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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말로 옮김]
〈임금이 백성에게 이르는 글〉 너희가 왜놈들에게 휘둘려 다닌 것이 너희 본마음이 아닌 줄을 과인도 알고 있다. 나오다가 왜놈들에게 붙들리면 죽을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도리어 나라의 의심을 받을 것이 두렵기도 하여 왜놈들 속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나라가 (너희를)죽일까 두려워 여태껏 나오지 않는구나. 이제는 의심하지 말고 서로 권하여 다 나오너라. (나라가)너희에게 따로 벌주지 아니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왜놈을 데리고 나오거나, 나올 때 왜놈들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내거나, 붙잡혀 갇힌 조선인을 많이 구해 내거나 하는 등의 공이 있으면 평민이든 천민이든 가리지 않고 벼슬도 줄 것이다. 너희는 더는 의심하지 말고 빨리 나오너라. -만력 21년(159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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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고문은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이 되는 1593년에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 백성에게 알린 문서이다. 이들 조선 병사는 탈출하다가 붙잡히면 왜적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요, 탈출에 성공하더라도 조국의 의심을 받아 벌을 받을 것이라며 불안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 처지를 잘 아는 선조가 이 글을 통하여 포로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포로인 그대들을 의심하거나 벌줄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얼른 빠져나오라고 한 것이다. 아울러 이왕이면 왜적을 잡아 오거나 왜적의 일을 알아오는 등 아무 공이라도 세워서 나오면 더욱 좋겠다고 행동 지침을 덧붙인 것은 당시의 전쟁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 말해 주고 있다.
이 포고문은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백성, 특히 하층민에게 나랏일을 알리기 위해 임금이 직접 한글로 발표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선조 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온 나라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허덕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한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겪으며 발전하였다. 선조는 평소 한글 편지를 즐겨 썼고[사진 2],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한문 사서四書를 한글로 알기 쉽게 풀어내어 누구나 가까이할 수 있게 하였다.
선조는 한글이 일반 백성에게 얼마나 편리하고도 요긴하게 쓰이는 소통 수단인지 잘 아는 임금이었다. 그러기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란 속에서도 백성의 소통 수단인 한글로써 용기를 북돋우며 인간적인 정을 나누었다. 이것이 바로 한글의 힘이었고 힘없는 백성에게 큰 힘을 실어 주는 원천이 되었다.
8. 임금이 어린 시절에 한글로 안부 여쭙다
〈문안 편지〉(정조, 1750년대 후반)
[사진 1] 정조의 원손 시절 한글 편지.
[사진 2] 정조의 세손 시절 한글 편지.
[사진 3]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한문 편지.
[현대 말로 옮김]
〈숙모님께〉
가을바람에 몸과 마음이 평안하신지 안부를 여쭙습니다. 뵈온 지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봉서를 받고 든든하고 반가우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고 하오니 기쁘옵니다. -원손
날씨 몹시 추운데, 기운이 평안하오신지 문안 알기를 바라옵니다.
오랫동안 봉서封書도 못 하여 섭섭하게 지냈는데, 돌아재가 들어오니 든든합니다.
(내[세손]가 돌아재에게) “(사가 사람이 궁에)들어오기 쉽지 않으니 내일 나가라” 하오니,
(돌아재가 대답하기를) “오늘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면서 단호하게 못 있겠다고 합니다.
할아버님께 인마人馬를 내일 보내오시길 바라오며, (인마는)수대로 (다)못 들어오니 훗날 부디
(형편이)낫거든 들여보내시옵소서. -세손
요사이 벽패僻牌가 떨어져나간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고 한다. 내허외실內虛外實에 비한다면 그 이해와 득실이 과연 어떠한가? 이렇게 한 뒤라야 우리 당黨의 광사狂士를 얻을 수 있을 것이 다. 지금처럼 벽패 무리들이 ‘뒤죽박죽’이 되었을 때에는 종종 이처럼 근거 없는 소문이 있다 해도 무방하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정조
정조는 신하나 백성에게 무엇을 전할 때 한글을 많이 사용한 임금이다.
