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창에서 바라보는 오월의 흰구름은 한가로워서 나도 저들처럼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버렸으면, 이런 생각들이 자주 일렁이는 오후입니다.
오전에 화순장에 들러 청양고추 10주, 오이 5주, 가지 3주를 사고 오천원을 지불하려는데 잔돈 오백원이 없으니 가지 모종 1주를 더 사가시면 안되겠냐 해서 그러자고 답하고 오천을 지불하였습니다. 해거름녘에 심을려고 대야에 모셔놓고 물을 주었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서둘러 빨래를 했지요. 엊그제 내린 비로 산천의 송홧가루가 사라지고 하늘이 맑게 개어서 빨래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입니다. 무논에 개구리들이 참 떠들썩합니다. 도시인들이 저 소리를 들으며 좀 다정해졌으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지난 몇 주는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서울, 구례, 해남에서 후배들이 찾아와 2박 3일을 묵고 갔지요. 화가는 동석한 한 여인이 좋아한다는 부용화를 그려주고 자신의 화풍과 포부에 대해 말했는데 좌중은 반응이 없었지만 그림에 조예가 깊은 그 미인 여성은 한없이 웃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다음날부터 4박 5일간 진도의 관매도를 찾았습니다. 진도 팽목항에서 출발하는 배를 기다리며, 아직도 파도 속에서 생을 꽃피우지 못한 아름답고 착한 아이들을 위해 내 마음 속에 간직한 수많은 별들을 뿌려주었습니다.
함께 간 두 명은 모두 선배인데 한 명은 히말라야를 등정했고 현재 화가로서 만인전을 준비중에 있지요. 또 한 명은 역시 히말라야를 등정했고 현재는 모 방송사 제작국장으로 재직중이랍니다. 저는 허리수술로 다리가 좀 불편했지만 나름 걸을만 해서 관매 8경중 6경을 둘러보았지요. 해변의 바위를 오르내리고 모래사장을 걷고 또 거친 파도를 보면서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감동케 하는 건 해변가의 꽃들이었습니다. 육지의 꽃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라는 이 아이들은 자신의 생존력을 키우기 위해 자신이 속한 환경을 절대 탓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마다 고달픈 생을 지켜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는지를 곧장 짐작할 수 있었지요.
집에 돌아와 여장을 풀고 며칠간을 멍하니 지냈습니다. 한가로움이 찾아오는 시간들이어서 마치 행복의 한 가지에 제가 앉아있는 듯 싶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의 산문집에서 '인간은 한적함 속에 있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한적함을 잠시나마 만끽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고 말했지요.
지난 주중에는 정읍 시립미술관에서 전시중인 '파카소와 동시대 화가' 전에 다녀왔습니다. 그가 91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무려 5만여 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이 거장에겐 영감을 주는 뮤즈가 여럿이어서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때마다 작품 경향이 바뀌면서 자신의 생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답니다. 미술관에는 브라크, 마리 로랑생, 샤갈, 살바도르 달리, 장 뒤뷔페 등 20세기 초의 거장들의 작품을 함께 관람할 수 있어서 매우 보람있었습니다.
지난 토요일엔 전북 순창의 선산에 뿌려진 벗의 무덤에 다녀오면서 그에게 바치는 조시 '오월에 진 꽃'을 낭송하였습니다. 그가 나의 거처에 남기고 간 도라지꽃은 해마다 흰빛과 보랏빛으로 다가와 나를 뭉클하게 합니다. 올해도 그 싹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순창 공립섬진강 미술관에 들러 박남재 화백의 전시 작품을 관람하였습니다. 인상파 화가의 대부로서 91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장들의 공통점은 두리번거림 없이 자기 길을 확고하게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며 그 붓과 원고지 속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을 또 깨달은 겁니다.
아, 천지에 이렇게 수많은 꽃들이 피어있다는 것을 저는 지금 실감하고 있습니다. 무엇엔가 관심을 갖다보면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아는 것 속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이 기쁨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요? 이상은 그의 고교졸업 사진첩에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습니다. '보고도 모르는 것을 폭로시켜라. 그것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 거기에도 노력은 필요하다.'
지금 설거지를 하면서 느낍니다. 그 수없는 꽃들도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고 또 새로운 꽃들이 천지에 얼굴을 내밀면서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가겠지만, 우리도 역시 그들과 다름없다는 현실 앞에서 괜히 숙연해집니다. 어떨 땐 무관심이 나를 평화롭게 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닻을 내리고 쉬고 있는 거처 위에 어떤 이가 새로 집을 지어서 마주보게 하는 불편함이 있어도 모른척 하기로 했습니다. 마음의 방향을 바꾸면 되니까요.
꽃의 그늘
한 나무에 여러 가지가 뻗고 수만 꽃송이가 눈을 뜨지만,
내가 어두워야 그 꽃이 반짝이는 것이고
내가 작아져야 그 꽃이 안식인 것이다
혀 끝에 닿는 뜨거움도 예전엔 눈물이었으니
오로지 빛나는 것들은 뒤에 있다
꽃의 그늘에 가슴을 둔다
- 시집<시인은 외톨이처럼> 수록
첫댓글 바쁘셨군요
진도의 관매도를 나도 가고 싶군요
해풍에 피어나는 야생꽃의 그늘을 찾을 수 있으려나
집을 비울 때쯤, 시간을 내야겠지요..
밤하늘의 작은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이유는
그 뒤에서 눈을 감고 배경이 되어주는 하늘이 있기 때문^^
오늘밤은 무논의 개구리 소리 들으러 가야지.
그래서 조금은 다정해져서 돌아와야지^^ ㅎㅎ
다정한 마음은 바다보다 더 크고 넓어서 자로 잴 수가 없지요. 이 밤도 개구리 소리가 정겹네요..
,,,모자에 보라색 도라지 꽃이 피었습니다.
홍해바다를 가른 선지자 모세같으신 포스.^^
신출애굽기를~^
꽃은 색 이전에 마음의 진실성이겠죠.
안녕하세요 선생님
서울 사는 이상규입니다
연락드렸을 때 진도에 가신다고 하셨는데 글 속 내용을 보니 더 반갑네요
반가워. 또 곧 만나겠지..
삭제된 댓글 입니다.
태양과 하늘과 구름의 저 아득한 이면에는 별이 있겠지요..
@물방울 개인적인 바램은 선생님 작업실에 꼭 한번 들르고 싶습니다
다음 주에 뵐께요
꽃잎이 만들어낸 그늘아래
내,,마음을 얹어본다..
마음에 무언가가 살짝 덧 씌워질때 시인님의 글은 그 덧씌움 걷어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느껴지네요...