는데 비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집"이란 뜻이 되고.
또, 보통 집이라는「집사(舍)」자는 '그 집은 사람[人]이 살기 좋다[吉]'는 뜻이 되는 반면
큰집이라는 뜻의「집옥(屋)」자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은 주검에 이른다'는
「송장 시(尸)」자와 「이를 지(至)」자의 합성문자인바 사치스러운 집에서
호위호식하며 사는 사람은 결국 주검으로 몰고 간다는 '경고'적 메시지를 시사하고있다.
이렇듯 옛 성현들이 글자를 만들 때도 결코 우연히 만들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보다 잘 먹고 잘 입고, 보다 넓은 뜰과 큰집에서, 보다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갖고자 하는 사람의 욕망은 인간을 그 욕망수행의 노예로 만드는 '불행지수'의 원천이다.
옛 우리조상들의 음식이나 옷차림이나 집에 겸(謙)했던 것은
그렇게 잘살 줄 몰라서가 아니고, 청백리(淸白吏)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며
못사는 사람과의 위화감 때문은 더욱 아니며
스스로의 행복을 누수 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아무리 집이 좁아도 앞뒤로 문만 열어놓고 마루에 나가 앉아 있으면
앞산과 뒤뜰이 내 집이 되고, 내가 즐기는 자연풍광이 되어버린다.
이를 건축미학에서는 고유의 경치를 사유화하여 이익을 본다는 뜻으로
차경경제(借景經濟)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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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옛 건물에는 격(格)과 서열이 있다.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루(樓), 정(亭)같은
건물이름에 붙는 끝 글자가 바로 그것이다.
「전(殿)」은 왕 또는 왕비 등의 공식활동 건물에만 붙이는 명칭으로
경복궁근정전이나 창덕궁인정전 등이 그 보기이다.
「당(堂)」은 '전'과 규모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격이 한 수 떨어지는 건물로 왕과 왕비 등은 '당'에 살 수 있으나
그 이하는 비록 세자나 영의정이라 해도 '당'에 기거하진 못했다.
창덕궁의 회정당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합(閤))」과「각(閣)」은 지위뿐 아니라 건물규모도 '전'과 '당'에
못 미치는 건물로 '전'. '당'의 부속건물일 수도 있고 독립건물일 수도 있다.
「헌(軒)」은 대청마루가 발달한 집을 가리킬 경우가 많으며
공무적기능 또는 일상주거공간으로 쓰였다. 강릉 '오죽헌'등을 들 수 있다.
「루(樓)」는 땅바닥에서 사람 키 높이 정도에 마루바닥이 있는 건물로
광한루'가 대표적인 예이다
「정(亭)」은 흔히 정자라 부르는 것으로 경관이 좋은 곳에
휴식, 수양공간으로 지은 사방이 트인 집이다.
이런 전각의 격만큼 집의 끝 이름에다 사람의 존칭도 함께 붙였다.
이를테면 왕의 경우 근정전 밑에 있는 높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전하(殿下)'라 불렀고,
품계이상의 계급을 지닌 문무백관을 일러 당(堂)위에 있는 계급이란 뜻으로
'당상관(堂上官)'이라 했다.
왕세자는 어렸을 때에는 동쪽건물에 기거하므로 '동궁(東宮)'이라 불렀고,
나이가 들면 '저하(邸下)'라 했다.
'저하'란 그냥 사저에 기거하는 무계급이란 뜻이다.
일반서민의 경우는 'ㅇㅇ댁(宅)'처럼 집'댁(宅)'자를 주로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우리국토를 유린하면서 '고종황제전하'의 존칭인
'전하(殿下)'를 떼고 처음엔 2단계 낮춰 '합하(閤下)'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3단계를 낮춰서 '각하(閣下)'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일본왕은 '전하'이고 조선왕은 일본왕보다
격이 3단계나 낮은 '각하'라는 비칭을 썼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한때 대통령은 물론이거니와 총리도 '각하'
장관과 장군까지도 '각하'라고 불렀던 적이 있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알고 보면 구역질나는 말이다. 쓰지 말아야 한다.
조상들의 슬기가 담긴 산 이름도 전각도 모두 한번 짚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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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다시 오르는 것도 별로 의미가 없어 북으로 뻗은 능선으로 발길을 돌린다.
안부자리갈림길에서 제2전망대로 향한다.
제2전망대를 지나 두척계곡으로 바로 뻗은 능선은 지난번 간 적이 있는 길이라
우측으로 급격히 떨어지는 능선을 택한다.
벤치가 있는 쉼터 앞에는 조금 전 안부에서 갈라진 우회로와 만나고
잠시 후 만남의 광장에 이르러 한숨을 돌린다.
우측으로 가깝게 산행을 마칠 수 있지만 계속해서 봉화산쪽으로 간다.
어쩌면 마산역까지 도로를 따라 가는 길을 줄이려고 무척 애를 쓰는 느낌이다.
중간중간 두어 개의 작은 봉우리와 좌우 내림길을 지나고
체육시설과 산불감시초소봉우리를 지나면 봉화산 봉수대가 나타난다.
보수를 했는지 잘 쌓여져 있고 앞에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다.
내려오는 길에 묘지 갈림길에서 역을 바라보며 좌측으로 내린다.
도로로 내려서니 나타나는 곳이 청산아파트 앞이다.
마산역(18:30 出) 경산역(19:48 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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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몸뚱아리를 하루종일 더듬고 보니 느끼는바가 있어
집에 가면 떠순이에게 멋진 호칭으로 한번 불러봐야겠다.
그러면 예전과 같이 도시락이라도 제대로 사줄랑가...?
오늘도 김밥 한 줄로 온종일 허배 다녔디만은 은근히 아부가...
정처 없는 떠돌이야 별다른 호칭이 필요 있겠냐 만은
떠순이의 호칭은 아무래도 좀 꺼림직하다.
명색이 그래도 집찌기민데...
그래서 집에 들자마자 떠순이에게...
'트하(apar"T下")'라고 했더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I~C 무슨 좋은 호칭 없나...?"
우쨌거나 독도는 우리낀데...
*헤매다 ; 길을 잃고 갈피를 못 잡는 것
*허배다 ; 갈 길을 알고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것
이상은 떠돌이의 국어사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