[사진 1]은 원손 시절에 외숙모인 민씨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어린 나이에 편지틀에 맞추면서도 작은어머니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할아버지의 건강에도 마음 쓰는, 효성스러운 손자다운 모습을 보인다.
[사진 2]는 세손 시절의 편지글이다. “날씨가 몹시 차가운데 기운 평안하게 지내신다는 문안을 알고자 바라며”로 시작하는 글이 세손의 몸으로 편지 격식을 차려 웃어른께 안부 여쭙는 모습이 제법 의젓해 보인다. 궁 밖 친척과의 왕래가 눈앞에 펼쳐지듯 매우 정감스럽게 묘사되어 편지로서의 섬세함을 드러내고 있다.
[사진 3]은 ‘뒤죽박죽’이란 한글 표현이 들어간 정조의 한문 편지다. 이 편지는 1796년부터 1800년까지 4년 동안 노론의 얼굴이었던 심환지에게 남몰래 보낸 편지 중의 하나이다. 한문 실력이 뛰어 난 정조였지만, ‘마구 뒤섞여 엉망이 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뒤죽박죽’ 말고는 이를 대신할 한자어를 찾을 길 없어 우리 고유어를 그대로 한글로 쓴 듯하다.
한문 편지에 고유어 하나를 한글로 적었다는 사실은 격에 맞지 않고 불균형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한국인의 생각과 느낌을 한문에 담는 데에는 엄연한 한계가 도사리고 있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9. 억울한 사정을 한글로 호소하다
〈여산 군수에게 올린 진정서〉(백씨 여인, 1904년, 고종 41년)
[사진] 1904년 충청도 백씨 여인의 발괄
[현대 말로 옮김]
〈충청남도 노성에 사는 백조시의 발괄〉
다음과 같이 하소연합니다.
저는 본 마을 치하 황화정에 살았는데 지난 병술년(1886년) 즈음에 집안 운수가 불행한데다가 친 정 동기간에 불화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해에 가족들이 흩어질 때 약간 남아 있는 재산인 메마른 땅 5말 5되지기와 콩밭 3마지기를 버리고 간 것은 다름 아니오라 철없는 동 생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간에 서로 자취를 찾을 수 없었는데 작년 동짓달에 비로소 와 본 즉 동생은 논밭과 하나도 상관없이 남의 집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앞뒤 사정을 알아보니 황화정 에 사는 서씨 댁에서 논밭을 차지하여 농사를 짓는다고 합니다. 그 연고를 물은즉 그 동안의 약값 빚이 있어 그 논밭을 차지하였다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니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약값으 로 논하더라도 55냥을 주었고 또 폐백으로 30냥을 주었고 그 후에 어린 아이 약값 3냥 5돈을 갚 지 못하였더니, 남의 집 불행을 다행으로 알아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하니 어찌 원통치 아니하겠 습니까? 아뢸 말씀은 끝이 없사오나 가슴이 막혀 이만 여쭈오니, 헤아려 생각하신 후에 명백히 처 분하여 논밭을 며칠 내에 찾아주시기를 하늘 앞에 엎드려 바랍니다. 여산 사또님께서 처분해주실 일입니다. 갑진(1904)년 오월일
〈판결문〉
지금 이 소장과 서씨 노의 소장을 보니 서로 다른 것이 많다. 30냥의 수고비는 논밭을 처음부터 허락해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 이치삼李致三에게 땅 2말 5되지기를 내다팔라고 말한 것 또한 홍 씨의 논인데 서씨 양반이 어찌 헐값에 팔 수 있었는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오랫 동안 함부로 행동하여 마음을 속이는 일이다. 지난번에 관아의 판결문을 서씨 댁에 보여 주었는데, 그대로 조처하는 것이 마땅할 일이다.
이 문서는 충청도 노성군에 살던 백조시라는 여성이 1904년 5월에 여산군수에게 자신의 집안 재산으로 있던 논밭을 가로챈 서씨를 고소한 소장이다.
‘발괄한다’는 말은 ‘사뢴다’는 뜻을 지닌 이두어로, 지방관에게 억울한 일이나 사정을 호소하는 문서를 가리킨다. 백씨 여인은 자신의 동생이 약값 ‘서 냥 닷 돈’(3냥 5돈)을 갚지 못한 것 때문에 서씨에게 논밭을 뺏긴 일을 뒤늦게 알고, 집안 재산을 찾아달라고 여산군수에게 호소한 내용으로, 양측의 주장이 상반되어 여러 차례 소장이 오갔던 사건이다.
고종이 1894년 한글을 국문으로 선언한 뒤에도 여전히 공문서는 한자로 작성되거나 한자를 섞어 작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로 공식 문서가 소통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관인이 공식문서로서의 효력을 보여 주고 있다.
세종이 《훈민정음》 서문에서 하층민의 억울한 사정을 토로할 수 있도록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이 문서 역시 그런 정신이 구현된 것이다.
여산 사또가 내린 처분은 문서 좌우에 한문 초서체로 쓰여 있다. 기존 관례이긴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지배층의 소통 한계를 엿볼 수 있다.
10. 각서를 한글로 작성하다
〈논을 담보로 돈을 빌린 수표〉(양기연, 1888년, 고종 25년)
[사진 ] 당당히 쓰인 손글씨 한글 각서
〈판독문〉
수표手標
우右 수ᄑᆈ手標ㅣ ᄉᆞ단事段은 다름
안이라 ᄒᆞ동河洞 듕터中基 거한居漢
양기연 듕ᄃᆡ치평中大峙坪 두
말낙斗落을 전당典當 이십양二十兩을
오일五日 한졍限定ᄒᆞ고 영영永永 ᄌᆡᆸ피되
과한過限인직 이 답畓의로 영영永永
방ᄆᆡ허급放賣許給 ᄒᆞ거온 약유잡담若有雜談인직
수표手標로 고관변정ᄉᆞ告官辨正事
〈현대 말로 옮김〉
이 수표를 작성하는 일은, 다름 아니라 하동의 중터마을에 사는 양기연이 소유한 중대치 평의 논 2마지기를 맡기고 20냥을 빌리되 5일로 한정하여 영영 잡힌다. 기한이 지나면 이 논을 영영 내다 팔도록 허락해주니 만일 잡담이 있으면 이 수표로써 관아에 고하여 바로잡게 할 일이다.
이 문서는 1888년(고종 25) 12월에 양기연이 자기 소유의 논 2마지기를 담보로 20냥을 빌리되 닷새 안에 갚을 것을 다짐하는 내용을 한글로 작성한 것이다. 큼지막한 손도장과 더불어 거친듯하면서도 힘 있는 붓글씨가 하층민의 소탈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대부분의 문서는 한자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관청의 공식문서가 아닌 개인 간에 오가는 사문서는 한글로 작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1. 조리법을 한글로 일러 주다
《음식디미방》(안동 장씨, 17세기쯤)
[사진 1] 《음식디미방》 표지
[사진 2] 《음식디미방》의 ‘만두법’ 설명 부분
[사진 3] 《음식디미방》의 만두법 재현 자료
[사진 4] 안동 장씨 사진
〈현대 말로 옮김〉
〈만두법饅頭法〉(메밀로 군만두 만드는 법) 메밀가루 장만하기를 마치 깨끗한 면가루같이 가는 모시나 비단에 거듭 쳐서, 그 가루를 덜어 풀을 쑤되 율무죽같이 쑤어서 그 풀을 눅게 반죽하여 개암알 크기만큼씩 떼어 빚어라. 만두소 장만하기는 무를 아주 무르게 삶아 덩어리 없이 다지고, 말리거나 익히지 않은 꿩고기의 연한 살을 다져 기름간장에 볶아 잣과 후추, 천초 가루를 양념하여 넣어 빚어라. 삶을 때에 번철에 적당히 넣어 한 사람이 먹을 만큼씩 삶아 초간장에 생강즙을 넣어 먹어라. 꿩고기가 없거든 힘줄 없는 쇠고기 살을 기름간장에 익혀 다져 넣어도 좋다. 쇠고기를 익히지 않고 다지면 한데 엉기어 못쓰게 된다. 만두에 녹두가루를 넣으면 좋지 않다. 소만두는 무를 그렇게 삶아 표고버섯, 송이버섯, 석이버섯을 잘게 다져 기름을 흥건히 넣고 잣을 두드려 간장물에 볶아 넣어도 좋다. 밀로도 가루를 곱게 상화가루처럼 찧어 메밀 만두소같이 장만하고, 초간장물에는 생강즙을 치면 좋다. 생강이 없으면 마늘도 좋으나 마늘은 냄새가 나서 생강보다 못하다. |
이 문헌은 안동 장씨가 17세기 후반에 조리법을 한글로 적은 책이다. 우리나라 영남 지역의 토속 음식조리법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전해 내려오거나 스스로 개발한 조리법을 한글로 기록하여 전통 음식의 맥을 잇게 하였다.
이 자료는 만두 요리법을 소개한 대목이다. 마치 만두를 직접 빚으면서 설명을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구어체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만두 만드는 방법뿐만 아니라 맛을 내는 방법, 주의점, 각종 식품의 특성 등을 소상하고도 생동감 넘치게 기술하였다. 한글 사용의 실용적 가치를 한껏 높인 저술이라 하겠다.
안동 장씨는 경상남도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서 1598년(선조 31년)에 태어나 1680년(숙종 6년)에 별세하였다. 장씨의 아버지는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성리학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이고, 어머니는 첨지 권사온權士溫의 딸이다.
[사진 1]은 《음식디미방》 표지이고 [사진 2]가 만두 요리법을 소개한 부분이다. [사진 3]은 [사진2] 그대로 한복려, 한복선, 한복진 세 분이 재현한 것이다. [사진 4]는 정부인 장씨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4장 한글, 돌과 함께 오다
12. 불, 한글로 경계하다
신령스러운 〈영비〉와 산불을 경계한 〈산불됴심〉
[사진 1] 서울시 노원구의 한글 〈영비〉(이문구 탁본)
[사진 2] 서울시 노원구의 한글 〈영비각〉
[사진 3] 경기도 포천의 한글 〈영비〉 전경
[사진 4] 경기도 포천의 한글 〈영비〉 부분
[사진 5] 문경새재의 〈산불됴심〉 비석
현대 말로 옮김〉 〈노원구 한글 영비〉: 영험한 비석이라. 건드리는 사람은 재앙을 입으리라. 이는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노라. 〈포천 한글 영비〉: 이 비석이 극히 영험하니 마음으로도 사람이 건드리지 말라. ▲한글은 비석을 통해서도 널리 퍼졌다. |
[사진 1]은 1536년(중종 31년)에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서울 노원구에 부모의 묘를 합장하면서 묘소의 훼손을 경계하고자 그 앞에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이 비석은 훈민정음 창제 이래 돌에 새겨진 최초의 한글 금석문이다. 이문건은 중종이 모두 없애라고 명령을 내린 채수의 소설 《설공찬전》의 한글 번역 일부를 자신의 일기책인 《묵재일기》 뒷면에 남긴 사람이다.
[사진 2]는 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영비각〉이다.
[사진 3]은 1686년(숙종 12년)에 낭선군 이우李俁(1637∽1693)가 인흥군 이영李瑛(1604∽1651)의 묘역 경계에 세운 비석으로,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에 있다.
[사진 4]는 [사진 3]의 비석에 있는 한글 글귀를 옮긴 탁본이다. 낭선군 이우는 선조 임금의 손자로 서화가이며 금석학의 대가로 알려졌다.
[사진 5]는 문경새재에 있는 비석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높이 157㎝의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이 표석의 글귀 덕분에 산불을 많이 예방할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